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한국시리즈
'''쳤습니다! 박정태 잡아서 베이스 태그! 경기 끝났습니다. 경기 끝났습니다. 그래서 92 한국시리즈는 롯데 자이언츠로 패권이 돌아갔습니다. 84년도부터 정말 절치부심, 정상등극을 노렸던 롯데 자이언츠가 8년만에 이룩하는, 그런 또다른 쾌거입니다.'''
MBC 임주완 캐스터의 우승콜
1. 개요
'''준플레이오프 ~ 한국시리즈 까지의 하이라이트'''
준플레이오프부터 한국시리즈까지의 보도와 중계 일부 모음
페넌트레이스 1위 빙그레 이글스와 3위 롯데 자이언츠가 맞붙었던 한국시리즈다. 1984년 이후 두 번째로 롯데 자이언츠가 우승한 한국시리즈다.[1] 이후 롯데는 우승 기록이 없어 현재까지도 '''응답하라 1992'''[2] 를 외치는 롯데팬들이 많다.
원년 OB우승 이후 삼성 라이온즈 및 빙그레 이글스에서는 번번이 한국시리즈에서 준우승만 기록한 김영덕 감독은 다승구원왕이란 역사에 다시 나오기 힘든 타이틀을 차지한 송진우 외 한용덕, 정민철, 이상군 등 쟁쟁한 투수진과 전성기 시절의 장종훈, 이정훈, 이강돈 등 다이너마이트 타선으로 막강한 전력을 구축하고 기다렸지만….
정규시즌 3위를 기록한 롯데는 삼성 라이온즈와 준플레이오프에서 승리하고, 선동열이 부상으로 빠진 해태 타이거즈와 5차전까지 가는 대접전 끝에 플레이오프마저 승리해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롯데 투수진은 윤학길-염종석-박동희의 트로이카가 투수진의 핵심이었고, 타선은 남두오성이라 불리는 박정태, 김민호, 전준호, 김응국, 이종운 등 상대적으로 장타보다는 머신건 타선에 가까웠다. 한번 분위기를 타면 아무도 막을 수 없는 팀 특성에 제대로 분위기를 타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3]
2. 엔트리
2.1. 빙그레 이글스
2.2. 롯데 자이언츠
3. 경기
3.1. 1차전
롯데는 해태 타이거즈와 플레이오프를 5차전까지 치르며 윤학길과 염종석이 모두 5차전에 투입되었고, 그런 상황에서 한국시리즈 1차전 선발 투수로 플레이오프 3차전을 시원하게 말아먹은 박동희가 선발 투수로 나서게 되었다. 1차전은 어쩔 수 없이 버리는 경기로 가져가겠다는 강병철 감독의 전략이었다.
한편 빙그레는 롯데와 해태가 플레이오프를 치루는 동안 서로 피터지게 싸우면서 총력전을 펼치는 것을 즐거운 마음으로 감상하고 있었는데, 해태가 아닌 롯데가 올라오길 내심 바라고 있었다. 해태가 그동안 번번히 우승을 가로막았기에 껄끄로웠기 때문. 뿐만아니라 롯데는 정규시즌 3위였고, 그해 빙그레는 정규시즌에서 롯데를 상대로 13승 5패라는 압도적인 전적을 기록했다. 특히 원투펀치인 송진우와 정민철 모두 롯데에 극강한 모습을 모이고 있었다. 실제로 롯데가 원투펀치를 모두 5차전에 투입하는 총력전 끝에 해태를 꺾고 한국시리즈로 올라오자 빙그레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빙글레의 선발 투수는 당연히 에이스 송진우. 송진우는 그 해 19승을 거두며 다승왕과 구원왕을 모두 석권하며 커리어 하이를 찍고 있었다. 1차전을 질 거라 생각한 빙그레의 팬은 아무도 없었다. 사실 롯데는 원투펀치를 모두 플레이오프 5차전에 투입했기 때문에 2차전 역시 4선발이 나올 것으로 예상되었고, 빙그레 팬들은 1차전은 물론이고 2차전까지 정민철을 내세워 여유롭게 이긴 후 3차전에서 롯데의 에이스 윤학길을 무너뜨릴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1회 초부터 2번 조성옥의 번트시도 때 '''주루방해'''판정을 받으며 흔들린 송진우는 폭투를 범하고 '자갈치' 김민호에게 2타점 적시타를 얻어맞으며 무너졌다.
롯데는 6회 이종운이 투런홈런을 뽑으며 승리에 쐐기를 박았고,[5] 선발 박동희는 8회까지 8안타에 '''폭투 3개'''를 범하며 4실점하는 등 영 불안한 투구를 보였지만, 위력적인 구위를 바탕으로 '''탈삼진 10개'''를 잡아내며 한국시리즈 첫 승을 올렸다.
3.2. 2차전
1차전 버리는 경기에서 승리한 강병철은 2차전에서 연습생(=신고선수) 출신인 윤형배를 내세우며 또다시 2차전을 버리는 경기로 가져간다.
빙그레 선발 정민철은 늘 그래듯이 안정적인 피칭을 보여주며 무실점 피칭을 이어갔다. 롯데 선발 윤형배 또한 1차전 승리 덕에 부담없이 던진 탓에, 1차전 선발 박동희같은 위력적인 구위는 아녀도 수비진의 분전에 힘입어 꾸역꾸역 무실점 피칭을 이어갔다.
두 투수 모두 양팀 선수들의 신들린 호수비에 힘입어 8회까지 서로 무실점을 이어가나 9회초 김영덕은 전날 선발이었던 송진우를 다시 마운드에 올리는 강수를 둔다. 하지만 송진우는 4연속 안타를 맞으며 자멸했고, 급히 구원등판한 한용덕도 2실점을 추가로 허용하며 롯데가 3:0으로 앞서나갔다.
9회말 이에 분노한 장종훈이 선두타자 안타를 치고 나가며 윤형배를 두들기는 듯 했으나... 윤학길이 등판해 비록 2실점[6] 하긴 했지만 불을 끄고 팀 승리를 지켜냈다. 어쨌든 적지에서 2연승이란 뜻밖의 수확을 거둔 롯데는 기분 좋게 홈 사직으로 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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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경기 직후 빙그레 응원 관중 500여 명은 대전구장의 창문과 정문의 유리창을 박살내고 빙그레 버스에 불을 지르진 않았지만 돌과 오물을 던졌다. 관중들은 "김영덕 물러가라"를 외치며 소란을 피우다 경찰과 몸싸움까지 벌였다. 홈인 대전구장에서 빙그레가 예상외로 무력하게 1, 2차전 스윕을 당해서 실망한 것도 있었지만, 2007년 한국시리즈 이전까지 초반 2연패 후 우승한 팀은 '''단 한 팀도''' 없어서 사실상 우승이 어려워졌기 때문이었다. 자세한 내용은이 기사를 볼 것.
한화팬들은 한화가 암흑기를 찍는 동안은 대전 '''보살팬'''이 됐지만 이땐 대구아재, 마산아재, 부산아재, 광주아재, 인천아재 못지 않은 '''대전아재'''로 유명했다.
3.3. 3차전
중계방송사는 MBC TV.
이제 드디어 에이스인 윤학길을 출격시키며 여유롭게 이기겠다 다짐했건만... 윤학길은 3회까지 3실점으로 흔들렸다. 그러나 김영덕이 '''또''' 송진우를 기용하면서 급기야 8회말 송진우가 역전을 허용(여기서 지면 송진우는 3연패), 스코어 4:3으로 3차전도 롯데가 이기는 듯 싶었다.[7]
그러나 9회초 빙그레의 마지막 공격에서 지화동이 동점 적시타를 때려내고 (이 사이에 김응국의 실책으로 지화동은 3루까지 진루) 2아웃 이후 임주택의 내야안타 때 홈을 밟아 빙그레가 역전했다.
9회말, 롯데는 1사 1, 2루란 마지막 기회를 잡았지만 고정식의 삼진과 김응국의 도루 실패로 송진우는 첫 승을 따내고 윤학길은 완투패를 기록했다. 빙그레는 1989년 한국시리즈 1차전 이후 한국시리즈 10연패에서 탈출했다.
한국시리즈 3차전의 시구는 부산 감천국민학교(현 감천초등학교) 6학년 야구선수가 했는데, 그는 20년 뒤에 롯데의 마무리투수가 된다.
3.4. 4차전
1992년의 괴물신인 염종석과 정민철이 나란히 맞붙었다. 2차전에서 17타자를 범타 처리하며 신들린 투구를 보여주었던 정민철은 이번에는 2회에 조기강판하고, 염종석도 6회 집중안타로 불안불안하게 가다가 결국 강판됐다. 염종석의 이날 부진은 어머니가 해주신 장어탕을 먹고 배탈이 나서 컨디션이 엉망인 탓이라 알려졌지만 실상은 팔꿈치 통증 때문이다.[9]
그리고 올라온 건 '''박동희'''. 박동희는 9회초에 양용모와 이강돈의 적시타[10] 로 2점을 허용했으나 마지막 타자 임주택을 유격수 땅볼로 처리하며 8회말 전준호와 조성옥의 연속 안타로 얻은 1점을 잘 지켜 세이브를 기록했다.
여담으로 시즌동안 거의 벤치멤버로만 있던 조성옥은 정규시즌의 한을 풀며 이날 '''5타수 5안타'''를 기록했다.
3.5. 5차전
선발투수는 각각 윤형배와 한용덕. 롯데는 1회와 3회에 각 2점씩 총 4점을 뽑아 앞서나가며 빙그레를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승부처라고 판단한 강병철 감독은 6차전까지 갈 경우 선발로 내정한 박동희를 4회에 조기등판시키는 모험수를 감행했다. 그리고 그 박동희가 9회까지 마운드를 지키며 1984년에 이어 8년만이자 통산 2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에 성공했다.
한편 이 경기는 SBS에서 처음으로 중계된 KBO 한국시리즈 경기다.[11]
이날 패배 이후 김영덕 감독은 라커룸에서 펑펑 울었다고 한다.
4. 평가
빙그레의 강점은 죽고, 약점은 극대화됐으며 롯데의 강점은 극대화되고 약점은 커버된 시리즈였다. 정규 시즌 맞대결은 13승 5패로 빙그레가 절대 우세였단 것이다. 몇 번의 한국시리즈 실패가 빙그레로선 새가슴으로 작용하고 만 셈이다.
4.1. 롯데 자이언츠
롯데는 해당 정규시즌 홈런 수 꼴찌였을 정도로 장타력이 부족했으나, 강력한 컨택과 주루 능력이 그대로 살아 있었다. 이는 앞서 말한 빙그레의 수비 불안과 겹쳐 위력이 배가 됐다. 어지간한 단타에도 득점권의 모든 주자가 득점에 성공했으니...
2승 1세이브를 기록한 롯데의 박동희가 한국시리즈 MVP에 선정됐지만, 당해 포스트 시즌 전체를 보면 염종석의 활약이 돋보였다. 그 결과 기자단 투표로 결정되는 그 해 투수 골든글러브는 염종석이 수상했다. 당시 2차스탯이라는 개념 자체도 없었던 시절이라 염종석의 수상은 당시로선 이변으로 여겨졌다.[12] 물론 당시 송진우의 다승왕은 김영덕 감독 특유의 밀어주기의 산물이라 여론이 좋지 않았던 덕을 본 것도 있었다.[13]
이 때문에 강병철 감독은 1984년엔 최동원, 1992년엔 염종석을 제물로 우승과 바꿨다는 점에서 우승했어도 탐탁지 않게 여기는 팬들이 많다. 그렇지만 이 우승이 롯데 역사에서 지금까지 마지막 우승인 데다 1984년 못지 않게 임팩트가 컸던 탓에[14] 이 시절을 그리워하는 팬들도 많다.
그런데 3년후 1995년 한국시리즈 다시 도전하려고 했으나 OB 베어스 한국시리즈가 우승하면서 롯데 자이언츠가 한국시리즈 준우승하고 말았다.
4.2. 빙그레 이글스
당시 최강의 전력을 자랑하며 페넌트레이스에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한 빙그레였고 우승을 달성한 절호의 기회를 맞이했었다. 그러나 막상 시리즈에 들어서니 시즌 내내 위엄을 보였던 다이너마이트 타선은 홈런 하나도 기록 못한 채 침묵하고, 에이스 송진우는 분전했으나 김영덕 감독의 무리한 기용이 겹쳐 부진했으며, 그 대신 팀의 유일한 약점이던 불안한 수비가 발목을 잡았다.[15]
결국 이때 우승을 하지 못한 후 이정훈, 장종훈, 이강돈, 강정길 등 주축 멤버들의 전성기도 끝남과 동시에 빙그레의 리즈 시절도 끝나고 말았다. 이듬해인 1993년에는 5위로 추락하고 한화그룹의 회장직 승계과정에서 팀명도 한화로 바뀐 뒤 빙그레 시절의 강력함은 모두 잃어버리고 리그 중위권 팀으로 전전했다. 이글스가 첫 우승을 달성한 건 1999년 한국시리즈. 공교롭게도 상대팀도 삼성을 힘겹게 꺾고 올라온 '''롯데'''였는데, 그들 상대로 승패 순서를 완벽하게 재현하면서[16] 되갚았다.
5. 여담
- 김영덕 감독과 롯데 자이언츠 그리고 강병철의 악연이 드러난 경기로, 삼성 라이온즈 감독이었던 1984년엔 져주기 신공으로 롯데를 택했다가 지고, 1992년에도 롯데에게 또 졌다. 특히나 두 번 다 김영덕 감독의 팀들이 롯데보다 전력이 좋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2번 다 패배했다.
사실 이 둘은 사이가 좋았다. 김인식, 이광환, 강병철, 김영덕은 한일은행 야구단의 선후배 사이로 끈끈한 사이였다.[17] 그러나 빙그레 이글스의 차기감독을 약속하고 강병철을 수석코치로 데려온 김영덕이 물러나지 않자 둘 사이에 금이 갔다.[18] 강병철이 롯데 감독으로 취임하면서 다시는 마주치지 않는 남남이 되어버렸고 강병철은 한국시리즈에서 2번이나 김영덕을 물먹이는 데 성공한다. 그 이후, 1993시즌이 끝나고 한화 이글스는 김영덕 감독이 물러난 감독 자리에 후임감독으로 강병철 감독을 영입하게 된다.
- 빙그레는 한국시리즈를 준비하는 동안 보너스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 1983년 MBC 청룡의 경우처럼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4번째 한국시리즈인 만큼 보너스는 한국시리즈 우승을 하고 줘도 늦지 않다는 구단과 페넌트레이스 우승 보너스는 줘야한다는 선수들 사이의 냉기류가 흐르며 분위기가 나빠졌다.
- 준플레이오프 통과팀 및 시즌 승률 3위 팀이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단 세 번의 시리즈 중 하나. 이후 두산 베어스가 2001년 한국시리즈, 2015년 한국시리즈에서 정규리그 1위 팀인 삼성을 상대로 업셋에 성공했다.
- 롯데는 준플레이오프를 투수 2명만 쓰고 끝낸 데 이어, 한국시리즈에서도 투수 4명만 쓰고 5경기를 했다.[19]
- 강병철 감독은 1992년 포스트시즌에서 KBO리그의 손꼽히는 명장들인 김성근, 김응용, 김영덕 세 감독을 도장 깨기로 연달아 이기며 두 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해태에 이어 두 번째로 2회 우승을 차지한 팀이 됐다.
- 롯데의 1984년과 1992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모두 경험한 사람으로서는 강병철 감독, 도위창 코치, 김용희 코치[20][21] , 그리고 박영태, 김민호, 조성옥 선수가 있다. 만약 엔트리에 들지 못한 사람도 포함한다면 한문연 선수도 있다.
- 이 한국시리즈 경험자 중에서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사람은 송진우, 김민재, 전준호다. 모두 2009년에 은퇴했다.[22]
- 롯데의 2번째 우승 이후 무려 28년 동안 PK권 연고 프로야구단의 KS 우승 기록이 없었다가, 2020년 한국시리즈에서 NC 다이노스가 우승하며 이 기록을 끊게 된다. 감독이 롯데 선수 출신인 것은 덤.[23]
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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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거기다 공교롭게도 양팀의 사령탑이 1984년 시리즈 때와 같은 감독들이었다 롯데는 강병철, 빙그레는 김영덕이다. 이쯤되면 악연도 이런 악연이 없다.[2] 원래 AGAIN 1992였지만 응답하라 시리즈가 엄청나게 떴기 때문.[3] 1984년 한국시리즈 때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다. 최동원이 하드캐리했던 1984년 때와 달리 염종석, 윤학길, 박동희의 제대로 된 3선발 체제가 구축되어 있었고 전준호, 이종운, 그리고 김응국의 3할대 타자들이 즐비했던 그야말로 제대로 된 팀이었다.[4] 참고로 도이 쇼스케 코치는 롯데의 1984년 한국시리즈 우승 때도 팀과 같이 했다.[5] 결정적으로 이 홈런으로 굳히기를 하지 않았다면 후반에 빙그레의 맹추격으로 보아 투수진이 얇았던 롯데는 고전했을 가능성이 크다.[6] 이때 해프닝이 있었는데, 1사 1, 3루에서 대타로 나와 중견수 키를 넘기는 적시타를 때린 진상봉은 '''1루까지 밖에 못갔다.''' 진상봉은 맞는 순간 홈런인줄 알고 환호를 했는데 결국 타구는 그라운드 안에 떨어진 것이다. 결국 빙그레는 더 이상 점수를 내지 못하고, 흥분한 대전 관중들은 빙그레의 버스와 구장 유리창에 돌을 던지며 분노했다. [7] 어찌보면 송진우는 불쌍하다고 할 수 있다. 송진우는 4⅓이닝 동안 3안타 1실점으로 1, 2차전 모두 나온 투수치고는 매우 호투했고, 7회와 8회에는 무사 1루에서 두번이나 롯데의 번트타구를 잡아 1루주자를 아웃시키는 호수비를 하기도 했다. 사실 8회의 역전 점수도 조양근의 중계플레이 미스만 아니었어도 이닝이 끝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1, 2차전에 합쳐서 4점이나 분식회계를 당하기까지 했다.[8] 중계방송 도중 KBS 뉴스 9로 인해 잠시 중단되었다가 8회말 김응국 타석부터 다시 이어서 중계.[9] 이 시즌 염종석은 고졸신인 첫해임에도 포스트시즌까지 포함해서 235이닝을 넘게 던지는 기록적인 혹사를 당했다.[10] 이때 좌익수였던 김응국이 펜스에 부딪히면서 김종헌으로 교체되기도 했다.[11] 포스트시즌까지 포함하면 이 해 플레이오프 5차전이 SBS의 첫 중계다. 당시엔 플레이오프 5차전이 잠실 경기였기에 가능했다. 이날 MBC는 경기 종료 후 뉴스데스크를 방송했고, SBS는 8시 50분쯤 SBS 8 뉴스로 넘긴 다음 9회 말에 현장을 다시 연결해 우승 장면을 중계했다. 한편 KBS 1TV도 메인 뉴스 도중 경기장 현장을 연결해 우승 장면을 라디오 중계와 함께 내보냈다.[12] 염종석 외에 후보로 거론된 송진우와 오봉옥은 현재는 보편화된 2차스탯을 적용할 경우 염종석에 한참 떨어지는 성적이다. (염종석 17승 9패 6세이브 204.2이닝 ERA 2.33 war 8.40, 송진우 19승 8패 17세이브 191.1이닝 ERA 3.25 war 5.19, 오봉옥 13승 0패 2세이브 126.2이닝 ERA 3.55 war 3.23) 염종석의 92년 WAR은 역대 신인투수 1위로 06 류현진 조차 능가한다. (염종석 8.40, 류현진 7.78)[13] 시즌 종반 염종석 17승 이강철 18승 송진우 18승인 상황에 염종석이 등판해 공동 다승왕이 가능한 상황에서 염종석은 포스트시즌을 위해 쉬었고, 이강철은 이미 마지막 등판을 마친 상황이었으며 송진우는 팀이 이기고 있는 상황에 잘 던지던 선발 한희민을 내리고 4회부터 등판해 19승을 채웠고 인터뷰에서도 밀어주기를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14] 1984년은 '''최동원'''이 혼자 미친 데다 유두열의 뜬금포에 힘입은 우승이라 친다면 1992년은 투타 전체가 미친 활약을 보였다. 특히 타자들의 활약은 더 말할 것도 없다.[15] 1992년 당시 빙그레는 정규시즌(126경기)에서 132개의 실책을 기록했다.[16] OOXOO, 이때도 홈 3차전에서 유일한 패배를 기록했고 '''잠실'''에서 승부가 결정났다.[17] 이중 김인식, 이광환은 김영덕과 아직도 친분이 있다고 한다.[18] 당시 빙그레는 감독파와 수석코치파가 나뉘어 있었을 정도.[19] 1차전 박동희-염종석, 2차전 윤형배-윤학길, 3차전 윤학길(완투), 4차전 염종석-박동희, 5차전 윤형배-박동희 이 순서대로.[20] 1984년은 선수로 1992년은 코치로 우승을 경험했다.[21] 1995년에 감독으로 한국시리즈에 올라왔지만 준우승을 하였다. 만약 우승을 했으면 한팀에서 선수, 코치 그리고 감독으로 모두 우승하는 진기록을 남겼을 것이다. 현재까지 KBO 리그 출신 감독 중에서 한 팀에서 선수부터 코치, 감독으로 뛰면서 우승을 차례대로 경험한 사람은 김태형 딱 1명이다. 다만 2001년 한국시리즈 당시는 전업 코치가 아니라 플레잉코치였다.[22] 김민재는 이해 플레이오프에서 대수비로 2경기 출장했고, 한국시리즈에 출전한적은 없다.[23] 반면 (같은 경상도 연고 팀이지만) TK 연고 팀은 그 사이 KS 7회 우승을 달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