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규(고려)

 

1. 개요
2. 생애
3. 평가
4. 가족관계

金仁揆
(? ~ 1142)

1. 개요


고려의 문신.

2. 생애


신라의 종실(원성왕계)로 병부상서를 지낸 김원황의 손자고, 광국동덕익성공신 문하시중 상주국 수태보 판상서이·형부사 낙랑군 개국공 식읍 3,000호 식실봉 700호 김경용의 아들이다. 과거에 급제해 관직에 나아갔으며 이자겸의 당파로 추밀원, 이부, 중서문하성 등에서 요직을 두루 지낸다.
예종 12년(1117) 급사중 추밀원좌승선 겸 태자좌찬성에 오르고, 예종 15년(1120) 한안인의 반란을 진압한다. 예종 17년(1122) 3월 좌간의대부에 오르고 같은 해 8월 동지공거가 되어 지공거 박승중과 과거를 주관한다. 인종 원년(1123) 동지추밀원사, 인종 2년(1124) 검교사공 이부상서 지문하성사에 임명되고, 인종 3년(1125) 12월 박승중, 이자덕 등과 함께 참지정사에 오른다. 인종 4년(1126) 을 일으켰던 이자겸이 척준경에 의해 구금되자 이를 모르고 이자덕과 이자겸의 아들 이지미를 따라 병부에 머무르다 도망쳤으며, 이자겸 실각 뒤에 지춘추사로 좌천된다.
인종 6년(1128) 7월 개경에 돌아왔는데, 매형 이숙과 누나 김씨 등이 자기 집에 들어와 살면서 노비 등 재산을 갈취한 정황을 파악한다. 이숙의 아들이 한술 더 떠서 김인규에게 반역죄를 뒤집어씌우려 하는데, 무고였음이 드러나 혐의를 벗는다. 인종 13년(1135) 호부상서로 예부낭중 왕창윤과 금나라희종 즉위 축하 사절로 다녀온다. 인종 19년(1141) 좌복야 참지정사에 올라 좌천 이전의 관직을 회복했지만 이듬해인 인종 20년(1142) 5월에 죽는다.

3. 평가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서는 '마음씨는 너그럽고 후했으며 남을 평가하기 싫어했다, 권세를 믿고 교만하게 굴지 않았지만 다소 우유부단했다.'라고 평가했다. 『고려도경』에서 서긍은 김인규가 풍채가 뛰어나고 수염이 아름다우며 자태는 빼어났고 몸가짐은 단정하고 정중했다고 평가했다. 이긍이 고려에 다녀온 시점은 이자겸의 난 전이었으므로 한교여(한안인)가 반역을 일으켰을 때 김인규에게 공이 있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4. 가족관계


  • 증조부: 김인위
    • 조부: 김원황
      • 부: 김경용
        • 누나: 경주 김씨
        • 매형: 이숙
        • 본인: 김인규
        • 누이: 경주 김씨
        • 매형: 이자원
신라 원성왕의 후손으로 고려 개국공신 김인윤의 후손이다. 재산 문제 때문에 누나 김씨 가족과의 관계는 좋지 못한 편이었다.
  • 본인: 김인규
  • 처: 개주군부인 왕씨
    • 아들: 김지우
    • 며느리: 경주 김씨[1]
      • 손자: 김충언
      • 손녀: 경주 김씨
      • 손녀사위: 황문부
    • 아들: 김지효
    • 딸: 경주 김씨
    • 사위: 이지언
처 개주군부인 왕씨는 좌복야 참지정사를 지낸 왕하(王嘏)의 딸이다. 아들 김지우는 본인의 묘지명이 전해지며, 김지효는 임원애의 딸 임씨와 결혼할 예정이었으나 척준경이 임씨를 인종의 왕후로 추천하는 바람에 무산됐다. 딸은 이자겸의 아들 이지언과 결혼해 이자겸과 사돈 관계에 있었다.

[1] 김선(金瑄)의 딸로 선평왕후의 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