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월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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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나월환 (羅月煥)

송죽(松竹)
생몰
1912년 10월 14일 ~ 1942년 3월 1일
출생지
전라남도 나주시 왕곡면 송죽리#
본관
나주 나씨
사망지
중국 시안시 연호구 연호공원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2.1. 초년기
2.2. 동경 유학
2.3. 중국
2.4. 한국청년전지공작대
2.5. 한국 광복군
2.6. 최후


1. 개요


한국독립운동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나월환은 1912년 10월 14일 전라남도 나주시 왕곡면 송죽리에서 나종성(羅種成)의 4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부농이 아니었지만 20~30마지기를 경작하고 집 뒤에 죽전 12마지기를 소유해 그런대로 먹고 살만 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말주변이 뛰어나 동네 애들과 소꿉장난을 할때마다 항상 앞에 나와서 일장 연설을 했다고 한다. 또한 일제에게 반감을 품고 강직한 성격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 어릴 때부터 배일의식을 가슴에 품었다고 한다.
훗날 나월환이 자신의 절친한 동지였던 박기성(朴基成)에게 들려준 일화에 의하면, 한 번은 나월환이 아이들을 모아놓고 몰래 동네 창고에서 멍석을 가져와서 아이들을 멍석에 앉혀놓고 일장 연설을 한 뒤 멍석을 그대로 두고 친구들과 함께 다른 놀이를 하러 갔다고 한다. 이에 멍석 주인이 나종성에게 하소연하자, 나종성은 아들을 찾았다. 자신을 찾는다는 말을 들은 나월환은 아버지에게 얻어맞을 것을 두려워하다가 동네 길 모퉁이에서 아버지와 마주치자 줄행랑을 쳤다. 그러나 나월환은 마침내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고 아버지가 그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섰다. 이때 나월환은 문득 길에 널브러진 가느다란 나무막대를 집어들고는 길 앞에 줄을 그었다. 그리고는 자신을 유심히 지켜보는 아버지를 향해 말했다.

이 선을 넘어오면 내 아들이요.

아버지는 아들의 엉뚱한 말을 듣고 어이가 없어 한바탕 웃고는 그를 용서해줬다고 한다.
나월환은 5살 때부터 집 옆에 마련된 독서당에서 독학했고 1922년에 양산보통학교에 입학해 1928년에 졸업했다.[1] 그는 학교에 다니는 동안 일본인 학생들로부터 ‘센징’(鮮人)'이라는 놀림을 받으면서 나라를 잃은 민족의 한을 뼈저리게 느꼈다. 이에 그는 나라를 빼앗아간 일본의 정체를 알기 위해 일본으로 가기로 결심하고 인천의 둘째 형 집에 머물렀다가 일본으로 갔다. 그가 일본에 언제 갔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1928~1929년 사이에 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2.2. 동경 유학


일본으로 건너간 나월환은 동경 계림장(鷄林莊)에 기숙하면서 박기성(朴基成)을 만났고, 그와 함께 사곡소학교(四谷小學校)에 재학했다가 1년 후에 세이쇼중학교(城成中學校)에 입학했다. 박기성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세이쇼중학교에 재학하는 동안 모든 성적이 우수했는데, 특히 웅변을 잘해 학교 전체에서 1등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세이쇼 중학교를 졸업한 나월환은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에 입학했고 수감 중이던 박열을 면회하고 아나키즘 성향을 갖춘 한인 학생들과 사귀었으며, 흑우연맹(黑友聯盟)에 가입해 선배, 동지들로부터 아나키즘을 전수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동경 시내에서 웅변대회가 열렀다. 나월환은 이 대회에 연사로 참가해 연설했다. 이 대회엔 많은 유명인사들이 참관했는데, 그 중엔 장제스의 친위대장인 전대균(錢大鈞)도 있었다. 그는 연설을 경청하던 중 나월환의 연설을 감명깊게 듣고 장래에 큰 인재가 될 재목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나월환을 설득해 1931년 9월 상하이로 데려갔다.

2.3. 중국


중국으로 건너온 나월환은 양여주, 김지강, 유서, 엄형순, 이용준, 원심창, 박기성, 이하유, 김광주 등 혈기왕성한 30여명의 아나키스트들과 함께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에 가입했다. 남화한인청년연맹은 1932년 5월 김구의 주선에 따라 다른 청년연맹들과 연대해 서간단(鋤奸團)을 결성하여 일제에 빌붙은 민족반역자들을 처단했다. 나월환은 또 한국혁명당에 가입해 1934년 한국혁명당이 해산될 때까지 열성적으로 활동했다.
1934년 2월, 나월환은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에 한일특별반이 설립되자 즉시 입교했다. 그 후 1935년 음력 1월 15일에 헌병사령부 훈련소 견습으로서 소위에 임관했고, 그해 6월 중순에 조교로 임명되었다. 그러던 1936년 늦은 봄, 나월환의 친형 나일환이 사업차 중국에 들러 동생을 찾아왔다. 며칠 후 나일환이 귀국길에 오르자, 나월환은 상하이 부두까지 나와 형을 배웅했다. 이때 일본 영사관 형사대가 그를 급습해 체포했다. 나월환은 일본 영사관으로 끌려가 며칠 동안 고문받았고 청도항으로 보내진 뒤 일본으로 압송될 위기에 몰렸다.
나월환은 탈출의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배가 청도항을 떠나려 할 때 두 명의 호송경찰에게 술을 권해 방심케 한 뒤 "화장실을 다녀오겠다."고 말하고는 잠깐 혼자 있게 된 틈을 타 곧바로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 후 청도항에 정박한 배들 사이로 숨어가며 구사일생으로 몸을 피한 그는 곧바로 청도시장을 찾아가 구원을 호소했고, 청도시장은 그를 난징으로 돌아갈 수 있게 배려했다. 난징에 돌아온 그는 탁월한 용기와 대담함을 갖췄다는 칭찬을 받았고 중앙육군군관학교 교수 배지를 달고 다닐 수 있는 특별대우를 받았다.

2.4. 한국청년전지공작대


1937년 초 중위로 진급한 나월환은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중국군에 배속되어 일본군과의 전투에 투입되었다. 그러던 1939년 10월, 나월환은 이하유, 김인, 김강, 박기성 등과 함께 중국 군대를 떠나 독자적으로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결성했다. 공작대 대장은 나월환이었고, 부대장은 김동수, 정치조장은 이하유, 군사조장은 박기성, 선전조장은 이해평, 대원으로는 조시제(趙時濟, 조소앙의 장남), 맹조화(孟兆和), 평지성(平智盛), 김원영(金元英), 현이평, 송길정(宋吉潗), 하상기(何尙祺), 김작생(金作生), 엄익근, 김인(金仁, 김구의 장남) 등이 참가했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는 회보 <한국청년(韓國靑年)>을 발간했는데, 발간사에서는 전지공작대 결성의 의의와 임무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1. 중·한 양대 민족의 공동의 적은 일본제국주의이다. 일본제국주의가 타도되지 않는 한 중·한 양대 민족의 해방이 가망 없을 뿐만 아니라, 동아 내지는 세계의 진정한 평화도 기약할 수 없는 일이다. 중국 항일전쟁의 승리는 이것이 곧 한국독립, 한국민족 해방 승리의 개시인 것이다. 이러므로, 우리들은 중국항전의 최후승리를 바랄 뿐만 아니라, 우리들은 다시 나아가서 우리들의 역량을 다하여 중국 항전의 승리를 촉성하여야 한다. 중국항일전쟁과 한국의 독립, 한국민족의 해방 운동이 일본제국주의의 타도에 있음은 그 의의에 있어서나, 행동에 있어서 이것을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 또 분리하여서도 안 될 일이다.

2. 우리들의 역량을 배양 충실하고 공헌하기 위하여, 우리들의 최후 승리를 보장하기 위하여 우리들은 공작을 실천하는 중에 학습한다. 우리들의 혁명선열을 배워 알고, 혁명의 이론과 기술을 학습한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공작 실천 중에서 모든 약점과 곤란을 극복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들은 적에게 부림을 당하고 노예가 되는 동포를 건져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우리들은 항일의 한국청년 동지들을 우리들의 진으로 모아야 한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는 먼저 중국군에게 보낼 솜조끼를 마련하는 데 필요한 4천여 원을 마련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1939년 10월 19,20일 저녁 7시 반에 연극을 두차례 공연했다. 공연의 제목은 <국경의 밤>, <삼강호(三江好)>, <재회> 등이었다. 이후 대원 16명은 태행산으로 가서 중국군 제27군을 도와 정보수집 등의 활동을 벌였고, 나머지 대원들은 연극 공연을 통해 중국 군민과의 친선을 도모했다. 1940년 5월 20일부터 10일간 시안 성안 남원문(南院門) 가설극장에서 거행된 <국경의 밤>, <한국의 한 용사>, <아리랑> 연극 공연은 중국 군관민들로부터 큰 환영을 받았다. 이때 나월환은 대회주임으로서 이 연극 공연을 주관했다. 또한 한국청년전지공작대는 서안부녀회가 주관하는 모금운동에 동참하는 뜻으로 <아리랑> 공연의 수익금 수천원을 부녀회에 전달했다. 부녀회는 이 돈으로 하복을 반들어 전방의 중국군 병사들에게 전달했다.
중국인 기자 젠민(建民)은 <아리랑> 공연을 관람하고 <한국청년> 지에 '흥분된 마음으로 아리랑을 보고'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연극에 출연한 한국청년 동지들은 곧 전장으로 가서 적과 전투를 벌이게 될 용사들이다. 그들은 자신을 희생할 각오를 하고, 충칭에서 시안으로 왔다. 피 흘리는 전투를 통해 자유해방의 큰길을 개척하려는 투사들이다. (중략) 잠에서 깨어난 사자의 포효처럼 돌연 징소리가 울려 퍼지자, 공연장의 분위기는 일순 긴장되어 관중석의 잡음이 순식간에 수그러들었다. “저희는 정식 연기자가 아닙니다.”, “저희는 장차 전방으로 떠날 전투원입니다. 이번 위문공연을 통해 전방에 있는 병사들에게 조금이나마 존경과 열정을 표하고자 합니다. (중략) 여러분의 열렬한 성원에 보답하기 위해 우리는 하나라도 많은 외적을 무찌르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라는 감사의 말을 전하며 보고를 마쳤다.

이후 한국청년전지공작대는 시안을 근거지로 삼고 동관(潼關)을 경유, 낙양, 자오쭤(焦作), 원청(運城), 린펀(臨汾), 태원, 석가장, 베이징을 연결하는 중국군 전구 일선 공작에 투입되어, 일본군 점령지역에 침투해 100여 명이 넘는 한인들을 모집하는 등 여러 전공을 세웠다. 또한 룽하이선 지구, 화북성산서성 남부 지역으로 대원을 파견해 중국군의 항일 전투에 직접 참여했으며, 일본군 포로들을 상대로 통역 및 회유 임무를 맡았고, 우리 말 방송과 우리 글 선전문건 등을 이용해 일본군 점령지구에 있는 한인들을 선동해 일본군을 상대로 봉기하거나 중국군에 가담하도록 유도했다.
이들의 활동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940년 5월경부터 일본군 점령지역 내에 거주하는 한인청년들을 대상으로 한 초모공작을 전개하였는데, 김동수·이해평·김천성·박영진·김용주·이월봉·이삼녀 대원은 34집단군 태항산유격대 정훈부에 배속되어, 태항산 링추안(陵川)을 거점으로, 일본군 36사단 주둔지역인 루안현에 거주하는 6천여 한인사회와, 도청선(瀋陽-焦作) 연변지역인 신샹(新鄕)·쟈오쭈어(焦作)·쇼우(修武) 등지를 무대로 초모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김천성은 일본군 여단 병력이 주둔하고 있는 루안성 내에 잠입하여 문응국·이병곤·박춘섭·정일명·김형철 등을 초모하고, 다시 일제 여단사령부에서 통역으로 근무하는 이도순·고여순 등 40여 명을 포섭하여, 일부는 현지에서 공작 업무에 종사토록 하고, 일부는 시안으로 후송하여, 후종난군 전시간부훈련단에서 훈련을 받도록 하였다. 이와 함께 이도순·박춘섭 등은 중국유격대와 함께 루안성 습격을 계획하기도 했다.
또 김용주·박영진 등은 허난성 쟈오쭈어에 잠입하여, 최봉진·송철 등 10여 명을 포섭하고, 김천성 등은 다시 스쟈좡을 거쳐 베이징·톈진 방면으로 진출하여, 조직과 활동을 확대하였다. 그 결과 전지공작대의 활동범위가 시안에서 퉁관을 경유하여 뤄양·장즈·쟈오쭈어·윈청·린펀·타이위앤·스쟈좡·베이징 등지를 연결하는 산시성 및 허난성, 그리고 화북지역 일원의 광범위한 지역을 포괄하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 나월환은 한국청년전지공작대 대장으로서 훈련생들을 잘 통솔했다. 그는 일본군 점령지역 내에 거주하다가 새로 합류한 한인 청년들을 시안으로 후송해 한국청년훈련반(일명 한청반)에 수용해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이 청년들은 3개월간 훈련을 받은 뒤 중국군 소위로 임관되는 동시에 전지공작대 대원으로 편입되었다. 한청반은 2개 구대로 편성되었고 독립적으로 운영되었다. 나월환이 대장으로서 운영을 총괄했고, 부대장 겸 제1구대장 김독수, 제2구대장 박기성, 정치지도원 이하유, 군사지도원 조시원(趙時元), 조손한(趙擎韓), 송호성(宋虎聲) 등이 전술, 역사, 정신교육 등을 담당했는데, 군사교육과 정신교육이 '3:7'의 비율이었다고 한다.
<한국청년>에 기재된 '우리의 하루'에 따르면, 훈련반에 들어온 훈련생들의 삶은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먼저, 두 번의 호루라기 소리에 기상하여 마당에 모여 애국가를 불렀다. 그런 다음 xxx 공원으로 가서 달리기, 독서 또는 한담을 나누다가 부대로 돌아와 교육을 받았다. 또한 신임대원들은 '하나, 둘' 구령에 맞춰 기본 동작을 반복하고, 실내에서는 중국어 성조 연습을 했다. 아침식사 후 저녁식사 때까지[2] 6시간 반 동안, '혁명 문제', '한국어문' 등의 학과수업 두 과목을 수업하고, 자습, 낮잠, 진찰 등으로 시간을 보냈다. 식사는 반찬 두 가지와 국 한 가지였다고 한다. 저녁 식사 후 '과외활동'으로 공놀이, 장기놀이, 노래, 세탁 등을 했고, 해가 지면 방 하나에 1개씩 있는 전등불이 켜졌다. 대원들은 자습, 편지쓰기, 독서, 원고쓰기, 일기 쓰기 등을 한 후 8시 반에 점호를 받고 '전지공작대 군가'를 부르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마쳤다.
박기성이 '오양준(歐陽軍)이라는 필명으로 1941년 9월 1일 <한국청년>에 개재한 '훈련수기'에 따르면, 1941년 7월 5일에 대원들이 종남산으로 행군해 종남산 아래의 천자두촌 마을에서 아침 식사를 한 뒤 수개 조로 나뉘어 자유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깃발을 꽂은 장대 등을 든 중국인 수천 명이 소리를 지르며 몰려왔다. 대원들은 아연 긴장하여 경계 태세를 갖추었다. 중국인들이 몰려온 내막은 이랬다. 가뭄이 계속되어 천자두촌 주민들은 보름 동안 기우제를 지내왔고, 마지막 날인 이날 이웃마을인 화리촌의 주민들이 와서 함께 기우제를 지내기로 했다. 그런데 화리촌 주민들이 천자두촌의 사당 앞을 무례하게 지나가자, 두 마을 주민 간에 시비가 붙었고 급기야 동네 싸움으로 번진 것이다. 이때 나월환 대장이 나서서 그들을 설득했다.

우리는 외국인이다. 오늘 이 곳에 와서 여러분이 이렇게 싸우는 모습을 보니 정말 가슴이 아프다. 생각해 보라, 지금은 일본놈들이 침략해 있는 때이다. 여러분은 왜 일본놈들을 상대해서는 이렇게 싸우는 투쟁정신을 갖지 못하는가?

두 마을 주민들은 연설에 감동해 화해했고, 이어서 '중한군민연합대회'가 열려 500~600명의 두 마을 주민이 참여해 노래 시합, 하모니카 연주 등을 하며 서로 친목을 다졌다. 다음날 새벽, 대원들은 두 마을 주민들로부터 식사를 대접하겠다는 제안을 받았지만 민폐를 끼칠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고 부대로 돌아왔다고 한다.
이렇듯 훈련생들을 잘 길려낸 나월환은 1940년 3월 1기생을 편성해 4월부터 7월까지 훈련시킨 뒤 9~10월 전방으로 파견했고, 1941년 2월엔 2기생을 교육시켰으며, 1942년 2월부터 사망할 때까지 3기생을 교육시켰다.

2.5. 한국 광복군


1940년 말, 시안과 충칭에서 한인들이 조직한 항일무장단체는 조선의용대와 한국 광복군, 그리고 한국청년전지공작대였다. 조선의용대와 한국 광복군은 한국청년전지공작대의 왕성한 활동을 보고 그들을 자신들 편에 끌어들이려 애썼다. 1940년 12월 31일, 조선의용대 2지대 부지대장 이자인을 필두로 의용대 대원들이 친선방문단이라는 명목으로 청년전지공작대를 방문했다. 그러나 나월환은 대원들에게 의용대와 만나지 못하도록 단속했다. 조선의용대 대원 김학철의 저서 <격정시대>에 따르면, 나월환은 자기 부하들이 '붉은 물'이 옮을까봐 의용대원들과의 접촉을 은밀히 단속했다고 한다.
1941년 1월 1일 신년 단배식이 끝난 후, 나월환은 한국청년전지공작대 전원을 이끌고 한국 광복군에 합세했다. 그들은 한국광복군 제5지대에 편성되었고 간부와 대원 200여 명이 이 부대에 배치되었다. 제5지대장에 임명된 나월환은 대원들을 대표하여 다음과 같이 선서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건국방략에 위배된 행동을 하지 않으며, 한국광복군 공약을 준수하며, 한국광복군 명령에 절대 복종하며, 직무에 충실하여 조국광복운동에 지성을 다하여 희생적으로 헌신하기를 자에 선서합니다.

이렇게 해서 광복군 5지대로 편입된 청년전지공작대는 징모처 5분처가 되었다. 제5분처는 전지공작대 시절부터 전개해온 활동을 그대로 계승해 지속적인 모집 활동을 전개했다. 제5지대는 이를 기반으로 초기에 편성된 4개 지대 중 가장 많은 병력을 확보하면서 광복군의 주력부대로 발전했다. 사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합류하기 이전 광복군의 병력 숫자는 고작 30여 명에 불과했지만, 전지공작대 200 명이 합세하면서 군대 편제를 어느정도 갖출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의용대는 포기하지 않고 1941년 2월 제5지대를 2차례 방문해 대원들을 자기들 편에 포섭하려 시도했다. 하지만 나월환은 대원들의 조선의용대 접촉을 엄격히 금지하고 한국 광복군에 충성을 바칠 것을 강조했다. 이에 대해 조선의용대 대원이었던 김학철은 <격정시대>에서 나월환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광복군의 서안지대 지대장 나월환은 현직 국민당 헌병대위로, 대대장에 작은 별이 셋이 박힌 제복을 입고 까만 장화를 신었는데, 작달막하고 호리호리한 키의 암팡진 사나이로서, 나이는 서른의 고개를 막 넘은 상 싶었다. 그는 이름난 무정부주의자인데, 상해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가 압송 도중에 목숨을 걸고 모험을 하여 구사일생으로 탈주에 성공을 한 용감한 용사다. 일본제국주의와는 철천지원수였으나, 독일의 히틀러를 은근히 숭배하여 히틀러의 전서 나의 투쟁을 특히 애독하었다. 정신이 온전한 사람의 눈으로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대립물의 통일’이었다. 그런데 또 그는 로마의 대웅변가 키케로도 무색할 만한 웅변가— 아니 열변가다. 무정부주의자건, 민족주의자건, 심지어는 맑스주의자들까지도 그의 연설을 듣고는 감동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조금치도 젠체하는 태도가 없었다. 그는 상급도 승인하지 않고, 하급도 승인하지 않고, 또 중앙집권제도 승인하지 않는 평등주의적 무정부주의자— 철저한 무정부주의자였다.

이무렵, 나월환은 동지들과 갈등을 여러차례 빚었다. 특히 한국청년전지공작대 정치지도원을 역임했고, 한국광복군 제5지대 정훈조장을 맡았던 이하유와의 갈등은 심각했다. 나월환과 동경 유학 때부터 함께 해온 동지 박기성은 "나월환과 이하유는 걸핏하면 다투었다. 무슨 일로 다투게 되었는지 알아보면 하찮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또한 나월환은 대원들과도 갈등이 잦았다. 한 번은 그가 지휘권을 확립할 목적으로 호종남(胡宗南) 장군의 중국 부대에서 보내온 생활비를 수령해놓고도 대원들에게 생활비가 지급되지 않았다고 둘러댔다.
나중에 이 일이 알려지자 대원들은 분개했고, 나월환이 그 돈을 빼돌려 유흥비로 썼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급기야 김동수가 소문을 듣고 분노한 나머지 나월환에게 장총을 발포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부대장이 대장을 상대로 하극상을 벌인 것이다. 다행히 총알이 비껴나가서 나월환이 사망하는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지만, 당시 부대 내 갈등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잘 드러낸 사건이었다.[3]
나월환과 함께 동경에서 유학 생활을 보냈고 항일 투쟁을 같이한 박기성은 훗날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나월환은 머리가 우수할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장점이 많은데 반해, 단점도 많았다. 아무튼 대원들 간의 여론이 좋지 않아서 제일 가깝고 그를 잘 알고 있는 나는 틈만 있으면 그에게 충고를 해 주었다.

"나 대장, 지금 현재 나 대장에 대한 대원들 간의 여론이 좋지 않으니 매사에 조심해주게."

그러나 나월환은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아니, 내가 뭐 어쨌다는 거요. 도대체 어떤 놈이 나더러 뭐라고 합디까! 뭣을 조심하라고 합니까."

이렇게 응수하며 여전히 그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진심으로 이렇게 말해 주었다.

"뭐라고 딱 집어서 얘기하기는 곤란하네만, 내 생각에 자네는 한동안 어디 가서 쉬었다 왔으면 싶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굵고 짧게 갈 생각이오. 내가 어떻게 되든 박형은 나에게 개의치 말아주시오."

이때부터 나는 그의 말대로 일체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임원이었던 정화암 역시 나월환이 "성품이 급한 편이고 재주가 출중하여 영웅심이 강한 탓으로 반감을 살 수 있는 성격이었다"고 회고했다. 이렇듯 그는 독단적으로 처신하며 많은 이들에게 반감을 샀고, 결국 비참한 최후를 초래하고 말았다.

2.6. 최후


1942년 3월 1일, 나월환은 3.1 운동 기념식을 마친 뒤 제5지대 본부에서 호종남(胡宗南) 부대가 제공한 영화관람권을 대원들에게 나눠줬다. 그러나 얼마 후 실종되었고 며칠 뒤에 제5지대 본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연호공원 안에 있는 폐쇄된 우물 속에서 그의 시신이 발견되었다.[4] 이후 중국군과 한국 광복군의 공동수사 결과에 따르면, 나월환의 부대에 속한 이하유[5] 등이 나월환에게 불만이 있다는 소문이 돌아서 그를 체포해 심문해보니 그가 나월환을 살해한 것을 인정했다고 한다. 그들이 나월환을 살해한 이유는 나월환이 무정부주의에 반대하고 광복군 본부에 무정부주의를 추구하려는 대원들을 밀고한 것에 반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에 이하유의 뜻에 따라 영화관람권을 나눠주던 나월환을 직접 살해한 박동운을 비롯한 사건 관계자 20여 명이 체포되었다. 그 중 박동운은 사형 선고를 받았고, 이하유, 김동수는 무기징역형에 처해졌으며, 이해평, 이도순, 고여순은 15년형, 김송죽(김천성), 김용주는 2년 형을 선고받았고 나머지는 무혐의 처분되었다. 이후 제5지대의 활동은 크게 위축되었고 많은 대원들이 이탈하는 등 혼란에 휩싸였다가 1942년 4월 1일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합류했을 때 제1지대, 제2지대와 통합하여 제2지대로 재편되었다. 훗날 박기성은 나월환의 최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나는 나월환의 장사를 지내주었다. 나는 이때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었다. 조국을 위해 독립운동을 하러 멀리 중국 땅에까지 와서, 그것도 부하의 손에 죽게 되다니, 기가 막힐 뿐이었다. 설사 그가 우리 한국청년전지공작대의 자금을 모두 유흥가에 썼다고 하자. 그리고 단점이 많은 사람이라고 하자. 그렇다고 쳐도, 그에게 당장 남아 있는 것이 뭣인가? 집 한 칸 마련하지 못했잖은가? 생각할수록 비참한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생각할수록 몇몇 동지들이 어리석은 놈들이라고 생각될 뿐이었다.

광복 후 임시정부의 김구 일행이 서울에 들어왔을 때, 나월환의 유해는 화장되어 유골함에 넣어진 채 국내로 들어왔다. 그의 유해는 곧바로 태고사(지금의 보은사)에 옮겨져 그곳에서 49제를 지낸 뒤 나월환의 아버지 나종성에게 전해졌고, 나종성은 가야산 중턱에 나월환을 묻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나월환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1] 인천시는 나월환이 1924년 3월 17일에 인천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며 인천의 인물로 선전하고 있으며, 민족문화대백과 사전에서도 인천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고 기록되었다. 하지만 인천 공립보통학교 졸업생 명부엔 나월환의 이름이 없고, 나월환이 1922년에 인천에 갔음을 입증할 정황 증거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 나월환의 친인척들은 그가 양산보통학교를 졸업했다고 일관적으로 증언했다.[2] 점심식사는 없었다.[3] 나월환은 사건을 무마시킨 뒤 대원들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아서 혼 좀 내줄려고 지급되지 않은 척했고 아무것도 모른다고 잡아뗐다고 해명했다고 한다.[4] 이때 1년 전에 행방불명되었던 독립운동가 현이평의 시신도 발견되었다.[5] 중국측 보고서에는 김광구(金光朐)로 표기되었는데, 이하유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