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도

 

1. 교수
2. 군인
3. 작곡가, 교육자 및 번역가
3.1. 개요
3.2. 생애
3.2.1. 작품 활동
4. 독도 주민


1. 교수


김성도(교수) 문서로.

2. 군인


김성도(군인) 문서로.

3. 작곡가, 교육자 및 번역가


金聖道
1914년 5월 29일 ~ 1987년 6월 13일

3.1. 개요


유명한 동요 "어린 음악대"의 작곡자. 호는 어진길[1].

3.2. 생애


1914년 5월 29일 경상북도 경산군 와촌면 덕촌리에서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자 포목상을 경영하던# 김창현의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2] 하양보통학교, 계성학교,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했다.
1937년 연희전문학교 졸업 후 백낙준의 배려로 황해도 신천군 소재 경신학교와 함흥 영생중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했으며, 1940년대 들어서는 거의 절필하고 강소천·김영일 등과 교류하며 지냈다. 8.15 광복대구로 돌아와 신명여자고등학교계성고등학교, 계명기독대학, 대구대학 병설 여자사범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평생을 교탁에서 보냈다.

3.2.1. 작품 활동


계성학교 3학년 재학 중이던 1929년, 16세의 나이로 당시의 대표적인 소년잡지인 《소년》을 비롯해 아동잡지 《별나라》《새벗》《아이생활》 등에 동요를 발표하기 시작했고, 성인 월간종합지 《동광》의 문예작품 공모에 시가 3등으로 입선하기도 했다. 또 이때 '꼬꼬닭아 우지마라'는 노래가사를 써 같은 연희전문학교에 다니던 김성태에 의해 작곡돼 널리 불리고 있었다.
이에 힘입어 김성도는 본격적으로 동요 작사와 작곡에 나서게 되었고 20살이 되던 1933년에는 '강아지래요'가 입선해 본격적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초기에는 주로 동요창작에 힘썼으며, 연희전문학교 1학년 재학 중이던 1934년에 작사·작곡한 《어린 음악대》는 이후 초등학교 교과서에서도 실리게 되었다. 이밖에 《아기별》과 《호박꽃 초롱》, 《산골동네》( 등의 동요를 작곡하였다. 모교인 하양초등학교의 교가의 작사를 하기도 하였다.
1950년대 이후에는 동화 창작에 주력하여 《색동》(1965), 《복조리》(1968), 《꽃주머니 복주머니》(1972), 《꽃씨와 인형》(1974), 《피리와 달》(1982) 등의 동화집을 펴냈다. 또 어린이들이 읽을거리가 부족하던 시절에 《안데르센 전집》을 번역하여 '''국내에 처음으로 안데르센 동화'''를 소개하였으며, 《그림동화집》 등을 번역하였다.
이응창·김진태 등과 대구아동문학회를 창립하였으며, 한국현대아동문학가협회 회장, 한국문인협회와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의 경상북도 지부장을 지냈다. 1971년 소천아동문학상, 1975년 경북문화상, 1980년 대한민국아동문학상, 1984년 한국아동음악상을 받았다.
현재 그의 모교인 하양초등학교에는 그를 기리는 '어린 음악대' 노래비가 세워져 있는데, 오랜 세월을 거치며 적잖이 훼손된 상태다.

어린 음악대

작사/작곡 김성도

따따따 따따따 주먹 손으로

따따따 따따따 나팔 붑니다

우리들은 어린 음악대

동네 안에 제일 가지요

쿵작작 쿵작작 둥근 차돌로

쿵작작 쿵작작 북을 칩니다

구경꾼은 모여 드는데

어른들은 하나 없지요



4. 독도 주민


金成道
1939년 ~ 2018년
1939년 경상북도 울릉군의 3대째 어업에 종사하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1960년대 중반 최초의 독도 주민인 최종덕을 따라 독도 부근 해상에서 해녀들과 함께 해삼전복을 채취하는 작업을 했다. 그후 부인 김신열(金辛烈, 1940년생)과 함께 1991년 독도로 주소지를 옮겨 서도에 살았다. 1996년 태풍으로 집이 부서지는 바람에 독도를 떠나 한동안 울릉군에 거주하다가, 경상북도 측에서 어업인 숙소를 지으면서 2006년 2월 부로 다시 귀환하여 정착했으며#, 같은 해 4월 독도리 이장에 취임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독도에 독도경비대 (육상)경찰 15명을 배치한 명목상의 이유 중 하나가 이 부부를 지키기 위해서이다. 독도를 지키는 행동에 앞장섰고 2014년 포항시에 세금을 납부하기도 해 존경을 샀다. 2018년 10월 21일 지병인 간질환으로 서울 아산병원에서 타계하였다. 부인과의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다. 50여 년 동안 독도지킴이로서의 공적을 인정받아 시신은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현재는 김신열만이 법적 독도 주민으로 등록되어 있다. 둘째딸 김진희, 사위 김경철 등이 종종 독도를 찾아 문안하는데, 김신열이 고령이라 2020년 아예 독도로 전입신고를 시도했으나 "울릉군 독도 주민숙소 이용 관리계획"에 규정된 대상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반려되었다. 현재 이 문제로 소송이 진행 중인 듯.

[1] 이름인 성도(聖道)를 한글로 풀이한 것이다.[2] 1914년 5월 9일 경상북도 경산군 하양면 금락리에서 태어났다는 기록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