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88577
1. 개요
롯데 자이언츠의 2001년부터 2007년 성적으로, 저 속에 '''4연속 꼴찌'''라는 위업도 들어있는 위대한 숫자다.[1] 그 시절 동안 올린 패배수는 무려 '''538패'''이다. 참고로 7년간 치렀던 경기 횟수는 총 910회다. 특히 8888을 찍던 2001년부터 2004년 때는 무려 '''532전 183승 19무 330패'''. 한 시즌 평균 패배수가 80패를 넘어갔다. 이 기록은 한화가 58868996을 기록하고 있던 2008년부터 2014년까지 7년 동안 539패를 기록하며 깨졌다. 2015년도 포함하면 600패가 넘어가지만, 비교를 위해 같은 시즌 횟수로 계산해야 하기 때문에 제외되었다.
2000년 성적까지 합치면 '''58888577'''로 비밀번호가 여덟자리 수가 되지만, 사실 양대 리그가 시행되었던 2000년에는 매직리그 2위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였다. 하지만 드림리그 3위였던 삼성 라이온즈보다 승률이 낮아 지금의 와일드카드 제도와 살짝 비슷한 준플레이오프를 치렀고 여기서 삼성에 패배, 바로 시즌을 마감하는 바람에 8구단 순위로 최종 환산 시 최종 순위가 5위로 되었다.[2]
롯빠의 마지막 보루이자 타팀의 영원한 놀림거리. 실제로 타 팀 팬[3] 들의 입장에서는 롯데 팬들이 자기가 응원하는 팀 성적이 나쁘다며 웃을 때 옆에서 조용히 8888577의 주문을 외우면 닥치고 버로우하게 되는 신비로운 힘이 있다. 사실 4연속은 아니어도 3연속 꼴찌를 한 팀도 롯데를 제외하면 2014 시즌에 899를 달성하며 3연속 꼴찌를 달성한 한화, KT밖에 없다는 점에서 어떤 팀에서도 깨기 힘들 것이 확실한 대망의 기록.[4] 바다 건너에서는 어느 구단이 2008년부터 4년 연속 기록 중... 이긴 하지만, 이 구단은 1954년부터 1959년에도 '''6년 연속 최하위'''를 한 적이 있다. 더군다나 4연속 꼴지는 하지 않았지만 바다 건너편의 자매팀은 1995년에 2위한 것을 제외하고 '''1986년부터 2004년까지 B클래스를 기록했다.'''
당시 롯데 팬들의 심정을 대변해주는 짤방.[5] 과거에 삼성의 역사상 최악의 성적이라 불리던 6위도 사실은 백인천 재임 시절이긴 한데, 다만 삼성은 백인천이 취임하기 전 2년 동안 55를 찍으며 나름대로는 답이 없던 상황이었다. 백인천은 결국 KBO 역사상 유래를 찾을 수 없는 리빌딩으로 팀을 1997년 포스트시즌으로 이끌고, 이 리빌딩이 결국 2000년대 삼성의 토대가 되었기에 그때를 본 삼성 팬들에겐 여전히 평이 좋은 감독이기도 하고, 2016년 9위를 하면서 이 기록은 갈아치워져서 2017년 시점에서는 큰 의미가 없게 되었다. 뒤에서 세도 당시 6위는 끝에서 3등, 2016년 9위는 끝에서 2등이다.
2. 2000년: 암흑기의 전조
시즌 시작전 롯데는 매직리그로 삼성은 드림리그로 옮겨졌다.
우선 펠릭스 호세는 미국 메이저 리그로 떠나고, 마해영과 박정태는 선수협 파동 때문에 훈련 부족으로 1999년에 막강했던 타선이 식어버렸다. 그래도 2000년에 가을 야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SK와 한화의 부진과[6] 롯데 투수진들의 분전, 양대리그 덕택에 강팀들과의 순위 싸움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 시즌 초부터 매직리그 1위를 달리다가 막판 부진과 LG의 연승으로 1위 자리를 내주고 삼성과의 준플레이오프 에서 1승 2패로 PO 진출 실패하였다. 그래도 20세기 마지막 해에 가을야구에 초대를 받아서 나름 훈훈하게 마무리 지을 수 있는가 했지만, 임수혁이 시즌 초 쓰러져 선수생활에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그리고 시즌이 끝난 후, 롯데의 운명을 가른 첫 번째 일이었던 마해영 트레이드 사건이 일어난다. 선수협 활동에 적극적이었던 마해영은 롯데 프런트에게는 눈엣가시같은 존재였고, 결국 2000 시즌 종료 후 김주찬, 이계성을 상대로 트레이드 된다. 하지만 문제는 지난 6년간 성장해와서 롯데에서 사실상 유일하게 거포라고 불릴 만한 선수는 당시에는 마해영 밖에는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삼성으로 간 마해영은 3년 연속 30홈런을 치는 등 삼성에서 3할대 초반의 타율과 111개의 홈런, 300개가 넘는 타점을 기록하면서 중심타선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해 줬고, 중심을 잡아줄 리더가 없어진 롯데는 이후 야수진을 꾸리는 데 애를 먹게 된다. 물론 김주찬이 롯데에 와서 잘 해주긴 하였으나 확실하게 잠재력이 터진 시점은 2007년 베이징 올림픽 예선전 이후였고, 그 이전까지는 그저 그런 발만 빠른 선수였다.
3. 2001년: 불운한 시작
2001년은 롯데에 있어 너무나도 불운한 해였다. 먼저 전 시즌에 2000년에 1999년 플레이오프에서 활약했던 임수혁이 심장마비로 식물인간이 되었고, 다음 시즌에 마해영은 트레이드로 삼성에 이적했으며[7] , 주형광도 신인 시절부터 지속됐던 무리한 투구 혹사 탓에 시즌 아웃 됐다.
게다가 2001년은 유례 없는 중하위권 팀들의 치열한 순위 싸움이 벌어진 해였는데, 이 치열한 상황에서 악전고투하던 '''김명성 감독이 시즌 도중 7월 24일에 심장마비로 사망'''하는 사상 유례 없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삼성 라이온즈 감독을 맡았던 우용득 감독 대행 체제로 어떻게든 수습하려 했고, 후반기에 김주찬이 톱 타자의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하며 팀에 활력을 불어넣기 시작해 시즌 막판까지 4강 싸움을 벌였다. 01시즌 출루율 5할 호세의 하드캐리를 필두로 팀 타격이 나름 분전했지만, 시즌 막판 마산구장에서 삼성과 1999년 플레이오프의 악연이있던 펠릭스 호세가 배영수의 빈볼성 투구를 참다 못해 참교육이라는 드립을 탄생시키는 폭력을 행사해 잔여 경기 출장정지 징계를 받으며 팀이 무너지고 말았다. 결국 한화는 물론 LG, SK에게마저 역전당해 득실차가 +를 기록하고도[8] '''4위와 2게임 차이로 아쉽게 8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호세가 출장 정지 먹고 나서 1군에 갓 올라온 선수가 훗날 롯데의 주전 강타자.
'''그리고,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4. 2002 ~ 2003년: 백골프의 등장, 절정기
2001년에 기록한 8위는 그래도 괜찮았다. 2001년 시즌에서의 4위 한화와 8위 롯데간 성적은 '''단 2게임 차'''로, 거의 도찐개찐에 가까웠기에 꼴지를 했다고 문제가 되는 건 아니였다.
그러나 2002년 김민재의 FA 이적, 펠릭스 호세의 이중 계약 파동이라는 악재를 맞았다. 특히 호세는 2002년에도 재계약이 사실상 확정되었으나, 휴식을 한다면서 스프링 캠프에 오지 않다가 갑자기 애리조나와의 계약을 하면서 이중 계약으로 '''프로야구 최초 외국인 선수 영구 제명'''을 받게 된다.[9] 물론 KBO와 롯데 구단이 항의를 안 한 건 아니었다. 메이저리그 사무국에 항의 팩스를 몇 번 보냈으나 실패로 돌아가게 된 것. 그 후 2004년에 겨우 투자를 시작한 롯데에선 부상으로 약간 안 좋았던 이시온을 포기하고 호세를 다시 데리고 오는 게 낫지 않나라는 의견이 쏟아져 나왔다. 이걸 반영해서 호세 영입을 강력하게 원했던 롯데는 호세만 무조건 영입하려 한다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영입하려 노력했으나, 이중 파동으로 당시 KBO 영구 제명을 당하고 있던 호세는 오지 못했다. 물론 나중에 제명이 풀려서 한국에 2006년 돌아오긴 한다.
이렇게 전년도의 주축 전력들이 이탈하기 시작하며 롯데는 나락으로 빠져들기 시작했고, 대행에서 승격한 우용득 감독은 이러한 상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다 최악의 성적을 찍고 중도 사퇴하였고 동시에 새롭게 부임한 '''백인천 감독이 롯데 7년 암흑기의 시대를 열었다.'''
백인천은 부임하자마자 시즌 포기와 리빌딩을 선언하며 온갖 무리수를 던져댔고, 그 결과 2002년 롯데는 구단 역사상 '''최악'''+모든 구단 역사상 뒤에서 3등[10] 이라는 찬란한 성적인 '''35승 1무 97패, 승률 0.265'''를 내면서 독보적인 최하위를 한다. 7위 한화의 승률인 '''0.461'''와도 2할 가까이 차이가 난다. 이 때문에 2002년 시즌은 역대 최악의 승률 인플레를 자랑했다. 아니, 당시에 '''1위와 7위 한화의 승차보다 7위와 8위 롯데의 승차가 더 벌어졌다'''. 순위 경쟁이 치열하면 '''페넌트레이스 1위와 최하위'''의 승률 차이가 2할도 안 나는 경우도 있고, 심지어 바로 전 해에는 한국시리즈 우승 팀과 리그 꼴찌 팀이 1할도 차이 안 났었는데... 참고로 이 때 롯데는 '''청보 핀토스 시절 허구연의 감독시절 승률 기록인 0.273'''을 깼다...
이 해 롯데의 홈 최종전이었던 2002년 10월 19일 한화전의 유료 관중은 겨우 '''69명'''이었다.
이 당시 관중 동원이 얼마나 안습이었느냐를 증명하는 에피소드가 있다. 2002년 9월 14일, 부산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참가국들을 응원하는 시민 서포터즈가 결성되었는데, 원래 주경기장에서 발대식 행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3만 명 이상의 서포터즈가 모이고 행자부장관, 부산시장, 각국 대사가 참가하는 성대한 행사였다. 롯데는 침체된 프로야구붐을 되살려보겠다는 생각으로 사직야구장으로 장소를 변경하길 요청했고, 행사 이후에 서포터즈가 그대로 공짜 야구 경기를 관람하게 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5년만의 만원 관중 예상이라며 보도자료를 돌렸다. 관련 기사. 그리고 야구장은 오랜만에 사람들로 붐볐는데... # 하지만 그 날 관중 수는 '''514명'''. 행사가 끝나고 경기 시작 시간이 되자 귀신 같이 관중들이 다 빠져나가 버린 것이다. # 당시 운영팀장은 "사람들이 돈 받는 줄 알고 다 갔나봐요."라며 씁쓸해 했다. 한마디로 공짜 야구도 소용 없는 지경이었다.
새 감독이 대놓고 시즌 포기를 선언하고 다음 시즌을 제대로 준비하겠다고 했으니, 2003년 시범 경기까지는 구단과 팬들도 나름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2002년에 남발했던 무리수의 후폭풍으로 개막 후 13경기 동안 1무 12패를 서막으로 충격적인 시즌이 시작된다. 이후 5월에는 꽤 선전하며 같이 최악의 초반 부진을 겪은 두산 베어스를 누르고 잠시 7위에 올랐으나, 최악의 6, 7월을 보내며 연패일로를 걷게 된다. 2002년부터 시작된 백인천의 온갖 무리수가 시너지 효과를 내기 시작하며 안 좋은 결과들을 쏟아내자, 백인천은 책임은 고사하고 아예 감독직 수행을 거의 포기하고 배째모드로 들어갔다. 2003 시즌이 되며 유니폼을 새롭게 바꾸는 등 다름 새롭게 준비를 하려 했으나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그렇게 롯데는 2003년에도 바닥을 기다 '''결국 8월 백인천을 해임한다.'''
대행으로 부임한 김용철이 그나마 팀을 어느 정도 수습하고 승률을 끌어올렸으나 이미 때는 늦어 39승 3무 91패, 승률 3할로 전년도에 이어서 압도적인 꼴찌를 차지했다. 게다가 '''두 시즌 합쳐서 190패'''라는 막장 기록까지는 아니어도 188패이기 때문에 거기서 거기고 무엇보다도 '''두 시즌 연속 90패'''를 기록했다는 점이 뼈아픈 기억이다. 그리고, 이 해 KIA전 '''1승 1무 17패'''[11] , 현대전 '''2승 17패''', 삼성전 4승 15패로 3팀한테 합쳐서 고작 7승이라는 충공깽의 상대전적을 기록하였다. '''한국 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3년 연속 꼴찌.''' 거기에다가 관중 수가 2년 연속으로 엄청난 삽을 푸다가 이승엽의 아시아 홈런 신기록 56호 홈런공을 잡겠다는 부산 야구 팬들의 일념(...)에 사직구장이 갑자기 만원 구장이 됐다가 성난 관중들로부터 오물 세례를 당하는 굴욕을 맛봐야 했다.[12]
5. 2004 ~ 2005년: 양상문의 부임과 짧은 부흥기
3년 연속으로 꼴찌를 한 후 2004년부터 양상문 체제로 들어서면서 롯데의 본격적인 리빌딩 행보가 시작된다. 이상목, 정수근을 FA 영입하며 전력 보강을 꾀했고 이대호, 박기혁, 김주찬 등을 중용하며 새로운 주축 전력들을 키워내려 애썼다. 그 결과 승률이 전년도에 비해 '''1할 넘게 올랐으나''' 그 전까지의 누적 데미지가 워낙 컸던 탓에 50승 11무 72패로 다시 한 번, 4년 연속으로 8위를 하게 되었다. '''현재까지 최초이자 유일한 기록이다.''' 그로 인해 '''꼴데'''라는 별명 확정. 8888의 임팩트 때문에, 2019년까지 15년동안 롯데는 꼴찌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꼴데 별명을 이어가게 된다. 안습. 그렇게 리빌딩 행보를 밟아나간 양상문호는 '''2005년''' 초 엄청난 돌풍을 일으키며 1위까지 했지만, 아니나 다를까 이후 팍 죽어버리며 한 달도 채 안 되는 기간만에 또 다시 나락으로 추락했다. 고군분투에도 불구하고 재활공장장 버프를 받은 한화에 밀려 '''5위'''라는 아쉬운 성적으로 시즌을 마감하게 된다.
6. 2006 ~ 2007년: 강병철 감독 시기
그리고 '''2006년'''이 되어 팬들은 2년만에 팀을 5위까지 끌어올린 양상문 감독이 계속 감독을 맡을 거라 생각했다. 투수 코치로서의 양상문은 크보 최악의 투수 코치로 욕 먹고 있지만 이 당시에는 만년 꼴찌 롯데를 단기간에 중위권으로 상승시키는 등 감독으로서의 평판은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13] 그러나 구단주가 갑작스레 발표한 롯데 투자 계획에 따라 새롭게 들어온 감독은 바로 '''강병철'''. 1984년 최동원, 1992년 염종석의 전성기와 그 후를 아는 팬들은 큰 우려와 혹시나 하는 작은 희망으로 그를 지켜봤지만 성적은 역시나 '''2년 연속 7위'''라는 기록과 함께 또 다시 시궁창으로 빠지게 되고, 대망의 '''8888577'''이 완성된다. 동시에 팬들이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없던 강병철 감독은 주구장창 까이며 잠시 야인으로 지내다 08년 히어로즈 2군 감독직에 오르게 된다.
이시기 강병철 감독에 대한 분노는 극에 달해있어서, 잠실 구장에서 플래카드가 걸리기도 했고 사직구장에서도 "편파적인 강감독의 선수기용 반대한다"라는 플랜카드를 걸기도 했다. 이 짤방만 봐도 이 시절 롯데 팬들의 설움이 어느 정도였는지 대충 짐작이 간다.
오죽하면 2006년 노무현 당시 대통령과 강병철이 부산상고(현 개성고) 동문이라는 점 때문에 어떤 초등학생이 강병철 감독 퇴진에 힘써달라는 글을 청와대 열린마당 게시판에 올리기도 했다. 기사.
2006년에는 호세, 이대호 말고는 그야말로 물빠따 타선이어서 그야말로 상대팀에게는 이대호만 거르면 별거 아니네라는 인식을 심어주기 충분했다. 특히 물빠따에 지대한 공을 세웠던 FA 영입타자 정수근이 엄청난 욕을 먹었다. 브라이언 마이로우가 시즌 초반에 많은 홈런을 치면서 비교적 선전했으나 마이로우가 약점을 드러내기 시작한 5월 이후부터는 성적이 곤두박질치자 롯데는 새로운 외국인 타자를 데려오는데...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투수진도 손민한 말고는 사실상 의미가 없는 수준이었고, 전에 FA로 영입한 이상목의 성적은 처참했다. 그나마 이대호가 잠재력을 폭발시켜 타격 트리플 크라운을 거뒀고, 롯데팬들은 김용희, 김용철, 김민호, 박정태, 마해영 이후 오랫동안 씨가 말랐던 롯데의 중심 타자가 전면에 등장한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리고 류현진을 거르고 뽑았던 나승현이 첫 시즌부터 16세이브를 기록하며 희망이 되었던 것 외에는 의미가 없었다.
2007 시즌에는 전 시즌에 22홈런으로 홈런 2위를 기록했던 펠릭스 호세와 재계약했고, 마무리로 카브레라를 데려왔는데, 호세가 확실하게 노쇠화되며 형편없는 성적을 내고 퇴출되었다. 초반에 이대호 등의 활약에 고무되어 4월 2~3위권을 유지하던 롯데는 5월부터 귀신같은 추락을 경험하면서 환장하는 성적을 기록했다. 그나마 꼴지를 깔아주고 있던 KIA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도. 그래서 시즌 중반 이후부터는 그 유명한 '''이대호와 여덟 난쟁이'''라는 드립이 성행했다. 이대호 말고는 홈런을 쳐줄 타자가 없었으니까. 다행히도 올스타전 이후에 성적을 끌어올렸던 정수근, 처음으로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하며 주전 포수의 입지를 완벽하게 다진 강민호, 그리고 새로운 롯데 내야수로 이원석, 정보명 정도가 성장 가능성을 보였다. 박현승도 생애 처음으로 3할 타율을 기록했다. 물론 엇박자가 심해 이들이 한꺼번에 잘한 경기는 많지 않았고 롯데는 그렇게 희망이 사라져가나 했다.
7. 2008 ~ 2010년: 제리 로이스터의 등장과 비밀번호 종료, 그리고 가을야구 3연속 진출 성공
2008년, 제리 로이스터 감독을 영입하여 시즌 최종순위 3위로 8년만에 가을야구 진출에 성공함으로써 '''비밀번호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 기간 동안의 성적을 간단히 보자면 포스트시즌에 진출하기 시작한 2008년에는 준플레이오프에서 삼성에게 3연패로 스윕당했고, 2009년에는 준플레이오프에서 1승 후 3연패로 역스윕당해 탈락했으며, 2010년 준 플레이오프에서도 두산에 2연승을 거뒀다가 '''리버스 스윕을 당하면서 2승 3패로 탈락하고 말았다.''' 이 때문에 8888577이 아니라 '''부산은행 8888577-03-1323[14] 예금주 : 로이스터'''라는 말이 나왔었다.
결국 로이스터 감독은 포스트시즌 성적의 책임을 지고 2010 시즌 후 경질되었으며, 다시 비밀번호 시대가 시작되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롯데 팬들 사이에서 만연했다.
한편 2010년 7월 장병수 당시 롯데 자이언츠 대표이사는 OSEN와의 인터뷰에서 '''"20년간 우승하지 못하면 프로 구단의 존재 이유가 없다"'''라는 발언을 했는데, 2012년에도 플레이오프에 탈락해 우승을 못 하면서 졸렬하다는 평가와 함께 롯데 해체 드립이 돌았다. 기사[15] . 이 이후에도 프로야구 신생구단 관련 발언과 갖가지 행보로 인해 프로야구 팬들에게 비판받았던 건 덤.
이후의 역사에 대해서는 롯데 자이언츠/역사 문서에서 다룬다.
8. 유사한 사례
'''가장 비슷한 예로 LG 트윈스의 2003년 이후 성적인 6668587667이 언급되기도 한다'''. 다행히 LG는 2013 시즌 급격한 성장세를 보이며 이전에 비해 크게 개선된 모습을 보였고, 4강을 나눠먹던 단골 팀들이 추락하여 사실상 재기불능의 상태였기에 2013년 9월 22일에 가을야구를 확정지었다.[16]
이 외에 이와 비슷한 비밀번호를 찍기 시작한 팀으로는 한화 이글스와 넥센 히어로즈가 있다. 이 중에서 한화의 경우 2008년부터 4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실패 및 2연속 최하위를 자랑했으며, 지나치게 약화된 선수층에도 불구하고 필요한 선수조차 잡지 않고(혹은 못하거나) 리빌딩만을 외치며 전력 증강에 실패하여 2010년 시즌까지만 해도 롯데나 LG를 뛰어넘는 비밀번호[17] 의 서막을 알리는 듯 싶었다. 여기에는 리빌딩에 대한 의지가 전무한 프론트의 투자 부족이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2011년 프런트가 물갈이 되고, 야왕 한대화 감독 또한 승부사의 포텐셜이 터지면서 약한 전력으로도 끈끈하고 포기하지 않는 팀 컬러를 보여주며 팬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게다가 '''카림 가르시아'''를 영입하는 등 타선도 더욱 강해졌다. 몇 년 더 봐야 알겠지만 롯데나 LG의 비밀번호를 뛰어넘기는 쉽지 않을 듯. 자세한 것은 한화 이글스 항목 참조. 어쨌든 2011 시즌을 6위[18] 로 마감함으로써 일단은 비밀번호가 5886이 되었다.
2011 시즌이 끝나고 한화는 더욱 희망적이었던 일이, 박찬호와 김태균이 복귀한 데다가 골든글러브 유격수도 갖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한대화의 삽질과 투타 양쪽에서 몇몇 선수가 말아먹는 분위기로 인해 이러한 트레이딩도 소용이 없어서 한화는 2012년 내내 꼴찌를 면치 못했으며, 결국 시즌 도중에 한대화 감독이 경질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2012년 시즌 후 김응용 감독이 부임하며 잠시나마 기대를 갖게 했지만 그것도 잠시, 류현진은 포스팅으로 해외 진출, 박찬호는 은퇴, 장성호는 트레이드로 나가면서[19] 2013 시즌을 앞두고 시름이 더욱 깊어지게 되었다. 결국 2013년 시즌도 꼴찌이자 한국 프로야구 최초의 9위 확정, 588689 항목이 만들어지게 되었고 2014년 시즌에도 8월에 잠깐 반짝하다가 9위, 5886899로 비밀번호가 연장되었다.
2011년에 한화 이글스가 이른바 '야왕 신드롬'으로 분위기가 좋았던데 비해, 빌리장석이 있는 넥센은 선수 팔아 연명하고 있었으니 많은 사람들이 무난하게 꿈도 희망도 없다고 믿었던 상황이었다. 넥센 히어로즈는 한화 이글스와 달리 경제적 여력 자체가 열악하여 선수층이 '''얇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팀의 재정 문제를 확실히 해결하고 타 구단에서 주축 선수를 대거 영입하기 전까지는 비밀번호 시대를 계속 이어갈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였다. 그나마 주축 선수 몇몇은 1군급이고 박찬호를 영입한 데다 김태균까지 돌아온 한화와 달리 넥센의 전력은 그 자체가 타팀의 2군에 준하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넥센은 새로 영입한 선수들의 포텐이 터지면서 2012년에 6위를 찍더니 2013년부터 2016년까지 4년 연속으로 가을야구에 진출하였다.
2013년 한화 이글스가 4월 14일 13연패를 기록하며 2003년 롯데가 세운 개막 12연패를 경신하게 되었다. 그나마 14연패는 당하지 않았다. 그리고 2017년까지도 가을야구 진출을 실패하며 5886899678로 이어가다가 2018년 포스트 시즌 진출 성공으로 이 비밀번호를 끊어내었다.
해외로 눈을 돌려보면 일본프로야구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가 난카이 호크스 시절에 '''20년 연속 B클래스'''(4~6위)를 기록했다. 미국에서는 오클랜드 어슬레틱스가 '''39년연속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 시카고 컵스가 '''38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의 기록을 가지고 있었는데...[20] 2016년에 우승했다.
9. 원인
백인천이 이 모든 결과를 초래한 것처럼 보이지만, 애초에 감독 혼자서 팀을 말아먹진 못한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치열했던 1999시즌 이후 연이어 터진 유망주 유출, 주축 선수 이탈, 구단의 소극적인 투자의 합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신인 선수들의 경우 부산 팜에는 백차승, 이승학, 송승준, 추신수라는 걸출한 신인들이 등장했지만, 이 선수들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로 떠나버리고 롯데는 손가락만 빨아야 했다.[21]
또한 선수협 파동이 터지며 롯데의 중심 선수였던 마해영이 괘씸죄로 삼성 라이온즈로 이적하며 타선의 무게가 상당히 가벼워졌다는 것도 한 몫 했는데, 당시 전성기였던 마해영이 떠나고 펠릭스 호세도 떠나버린 상황에서 중심타선으로 쓸 수 있는 선수가 전무했던 상황. 박정태와 김응국은 노쇠화로 중심 타선으로서의 활약을 해주지 못했다.
그나마 조경환이 2001 시즌에 마해영의 공백을 메우는가 싶었는데, 우산효과가 빠진 탓인지 2002년 크게 부진했고 당해 백골퍼가 자기 말을 안 듣는다고 조경환을 SK로 보내서 타선이 더 약화되었다. 다만 조경환은 트레이드 이후에도 2003년을 제외하면 그닥 활약하지 못했다.
거기에다 문동환 입단을 위해 계약/위약금을 포함해 현대 피닉스에 줘야 할 위약금 5억 원이 아까워서 팀의 테이블세터인 전준호를 넘기는 실책을 범했고, 그렇게 데려온 문동환은 1998, 1999시즌에는 에이스로 활약했지만 얼마 안 가 부상으로 내리막을 타기 시작했다.[22] 또한 부산고 에이스 출신의 염종석과 주형광이 부상 여파로 2000년~2001년 활약을 거의 하지 못하며 투수진에 큰 구멍이 생겨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 시기에 롯데는 좌완투수가 없어서, 가득염을 빼면 1군에서 뛴 좌완은 김영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전설의 2승 18패만 남기고 조용히 SK행. 그나마 있던 가득염도 불을 지르고 있었는데, 부상에서 복귀한 주형광이 합세하여 같이 불을 지르는 상황이 일어나고 만다. 한술 더 떠 롯데의 고질적인 마무리 부재로 선발투수감이었던 강상수마저 마무리로 구르다 퍼져버리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거기다 외부 선수 영입은 꿈도 꾸지 못했고, 성적에 대한 스트레스로 2001 시즌 막판 김명성 감독이 심장마비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 선수단 분위기가 뒤숭숭해지기에 이른다.
그런 와중에 김명성 감독의 뒤를 이은 감독이 바로 마왕 백인천으로, 불난 집에 기름을 끼얹어 버린 격이 되고 말았다. 2002~2003 시즌에는 아주 혹독한 대가를 치름에도 구단측에서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그 결과 처참한 관중 동원과 그룹 이미지 손상이라는 성적표를 안게 되자 이상목과 정수근을 둘이 합쳐 70억 원이라는 거액을 들여[23] 선수 보강을 했지만 선수 두 명 가지고 팀이 바뀔 리가 있나... 거기다 이상목은 그럭저럭 결과를 내 주긴 했지만 노쇠화가 급격히 오면서 몸값에 비해선 아쉬운 성적을 기록했고[24] 정수근은 이미 전성기의 기량을 회복하지 못한 지경에 이르렀기에[25] 팀 성적에도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이후 양상문과 강병철이 감독을 맡으면서 어린 선수들에게 경험치를 몰빵, 비록 성적은 밑바닥이었지만 선수들의 실력을 향상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고, 이후 제리 로이스터가 이 암흑기를 깨게 되었다.
10. 관련 어록
'''"롯데는 와 그리 못 이기는 겁니까?"'''
가수 올라이즈 밴드, 무릎팍도사의 양준혁 편(2007년 11월 21일 방송분)에서. 방송 당시 양준혁 본인이 "롯데 자이언츠가 잘해야 프로야구가 산다"라는 발언을 남겼다.
'''"예컨데 롯데야구단이 프로야구에서 우승한다고 해서 기분은 좋을지 몰라도 자기의 삶과는 별 관계가 없는 것 아닙니까."'''
1992년 한국시리즈 우승 이후 한겨레신문 대선 순회좌담회에서 문재인 변호사(현 대통령)의 발언.[26]
이 말은 지역보다는 자신이 속한 계층에 대한 정책과 공약을 보고 투표해야 한다는 뜻이었지만, 2017년 대선 때 발굴되어 롯데의 안습한 성적에 초탈해진 롯데팬들이 많이 써먹고 있다. 그런데 정작 발언 당사자는 부산 출신이고 롯데 팬이다(...)
11. 여담
- 디시인사이드 야구 갤러리에서 인터넷 방송을 할 때 가끔씩 이 번호로 비밀번호를 설정하는 듯. 근데 요새는 LG가 찍은 비밀번호에 좀 밀리는 감이 있다. 그래도 외우기 쉽고 짧아서 자주 쓰는 편.
- 롯데 자이언츠가 이 비밀번호를 찍은 타이밍도 영 좋지 않았다. 롯데가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한 7년, 특히 8위를 도맡았던 초기 4년의 경우는 세계적으로 초고속망 인터넷이 보급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어서 국내에서도 인터넷 문화가 막 활성화되고 있던 시기였다. 인터넷 문화는 기본적으로 익명성으로 인해 매사에 비판적인 "3류 감성"이 주류가 되기 쉬운 환경이고, 이런 게 세계적으로 막 자리를 잡기 시작한 타이밍에 최하위를 독점하면서 롯데 팬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되었다.
- 이 시기에 한화 이글스한테 유독 약했다. 항상 상위권만 있다가도 한화에게 덜미를 잡혔었던 시절이 이때였다. 한화의 5시멀티(...)라는 놀림을 당하기도 하고, 특히 2005년부터 2007년까지 롯데는 한화한테 철저하게 밟해서 이 시기 한화가 가을야구 즐기는 걸 구경만 해야 했다.[27] 이러다 보니 이때 통합야갤시절, 한화팬들이 "칰키워"라고 불릴 정도로 굉장히 강세였고 롯데 팬들만 보면 냄새 난다고 욕을 했었다.[28] 그래서 생겨난 게 바로 롯데 자이언츠 갤러리. 하지만 2009년 이후로는 한화의 암흑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반대로 롯데가 한화를 철저하게 밟았다.[29] ...였는데 롯데가 폭망하고 한화가 11년만에 선전하는 2018년에 다시 롯데가 밟히는 중이다.[30]
- 원조(?)인 051-888-8577도 있는데, 부산광역시의회 2층 방송실의 전화번호라고. 부산시의회 전화번호 안내.
- 2013년 이후 2차 비밀번호 시기에 롯데팬들의 열정이 식어가는 모습이 보였는데, 이는 윗동네의 4연패 광폭 행보와 옆동네의 선전도 영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자기는 일이 안 풀려서 서운해 죽겠는데 윗집에서는 사업이 초대박 치고 옆집에서는 잘 나가는 기업의 간부로 승진했다고 하면 어떤 기분이 들지...
- 롯데마트의 어느 알바 이야기도 화제가 되었다. "야구 우승 못하면 이거라도 1위 해야죠." # 그리고 막줄의 이마트 로고송은 2021년 SK 와이번스가 신세계그룹에 진짜로 팔리면서 이 에피소드는 다시 화제가 되었다(...).
- 스포츠동아 이재국 야구전문 기자에 따르면 관중석에서 자전거를 타도 될 정도로 관중들이 없었다고. 또한, 롯데 구단에서 팬서비스 차원으로 아이스크림 천 개 분량을 준비했으나 워낙 관중이 없어 남은 아이스크림을 기자들에게 나눠줬는데 두 개씩 집어가라고 했다는 웃픈 에피소드...
- 타 사이트에 정리된 롯데 암흑기의 추억. 작성하신 분이 롯빠인 것 같다.
- 장원준은 FA 때 롯데의 88억 제안을 거절하고 두산과 84억에 계약한 후 역대급 성적을 찍고 우승반지를 거머쥔다.
- 2019 시즌에 꼴찌인 10위를 기록하며 다시 한번 꼴데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이제 비밀번호에 알파벳(A)[33] 이 들어가게 되었다. 시즌 도중 감독과 단장이 동시에 사퇴하고 특히 감독의 경우 KBO 역사상 감독 부임 첫 해 사퇴라는 최초의 기록까지 달성하였다(...) 15년만의 꼴찌, 10개 구단 체제 최초 원년팀 10위, [34] 그리고 또 KBO 역사상 최초로 한 시즌 90패를 세번이나 기록한 최초의 팀이 되었다.[35] 여기에 그치지 않고 10개 구단 체재 이후 50승을 거두지 못한 첫번째 팀이라는 불명예까지 기록하였다. 결국 이 시즌의 여파로 인해 다음 시즌 감독은 외국인 감독으로 정했으며 그 후보군으로 제리 로이스터, 스캇 쿨바, 래리 서튼을 공개했다. 후보군 중 래리 서튼으로 결정됐지만 2군 감독으로 결정됐으며 1군은 또 국내 감독인 허문회로 가게 되었다.
12. 둘러보기
[1] [2] 공교롭게도 한국프로야구의 관중성적이 이시기 롯데의 성적과 거의 흡사했다. 2005년도의 5위했을때는 평균 10,357명으로 8888시절보다 확실히 좋았고 실제 총관중도 3,387,843명이었다. 2000년부터 2004년까지는 200만 관중이었다. 06때 평균 7000명대였다가 다시 07때 12000명대였다. 2007년은 총관중 400만대를 기록함으로서 한국프로야구의 중흥기가 다시 온것이다. 참고로 2004년의 롯데 관중은 평균 4,590명이다. 뭐 2004년은 사실 엘지를 제외하면 다들 성적이 폭망이긴 하다. 우승팀 현대의 평균관중이 1,955명이고 준우승팀 삼성이 2,923명이니...[3] 특히 KIA 처럼 상위권과 하위권을 왔다갔다하는 팀.[4] 2018년 10월 13일 NC 상대 10대 8로 KT가 이기면서 4년 연속 패배는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그 한화마저도 15시즌 김성근을 영입해서 혹사 논란, 후반기 DTD 등이 있었지만 어쨌든 최하위만은 면했다.[5] 사진에 없는 12번과 13번은 현재 사진을 찾을 순 없지만 남은 글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선동렬이 TV에 나오면...반사적으로 TV를 끈다.(은퇴한지가 언젠데...)','마찬가지로 삼성투수코치가 마운드에 올라오면 괜히 그 사람이 공을 던질 것 같다.'[6] SK는 1999시즌의 쌍방울 전력을 거의 그대로 가져온 거라 못할 수밖에 없었고, 한화는 투수진이 폭망해서 시즌 초부터 일찌감치 떨어져 나갔다.[7] 익히 알려진 대로 선수협 사태의 주동자로 찍혀 트레이드 됐다. 1988년 최동원과 김용철의 사례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8] 한편 '''한국시리즈 우승팀''' 두산은 732득점 733실점으로 득실차가 -1이었다.[9] 사실 이중 계약 파동으로 논란을 겪은 건 롯데만이 아니었다. 한화도 2002년 프란시스코 캄포스라는 투수 용병을 영입했으나 밀워키로 뒤통수 치고 가버렸다(...) 그리고 대체 선수가 바로 레닌 피코타이다.[10] 모든 구단 역사상 뒤에서 1등은 1982년 승률 0.188의 삼미 슈퍼스타즈, 2위는 주전을 모조리 팔아치웠던 1999년 승률 0.224의 쌍방울 레이더스.[11] 그 1승조차도 19차전, 즉 마지막 경기에서 겨우 거둔 1승이다.[12] 이승엽의 마지막 타석 때 김용철 감독대행은 1루를 채우기 위해 고의사구를 지시했고 이 장면을 본 관중들은 물병부터 잠자리채는 물론 쓰레기통까지 손에 집히는 물건은 그라운드로 냅다 던져버리며(...) 불만을 강하게 터뜨리게 된다. 결국 김용철 감독대행이 그라운드로 불려나와 마운드에서 마이크를 잡고 공개 사과를 하고서야 사태가 다소 진정됐다.[13] 2014년 양상문 감독이 승패마진 -16의 LG를 4강에 올려놓자, 8888577의 5가 양상문 업적이었다는 게 재발견되기도 했다.[14] 참고로 이 계좌번호 표기는 '''틀렸다.''' 실제 부산은행의 계좌번호 체계와는 좀 다른 게, 지방은행들은 대개 지점 번호가 계좌번호 앞에 붙는다. 롯데 스폰서 중 하나가 부산은행이라 이런 이야기가 나온 듯. 실제 체계를 따르려면 888-8577-0313-23이 되어야 한다.[15] 이 기사에 나온 이재곤, 김수완은 2018년 시점에서 죄다 망했다.[16] LG는 저런 성적으로도 관중동원하나는 정말 꾸준했고 프로야구 암흑기에도 평균 10000명 이상이 들어올정도로 충성심이 매우 강하다.[17] 하지만 쌍방울도 '''68788'''찍고 포스트시즌으로 갔다. 하지만 '''1999년'''의 포스가 워낙 강해서...[18] LG의 비밀번호 보고 갸우뚱한 사람이 있을 텐데, 4강 탈락팀의 경우 승률이 동률이면 그냥 '''공동순위 처리'''한다. 2011년 시즌 이전에는 1991년 LG와 쌍방울이 공동 6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다만, 신인 드래프트 등 순위 판가름이 필요한 경우에는 상호간의 전적 등을 참조하여 순위를 결정한다.[19] 막상 2013년에는 트레이드로 내보낸 장성호보다 트레이드로 데려온 송창현이 더 잘했다.[20] 다만 이 시절에는 리그 1위만 포스트시즌에 진출할 수 있었던 시절이라(NPB, MLB 모두 해당) 절반 안에만 들면 가을야구 티켓을 쥐어주는 KBO나 2000년대 중반 이후의 NPB하고 동급으로 봐서는 안 된다. '''사실 리그 1위만 포스트시즌 진출 가능이면 롯데는 이미 38년 연속 포스트 시즌 진출 실패로 컵스와 동률이다.''' 굳이 메이저리그하고 비교하자면 1932~1970년 오클랜드 어슬레틱스하고 1946~1983년 시카고 컵스보다 1916~1949년 필라델피아 필리스가 더 맞을 듯. 이쪽은 문자 그대로 8888577을 다섯 번 연속으로 찍었다고 봐도 무방하다.[21] 다만 부산고 출신들의 경우 롯데 OB이자 부산고 감독이었던 조성옥이 롯데 입단 대신 해외 진출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22] 이후 2006년 한화에 문동환이 있을 당시 선발투수로 7승 1패를 기록 중이었던 문동환과 당시 8승 23패를 기록한 롯데를 비교한 캡쳐가 짤방으로 돌기도 했다.[23] 다만 둘 다 옵션을 못 채워서 실제로는 60억도 안썼다는게 함정. 정수근이 6년 40.6억에 계약했지만 실제로는 옵션을 못 채운데다가 사고쳐서 출장이 줄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30억도 못 받았다고 한다.[24] 2006년의 12승을 빼면 10승을 올리지 못했고 부상과 부진으로 인해서 선발로테이션에서 종종 빠졌기에 출전경기수도 적었던 편.[25] 다만 정수근은 주루능력이 떨어지긴 했지만 타격지표는 오히려 상승했다. 하지만 술 먹고서 사고를 친데다가 강병철 감독과의 불화를 겪으면서 자연스래 출장경기가 줄고 성적도 하락세를 타게 된 것.[26] 그리고 당시 같이 나온 분은 훗날 부산광역시교육청의 교육감이 되어 롯데와 부산교육청 협력으로 사직구장에 자주 초대받게 된다.[27] 저 자료 화면은 한화 로고가 바뀐 직후이므로 2007 시즌이다. 저 화면에서 첫 3연패를 한 주말 3연전 중 일요일 경기에서는 잘 버티다가 홈런 한 방을 맞고 피스윕을 확정지었는데, 그 홈런을 친 선수가 훗날 롯데 감독이 되는 조원우다.[28] 당시 꼴빠들 사이에서 "갈매기들은 독수리로 위장하고(...) 한화 응원이나 하자"라는 자조적 개드립도 있었다. 그러나 롯데가 포스트시즌에 진출하고 그 희생양이 된 한화의 비밀번호가 시작되면서...[29] 특히 2013년은 롯데와 한화의 상대전적이 14:2였으며, 2015년이 돼서야 양 팀의 상대전적이 8:8 동률이었다. 2016년에도 동률이었고 2017년엔 롯데의 11승 5패.[30] 무려 11년만의 우세로, 한화의 10승 6패로 끝났다.[31] 이날은 2011학년도 수능 다음날이었다.[32] 쌍방울 레이더스-SK 와이번스 팬이다. 문서 참고.[33] 16진법으로 10을 의미[34] 이제까지 10위는 신생팀인 kt와 NC만이 기록한 순위이다.[35] 2002년(97패)과 2003년(91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