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수(1916)
1923년 상하이로 파송된 부친을 따라 상하이로 건너간 김동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초등교육기관인 인성학교(仁成學校)를 다녔다. 또한 1928년경 김구, 조소앙의 지도에 의해 조직된 소년 단체 화랑사(花郞社)에 참여하였다. 이 단체는 강령·규약을 제정하고 활발한 활동을 계속하여 <화랑보(花郞報)>라는 기관지 30부씩을 발간해 상해 한인들에게 배포하였으며 독립운동을 격려하는 내용의 격문을 인쇄하여 살포 또는 조선 내에 발송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인성학교를 졸업한 그는 공시중학교(公時中學校)를 다녔고, 1932년 제1차 상하이 사변을 저지른 일본군에 항의하는 중국 학생 시위운동에 참여했으며, 자진하여 적십자군이 되어 들것으로 부상병을 나르고 부상병에게 손수 붕대를 감아주는 등 간호 활동을 펼쳤다. 이후 공시중학교를 졸업한 김동수는 1934년 중국군관학교 낙양분교에 입학하여 군사훈련을 받았다. 1934년 2월 28일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에서 한인 훈련생 92명으로 1개 군관생도반을 특설하여 군관 양성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낙양분교 한인 특별반의 교과 내용 및 기타 세칙은 중국군관학교의 교육 내용이 그대로 적용되었다. 교과는 정치 훈련과 전술학, 병기학, 통신학에 치중하였으며 체육, 체조, 무술, 사격 등의 학과도 진행하였다.
한편 김동수는 1935년 1월 김구가 조직한 특무대에 참여했다. 그러나 양분교 한인 특별반 훈련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일제가 중국 당국에 엄중하게 항의하면서 폐교를 강요했다. 내외적인 난관에 봉착한 낙양군관학교 한인 특별반은 1935년 4월 결국 1기의 졸업생을 배출하고 폐교되고 말았다. 이후 1936년 7월 중국 육군 제25사단 견습사관으로 근무한 그는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의 지령을 받고 난징으로 가서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그는 임시정부가 피난 가는 상황에서 다른 젊은 청년 장교들과 함께 정부 요인들을 경호하고 그들의 가족을 지키는 임무를 수행했다.
1939년 10월, 김동수는 충칭에서 나월환, 박기성, 이하유(李河有), 이재현 등과 함께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조직하여 부대장이 되었다. 전지공작대는 1939년 12월 전선과 가까운 섬서성 시안으로 이동하였다. 시안은 당시 섬서성의 군사 중심지로서, 적 점령지구에 대한 대적선전(對敵宣傳)과 첩보 수집, 초모(招募) 등 전지공작을 수행하는 데 적합한 지역이었다. 김동수는 1940년 5월부터 대원들과 함께 일본군 제36사단이 주둔하고 있는 노안을 비롯하여 도청선 철로를 중심으로 싱향, 초작, 수무, 장치 등지에서 초모 공작을 전개했다. 그 결과 노안에서만 60여 명의 인원을 불러모으는 성과를 거두었다.
1940년 말 백여 명에 달하는 대원을 확보한 전지공작대는 1941년 1월 1일 한국 광복군에 편입되어 제5지대에 평성되었다. 그는 광복군 제5지대의 부지대장 겸 제1구 대장이 되어 시안을 중심으로 장병을 훈련시키는 동시에 초모, 선전, 정보활동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런데 1942년 3월 1일 지대장 나월환이 휘하 대원들에 의해 암살당한 사건이 벌어졌다. 지대장이 부하에게 피살되는 하극상의 불상사로 말미암아 광복군 주력 부대로 성장해 가던 제5지대는 해체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나월환 살해 혐의로 이하유 등 20여 명이 중국군 당국에 체포되었고, 이들 가운데 박동운 등이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 사건에 연루된 그는[1]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가 석방되어 광복군에 복귀했다.
1942년 4월 1일 제5지대는 기존의 제1, 2지대와 통합하여 제2지대가 되었다. 여기에 충칭에 잔류하고 있던 조선의용대 대원들이 제1지대가 되었고, 김학규의 징모 제6분처가 제3지대로 편성되었다. 이때 김동수는 제2지대에 편입되어 신입 대원들에 대한 교육 활동에 전념하였다. 이후 1945년 4월 광복군 총사령부에서 토교대(土橋隊)를 중경에 설치함에 따라 제3대 대장을 역임하였다. 토교대의 주요 임무는 광복군 총사령부 경비 및 고위 요원의 호위, 광복군의 간부 요원 교육과 양성, 그리고 일본군 내의 한국인 사병에 대한 초모 활동 등이었다. 토교대는 광복군 편제상의 조직은 아니었지만, 일종의 보충대 역할을 하는 조직이었다.
1945년 8.15 광복 후 김동수는 한국독립당 감찰위원, 상해지당부 특파원 등으로 선임되었다. 1946년에는 임시정부 주화대표단 동북특파원으로 임명되어 한인 교포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며 중국 당국과 교섭해 교포들의 안전한 귀국을 주선했다. 1948년 6월 귀국한 그는 같은 해 11월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대한민국 국군에서 연대장·사단장 등을 역임하고 육군 준장으로 예편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고, 1982년 2월 20일 서울 돈암동에서 사망했다. 사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1] 김동수는 이전에 나월환이 중국군 호종남(胡宗南) 장군의 부대로부터 수령한 생활비를 광복군 대원들에게 지급하지 않고 유흥비로 빼돌렸다는 소문을 듣고 격분한 나머지 나월환에게 장총을 발포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나월환이 사건을 무마시켰기에 무사했지만, 나월환이 피살된 후 이때의 일이 문제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