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을한
1. 개요
1905년 ~ 1992년 5월 31일
김황진의 조카이며 덕혜옹주의 전 약혼자 김장한의 형. 본관은 안동(安東), 호는 동명(東溟).
2. 생애
김을한은 1905년 한성부(현 서울특별시)에서 병자호란 때 척화대신 김상헌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경성부 교동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양정고등보통학교에 다니다가 2학년 때 3.1 운동에 참가했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검거를 피할 수 있었다.
그 직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에 진학하였으나, 1923년 관동대지진이 일어나자 학업을 포기하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 1924년 10월 조선일보사에 입사하여 사회부 기자로 일제하에 있었던 만행들을 파헤치는 데 기여하였으며 광주학생항일운동·장진강 토지 강탈사건·만주사변 등에 특파원으로서 보도를 담당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30년 9월 매일신보사로 근무처를 옮기면서 친일 성향을 띠기 시작했다. 그후 그는 1937년까지 사회부 기자로 근무하면서 조선총독부·철도국 등을 담당하였으며, 그 사이 1933년에는 만주의 신경(新京)에서 창간된 만몽일보(滿蒙日報)의 창립위원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1939년 4월에는 일본 도쿄에서 조선문화사(朝鮮文化社)를 창설하고 '조선화보'라는 친일 성향의 잡지를 발행하였다. 또 1945년 7월 17일 중일전쟁 때 중지나방면군 사령관을 역임한 마쓰이 이와네가 총재로 있던 파시즘단체 '대일본흥아회' 조선지부가 조직되었을 때 부지부장(副支部長)을 맡기도 했다.[1]#
8.15 광복 직후 그는 일본에 특파되어 취재하던 중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이은과 교류했고, 잦은 인터뷰를 통해 얻은 이야기들을 70년대에 《인간 이은》이란 제목으로 출판하기도 했다.
고종황제의 딸 덕혜옹주가 정신병원에 입원 후에 귀국 금지를 당하게 되자 귀국하도록 도와줬다. 1950년 서울신문 일본 특파원 시절 일본에 체류하여 덕혜옹주의 소재지를 찾아내어 귀국하는 데 수많은 노력을 했다. 그의 말로는 백부와 동생의 일도 있었지만 그의 아내 민덕임이 덕혜옹주의 유치원 동무였던 것도 덕혜옹주에게 관심을 둔 이유로 작용했다고 한다.
김을한의 회고록에 의하면 덕혜옹주가 정신병원에 있는 것을 알려준 건 소 다케유키가 아니라 이은으로 당시 돈으로 월 1만 엔[2] 에 달하는 거액의 병원비를 매달마다 지불한 것도 이은이었다고 한다. 소 다케유키가 덕혜옹주와 이혼한 것도 이은과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가 후견인으로서 허락한 것이었다.
이복 여동생의 병원비에 현재의 시가로 계산해도 엄청난 금액을 내 준 거지만 당시 이은은 더 이상 왕공족이 아니어서 예전처럼 풍족하지 않았다. 신적강하나 이승만 정권의 황실 재산 강제 국유화 등으로 인해 이때부터 대부분의 재산을 몰수당한 시점이었기에, 원래 살았던 이왕가 저택마저 헐값으로 내놓는 지경에 이르는 매우 어려운 시절이었다.
집세를 핑계로 참의원에서 공건물을 빌렸다고 서류에 쓰고 돈을 줄 정도로 빈털터리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는데 그 와중에 이복 여동생을 위해 거액의 병원비를 내 주고 있었던 거다. 정신질환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시대 출신이고 소 다케유키와의 이혼을 허락하기는 했지만 외롭게 살아야 했던 이은의 입장에서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이 정말로 소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3. 기타
자녀로 1남 김수동을 두었는데 영화 감독이 되어 <밤나비>, <단발머리> 등의 메가폰을 잡았고 KBS로 옮겨 방송계에 몸담은 뒤 <꽃피는 팔도강산> 등을 연출했다. 이후 KBS 예능국장을 지내다 은퇴하고 그 뒤로도 외주업체 소속으로 다양한 작품활동을 했다.
4. 대중매체에서
1990년작 KBS1 3.1절 특집드라마 <왕조의 세월>에선 배우 박웅이 연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