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화(독립운동가)
1. 문경시 출신 독립운동가, 김경화
김경화는 1919년 7월 20일 경상북도 문경군 문경면 마원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39년 12월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 입대하여 활동하다가 다음 해 4월에 중국 섬서성 서안의 중앙간부훈련단 학원대에 입대하였다. 이후 1940년 9월 한국 광복군이 창립되면서 광복군 제1지대에 입대하였으며, 1942년 9월 중국 제9전구지역인 호남성(湖南省)에 파견되어 8.15 광복 때까지 활동하였다. 1944년에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에 입당하여 당원이 되었다. 이후 서울로 귀환하여 평범하게 살다가 2007년 1월 21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김경화에게 건국포장을 수여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2007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2. 의병장, 김경화
김경화는 1907년경 의병대를 조직하고 의병장이 되어 수백 명의 의병을 이끌고 강원도 양구·홍천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11월 21일 양구군 선안리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경찰대의 기습을 받아 교전 중 전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김경화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3. 광산구 출신 독립운동가, 김경화
김경화는 1857년 10월 27일 전라남도 광산군 임곡면 고룡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의 국권이 일본에게 넘어간 것에 분노하여 1906년 3월 박현동·조경환 등과 구국의 방도를 논의하고 동지들을 규합하면서 의병항전을 개시하였다. 1907년 2월에는 전남 장성군에서 활동하던 기삼연 의병진의 선봉장 김태원 휘하에 들어가 항일전을 벌이게 되었다.
1908년 1월 1일 무등촌 전투에서 일군장교 요시다카 츠사부로우(吉田勝三郞)를 총살하고 휘하 일본군 수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고, 기삼연 의병장이 구수동 민가에서 일본군에게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구출작전을 벌였지만 실패했다. 그 뒤 김태원 의병장이 1909년 3월 광주 어등산 전투에서 전사하게 되자, 같은 해 4월 그는 다시 전해산 의병진으로 옮겨가 항전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장성에서 붙잡혀 광주감옥에서 수일 동안 옥고를 치르던 중 1910년 8월 5일 전해산 의병장이 대구감옥에서 순국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한 마음을 금치 못하던 차에 일제로부터 귀순 권유를 받자 "귀가 더렵혀졌다"라며 자결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김경화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4. 양양군 출신 독립운동가, 김경화
김경화는 1901년 7월 18일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광석리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감리교 미션스쿨인 배화여학교에 재학하던 중 박양순 등 동료 여학생들과 함께 3.1 운동 1주년 기념 만세시위를 거행하기로 결의하고 1920년 3월 1일 아침 8시 반경에 학교 교정(校庭)과 기숙사 뒤편 언덕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된 그녀는 동료 학생 23명과 함께 재판을 받았다. 1920년 4월 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언도받았고 다음날인 4월 6일에 풀려났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 김경화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