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현(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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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이재현(李在賢)
이명
이재두(李在斗)

해평(海平)
생몰
1917년 2월 2일 ~ 1997년 2월 24일
출생지
경기도 시흥군 동면
(현재 경기도 안양시)
사망지
경기도 안양시
매장지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3. 여담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이재현은 1917년 2월 2일 경기도 시흥군 동면(현재 경기도 안양시)에서 이용환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1 운동 이후 형 이재천과 함께 부친을 따라 고향을 떠나 상하이로 향했다. 그는 상하이에서 형과 함께 인성소학교를 다녔고, 1935년 김구로부터 해평(海平)이란 호를 하사 받고 이해평이란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해에 이재현은 30여 명의 중앙군관학교에 소속된 한국인 청년들과 함께 안휘성의 변경에 있는 용지산 깊은 산속에서 특별훈련을 받았다.
그가 특수훈련을 받고 이듬해에 배속 받은 임지는 중국의 남단도시 광동성 광주였다. 이때 이재현은 백범의 큰아들 김인(1917∼1945)과 함께 백범 김구의 특명을 받고 광동성 광저우에 파견되었다. 그는 이곳에 소재한 중산대학에 유학을 온 한인 학생을 포섭하여 독립군으로 만드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때 공작대를 지휘하는 교관은 안우생이었는데, 이재현은 안우생으로부터 에스페란토를 익혔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광저우가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가자, 이재현은 홍콩으로 파견되었다. 이후 중국의 임시수도인 충칭으로 옮긴 그는 1939년 나월환, 김동수, 이하유 등과 함께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조직하여 선전반장을 맡았다. 그는 시안으로 이동하여 중화민국 전시간부훈련 한청반 교육을 수료하고 한국청년전지공작대 분대장에 임명되어 태행산 유격지구에 파견되어 일본군에 강제 징집된 한인 청년들을 포섭해 공작대에 가담시켰다.
이후 한국 광복군이 창설되자 나월환을 따라 광복군 5지대에 소속되었으나 1942년 3월 나월환 대장 피살 사건에 연루되어 재판을 받고 한동안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이후 1944년부터 광복군 제2지대 한미합동훈련반 특별반의 조교로 한국에 투입될 대원들을 가르쳤고, OSS와 협력하여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했으나 8.15 광복으로 취소되었다. 그 후 한국광복군 국내정진군 주임으로 북경에 파견되어 귀국하는 교포의 민정을 지원하면서 일본군 대본영으로부터 한국 국적을 가진 병사들을 인수 받는 임무를 수행했으나, 미군정이 광복군을 인정하지 않고 개인 자격으로 귀국할 것을 지시하는 바람에 1946년 6월 어쩔 수 없이 개인 자격으로 국내로 돌아왔다.
이재현은 귀국 후 한국광복군 국내정진군 주임으로 북경에 파견되어 귀국하는 교포의 민정을 지원하면서 일본군 대본영으로부터 한국 국적을 가진 병사들을 인수 받는 임무를 수행했다. 또한 중국에 있을 때 에스페란토 잡지 Nove-Bakito를 창립하고 발간했던 경험을 살려 서울의 산수대학과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서 에스페란토 강습회를 조직하고 지도했으며, 1950년 부산에서 에스페란토 클럽을 만들고 에스페란토를 가르쳤다.
1950년 6.25 전쟁 발발 후, 이재현은 1951년부터 1957년까지 주한합동고문단에서 일했고, 전쟁 종결 후 미국으로 건너갔으며 1966년부터 1975년까지 베트남에서 미군과 연결된 기업에서 일했다. 1975년 귀국 후 서울의 앰배세더 호텔에서 1980년 퇴직할 때까지 일했다. 또한 그는 에스페란토-한국어 사전(1969년)과 에스페란토 사전(1983년)을 발간했다. 앰베세더 호텔에서 퇴직 후 1983년 한국에스페란토 협회 부회장을 맡아 1990년까지 역임하면서 신문집들을 편집하고 에스페란토로 번역했으며, 자신의 에스페란토 원작들을 추가했다.
1990년 에스페란토 협회 부회장 은퇴 후 안양에 있는 자택에서 여생을 보내다 1997년 2월 24일 사망했다. 사후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이재현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이때 한 가지 일화가 전해진다. 박정희 대통령은 삼일절을 기념하여 건국공로훈장을 수여하는 자리에서 이재현을 만나 청와대에 초청했지만, 그는 이를 거부했다. 광복절 때 다시 한 번 초청이 있었지만, 그는 역시 가지 않았다. “내가 대통령에게 부탁할 일이 없다."는 것이 초대를 거부한 이유였다고 한다.

3. 여담


그의 형인 우봉(牛峰) 이재천 지사(1913~?) 역시 독립운동가여서, 안양자유공원에는 형제를 추모하는 동상이 세워져있다. 그런데 형 이재천은 젊은 모습, 동생 이재현은 늙은 모습으로 나타나있는데, 이는 이재천이 1935년 중앙군관학교 졸업 후 그해 10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밀명을 받고 인천으로 입국 도중 일본 경찰에 체포, 1936년 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와 대전 감옥에서 복역뒤 1940년 8월에 석방되었다는 기록이후에는 행방불명되어 그의 기록은 1940년인 28세에 멈춰있기 때문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