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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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박기성(朴基成)
이명
이수현(李守玄, 李守鉉, 李壽玄), 이활(李活)
이홍(李鴻), 구양군(歐陽軍)

순성(順成)

의당(毅堂)
생몰
1905년 6월 1일 ~ 1991년 2월 4일
출생지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
본관
죽산 박씨
사망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제동
매장지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2.1. 초년기
2.2. 아나키즘 운동
2.3. 한국청년전지공작대
2.4. 한국광복군
2.5. 광복 후 경력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박기성은 1905년 6월 1일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에서 부친 박문용(朴汶容)과 모친 연철희(延哲熙)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3살 때부터 증평군 도안면 화성리에 있는 외가에서 성장하면서 부친에게 천자문을 배웠고, 7살 때 서당을 다니며 한문을 공부했다. 1919년 3월 30일 도안면의 인근 지역인 청안면에서 2천여 명의 군중이 모여 독립만세 시위가 열렸을 때, 박기성도 여기에 참가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를 입증할 기록은 없다.
이후 학업에 매진한 그는 1922년 18살의 나이로 도안면 강습소에 진학해 2년간 수학했고, 1924년 4월 강습소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유학갔다. 그는 도쿄에서 요츠야 소학교(四谷小學校) 야간부 5,6학년 과정을 이수하는 속성과에 입학했는데, 여기서 훗날 독립운동을 함께 한 동지 나월환을 만났다. 소학교 1년 과정을 마친 뒤, 박기성은 1925년 가이세이 중학교(開城中學校)에 입학했다. 그는 4년간 학교를 다니면서 폐품을 수집하는 자선단체에서 일하며 숙식비를 어렵게 해결했지만 끝내 경제적인 문제로 졸업하지 못했다.

2.2. 아나키즘 운동


1925년 1월 15일, 아나키즘을 수용한 박기성은 정찬진, 홍영유 등과 함께 자유청년연맹을 조직했다. 자유청년연맹은 반일, 반공 노선을 추구하며 친일파 박춘금이 설립하여 일선융화를 지지하는 활동을 벌이던 상애회와 대립했다. 박기성은 훗날 회고록에서 상애회와 대립한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나는 정찬진·홍영유 등과 자유청년연맹을 조직하여 첫 투쟁대상으로써 당시 상애회라는 친일단체를 조직하고 있는 박춘금이 대상이 되었다. 이 자는 친일파의 거두였다. 나를 비롯한 정찬진, 홍영유 등 몇 명은 어느 날 밤 모처에서 나와 정찬진·홍영유 등이 만나 숙의 끝에 각자의 임무를 맡고 결행시간이 되어 박춘금 집을 습격하려 했는데 이 사실이 누구에겐지 사전에 누설되어 동지 몇 사람이 일본경찰에 붙잡혀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1928년, 박기성이 참가한 자유청년연맹은 원심창 등이 주도하는 흑우연맹과 연합하여 3.1운동 기념투쟁, 5월 1일 노동절 투쟁, 8월 29일 한일병합 국치일 기념 투쟁, 9월 1일 관동대학살 추도대회 등을 주관했다. 또한 기관지 <자유청년(自由靑年)>을 1929년 1월 31부터 매달 발간해 아나키즘을 선전하고 일본정부를 규탄했다.
그러던 1929년 국내에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발발하자, 박기성은 재일 아나키스트들을 규합하여 한국 학생들을 돕기로 결심했다. 그는 원심창과 한하연을 찾아가 자신의 뜻을 밝혔지만, 두 사람이 아직 때가 오지 않았다며 말리자 단독으로 활동하기로 결심하고 1929년 11~12월 사이에 홍영유와 함께 귀국했다. 그러나 형사들의 감시와 미행을 받은 그는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중국 망명을 결심했다. 그는 집에 들러 땅문서를 저당잡혀 망명자금을 확보하고, 인천에서 배편을 이용해 칭다오로 망명했다.
1931년 6~7월 칭다오에 도착한 박기성은 곧장 난징으로 이동해 일본 유학 시절에 친분을 맺은 적이 있던 중국인 황샤오메이(黃紹美)의 도움을 받았다. 그는 난징에 머무르면서 역시 일본에서 상하이로 망명한 원심창과 연락했고, 남화한인청년연맹에 가입해 선전활동과 친일분자 처단 활동을 벌였다. 또한 그는 원심창, 정해리, 이규창 등과 함께 문서부 위원으로 선정되어 선전활동을 벌이기도 했고, 남화구락부에서 동지들과 함께 아나키즘을 연구하고 각종 기념일에 격문을 살포해 재중국 한인들의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박기성은 1931년 8월 29일 백정기의 주거지에서 원심창, 유자명, 정해리, 이회영, 이규창 등과 함께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조선을 독립하여 무정부주의 사회를 건설하자>는 제목의 격문을 100매 등사하여 배포했다. 또한 1931년 9월 하순에는 반전투쟁을 위한 반전 전단을 작성할 것을 협의하고 그 취지의 전단은 1,000매 등사해 동지들에게 배포했다. 그리고 1931년 12월부터 1932년 3월 하순까지 이달, 김성수, 엄형순, 이규창, 오면직 등과 함께 난샹(南翔)의 입달학원(立達學院) 부근 독립가옥에서 거주하며 아나키즘 연구회를 개최했다.
1933년 2월 하순에는 3월 1일 조선독립기념일을 맞아 조선을 독립하고 아나키즘 사회의 필요성을 선전하는 전단을 60매 작성해 배포했으며, 1933년 4월 하순에는 5월 1일 노동절을 기념해 노동절의 의의, 국가권력 및 사유제산제 부정, 아나키즘 사회 건설을 위한다는 내용의 전단을 500매 작성해 배포했다. 이러한 선전물의 인쇄는 원심창의 주거지인 프랑스 조계 차이스로(菜市路)의 영인리 16호에서 진행되었다.
박기성은 친일분자 숙청에도 앞장섰다. 그는 1932년 11월 백정기의 집에서 열린 회합에 참여해 상하이 방면에 폭탄을 투척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원심창, 이용준은 베이징이나 톈진의 일본 기관에 폭탄을 투척하자는 류기석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이후 류기석, 원심창, 이용준은 톈진으로 이동한 뒤 작전을 실행했지만 큰 피해를 주지 못했다.
이후 이회영이 다롄에서 일본 헌병대에게 체포되어 옥중에서 사망하자, 남화한인청년연맹원들은 이회영이 체포된 것은 밀정의 밀고 때문일 거라고 짐작하고 은밀히 조사한 끝에 연충렬과 이규서를 밀정으로 지목했다. 두 사람은 이회영이 만주로 떠나기 전에 만난 자들로, 실제로 이회영이 만주로 간다는 걸 일본 영사관에 알렸다. 남화한인청년연맹은 이들을 처단하는 방안을 모색했고, 박기성은 이 회합에 참여해 1932년 12월 안에 두 밀정을 처단하기로 결의했다. 이후 이달과 오면직은 연충렬과 이규서를 유인하여 체포해 자백을 받아낸 뒤 난샹역 철교 부근에서 처단했다.
박기성은 또 군자금 확보를 위해 친일 자산가를 습격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1931년 12월 상순에 이용준의 숙소에서 진행된 회합에 참여해 금은교역상 겸 과물상인 이명섭(李明燮)의 집을 습격하기로 결의했다. 수일 후 백정기, 이용준, 엄형순, 김성수 등이 이명섭의 집을 습격하여 현금 500원과 금제 회중시계 1개를 빼앗았지만 예금통장 인출에는 실패했다.
1933년 6월 초순에는 이용준의 숙소에서 진행된 회합에 참여해 평안북도 금융조합 이사 김창우(金昌宇)가 조합의 공금 4만엔을 가지고 프랑스 조계의 숙소에 있으니 이를 습격하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오면직,김성수, 이용준 등의 습격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그가 직접 나서서 이달, 엄형순과 함께 다시 습격해 김창우가 휴대하고 있던 통장에서 예금을 인출하고자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1933년 7월, 박기성은 이이덕, 이용준과 함께 친일 자산가 조상섭(趙尙燮)의 자택을 습격해 조상섭 소유의 조선인삼 약 40근 및 금제 회중시계 1개를 빼앗았다. 빼앗은 조선인삼은 판매해 독립운동자금에 충당했다. 또한 박기성은 1931년 12월 항일구국연맹의 흑색공포단에 입단하여 중국 주재 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 암살 계획에 가담했다. 흑색공포단은 아키라가 추진하는 비밀 연회가 이듬해 3월 17일에 육삼정(六三亭)에서 있을 거라는 소식을 듣고 백정기와 이강훈을 선발해 의거를 진행하려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밀정의 밀고 때문에 탄로나고 말았고, 원심창, 백정기, 이강훈이 체포되었다.

2.3. 한국청년전지공작대


박기성은 아나키즘 운동을 통해 일제에 맞섰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성과가 지지부진하자 중국군에 입대해 일본에 맞서기로 결심했다. 그는 1933년 7월 난징으로 이동해 중국포병학교에 입교하여 교육을 받았고, 1934년 9월 유자명의 도움으로 중국군관학교 정치부주임 비서 천광궈(陳光國)의 보증을 얻어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에 제11기로 입교했다. 1937년 군관학교를 졸업한 그는 후난성 창더에 있는 제1통신병단의 보충대 소대장으로 부임했다. 이후 상위(대위)로 진급하고 충칭에 있는 훈련총감부 참모로 복무했다. 이때 그는 유자명, 나월환, 이하유와 자주 교류하며 두터운 친분을 다졌다.
1939년 2월 류저우에서 임시정부 인사들에 의해 창설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서 활동하던 이하유, 김인(金仁), 김동수(金東洙) 등은 간부들과 의견이 잘 맞지 않자 독자적인 단체를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중국군에서 활동하고 있던 박기성, 나월환과 접촉해 도와줄 것을 청했고, 박기성은 이를 흔쾌히 수락하고 유자명에게도 알렸다. 이후 박기성 등은 1939년 11월 11일 김구의 승낙을 얻어 충칭에서 30여 명의 대원으로 구성된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를 결성했다. 대장은 나월환, 부대장은 김동수, 정치조장은 이하유, 선전조장은 이해평(李海平)이었으며, 박기성은 군사조장을 맡았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는 결성 직후 시안으로 이동했고 1940년 5월부터 중국 제34집단군 후종난(胡宗南) 부대와 연계를 맺고, 일본군 점령지역에서 복무중인 한인청년들을 대상으로 초모 활동을 전개했다. 박기성은 몇 명의 대원들과 함께 타이항산으로 가서 20여 명을 모집해 시안으로 인솔해 오기도 하는 등 초모 활동을 적극적으로 수행했다. 모집된 청년들은 시안에 설치된 한국청년훈련반(韓國靑年訓練班)에서 일정 기간 군사훈련을 받은 후 대원으로 편입되었는데, 1940년 말에는 그 숫자가 100여 명에 달했다.
한편, 박기성은 한국청년전지공작대의 기관지인 <한국청년> 발행에 참여했다. 그는 1940년 7월 15일에 <1940년 일본경제의 전도(前途)>를 게재해 일본 경제의 통화 팽창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렸고, 1940년 9월에 <일본의 구매권 제도 실시>를 게재해 일본 정부가 시행하는 구매권 제도는 일본 경제가 이미 붕괴되고 있음을 암시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1941년 9월 1일에 <한청동태-훈련수기>를 게재해 한국청년훈련반의 훈련과정을 설명했다.
박기성은 한국청년전지공작대의 선전활동에도 동참했다. 1940년 5월 20일 시안 성내 가설극장에서 <아리랑> 공연을 기획해 중국인들에게 한국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심어주도록 노력했다. 아리랑 공연의 첫번째 극인 <국경의 밤>은 한국과 중국의 병사들이 일본군의 방어선을 뚫기 위해 분투하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었다. 그리고 두번째 극인 <한국의 한 용사>는 일본 헌병대 통역관이던 박동운이 1940년 1월 3일 중국인 유격대원을 풀어주고 기밀문서를 훔쳐 적진을 탈출하였던 실화를 바탕으로 연출된 공연이었다. 그리고 세번째 극인 <아리랑>은 한, 중 협연으로 진행되어 출연자가 59명에 달하고 악대는 33명에 달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 박기성은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관객을 안내하고 통제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중국 관객들은 아리랑 공연에 큰 성원을 보냈고, 공연의 수익금은 4,100원에 달했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는 이 수익금을 부녀위로총회에 기부하여 병사들의 하복 준비에 도움을 줬다.

2.4. 한국광복군


1940년 9월 17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충칭에서 한국광복군을 창설했다. 이후 한국청년전지공작대는 자신들에게 와달라는 조선의용군과 한국광복군 중 어느 한쪽과 가담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대장 나월환은 장고 끝에 한국광복군에 가담하기로 결심했고, 한국청년전지공작대는 1941년 1월 1일 시안 본부에서 편입식을 거행하고 한국광복군 제5지대로 편제되었다. 제5지대는 지대장 나월환, 부지대장 김동수, 정훈조장 이하유, 공작조장 이해평 등 한국청년전지공작대의 간부들이 중심을 이뤘고, 박기성은 훈련조장을 맡았다.
박기성은 한국광복군 편입 후 주로 초모인원들의 군사교육에 전념했다. 그는 나월환, 김동수 등과 함께 한국청년훈련반 제2, 3기의 군사교육을 담당했다. 이러한 초모 활동은 상당한 성과를 거뒀고, 제5지대는 한국광복군에서 가장 많은 병력을 확보한 부대가 되었다. 그러나 이무렵 제5지대 내부에서 내분이 벌어졌다. 박기성은 훗날 회고록에서 지대장 나월환과 정훈조장 이하유와의 갈등이 매우 심각했다고 회상했다.

나월환과 이하유는 걸핏하면 다투었다. 무슨 일로 다투게 되었는지 알아보면 하찮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또한 나월환은 대원들과도 갈등이 잦았다. 한 번은 그가 지휘권을 확립할 목적으로 호종남(胡宗南) 장군의 중국 부대에서 보내온 생활비를 수령해놓고도 대원들에게 생활비가 지급되지 않았다고 둘러댔다. 나중에 이 일이 알려지자 대원들은 분개했고, 나월환이 그 돈을 빼돌려 유흥비로 썼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급기야 김동수가 소문을 듣고 분노한 나머지 나월환에게 장총을 발포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부대장이 대장을 상대로 하극상을 벌인 것이다. 다행히 총알이 비껴나가서 나월환이 사망하는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지만, 당시 부대 내 갈등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잘 드러낸 사건이었다.[2]
박기성은 이런 일련의 상황에 깊은 우려를 품고 나월환에게 충고했다.

"나 대장. 지금 현재 나 대장에 대한 대원들 간의 여론이 좋지 않으니 매사에 조심해주게."

그러나 나월환은 콧방귀를 뀌며 응수했다.

"아니, 내가 뭐 어쨌다는 거요. 도대체 어떤 놈이 나더로 뭐라고 합디까! 뭣을 조심하라고 합니까."

박기성이 다시 충고했다.

"뭐라고 딱 집어서 얘기하기는 곤란하네만, 내 생각에 자네는 한동안 어디 가서 쉬었다 왔으면 싶네."

그러나 나월환은 잘라 말했다.

"나는 굵고 짧게 갈 생각이오. 내가 어떻게 되든 박형은 나에게 개의치 말아주시오."

결국 1942년 3월 1일, 나월환은 이하유, 박동운, 김동수, 이해평, 이도순, 고여순 등 20여 명의 간부들에 의해 암살되고 말았다. 이후 나월환을 살해한 인사들은 전원 중국군에게 체포되었고, 나월환을 직접 살해한 박동운은 사형 판결을 받았으며, 음모를 꾸민 이하유, 김동수는 무기징역, 이해평, 이도순, 고여순은 15년형, 김송죽(김천성), 김용주는 2년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제5지대의 활동은 크게 위축되었고 많은 대원들이 이탈하는 등 혼란에 휩싸였다가 1942년 4월 1일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합류했을 때 제1, 2지대와 통합하여 제2지대로 재편되었다. 박기성은 훗날 나월환의 최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나는 나월환의 장사를 지내주었다. 나는 이때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었다. 조국을 위해 독립운동을 하러 멀리 중국 땅에 까지 와서, 그것도 부하의 손에 죽게 되다니, 기가 막힐 뿐이었다. 설사 그가 우리 한국청년전지공작대의 자금을 모두 유흥가에 썼다고 하자. 그리고 단점이 많은 사람이라고 하자. 그렇다고 쳐도, 그에게 당장 남아 있는 것이 뭣인가? 집 한 칸 마련하지 않았지 않은가? 생각할수록 비참한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생각할수록 몇몇 동지들이 어리석은 놈들이라고 생각될 뿐이었다.

박기성은 일본에 있을 때부터 오랫동안 독립운동을 함께 한 동지였던 나월환이 암살된 후 더는 시안에서 활동하지 않고 충칭으로 이동해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에서 정보참모처 제2과에서 근무했고, 1944년 3월에 서무과원에 배속되어 활동하다가 8.15 광복을 맞이했다.

2.5. 광복 후 경력


박기성은 광복 후 한인 교포들의 이주 문제로 이강과 함께 잠시 대만에 다녀왔고, 1945년 12월 28일에 귀국한 뒤 1946년 육군사관학교 제3기 특별반에 입교했다. 그는 1946년 3월 20일 최덕신, 박시창 등과 함께 대위로 임관하여 총사령부에 배치되었다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부산 제5연대 대대장으로 부임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한 후에는 2시단 5연대장, 대구 제1훈련소 부소장 등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대위 지휘참모과정[3] 7기 교육을 맡았고 군산 신병보충대장을 거쳐 1952년 101사단장으로 전입되었다. 그리고 1960년까지 대령으로 근무하다가 준장 진급과 동시에 퇴역했다.
그는 예편 후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고, 1969년에는 독립운동사를 집대성하기 위해 구성된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에 위원으로 참여했다. 또한 1985년에 한국광복군동지회 회장에 선임되어 2년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의 역사적 정립을 꾀했다. 1991년 2월 4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제동에서 병사했으며,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1] 1937년, 중국군관학교 졸업 당시 촬영된 사진[2] 나월환은 사건을 무마시킨 뒤 대원들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아서 혼 좀 내줄려고 지급되지 않은 척했고 아무것도 모른다고 잡아뗐다고 해명했다고 한다.[3] 구. 고등군사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