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 獨島 | Dok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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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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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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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 경상북도 울릉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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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역명'''
|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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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명주소'''
|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안용복길(서도), 독도이사부길(동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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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동경 131°52′ 북위 3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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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적'''
| '''총면적''' 187,554㎡
'''동도''' 73,297㎡ '''서도''' 88,740㎡ '''부속도서(바위, 암초)''' 25,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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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질학적 형성'''
| 신생대 신제3기 플라이오세 잔클레절[1] 약 500만 년 전(하부 현무암) - 250만 년 전(동도 조면암 관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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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쾨펜의 기후 구분'''
| 온난 습윤 기후(Cfa)[2] 먼바다에서는 서안 해양성 기후가 일부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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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평균 기온'''
| 약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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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평균 강수량'''
| 1,000mm-1,800mm 내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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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 약 40여 명[3] 최종덕 씨(1925~1987)가 1965년 3월부터 처음으로 거주한 이래 현재 김성도 부부 및 독도경비대원 35명, 등대 관리원 2명, 울릉군청 독도관리 사무소 직원 2명 등이 거주한다. (2017년 9월 기준) 2018년 10월 21일 김성도씨가 별세하면서 법적 주민으로는 김신열 씨가 유일하다.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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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할 경찰'''
| [image] 경상북도경찰청 독도경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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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토 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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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효 지배'''[4] 한국 정부는 독도가 실효 지배가 아니라 '원천적으로 고유 영토'이며, 일본 정부의 입장은 '한국의 불법 점거'이지만, 국제법에서는 한국에 의한 실효 지배 상태로 본다.
| [image]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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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유권 주장'''
| [image] 대한민국 [image] 일본 [image] 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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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역명'''
| [image]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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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 '''한국어'''
| '''영어'''
| '''한자'''
| '''일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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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 독도
| Dokdo
| 獨島
| 独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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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 다케시마[5] 과거 1890년대 후반에는 마쓰시마라고 불렸다.
| Takeshima
| 竹島
| 竹島[6] 죽도, 이른바 대나무 섬. 그러나 실제로는 독도에 대나무는 없다. 竹은 일본에서 등급이나 순서를 나타낼 때 쓰는 송죽매(松竹梅)에서 따온 것이다. 당연히 松島(울릉도를 가리킴)도 있는데 옛날에는 松島와 竹島가 의미하는 섬이 서로 반대였다. 자세한 것은 독도/역사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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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 리앙쿠르 암초[7] 프랑스의 포경선 리앙쿠르 호에서 따온 이름이다.
| Liancourt Rocks
| -[8]
| リアンクール岩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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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해에 있으며,
대한민국 '''최동단'''에 있는 섬. 대한민국 영토이며, 북한과 일본이 영토(영유권) 주장을 하고 있다.
독도/논란 문서 참고.
국제해양법상
암초(rocks)로 분류된다.
[9] 섬을 "사람이 살며 경제활동이 가능한 섬(island)"과 "그렇지 못한 암초(rocks)"로 구별하며, 독도가 국제법상 섬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까닭은 사람이 살고는 있으나, 독도 안에서 스스로 경제활동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섬 안에만 있는 자원으로 농사지으며 살 수 없다는 이야기. 섬의 정의에는 거주민뿐 아니라 스스로 경제활동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단서가 붙기 때문에 섬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2. 상세
[image]울릉도와
오키 섬 사이에 있으며, 울릉도에서 동남쪽으로 87.4km 떨어져 있고 일본의 오키섬과는 157km 떨어져 있다. 일본의 오키섬과 달리 독도는 날씨가 좋을 때에는 울릉도의 고지대에서 맨눈으로 볼 수 있다.
[10] 울릉도와 오키섬 기점으로 EEZ를 절반으로 분리 시 독도는 대한민국 단독의 EEZ 영역에 들어가게 된다. 한일어업협정 문단 참고.
독도에서 가장 가까운
한반도의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에서 216.8km이며, 일본 본토에서부터는 약 212km로, 가장 가까운 섬 기준으로는 한국(울릉도)에 가깝지만 각국 본토부터 비교한다면 일본에 가깝다. 하지만 일본은 본토 자체가 섬이기에 같은 선상에서 비교는 어렵다.
독도에서 외부와 연결되는 교통수단은 선박과 헬리콥터가 존재한다. 이 둘을 제외한 다른 교통수단을 운용하기엔 섬의 용적이 협소하기에 이들 둘밖에 운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외부로 연결되는 교통편도 사실상 울릉도뿐이다.
울릉군/교통#s-1.4.1을 참고하기 바란다.
독도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대한민국 실효통치 지역(남한)은
전라남도 신안군 가거도이다. 직선거리로 707km를 초과하며, 대한민국 실효통치 지역(남한)에서의 어느 두 지점 사이의 거리 보다도 제일 멀다.
마라도와 독도가 약 686km,
백령도와 독도가 약 647km,
마라도와
강원도 고성군 통일전망대가 약 637km이다. 헌법상 영토로 범위를 넓혀 본다면 극서점인
평안북도의
신도군 비단섬이 직선거리 725km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
[11] 한반도 최서단은 압록강 하구의 비단섬, 한반도 최동단은 함경북도 경흥군, 한반도 최북단은 함경북도 온성군, 한반도 최남단은 전라남도 해남군이다. 실효지배 영역만 따지자면 남한 최서단은 황해도 해상의 백령도, 남한 최북단은 강원도 고성군, 남한 최남단은 마라도이다.
서울특별시 광화문 기준으로는 약 435km 거리
[12] 가거도보다 약간 멀고, 양강도 혜산과 비슷한 거리에 있다.
에 있다.
독도는
화산 분화로 형성되었고 지질학적 높이가 2,000m에 이른다.
[13] 독도는 최종빙기때에도 육지와 연결되어 있지 않은 섬이였다.
수백만 년 전 신생대에 동해에서 분출한
화산이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풍화되어 화산의 모습이 거의 다 사라지고, 나머지 부분은 평균 수심이 깊은 동해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것. 점성이 크고 유동성이 작은 종상 화산체 이다. 마찬가지로 화산섬인
울릉도는 여전히 화산의 모습이 희미하게나마 있다.
[14] 여담으로, 바다에 잠긴 부분을 포함하는 지질학적 높이를 기준으로 하면 지구에서 가장 높은 산은 에베레스트가 아니라 마우나케아 산이다.
독도의 해저 지형 또한, 독도 일대에는
천연가스,
메탄 하이드레이트 등 자원이 풍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독도에는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식생들이 많이 산다. 무엇보다 본래
강치의 주 서식지였는데, 일제강점기 및 해방 이후 계속된 남획으로 인해 멸종되었다. 본디
일본에서 1905년 독도를 점거한 표면 상 연유가 강치 때문이다. 실제로
일본인들이 강치를 사냥하는 장면이 흑백 영상으로 남아 있다.
독도는 수산물과
조류는 풍부하지만 바위산이 뜬금없이 바다 한가운데 솟은 것이나 다름없어서 지형이 가파르고 평지가 별로 없다. 게다가 식수도 많지는 않다. 물골이 존재하기는 하나 물골의 물 만으론 충당하기에는 부족함이 존재한다. 독도의 면적이 좁지 않음에도 거주하는 사람이 적은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한자로는 홀로 독(獨)자를 쓴다. 그러나 독도의 한자 표기는 뜻과는 상관없이 한자의 소리를 빌려 쓴
음차로써, 본래의 뜻은 돌(石)의
서남 방언인 '독'이다. 즉 '돌로 된 섬' 이라는 뜻이다. 흑돌과 백돌로 하는 놀이인
바둑의 옛말도 '바독'인데 이를 볼 때 단순 방언이 아니라 '돌'의 고어형(古語形)일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
경상북도에 있는데 왜
전라도 사투리가 왜 붙었는가?'라는 점에 대해서는
울릉도와 독도를 지키기 위해 공도령(空島令)을 해제했을 때
전라도 사람들이 독도로 가서 독섬이라는 이름을 붙였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실제로 울릉도 개척 초창기에 전라도 출신들이 대다수였으며 흥양(
고흥),
여수,
낙안 출신들이 많았다.
독도는 동도(東島)와 서도(西島)라는 큰 두 섬과 크고 작은 89개 부속도서로 나뉜다. 실제로는 섬 하나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소리. 생각해 보자면 익히 알려진 노래
독도는 우리땅의 첫 소절인 '외로운 섬 하나'는 잘못된 셈이 되는 것이다. 물론 절해고도(絶海孤島)란 점에서 보자면 '외로운 섬'이라는 이름도 어울린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우산, 무릉의 두 섬은 (울진)현의 정동쪽 바다 가운데 있는데, 두 섬이 서로 멀지 아니하여, 날씨가 청명한 날에는 충분히 바라볼 수 있다.
于山、武陵二島在縣正東海中. <二島相去不遠, 風日淸明, 則可望見> 《세종실록지리지》
일본의 가와카미 겐조는 세종실록이 고려사를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울릉도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 우산도를 착오로 집어넣었다고 주장했으나 이 주석으로 논파 끝. 애초에 고려사와 세종실록은
김종서로 편찬 책임자부터가 동일인이다. 울릉도에 파견되어 주민의 쇄출을 집행한 김인우의 직함 또한 1차 쇄출(1416년)에서는 '무릉등처안무사'였다가, 3차 쇄출(1423년)에서는 '우산·무릉등처안무사'로 바뀐다. 따라서 당시 조선이 울릉도, 독도라는 두 섬을 따로 인식했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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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또 울릉도에서 독도를 보려면 130m 이상 위로 올라가야 하는데, 울릉도는 안개가 잦고 삼림에 덮여 있으므로 오르기 힘들었다고 주장하였다. 근데 울릉도 성인봉의 높이는 무려 984m고, 울릉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마을인 나리분지만 해도 250m에 달한다. 게다가 고려사엔 1157년에 이미 명주도감창 김유립이 울릉도 정상에서 사방을 답사한 보고가 기록되어 있다.
5월 병자일
○ 동해 가운데 있는 우릉도(羽陵島)는 옛날 주현이 설치되었던 곳으로 땅이 넓고 기름져 사람이 거주할 수 있다는 말을 왕이 듣자 명주도감창(溟州道監倉)·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 김유립(金柔立)을 파견해 살펴보게 했다.[15]
본래 울릉도는 이사부가 정복한 우산국에서 알 수 있듯 적지 않은 사람이 살고 있었지만, 11세기 초 여진족 해적의 침공을 받아 한반도로 대부분 이주하고 거의 빈 섬이 된 상태였다.
김유립이 돌아와서, 땅이 바위투성이라 백성들이 거주하기가 불가능하다고 보고하자 백성을 이주시킬 계획을 포기했다.王聞東海中, 有羽陵島, 地廣土肥, 舊有州縣, 可以居民, 遣溟州道監倉殿中內給事金柔立往視. 柔立回奏, “土多巖石, 民不可居.” 遂寢其議.
'''『고려사』 권18, 세가18 의종 11년(1157년)''' ##
본래 고구려의 우진야현(于珍也縣)【고울이군(古亐伊郡)이라고도 함】으로, 신라 경덕왕 때 지금 이름으로 고쳐 군(郡)으로 하였다. 고려에 들어서는 현(縣)으로 강등시키고 영(令)을 두었다.
울릉도(鬱陵島)가 있다.【현(縣)의 바로 동쪽 바다 한 가운데에 있다. 신라 때 우산국(于山國)이라고 불렀는데, 무릉(武陵), 혹은 우릉(羽陵)이라고도 하며 땅은 사방이 백리이다. 지증왕 11년(510)에 신라에 투항했다. 태조 13년(930)에 섬사람들이 백길토두(白吉土豆)를 보내 방물(方物: 특산물)을 바쳤다. 의종 11년(1157), 울릉의 땅이 넓고 토질이 비옥하여 과거에도 주·현이 있었고 백성이 거주할 만하다는 말을 왕이 듣고는 명주도감창(溟州道監倉) 김유립(金柔立)을 보내 살펴 보게 했는데 김유립이 돌아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섬 가운데 큰 산이 있으며, 산의 정상에서 동쪽으로 10,000여 보, 서쪽으로 13,000여 보, 남쪽으로 15,000여 보, 북쪽으로 8,000여 보 갈 수 있는 넓이입니다. 촌락의 터가 7곳이고, 석불(石佛), 철종(鐵鍾), 석탑(石塔)이 남아 있습니다. 시호(柴胡), 호본(蒿本), 석남초(石南草)가 많이 자라지만 바위가 많아 백성들이 살기는 불가능합니다.” 이에 따라 결국 논의는 흐지부지되었다. 일설에는 우산(于山)과 무릉(武陵)이 본래 두 개의 섬으로 서로 거리가 멀지 않아 기후가 청명하면 바라볼 수 있다고 한다.】
'''『고려사』 권58, 지제12, 지리(地理)3, 동계, 울진현''' ##
3.2. 은주시청합기
은주시청합기는 1667년 은주(隱州, 오키국) 지방 번사 사이토 호센이 남긴 책인데, 독도를 직접 기록한 일본 최초의 기록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은 한국 정부에게 보낸 외교 공문에 이 저서를 언급하며 '17세기부터 일본은 독도를 인식하고 있었다'는 자료로 사용하려 했으나 실제 내용을 살펴보면,
此二島無人之地
이 두 섬은 사람이 살지 않는 땅으로
見高麗 如雲州望隱州
(이 두 섬에서) 고려[16]
를 보는 것이 마치 운주(雲州)에서 은주(隱州)를 보는 것과 같으니
然則日本之乾地 以此州爲限矣
그렇다면 일본의 땅은 이 주(州, 앞 문단부터 언급된 은주)로 경계를 삼는다.[17] 풀어쓰면, 두 섬에는 사람이 살지 않고 이곳에서 고려를 보는 것이 운주에서 은기를 바라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일본의 서북 한계는 이 주로 한다.
참조
로 오히려 '17세기부터 일본은 독도를 조선령으로 인식하고 있었다'[18] 은주시청합기는 일본의 서북한계를 오키섬으로 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는 것을 증명하고 말았다. 현재 일본 외교부 독도 사이트에서 은주시청합기 내용을 찾아볼 수 없다.
3.3. 안용복 진술의 신빙성은?
안용복의 업적이 영유권 분쟁에 크게 불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여긴 일본 측은 다양한 방법으로 안용복의 진술과 행적을 부정해왔다.
1. 안용복은 범죄자이므로 그의 진술을 믿을 수 없다 論
안용복은 노비출신 어부로서 불법 도항과 관리 사칭의 죄로 사형을 언도받았으나, 울릉도 쟁계 이후 울릉도-독도의 영유권 확보에 공이 있음이 인정되어 유배형으로 감형되었다. 안용복을 범죄자로 취급한 바로 그 조선 정부에 의하여, 그의 진술은 신빙성 있음이 확인되었으므로, 안용복이 범죄자임을 탓하려면 '안용복은 범죄자이나, 진술은 믿을 수 있다'라고 생각해야 일관성 있는 논리이다.
2. 안용복은 막부의 서계를 받은 바 없다 論
안용복이 에도 막부로부터 받았다가 대마도주에게 빼앗긴 '울릉도-독도는 조선령'이라는 서계는 안용복이 꾸며낸 이야기라는 주장이다. 유감스럽게도 안용복이 서계를 받았다는 이 주장은 어린이용 위인전 정도나 제외하고 한국 측 연구자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사실 조선정부도 믿지 않았다.
안용복을 심문한 유일집(兪集一)은
"근년 동래에 봉사(奉使)했을 때 안용복을 추문(推問)했더니, 그가 말하기를, “호키주에서 준 은화(銀貨)와 문서를 쓰시마 사람이 겁탈했다.” 했는데, 이번 그가 호키주에 정문(呈文)한 데에는, “쓰시마 사람이 2천 금(金)으로 나를 속(贖)바치고 본국(本國)에 내보낸다는 거짓말을 하고 그 은은 본국에서 받겠다고 했다.”고 했으니, 전후에 한 말이 매우 어그러집니다. 또 쓰시마는 본디 속은(贖銀)을 와서 거둔 일이 없고, 임술 약조(壬戌約條)도 비밀에 관계되는데, 안용복이 어떻게 들을 수 있었겠습니까? 또 왜인은 모두 죽도(竹島)가 호키주의 식읍(食邑)이라 하므로, 안용복이 한 번 말했다 해서 조선 땅이라 쾌히 말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안용복의 정문 가운데는 울릉도는 본국 땅이라고 여러 번 말했으나, 왜인이 문답한 문서와 안용복을 내보낸다는 문서에는 일체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사정들은 매우 의심스러우니, 다시 핵사(覈査)해 실정을 알아 낸 뒤에 죄를 논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3. 안용복은 독도에서 일본 어부들과 마주친 적 없다 論
안용복의 1696년 왜인을 만났다는 숙종실록의 기록에 대해 일본 학자들은 안용복의 신빙성 없는 일방적 주장이라며 부정하였으나 1월 28일에 이미 막부가 도해금지령을 내렸으므로, 그해 5월에 안용복 일행이 독도에서 일본 어부들을 만났다는 진술은 허위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실제 어업 중이던 일본의 두 가문에게 도해금지명령이 전달된 것은 그해 8월 1일의 일이라는 것을 나이토 세이츄 교수가 발견한 당시 돗토리번 공식일지인 히카에쵸(控帳)에 기록됨으로써 안용복의 진술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런데, 2005년 겐로쿠 각서에는 자산도=송도가 기록되어 있으면서도 안용복이 송도에 오게 된 이유를 '영주에게 소송하기 위해서'라고만 쓰여있지, 왜인이 또 울릉도에 어업을 하고 있는 걸 보았다는 내용이 없다는 것을 근거로 이케우치 사토시를 비롯한 일본 학자 및 일부 한국 독도연구가들도 안용복의 진술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19] 안용복이 실제로 일본 어부를 만났다는 주장을 회의적으로 보는 일본 측 근거는 오오야, 무라카미 가문도 그전 울릉도 쟁계로 조업이 막혀 손해만 보다, 출어를 위한 자금도 구하지 못해 출어할 상황도 아닌 데다, 일본 어부를 정말 만났다면 그런 중요한 내용이 왜 겐로쿠 각서에는 쓰여지지 않았느냐가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2차 도일 당시 일본 측은 '죽도일건(울릉도쟁계)는 끝났는데 왜 또 왔냐?'라는 어이없는 반응이었고, 이런 뜬금없는 도일에 명분을 가지려면 당연히 '여전히 남의 땅에 왜인들이 조업하고 있다'라고 해야 하는데, 도일의 이유가 대마번에게 당한 냉대를 호소, 소송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다만, 재일 독도연구가 박병섭 선생은 안용복이 1695년에 만난 것을 1696년에 만난 것이라고 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일본측 기록에 따르면 1695년 또 일본이 울릉도에 고기를 잡으러 오는데 이미 울릉도에 조선인들이 철포와 칼로 무장하고(!) 그들이 오기를 벼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는 수 없이 그해 울릉도 조업을 포기하고 돌아가야 했는데, 그 무장 조선인들이 안용복 일행이 아닐까라는 것이다. 실제로 울릉도 쟁계는 이미 안용복의 1차 도일(실제로는 일본에 납치)로 조선 영토임이 일본의 인정으로 끝났는데, 새삼스레 왜 또 안용복이 2차 도일을 감행했느냐의 이유가 조금 부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일본 학자들은 단순히 안용복이 1차 도일 때 일본에게 받은 냉대에 대해 칭얼대기 위함이라고 폄하하고 있다.) 어차피 울릉도는 공도정책으로 조선인들도 도항할 수 없으므로 안용복은 또 울릉도에 불법 조업을 하긴 했으나 1차 도일 때 당한 괴로운 기억과 울분으로 1695년 때는 자기들도 만일을 위해 무장하고 있던 판에 또 일본 어민들이 오자 참다못해 1차도일 때의 냉대에 대한 항의도 겸해서 철저한 준비(관직 사칭, 지도 준비, 소장 작성 등. 실제로 안용복의 독도(자산도)에 대한 지식은 2차 도일 때 훨씬 더 정교하게 된다.) 끝에 1년 후 2차 도일을 감행한 것이라는 가정이다. 다만 2차 도일 자체도 사형선고를 받을 정도로 중죄인데 1차 도일 때 사면 받고도 얼마 안 돼 또 울릉도로 갔다고 진술해 봤자 자신에게만 더 불리해지므로 1696년이라고 진술한 게 아니냐는 것이다.(어차피 2차 도일의 명분을 위해서는 울릉도에 또 갔다는 것을 시인 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는 가정일 뿐이며, 1695년의 조선인들이 누구인지는 알 길이 없다.
이는 여전히 한, 일 간 논쟁 중이다.
다만 안용복이 "일본의 '마쓰시마'가 곧 자산도로 조선의 영토이다!"라고 주장한 것은 실제 1696년 안용복이 울릉도에 가서 일본인을 만났냐와는 것과 별개로 숙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엄연한 사실이고, 이것이 특히 중요한 이유는 '자산도'를 일본인이 말하는 '송도'라고 명확히 기록했는 데다, 일본 문서(겐로쿠 각서)에서도 확인되었으므로 전근대 영유권 주장에서 한국 측이 한 발 앞서나가게 되었다.
겐로쿠9병자년 조선주착안 일권지각서에서 울릉도와 독도에 관한 언급이 있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江原道(カンヲンダウ) 此道ノ中ニ竹嶋松嶋有之.
* 강원도 안에 '다케시마'와 '마쓰시마'가 있다
安龍福申候ハ竹嶋ヲ竹ノ嶋と申朝鮮國江原道東萊府ノ内ニ鬱陵嶋と申島御座候是ヲ竹ノ嶋と申由申候則八道ノ圖ニ記之所持候
* 안용복이 말하길, '다케시마'를 다케노시마라고도 한다. 조선국 강원도 동래부 안에 울릉도라고 하는 섬이 있으며, 이를 다케노시마라고 하는 까닭에라고 말해, 팔도지도에 기록해 이를 소지하고 있다.
松嶋ハ右同道之內子山と申嶋御座候是ヲ松嶋と申由是も八道之圖ニ記申候 참조
- '마쓰시마'는 상기한 도(道) 중에 자산이라고 하는 섬이며, 이를 '마쓰시마'라고 하는 까닭에 이도 팔도지도에 기록했다고 말했다.
3.4. 옛 지도의 독도
'''중종 때 편찬된 신동국여지승람의 팔도총도'''[20] 현존하는 인쇄본 단독 지도 중에 독도(우산도)가 그려진 최초 지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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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제작된 여러 고지도에 나오는 우산도가 현 독도를 지칭하는 것인지에 대해 논쟁이 있다. 이는 위성, 사진 기술, 근대적 측량 기술이 부족하고, 현대인과 인식체계도 사뭇 달랐던 시대에 제작된 고지도를 현대인의 눈높이에 맞추어 읽으려들기 때문에 발생하는 논란이다. 예를 들어 1530년에 제작된 「팔도총도」의 우산도는 울릉도의 서쪽에 그려졌기 때문에 독도가 아니라거나, 1711년 박석창이 보고한 「울릉도도형」 울릉도 바로 옆에 그려진 '소위 우산도(所謂 于山島)'는 해장죽전(海長竹田)이 있다고 기재되어 있으므로 죽서도라는 식의 도맷금 평가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은 한국이 보유한 수많은 독도 관련 사료를 트집잡아 무용한 것인양 만들려는 일본 측의 전략적 폄하에 기인한 면이 크다.
그러나 실제로 고지도의 해독은 매우 고차원적인 일로 「울릉도도형」 '소위 우산도'의 경우 죽서도보다 남쪽인 저전동(현 저동) 저동항보다 더 남쪽에 그려져 있고, 1937년 그보다도 더 남쪽인 도동에서 발견된 수토관 박석창의 묘방(정동쪽) 각석입표를 고려하면, '소위 우산도'는 현 울릉도 동남쪽의 독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참조참조>
우산,무릉의 두 섬은 (울진)현의 정동쪽 바다 가운데 있는데, 두 섬이 서로 멀지 않아 날씨가 청명한 날에는 바라볼 수 있다. (于山武陵
[21] 무릉(무릉도/武陵(道))는 울릉도의 별칭이다.
二島 在縣正東海中 二島相去不遠 風日淸明 則可望見) 《세종실록지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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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의 정확성은 현대적 수준측량에서 성인봉의 약 600m 지점부터 육안으로 독도를 식별 가능하다는 연구결과에서 드러나며, 이는 전통적으로 조선의 지리학자 및 관리들이 독도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팔도총도」의 경우에도 지도를 실제 제작한 이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울진 정동쪽 바다에 우산-무릉 이라는 두 개의 섬이 있다'는 세종실록지리지 등의 문헌-문자 정보만을 가지고 지도를 제작해야 하기 때문에 어느 섬이 더 육지에 가까이 있는지 알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두 섬의 위치를 해당 기록 순서인 우산, 무릉 순으로 동쪽 바다에 나란히 임의로 배치시키는 것은 가장 자연스러운 선택으로 이해될 수 있다. 실제로 15세기 「팔도총도」 이후, 자료의 축적에 따라 18세기 작성된 정상기의 「
동국지도」는 무릉은 왼쪽, 우산은 오른쪽으로 이동하게 되는 현상을 관찰할 수 있다.
실제 고지도는 이러한 미비함과 난해함 때문에 국제법정에서도 판결에 직접 인용되는 경우가 지극히 제한적이다. 고지도를 직접 인용하여 판결을 내리는 경우는 그 고지도가 해당 분쟁에 직접 활용되는 경우
[22] 예를 들어 안용복이 항의를 위해 일본에 가져간 조선팔도지도, 1962년 국제사법재판소의 프레비 히어 사원 판결에서 언급된 지도 등
등에 한한다. 또한 자국의 영토에서 누락시킨 지도의 증명력보다 타국의 영토로 표시한 지도의 증명력을 더 높이 평가
[23] '페드라 브랑카 사건(2008)'판결과 독도 영유권
하는 경향이 있으며, 개인 혹은 민간의 지도보다 정부 공인-공식 지도의 영향력을 더 높게 평가한다. 이러한 조건에 가장 잘 부합하는 고지도는 예는
태정관지령문에 첨부되었던
기죽도약도이다.
일본은 독도의 영토편입을 시도했다는
시마네현 고시 제40호 문서가 1945년 화재로 인해 소실되었다며 원본 문서의 존재를 입증하지 못하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문서는 시마네현청에서 지방 촌 사무소로 배부된 사본 중 남아 있는 것을 수거한 것으로 알려졌다.
[24] "'독도 편입' 시마네현 고시 제정은 거짓말"
이에 대해 사본에 시마네현 지사의 날인이 없고, 내부용도로 사용되는 '회람' 도장이 찍혀있는 등의 근거로 애초에 고시문은 완료되지 못한 것이라는 추정과 고시(널리 알림)을 의도적으로 회피하려 했다의견이 있다.
1837년 2월에 에도 바쿠후의 명령으로 다카다번이 니가타현 지역 해안가에 세운 도해금지령 팻말에 있는 '오른쪽 섬(右島)'이 울릉도-독도 중 어느 섬을 지칭한 것인지 논쟁이 있다. 팻말의 내용을 요약해 보면 '이번에 하치에몬이 '다케시마'(竹島)에 도해한 사건을 검토한 결과, 오른쪽의 섬(右島)은 겐로쿠 시대부터 도해정지를 명령한 곳이므로 항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이 오른쪽 섬(右島)을 '죽도(당시 울릉도)', 독도 중 어느 쪽으로 해석할 것인지 엇갈리는 것이다.
'오른쪽 섬(右島)'이 울릉도를 칭한다고 주장하는 측에서는 팻말의 왼쪽으로 문장을 연결하는 구조상 최초 등장한 '죽도(竹島)'에 대한 지칭대명사로 '오른쪽 섬(右島)'이 반복하여 등장하고 있음으로, 이는 '오른쪽에 지칭 한 섬', 즉 죽도=울릉도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입장이다. 반면 독도를 지칭한다고 주장하는 측에서는 '向後 右島之儀も 同様相心得 渡海致間敷候(향후 오른쪽 섬도 같음을 명심해 도해하지 않도록)'의 문장을 근거로 여기에서 지칭된 오른쪽 섬은 'も(~도)'가 붙어있고, 바로 앞 문장에 울릉도가 도해금지 된 이력을 말하고 있음으로 '울릉도의 오른쪽 섬', 즉 독도라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입장이다.
이 팻말은 2010년에 한국인 사업가가 구입하여 한국으로 가져왔다.
참조18~19세기는 조선(대한 제국)이 한창 자리를 잡아가던 시기라 문서 면에서 여러 가지 논쟁점이 생긴다.
- 대한지지
최남선의 대한지지는 독도와 울릉도의 경도를 잘못 표기하여 영유권 주장의 근거로 쓰이기도 한다 그러나 대한 지지에는 "이 책은 일본인이 저술한 한국 지리관계 도서를 주로 하고 동국여지승람을 참고하여 역술하였다.” 고 되어 있다. 그리고 현채는 '대한지지'의 후기에 "시간적 여유가 없어 일본의 지리서를 번역했다."며 일본의 문서를 가져왔다고 했다.
- 대한신지지
"대한신지지"에는 울릉도만 있고, 독도가 없고, 위치편에 '조선의 동쪽의 경계는 두만강이며, 그것은 130도 58분이다' 라고 기술되어 있으므로 당시 독도는 조선령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장지연은 분명히 "于山島는 其東南에 在하니라(우산도는 울릉도의 동남쪽에 있다)"고 서술하였고, 대한신지지"는 일본의 한국신지리(韓國新地理,1905)를 참조한 것이다.
- 대한제국 칙령 제41호(1900년) 1900년 대한제국 칙령 41호, 독도 영유권 국제적 재선언
5. 관광
1982년 천연기념물 제336호(명칭: 독도천연보호구역)로 지정, 문화재보호법 제33조에 근거하여 공개를 제한해 왔으나 제한지역(동도,서도) 중 동도에 한해서 일반인의 출입이 가능하도록 공개제한을 해제(2005.3.24 정부방침 변경)함으로써 입도허가제(승인)를 신고제로 전환하였다.
일반 관람객의 경우와 특수목적입도 두가지로 나뉜다. 전자의 경우 입도범위가 동도 선착장으로 한정되는 관람이며, 후자의 경우는 입도에 해당한다.
- 일반 관람객: 2009년 6월부로 1일 관람객 수 제한이 해제되어 1회 470명 한정으로 관람이 가능하다.여객선을 예매하면 여객선사에서 울릉군에 승객 명단[25]
승선권의 절취 후 회수되는 부분에 성명과 주민번호, 연락처를 기재하며, 이를 토대로 명단을 작성한다.
을 제출하여 일괄적으로 신고를 한다. 이후 울릉군에서 선사에 신고필증을 교부하면 절차가 마무리되며, 독도 도착 후 기상여건에 따라[26] 독도의 기상여건이 좋은 날이 별로 많지 않아 접안을 할 수 있는 날이 1년에 불과 50~60여일 정도라고 한다. 오죽하면 '3대가 덕을 쌓아야 갈 수있다'나 '하늘이 허락해야 갈 수 있다'라는 말이 나오겠는가.
접안여부가 결정되면 탑승한 여객선을 이용하여 입도 후 2~30여 분간 동도 선착장에 한하여 관람이 가능하다. 이후 선장이 기적을 울리면 타고 온 배에 다시 승선하여 울릉도로 돌아오는 방식.[27] 기상상태가 영 좋지 못한 경우 독도를 한바퀴 선회한 후 울릉도로 돌아온다. 하지만 삼봉호의 경우 접안여부에 관계없이 선회관람을 한다.
- 특수목적입도: 행사개최, 행정·학술상 목적, 경찰업무, 언론취재, 시설물 유지보수 등의 사유로 숙박 및 체류할 경우 입도를 허가한다. 이 경우 독도입도신청서 1부, 독도입도신청자명단 1부(단체에 한함), 독도 입도 목적, 내용, 장비 등을 명시한 구체적 계획서 1부(행사 시 행사계획서 1부)를 입도 희망일 7일 전까지 울릉군에 제출하면 울릉군에서 문화재청 등 관계부처와 협력하여 승인여부를 결정한 뒤 통보해준다. 울릉군 독도천연보구역 관리조례에 의거 반드시 입도 희망일 7일 전에 신청해야 하니 유의할 것. 이 방법으로 독도에 입도할 때, 여객선을 이용할 경우 승선권을 2장 구매해야 한다. 무슨 소리냐 하면, 독도에서 울릉도로 나가는 승객이 당연히 있을 리가 없기 때문에 특수목적입도를 하는 승객을 수송할 경우 왕복운항 중 한번[28]
입도시 독도→울릉구간, 울릉도 귀도시 울릉→독도구간
은 빈 배로 운항해야 하기 때문에 입도 후 울릉도로 나오는 배편의 승선권을 구매하지 않을 경우 선사로써는 손실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물론 승객의 입장에서도 울릉도로 나오는 선박의 좌석이 매진되었을 경우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타지도 않는데 왜 돈을 내야 하는지 억울하겠지만 남들과는 다른 경험을 하는데 그 정도는 감수하자.
울릉도에서 독도까지 여객선이 운항한다. 날씨가 좋으면 30분 정도 입도할 수 있다. 하지만 선착장 근처로 활동이 제한되며, 계단을 통해 위쪽으로 올라가는 것은 울릉군청을 통해 사전 허가를 받아야 가능하다. 계단으로 가는 길은 독도 경비대원이 지키고 있다.
독도 내에서는 도보로만 이동이 가능하다.[29] 물론 동-서도 간 이동시에는 선박을 이용한다.
동, 서도 모두 도보로 이동할 수 있는 길이 나 있으며, 이 길은 최고 40cm 높이의 계단이 있을 정도로 매우 험하고 가파르다. 사람은 탑승할 수 없지만 정상 부근의 독도경비대 막사와 선착장 사이에 화물을 운송할 경우 케이블카를 이용하기도 한다. [30] 이 여행기의 13번째 사진이 바로 그 케이블카의 모습이다. 참고로 16번째 사진에 나온 콘크리트 구조물이 과거 사용되던 하부역(?)인데 파도로 유실된 후 현재 위치에서 운행한다.
독도행 교통수단은 민간인의 경우 여객선이 사실상 유일하다.
천연기념물 보호구역으로 상륙 후에는 흡연 및 취식 등 쓰레기를 만드는 일체의 행위가 불가능하다.
의외의 사실이지만 돌출 행동만 하지 않으면 일본인의 독도 관광은 무난하게 가능한 편이다. 다만 입도하는 일본인의 정보를 확인하고 있으며 문제가 되는 일본인(우익인사) 같은 경우 입도가 불허 되는 경우가 있다. 연간 100여 명 정도의 일본인이 방문한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독도입도 종합안내 페이지를 참고바람.[31] 참고로 이 페이지의 내용을 100% 신뢰하지는 말자. 독도행 여객선 중 일부는 사동, 저동에서 출항함에도 전 여객선이 도동에서 출항하는 것으로 쓰여있고 2013년 개정된 독도천연보호구역 관리조례 또한 옛 내용으로 올라와 있는 등 관리가 잘 되지 않고 있다. 기사 게다가 IE 이외의 브라우저에서는 잘 작동하지도 않는다.
독도에서는 휴대전화 통신이 내륙보다도 오히려 잘 된다. 대한민국 전체에서 가장 통화품질이 좋은 곳이라고 봐도 된다. 상주인원 수 자체가 적은데다, 통신 3사 모두 대한민국 어디서든 통화품질이 좋다는 마케팅 목적으로 기지국을 오히려 촘촘하게 마련했기 때문이다. LTE 출시 당시, 서울에서도 못 쓰는 LTE를 독도에서부터 먼저 시험한다고 해서 논란이 되기도 했을 정도. # 실제로 독도 상륙 시 관광객들은 가족과 영상통화를 하는 경우가 많다.
6. 대중매체에서
대한민국, 일본 모두 어느 매체에 등장하든 대부분 혐한/혐일적 내용과 국뽕으로 점찰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한민국이나 일본이나 보통 이런 민감한 주제를 이용해 1차원적인 애국 마케팅으로 소비자들 한번 뽑아보겠다고 나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 그렇기에 상당수가 망작이다.
- 영화 2012에서 동해상에서 항해 중인 여객선이 쓰나미에 휩쓸리는데, 삭제된 장면에서 보면 독도 위에 걸려서 승객들이 생존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때 마찰을 우려하여 그냥 '암초'라고 나온다.
- 김경진의 독도왜란에선 한일전쟁 소설에서 독도경비대의 죽음으로 시작하는 클리셰를 정면으로 깨고 오히려 일본 특수부대원들을 처발랐다. 본문에서 실제로 사망 플래그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 두드리자의 장편 소설 독도를 지켜라에서 한일전의 시작으로 나온다. 그 뒤는 좀비 이포칼립스.
- 유성일의 장편 소설 독도대전에서 지진으로 인한 국민의 불만을 다른 데로 돌린다며 일본이 독도를 침략한다. 이후 사이버 대전으로 번지고 한국이 중국, 대만, 러시아까지 끌어들인다.
- 부활 이소룡 플래시 애니에서 이소룡이 독도를 차지한 니기미 사바사키 일당을 퇴치하는 것[32]
그러나 닥터 강이 독도에 유능한 요원들을 보냈으나 실종된다 그들 중에는 허준도 있지만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 니기미 사바사키가 고용된 자들이 영화에 나온 자들로 여전히 이소룡에게 퇴치 당한다. 미션을 보낸 닥터 강은 니기미 사바사키와 한패였다. 1화에서 9화까지만 10편은 나온다고 했으나 나오지 못했다.
- 온라인 게임 세컨드 라이프에는 한국 땅으로 되어있는 독도가 존재한다. 그리고 거기에 불만을 품은 일본 유저가 독도에 폭탄을 떨구는 바람에 일본 유저 상당수가 밴 먹은 사건이 있었다.
- 넷 우익들에 의하면 독도가 한국 땅이라고 생각하면 반일이라고 한다. 니코동 같은 곳에 일본에 진출한 한국인 연예인들이 독도 관련 얘기를 하는 동영상을 올려서 반일이라고 까는 경우다. 실제로 보면 한국의 종북몰이, 친일몰이 만큼이나 심각하다.
- 2014년 1월에는 일본 프라모델 메이커 아오시마에서 해상자위대 아키즈키급 구축함 모형을 발매하면서 박스아트에 독도를 침공하는 해자대를 묘사하여 국내 프라모델러들의 어그로를 한 몸에 받고 있다.
- 2013년부터 김단우 감독, 원기준, 이원종 주연의 '놈이 온다'라는 제목의 영화가 제작 중이다. 내용은 '독도를 무단 점거하는 일본 극우파에 맞서 싸우는 것'이라고. 독도를 배경으로 한 영화라 그런지 독도 관련 단체들의 지원을 받는다는 내용의 기사들이 가끔 올라오기도 한다. 그러나 쌈마이스러운 영화 포스터부터 해서, 무엇보다 감독의 정체가 한 국민의 암까지 완치시킨 희대의 망작 주글래 살래와 클레멘타인을 찍은 김두영인지라 영화의 질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네이버영화정보
- [33]
제11회 주한미군 웅변대회 1위 수상자인 마이클 패레스 상병으로, 북한의 은하 2호 발사실패 당시 페이스북에 찰진 한국어를 보여 줄 정도로 한국어 실력이 뛰어나다. 참고로 이 사람은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되어서 대한민국 국민들이 미군이 철수할 것을 걱정하고 있을 때 SNS를 통해 안심하셔도 됩니다. 저희는 절대 철수하지 않을 것입니다. 라는 말을 남겼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일본의 주장을 다 맞다고 쳐도 독도를 일본에서 접수→일본 영토에서 독도를 제외하고→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독립시킴→어느 조약에서도 명시되지 않은 독도는 아직도 연합국 최고사령부의 점령지(?) 라는 기묘한 논리가 성립한다.
7. 여담
- 대법원 인터넷등기소 사이트에서 프린터 출력 테스트를 하면 출력되는 부동산 등기사항증명서가 바로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1'의 것이다. 해당 토지는 1968년 3월 13일 소유자 "국(國)"(= 대한민국 정부 직할)으로 소유권 보존 등기가 되어 있고, 현재 해양수산부가 관리청으로 되어 있다.
- 삼성그룹에서 울릉군 도동리에 독도박물관을 지었다.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독도에 대한 정보와 삼국접양지도 같은 유물로 반박 자료 및 독도가 대한민국령이라는 증거를 자세히 소장하고 있다.
- 동도의 북쪽 사면에 '한반도 바위'라는 이름이 붙여진 한반도 모양의 절벽이 있다.
- 일제시대의 일본의 식물분류학자 나카이 다케노신은 울릉도에서 울릉 특산종인 섬초롱꽃을 발견해 명명했는데 Campanula takesimana라는 매우 악의적인 학명을 붙였다.
- 2011년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일본이 모르는 10가지 독도의 진실 이라는 문서를 만들어 배포한 적이 있다. 문서 원본
- 2018년 6월 15일 SBS <궁금한 이야기 Y>에서 1947년 미군 독도폭격에 관한 미스테리를 보도한 바 있었다.
- 1905년 일본이 독도를 무단점거했을 때 박제순은 "독도는 일본 땅과는 무관하니 철저히 조사 후 보고하라"라는 지령을 내렸다. 놀랍게도 을사오적의 그 박제순 맞다! 독도는 일본 땅과 관련되지 않았고 일본 땅도 아니다라고 반박하는 발언을 남긴 것.
- 천안시 상명대학교 캠퍼스에 1/75 스케일로 재현된 독도 조형물이 존재한다. 독도 섬은 물론이고, 동해바다와 경비대 기지 시설, 등대, 태양광 발전소등도 원래 모습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 독도에도 우체통이 있다. 이 우체통에 투함된 우편물은 2개월에 한 번 독도경비대함이 들어올 때 집배원이 수거한다. 서울 영등포구 기준으로 독도에서 투함한 우편물이 오는 경로는 독도⇨울릉우체국⇨포항우편집중국⇨대전교환센터⇨서서울우편집중국⇨영등포우체국⇨배달이다. 우편번호는 개정 전 6자리 번호가 799-805, 2015년 개정 후 5자리 번호는 40240이다.
- 다음 지도와 네이버 지도에서 각각 독도의 로드뷰를 제공하고 있어 그 모습을 조금이나마 생동감있게 들여다 볼 수 있다.
- 2005년에는 우간다 중앙은행이 김연아와 함께 독도 기념주화를 발행했다.
- 일본 측의 행정분류로는 오키군 오키노시마정에 위치한다. 2004년 이전 오키노시마초 행정 통합 이전에는 오키노시마를 구성하는 5개의 무라중 하나인 고카무라(五箇村)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8. 사건사고
- 1948년 6월 8일 오전 11시 30분경 미군은 독도를 공군 폭격 연습지로 선정하고 독도를 폭격했는데, 어민들은 미군이 독도를 폭격 연습지로 쓴다는 소식을 듣지 못하고 결국 배 20여 척이 파괴되었고, 어부 16명이 즉사하고 10명이 중상을 입었다.[34]
폭격의 와중에서 살아남은 장학상은 “30여 척의 동력선에 한 척당 5~8명이 타고 있었으니까, 150여 명 정도가 숨졌다고 보면 될 것 같다. 고 증언했다.
이후 1950년 7월 6일 2차 폭격이 발생했는데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다.
- 2019년 10월 31일, 독도 헬기 추락 사고가 발생하여 탑승인원 7명 중 4명이 사망하고 3명이 실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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