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철(야구선수)
1. 소개
대한민국의 전직 프로야구 선수. 여러모로 '''KBO 역대 비극의 인물'''이라고 칭할 정도로 안타까운 삶을 살았다. 한국 프로야구 원년 최악의 약체 팀인 삼미 슈퍼스타즈의 창단 멤버로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2] 빛을 못 본 채 불과 입단 1년만에 팀에서 방출된 후 이를 비관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비운의 인물. 그러나 이조차도 모르는 이들이 많아 기억 속에서 잊혀진 인물이다.
2. 현역 시절
동산고 졸업 후 인하대로 진학하여 선수로 활동하던 중 프로야구가 출범했고 인천 연고 팀으로 삼미 슈퍼스타즈가 창단되었는데, 당시 삼미는 고질적인 투수난에 시달리고 있던 탓에 쓸 만한 투수를 끌어오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오죽하면 일반인들을 상대로 공개 테스트를 통해 전력을 보강하려고 했었다. 이 때 삼미특수강 직원으로 근무하던 좌완투수 감사용[3] 이 테스트에 합격하여 삼미 유니폼을 입었다. 당시 인하대 3학년에 재학 중이던 김동철은 삼미의 스카웃 제의를 받고 학교를 중퇴한 채 프로에 발을 들였다.
당시 프로야구는 알다시피 선발이나 중간, 마무리 같은 개념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고[4] 하물며 허약하기 짝이 없는 마운드를 자랑하는(?) 삼미로서는 가용 인원 전부 보직 그런 거 가릴 것 없이 돌려야만 경기를 그럭저럭 꾸려나갈 상황이었다. 물론 김동철도 예외는 없었고 선발, 중간, 마무리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던지며 1982년 한 해 동안 '''총 32경기 등판'''에 '''15번을 선발로 마운드에 오르며 93이닝 투구'''로 규정이닝(80이닝)을 넘겼지만, '''1승 9패 1세이브, 평균자책 7.06'''이라는 처참한 성적을 남겼다(...). 그리고 이것이 김동철의 프로 통산 성적이다. 특히 이 해 김동철의 평균자책 기록은 아직도 '''역대 한 시즌 규정 이닝 진입 투수 중 최악의 기록'''으로 남아있다.
참고로 2009년 한화 이글스의 김혁민이 '''7.87'''의 평균자책을 기록했으나 '''116과 3분의 2이닝'''으로 규정이닝 133이닝을 채우지 못하여 기록 갱신(???)에는 실패했다(...).
아무튼 성적은 안 좋았을지언정 마당쇠처럼 열심히 던진 김동철이었지만, 원년 시즌 후 삼미에서 대대적인 선수단 정리가 있었고, 김동철도 방출 선수 리스트에 끼어 있었다. 그렇게 김동철은 불과 1년만에 허무하게 프로 무대를 떠나야 했다.
김동철의 1982년 시즌 유일한 1승, 그리고 '''프로 통산 첫 승이자 마지막 승리'''는 그 해 5월 5일 춘천에서 열린 롯데 자이언츠와의 홈 경기에서 따낸 것이다. 이 날 선발로 등판한 김동철은 6이닝 동안 5실점으로 롯데 타선에 두들겨 맞았으나 삼미 타자들이 뜬금없이 안타 22개로 무려 16득점을 뽑아낸 덕분에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통산 1세이브'''는 바로 감사용의 승리를 구원하면서 기록했는데 공교롭게도 이 세이브 기록 또한 롯데전에서 기록하였다. 또한 이는 감사용의 유일한 승리 기록이기도 하다.
3. 방출 이후와 갑작스런 사망
삼미에서 퇴단당한 김동철은 이후 현역병으로 입대했으나, 1983년 시즌 개막 전날인 4월 1일 인천 도원야구장 부근의 경인선 철로에 투신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향년 22세. 자살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마도 더 이상 야구를 못하게 된 것에 대하여 세상을 비관한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안습한 사실은 네이버에서 아무리 검색해 봐도 프로필조차 나오지 않고 삼미 선수들의 대규모 방출기사만 존재할 뿐 그가 자살했다는 기사조차 전무하다는 점이다.
어쨌든 한국 프로야구 사상 첫 번째로 자살한 선수였지만 죽어서도 전혀 관심조차 받지 못한 야구인이었다. 3년 뒤인 1986년, OB 베어스 소속이던 김영신은 팀내 주전 경쟁에서 밀린 것을 비관하여 김동철과 같은 운명을 선택했지만 그의 등번호였던 54번은 영구결번으로 지정되면서 그나마 대접받게 된 케이스라고 할 수 있겠다.[5][6]
4. 연도별 성적
5. 관련 문서
[1] 3학년 때 중퇴하고 프로에 입문했다.[2] 평균자책점 7.06으로 현재까지도 규정 이닝 기준 역대 최악의 평균자책점을 기록 중이다.[3] 일반인이라 해도 대학 시절까지 선수로 뛰었고 사내 야구팀 에이스로 활약했었다.[4] 원년의 슈퍼스타 박철순도 선발과 마무리를 겸직할 정도였다...[5] 이 때 김영신은 한국프로야구 최초의 영구결번 선수가 된다.[6] 그도 그럴 수 있는 것이 김동철은 원년에만 뛴 선수라 상대적으로 인기를 얻기 전이고, 김영신은 그래도 프로야구 4번째 시즌부터 뛴 선수에다 국가대표를 역임했었다. 또한 김동철은 방출되고 병사 신분에서 자살해서 삼미 구단이 거의 개입하지 않았지만 김영신은 현역 선수 신분에서 자살한지라 구단에서 적극적으로 조치를 취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