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현(1968)

 


'''김상현의 수상 및 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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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리즈 우승반지'''
'''1992'''


'''이름'''
김상현(金相鉉)
'''생년월일'''
1968년 4월 28일
'''출신지'''
정부 직할 부산시
'''학력'''
경남중-경남고-동아대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2년 롯데 자이언츠 2차 3라운드 지명
'''소속팀'''
롯데 자이언츠(1992~1997)
1. 선수시절 활동
2. 은퇴 후
3. 연도별 주요 성적


1. 선수시절 활동


대학시절에는 투수유격수를 겸했으며 1992년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한 뒤 투수로 전향했다. 그 해 6월 5일에 LG 트윈스를 상대로 프로 첫 완봉승을 거두었으며 9월 3일 삼성 라이온즈를 상대로 더블헤더 2차전에서 7:0 완봉승을 기록하였다.[1]
또한 프로 첫 해에 우승을 경험했다.[2] 그 이후로도 꾸준히 롯데 마운드에서 활약하면서 롯데가 좋은 성적을 내는 데 크게 활약한다. 특히 이듬해인 1993년은 풀타임 선발투수로 활약하며 12승 9패 4세이브 3.20의 평균자책점으로 롯데에서 없어서는 안 될 레귤러로 자리잡았다. 그 해 롯데는 해태를 상대로 광주 무등경기장에서는 1승 8패의 졸전을 벌였는데, 그때 유일한 1승이 김상현의 완투승이었다. 팀은 8대3으로 승리했다. 1994년 방위복무를 하면서도 홈경기에 출전해 나름 활약을 해 주었다.
이듬해인 1995년 방위복무를 마친 뒤엔 롯데 불펜의 핵으로 활약했다. 특히 기존 마무리투수였던 박동희가 부진하자 후반기부터 대신 마무리투수를 맡으며 롯데의 한국시리즈 준우승에 한 몫을 했다. LG 트윈스와의 플레이오프에서 구원승으로 2승을 따내며 롯데의 한국시리즈 진출에 공헌했지만, 한국시리즈 3차전 10회초 구원등판해서 크게 불을 지르고 햇병아리 신인이었던 정수근에게 3루타를 맞는 바람에 롯데의 우승 실패에 지분을 차지했었다는 점은 옥에 티로 남았다. 한편 3차전의 패배 이후 롯데의 마무리 역할은 김경환에게 돌아갔고, 김경환은 이후 완벽한 투구로 OB의 타선을 틀어막는데 성공한다.[3]
그러나 이후 경기중 발목 부상을 당했고 수술을 해야하는 상황이었으나 조속히 등판 재개하길 원했던 구단에서 수술없이 재활치료를 고집하는 바람에 고질적인 발목부상 재발을 겪었다 . 1996년은 전해의 절반 수준인 26경기에 등판해 2승 4패 2세이브 4.98의 평균자책점으로 부진했다. 결국 1998년 초에 웨이버 공시된 후 방출되며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수년간 롯데 마운드의 주축으로 활약해왔던 성실한 선수가 갑자기 발목부상을 당했고 구단의 관리 미숙 문제를 겪고 또 오래 기다리지 않고 즉시 방출한 것은 구단과 선수에게 서로 아쉬운 선택이었을 뿐이다. 김상현의 방출 이후 롯데는 1998, 2001, 2002, 2003, 2004년에 꼴찌를 기록한다. 야구에 만약이라는 건 없지만 롯데로서는 아쉬울 일. 은퇴 당시에도 너무나 조용히 은퇴했고 이후에도 야구계와 전혀 연결되지 않아 그의 근황을 궁금해하는 올드팬들이 더러 있다.
이른 나이에 갑작스럽게 은퇴해 커리어는 1992년부터 1997년까지 단 6년. 그래도 그 기간 동안 한국시리즈 우승과 준우승을 한 번씩 경험했다. 신장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다소 옆으로 벌어진 듬직한 체격이었고 그 덕분인지 구속에 비해 구위가 묵직한 편이었다. 1993년에 8완투를 기록했을 정도로 완투 능력까지 겸비하고 있었다. 통산 기록을 보면 알겠지만 선발 중간 마무리 어디서든 제 몫을 해냈던 선수. 그래서 현역 시절에 '마당쇠' 이미지가 강했다. 지금 시점의 현역선수와 비교하자면 한화 이글스에서 뛰는 송창식의 1990년대 버전이었다고 보면 딱이다.

2. 은퇴 후


현재 추신수, 이대호, 장원준의 모교인 부산 수영초등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재직하고 있다. 학교의 재건축으로 운동장 사용이 곤란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2017년 5월 전국 초등학교 야구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고 한다. 기사 2018년 현대자동차배 초, 중, 고 야구대회 기사, 2019년 현대자동차배 리틀, 초, 중, 고 야구대회를 2회 연속 우승을 차지하는 등 기사 각종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며 감독으로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고 한다.

2013년에 롯데 구단의 초청으로 입국한 펠릭스 호세가 수영초등학교를 직접 방문해서 선수들에게 하루 동안 타격 기술을 지도하기도 했다. 그런데 김상현이 호세를 직접 대면하긴 했는데 본인이 은퇴한 후에 호세가 롯데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서로를 알고 있었을 가능성은 희박했을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김상현의 현역 때 등번호는 34번이었고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이적한 박성기가 잠시 34번을 달았으나 1999년에는 호세가 그 번호의 주인이 된다.

3.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1992
롯데 자이언츠
33
113⅓
7
9
4
0.438
4.21
121
13
56
68
64
53
1993
28
163⅓
12
9
4
0.571
3.20
152
8
50
77
60
58
1994
17
48⅔
4
3
0
0.571
3.88
49
7
33
13
22
21
1995
42
89
4
6
9
0.400
3.03
82
9
23
47
32
30
1996
26
34⅓
2
4
2
0.333
4.98
43
2
27
27
21
19
1997
19
30
0
0
0
-
3.60
39
3
14
13
12
12
'''KBO 통산'''
(6시즌)
165
478⅔
29
31
19
0.483
3.63
486
42
203
245
211
193
[1] 1차전에서는 윤형배가 3:2 선발승을 기록하였다.[2] 엔트리에 포함되긴 했지만 한국시리즈 출전은 하지 못했다. 참고로 이 해 한국시리즈에서 롯데는 투수 엔트리 9명 중 윤학길, 박동희, 염종석, 윤형배 단 네 명만 출전하였다.[3] 7⅓ 이닝동안 안타는 단 2개만 허용했고 자책점도 전혀 없었으나 이 시리즈는 안타깝게도 김경환의 야구인생 마지막 경기가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