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다케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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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2.1. 결혼 이전
2.2. 덕혜옹주와의 정략 결혼
2.3. 아내와의 관계
2.4. 이혼
2.5. 딸 정혜의 행방 불명
2.6. 이후
3. 평가
4. 대중 매체에서


1. 개요


宗武志(そうたけゆき)(종무지)
1908년 2월 16일~1985년 4월 22일. (향년 77세)
대한제국덕혜옹주의 전 남편이다. 한국사의 마지막 부마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덕혜옹주와 결혼할 당시에는 이미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없었으므로''' 공식적으로는 부마로 꼽히지 않는다.[1] 조선·대한제국 이씨 왕조 여성과 결혼한 비(非)한민족 남성으로는 의순공주와 결혼한 아이신기오로 도르곤 이후 두번째다. 쓰시마 소 가문의 35대 당주이자 영문학자 겸 시인으로서[2] 대학 교수를 지낸 엘리트 학자이기도 했다.

2. 생애



2.1. 결혼 이전


쓰시마 번주 소(宗) 씨 가문의 후손으로, 백작이었다.[3] 임진왜란 당시 쓰시마 도주로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장으로 참전했던 소 요시토시가 바로 소 다케유키의 10대조다. 아버지는 소 요리유키(宗和志), 어머니는 구로다 레이코(黑田鏻子)이다. 요리유키는 처가인 구로다 가문의 데릴사위가 되어 '구로다 요리유키'로 성씨를 바꾸었고, 아들 다케유키도 본래 외가의 성씨를 따라 구로다 다케유키(黑田武志)라는 이름을 썼다. 그러나 소 가문의 대가 끊길 위기에 놓이자, 다케유키는 구로다에서 소로 성씨를 바꾸어 친가인 소 가문을 계승했다.[4]
친부모는 일찍 세상을 떠났고, 데이메이 황후(다이쇼 덴노의 아내이자 쇼와 덴노의 어머니)의 오빠인 쿠죠 미치자네(九条道實)가 다케유키의 후견인이 되어주었다.
중학교까지는 쓰시마에서 졸업했고, 고등학교와 대학은 도쿄에서 다녔다. 황족과 화족 전용 관립 학교인 가쿠슈인[5] 고등과와 일본 최고 명문인 도쿄제국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영어 작문과[6] 라틴어, 그리스어, 이탈리아어에 능통했다고 한다.
문학을 좋아했는지, 소 씨 당주와 백작 작위를 계승한 1923년 10월에 자신의 친구들과 문예 동인지를 만들고 그 이듬해에 시와 동시 잡지를 발행하기도 했다. 가쿠슈인 고등과 시절에는 평소 존경하던 하이쿠 시인인 기타하라 하쿠슈(北原白秋)의 문하에 들어가는 기회를 얻었고, 1927년에 하쿠슈가 발행하던 시가 종합 월간지 <근대풍경> 6월호에 다케유키의 자작시 <송림의 밤>이 실리기도 했다. 나중에 다케유키가 쓰시마 섬 구전 민요를 모아 펴냈을 때도 기타하라 하쿠슈가 추천사를 써주었다고 한다.#
쓰시마 역사민속자료관(현재는 2020년까지 내부수리중) 입구에는 소 다케유키가 그린 바닷가를 배경으로 하는 외로운 섬의 그림이 있었는데, 어떤 승려는 이 그림을 보고 소 다케유키라는 인간을 "'''자기 세계가 강한 고독하고 외골수적인 인간'''"이었을 것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2.2. 덕혜옹주와의 정략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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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덕혜옹주와 사실상 정략결혼 성격이 짙은 결혼을 했다. 일본인과의 사실상 강제 혼인이기 때문인지, 결혼사진을 보면 전날 울다 잠들어 덕혜옹주의 눈이 부어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덕혜옹주의 올케 이방자 여사가 1984년 경향신문에 연재한 회고록 <세월이여 왕조여>에 따르면, 덕혜옹주는 이 결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때문인지 일제강점기 당시엔 세간에 소 다케유키가 애꾸눈에 못생겼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으나, 사실은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 미남에 키도 훤칠하고 도쿄제국대학 영문과를 나온 엘리트였다.[7] 이런 소문이 난 이유는 민족 감정 + 귀천상혼으로 해석될 수 있는, 소 다케유키가 귀족 중에서도 급이 떨어지는 백작 신분이었기 때문인 듯 하다.[8] 덕혜옹주와 소 다케유키는 결혼이 확정되고 나서, 결혼식 전에 사실상 얼굴 확인이나 다름없는 맞선을 보았다.

2.3. 아내와의 관계


하지만 과거 알려져왔던 것과 달리 소 다케유키와 덕혜옹주의 관계는 그렇게 나쁘진 않았고, 소 다케유키는 오히려 아내를 신경 써주고 걱정하는 자상한 남편상에 가까웠다고 한다. 아내의 상태를 걱정하고 안타까워한 것은 진심이었는지 아내를 향한 장문의 시를 남긴 적도 있었다.#
그러나 1932년 8월 14일에 딸 마사에를 출산한 이후 덕혜옹주정신병 증세는 더 심해졌고, 다케유키와 주변인들은 당시만 해도 생소했던 정신병에 대한 이해 부족과 신분상의 이유 등으로 한동안 덕혜옹주병원에 데려가지 않고 그저 안마사를 집에 불러 마사지만 받게 했다고 한다. 물론 당시의 의학 수준으로는 병원을 가도 딱히 해결책이 없었고, "조선에서 온 옹주가 미쳤다"는 사회적 낙인만 찍혔을 확률도 있었겠지만. 여담으로 이에 대해 덕혜옹주를 주제로 얘기한 역사저널 그날 116화에서 출연진들은 "당시 의학 기술 및 시대 상황을 고려해볼 때, 소 다케유키는 할 만큼 했다"는 평을 내리기도 했다.

2.4. 이혼


일제 패망 이후 소 다케유키는 덕혜옹주를 결국 정신 병원에 입원시키고, 그 와중에 1947년 신적강하[9]를 당해 생활이 어려워지자 결혼 20여년이 지난 1955년 이혼했다.[10] 다만 강제 이혼은 아니었고, 덕혜옹주의 후견인 역할을 했던 오빠 영친왕, 올케 이방자 부부와 합의하여 이혼했다. (일본 위키백과에는 덕혜 옹주의 친가요청으로 인해 이혼했다고 나온다)
소 다케유키는 이혼한지 얼마 되지 않아 카츠무라 요시에(勝村良江)라는 일본 여성과 재혼하였고, 이후 치바현으로 이주했다. 장남 타츠히토(立人), 차녀 와키(和木), 차남 나카마사(中正)의 2남 1녀를 더 낳았다.

2.5. 딸 정혜의 행방 불명


소 다케유키와 덕혜옹주 사이에서 태어난 딸의 이름은 정혜(正惠)로 바를 정(正)과 덕혜옹주의 은혜 혜(惠)로 지었으며 일본식 발음으로는 마사에였다. 허나 덕혜 옹주가 병이 있다 보니 딸의 육아는 다케유키 본인이 많이 한 듯 하다. 다케유키가 정혜를 데리고 조선 왕실 행사에 참여하고, 직접 정혜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마사에는 여자 가쿠슈인을 졸업한 후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졸업했고, 같은 대학 출신인 스즈키 노보루(鈴木昇)와 결혼했다. 결혼 후로도 마사에는 남편의 성씨를 따르지 않았고, 대신 노보루가 처가의 성씨를 따라 '스즈키'에서 '소'로 성을 바꾸었다. 이는 장인 다케유키의 요구에 의한 것이었다.
그런데 덕혜옹주와 다케유키가 이혼하고 약 1년 후인 1956년, 갓 결혼한 24살의 새댁이었던 마사에는 갑작스레 유서를 남기고 실종되었다. 유서에 의하면 야마나시현나가노현을 경계로 하는 고마가타케 산에 자살하러 간다고 했는데, 사실인지는 불명. 현해탄(대한해협)에 뛰어들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신뢰할 만한 근거는 없다. 분명한 건 이후 마사에를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다.
다케유키는 자신이 사망할 때까지, 끝내 장녀 마사에의 사망 신고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케유키의 사후 마사에의 이해 관계인에 의하여 일본 민법 제30조 조항에 따라 마사에의 실종 신고 후 7년이 경과할 때까지 그 어떠한 생존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실종 선고가 성립되어[11] 사망 처리되었다.
마사에(정혜)의 실종 이후 수색대의 노력에도 마사에의 생사를 알 수 없자 부재자의 상태로 노보루와의 이혼이 성립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전 남편이 된 노보루가 2007년 4월 발표한 시집에 의하면, 실종 후 50년 가까이 경과한 시점에서야 사체가 발견되었고, 유품인 수첩으로 신원을 특정하여 마사에의 사망이 실체적으로 확인된 것으로 보인다.

2.6. 이후


1972년에 덕혜옹주를 만나러 한국에 찾아왔지만 만나지 못했다. '한국사 전(傳)'에서 밝히기로는 당시 창덕궁 낙선재의 비서실장이었던 이공재 씨 앞에 소 다케유키가 찾아와 아내를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는데, 이공재 씨는 "'''만나봤댔자 할 얘기도 없고, 꼭 만나야 할 이유도 없다. 당신을 만나게 된다면, 옛날 생각이 나서 오히려 병세가 더 악화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니 당신 같은 사람한테는 면회를 일절 허용치 않으니 돌아가시오.'''"고 냉정하게 내쳐서 돌려보냈다고 한다.[12]
그 뒤 치바현에 머무르면서 레이타쿠(麗澤) 대학의 교수로 활동하다가 1985년 사망, 쓰시마 섬에 있는 역대 쓰시마 다이묘 선친들의 묘지인 반쇼인(滿松院)에 함께 안장되었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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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소 다케유키.

3. 평가


소 다케유키의 개인적인 인물됨은 그와 관련된 자료가 거의 없어 사실 정확히 평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얼마 없는 사료들을 조합해보면, 적어도 개인적인 인물됨이 나쁜 인간은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 결혼 전부터 있던 덕혜옹주정신병 증세가 출산 후 더 심해졌음에도 결혼생활을 유지하려고 애를 쓴 정황은 있다. 상술했듯 덕혜옹주를 동정했는지 <환상 속의 아내를 그리워하며>라는 장문의 시를 쓰기도 했다. 허나 조선 황족과의 결혼으로 상당한 지참금을 받아 부유한 생활을 누리다 신적강하 이후 재산을 몰수당해 생활이 어려워지자 덕혜 옹주의 정신병원 입원 및 이혼이 일어났기 때문에,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해도 좋은 남편이라고 하기도 어렵다는 의견도 있다.
다만 이 부분도 위의 정신병 관련 내용과 더불어 참작해볼 여지는 있다. 신적강하 이후에는 집안 하인의 숫자가 수십 명에서 단 1명으로 감소했기 때문에 사실상 정신병자를 수발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고, 병자와 산다는 것은 말처럼 쉽진 않은 것이 현실이었다[14][15]. 게다가 신적강하 이후 바로 이혼한 것도 아니었고 1955년에 가서야 덕혜옹주와 합의 이혼을 했다[16]. 물론 이혼하고 얼마 안 가서 재혼한 모습에 대해서는 각자 판단에 맡겨야겠지만 사실상 10년 가까이 별거 상태였던데다가[17], 이혼 당시 자식이라고는 딸 마사에 뿐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당시 48세였던 소 다케유키가 재혼을 서두른 것은 쓰시마 종가의 당주로서 대를 잇기 위함도 어느 정도는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18]
한편, 소 다케유키는 덕혜옹주와의 결혼 생활에 대해서는 아무런 평도 남기지 않았으며, 평소에도 입에 일절 올리지 않아 소 다케유키가 덕혜옹주에 대해 뭐라 했는지에 대한 제대로 된 증언조차도 남아 있지 않다. 다만 만년의 수필에서 "'''25년은 내 인생의 공백기였다'''"고 짧게 언급했을 뿐이다. 당시 소 다케유키에게는 덕혜 옹주를 언급하는 것 자체가 꽤나 공허한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아내를 안타까워해서 시를 쓰기도 하고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리란걸 알면서도 덕혜 옹주를 만나기 위해 한국으로 한번 찾아왔던 것도 생각해보면, 소 다케유키도 마음 한켠에는 덕혜옹주를 안고 사는 인생이었을 것이다. 어찌됐든 연을 맺었던 부부였으니까.
만약 정혜가 요절하지 않고 더 나아가 결혼하여 자식을 얻었다면 소 다케유키는 정혜에게 쓰시마 소 가문 당주직을 물려줬을 가능성이 높다.[19] 젊은 나이에 얻은 첫 자식에게 당주 자리를 물려주고 싶어했을 것이며 상술한 것처럼 소 다케유키 본인이 덕혜옹주를 사랑한 것도 있었을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정혜가 죽고 부모인 소 다케유키와 덕혜옹주도 이혼하면서 그러한 사랑도 비극적으로 끝나고 말았다.

4. 대중 매체에서


한국 대중 매체물에서는 과거 안습하게도 부정적으로 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1996년 MBC에서 8.15 광복 특집극으로 방영했던 <덕혜-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가 대표적인 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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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에 나온 영화 덕혜옹주(영화)에서는 배우 김재욱이 분했다. 이전보단 묘사가 나아져서 결혼 이후 식음을 전폐하고 마루에 멍하니 앉아 있는 덕혜를 위해 조선식으로 식단을 준비하라고 하고, 옆에 앉아 다정히 말을 건네주는 모습도 나온다. 이후 작중 늙어 재혼한 뒤 자신의 집으로 덕혜를 찾아온 김장한[20]과 몸싸움을 벌이지만, 결국 서로의 처지를 알게 되고 "나는 덕혜를 버리지 않았다. 내 딸 정혜는 내가 덕혜와 이혼한 뒤에 자살했다"며 눈물을 흘린다.

[1] 진짜 한국사의 마지막 부마는 박영효가 된다.[2] 본인의 시집도 있고, 쓰시마 섬 전래 구전 민요를 모은 저서도 있다.[3] 원칙상으로는 고쿠다카 기준으로는 자작이었으나 조선과의 외교 등으로 인해 메이지 정부가 1등급 높여주었던 것.[4] 이 점도 다케유키에 대한 한국인들의 인식을 안 좋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소수나마 있다. 일본에서야 성(姓)과 씨(氏)를 구분해 성과 달리 씨는 자기 편의대로 바꿀 수 있었고, 성씨를 바꾸는 것에 대해서 별 거부감을 가지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 번 가지고 태어난 성씨는 죽을 때까지 바꿀 수 없는 것이 철칙인 사회였다. 그러다 보니 소 씨에서 구로다, 다시 소 씨로 성이 바뀐 다케유키에 대해 '제 성씨도 멋대로 갈아치우는 근본도 모르는 왜놈' 정도로 미운털이 하나 더 박혔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 그래도 다케유키 본인 입장에서는 조상이 쓰던 본래 성씨로 다시 돌아왔을 뿐이므로 이러한 비판은 다소 악의적인 것이다.[5] 패전 후로는 사립학교로 전환되었고 평민에게도 개방되었으나, 여전히 부유하고 지체 높은 집안의 자제들이 다닌다고. 일본의 명문 사립학교들이 대개 그러하듯 유치원부터 대학원까지 전 과정을 갖추고 있으며, 한 번 입학하면 별도의 수험 없이 상급 학교로 진학할 수 있다.[6] 나가사키 현에서 주최한 중학생 영어 웅변 대회에 나가서 우승한 적도 있다.[7] 다만 사시였는데, 애꾸눈이라는 소문도 여기서 비롯된 듯 하다.[8] 소 가문은 다이묘로써 2만 석에도 미치지 않는 수준이었기에 원칙적으로는 더 낮은 자작에 봉해져야 했지만, 대대로 조선과의 외교를 담당해왔다는 점이 감안되어 백작으로 봉해졌다고 한다.[9] 다이쇼 덴노의 직계 자손들을 제외한 나머지 방계 황족들과 화족들이 모두 평민 신분으로 전락한 것.[10] 시기는 사실 여러 설이 있는데, 이방자 여사가 회고록에 1955년으로 기록했으므로 이 해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11] 아마 소 다케유키가 덕혜옹주와 이혼 후 재혼하여 낳은 마사에의 이복 동생이 실종 선고를 청구한 것으로 보인다. 부친이 사망한 시점에서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수십년간 실종 상태에 있었던 이복 누나 / 언니를 위해 호적을 한도 끝도 없이 그대로 두기에는 상속 문제도 걸려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원만한 법적 해결을 위하여 결단한 부득이한 조치였을 것이다.[12] 신병주 교수에 따르면 '''덕혜옹주 자신이''' 다케유키를 만나기를 거부했다는 얘기도 있다(출처 : 조선평전).[13] 이 묘원 반쇼인은 이즈하라 항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으며, 한국에서 보기 힘든 거목이 가득하고 조선 국왕이 하사한 물건이 전시되어 있는 등, 대마도에서 그나마 역사적인 볼거리라서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가는 곳이다.[14] 당장 전두엽 절제술 같은 막장스런 방법이 획기적인 치료법이랍시고 떠들어지던 시대에, 완치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현대에 와서도 아내가 미쳤다고 가정한다면 수발 들다 본인조차 피폐해져 이혼을 고려할 충분한 현실적 사유가 될 판국에, 정신병에 대한 병명조차 생소하던 당시 소 다케유키는 아내를 위해서 그래도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꾀한거 아니냐는 의견이 나오는 이유이다.[15] 정신병이 아니라도 긴병에 효자없다는 말도 있고, 병든 자식을 돌보다가 가족 자체가 해체되는 경우도 많다[16] 덕혜옹주는 의사 표현이 불가능했기에 오빠 영친왕, 올케 이방자 여사가 후견인으로서 이혼 합의를 해주었다.[17] 이 별거도 사이가 나빠서 한 게 아니라 당시의 정신병의 치료 방식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18]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봉건적 관념이 강한 동북아시아에서는 막 부인과 이혼하거나 사별한 남성에게 재혼을 강요하는 일이 아직도 많다. 이런 낡은 관념이 여전히 지배적이던 1950년대인데다, 귀족 집안의 자제이기까지 한 소 다케유키는 그 압박을 더 심하게 받았을 터였다.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봉건적 관념이 상대적으로 덜한 서유럽 같으면 전근대부터 귀천상혼으로 당주직 계승권이 먼 방계로 넘어가는 일도 잦았던 만큼 먼 친척을 후계자로 삼으면 될 일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소 다케유키의 조국인 일본은 21세기 기준으로도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봉건적 관념이 남북한과 중화권보다도 더욱 강하게 남아있는 나라다.[19] 물론 정혜는 여성인 만큼, 남자에게 가문을 계승시키는 일본의 전통적인 방식에 따라, 공식적으로는 딸 정혜가 아니라 자신의 사위로 들어왔던 스즈키 노보루에게 당주직을 물려줬을 가능성이 높다. 마침 노보루는 이미 장인인 소 다케유키의 요구에 따라, 자신의 성씨를 소씨로 바꾼 바 있었다.[20] 영화는 각색이고, 덕혜옹주를 찾으러 뛰어다닌 실제 인물은 김장한의 형 김을한 기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