이오(고려)
李䫨
(1042 ~ 1110)
1. 개요
고려의 재신. 시호는 문량(文良)으로 문종부터 예종까지 3대 6명의 왕을 섬겼다.
2. 생애
이자상의 아들이자 이예의 동생으로 과거에 급제해 직한림원에 오른다.
숙종 원년(1096) 숙종이 연덕궁주와 원자와 함께 연 잔치에 시중 소태보 이하 관원들이 참석하는데, 직문하성사를 지내던 이오도 여기에 끼어 시를 주고받는다. 숙종 시기 이오의 관직은 예빈경 추밀원부사, 태자빈객, 예부상서 등으로 바뀐다.
숙종 6년(1101) 왕이 동생 의천을 병문안하고 열흘도 안 돼 죽는다. 정당문학 이오가
라고 하니, 숙종과 신하들이 모두 상복을 입었고 3일동안 조회를 멈추고 고인을 애도한다.왕후(王煦, 의천의 이름)는 전하와 지극히 가까운 사이이나 예(禮)에 따르면 출가자(의 장례)에는 상복을 입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인은) 재주와 행실이 전부 뛰어났고 그 이름은 요, 송에서도 위세가 있었으니 상복을 입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1]
이 해에 참지정사 주국에 임명되면서 재상의 반열에 오른다. 숙종 7년(1102) 판상서호부사를 겸하고 숙종 8년(1103) 검교사도 수사공 판형부사에 오른다. 이 해에 서경유수사에 임명되고 중서시랑평장사로 승진한다. 계속해서 수사공 상서우복야, 중서시랑평장사 판삼사사 태자소보, 수사도 태자소사 겸 서경유수사, 등으로 관직이 여러 번 바뀐다.
숙종이 즉고 예종이 즉위하자 최홍사와 함께 문하시랑동평장사에 임명된다. 이듬해 상주국이 더해지고 그 다음해에 문덕전대학사 판상서예부사 수국사에 임명된다. 파한집에 따르면 이즈음 예종을 모시고 서경(평양) 영명사 남헌(南軒)에 올랐으며, 후일 부벽료(浮碧寮)라고 이름짓고 그 본말에 관한 시를 함께 짓는다.
예종 4년(1109) 최홍사, 임의 등 다른 재상들과 함께 여진 정벌의 패전 책임을 물어 윤관을 문책할 것을 청한다. 이오는 동시기 다른 재상들에 비해 윤관을 강경하게 공격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듬해 예종 5년(1110) 5월에는 김경용, 최홍사 등이 중서문하성의 관료들을 전부 끌고 동맹휴직해버리자 왕명에 따라 중서사인 이덕유와 둘이서 수십일간 중서문하성 관청에서 숙직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관직이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 수태보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 판상서예부·한림원사 수국사 상주국'에 이른 이오는 예종 5년(1110) 7월 4일(음력) 69세의 나이로 죽으니 예종은 3일간 조회를 멈추고 시호를 내린다.
3. 문장
- 김부일에게 보낸 답시
臨軒授鉞命東征, 一擧腥膻盡掃淸 임금으로부터 부월을 받고 동쪽 정벌을 명받으니 일거에 오랑캐들을 모두 소탕하는구나
漢塞已空無古月, 秦人何苦築新城 한의 변방은 이미 비어 오랑캐(古月) 없으니 진인은 어찌 힘써 새 성을 쌓았는가?
滿庭諫切眞長策, 拓地功高是大名 뜰 가득한 간절함은 실로 좋은 계책이요 땅을 넓힌 공이 높으니 큰 명예로다
從諫擧功誰最急, 吾皇聖制兩平明 간언을 좇음과 공적을 드러냄 무엇이 가장 급한가 우리 황제의 거룩한 말씀은 양쪽이 평명하다.
4. 평가
사람이 고요하고 욕심이 없어서 녹봉으로 받는 것 외에는 따로 돈을 벌려고 하지 않았다. 불경과 불경의 주해서를 탐독했으며 그 중에서도 금강경을 좋아해 스스로 '금강거사'라고 칭했다. 조선 초에 편찬된 『고려사』에서는 이오가 불교를 믿는 정도가 다소 지나쳤다고 서술하고 있다.
5. 가족관계
- 부: 이자상
- 본인: 이오
- 아들
- 손자: 이광진
- 아들
- 본인: 이오
[1] 煦於上周親, 而禮出家無服. 然才行俱優, 名重遼宋, 不可不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