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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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洪才, 1954.10.10~
재일교포 지휘자이자 전 광주시립교향악단 상임 지휘자. 2010년 현재 국적은 한국으로 되어 있다.
효고현 이타미 시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초중고등학교 교육은 모두 현내 조선학교들에서 받았으며, 아마가사키 조선중급학교 재학 중 취주악 동아리에 들어가 클라리넷을 배웠다. 고베 조선고급학교를 졸업한 뒤 1973년에 사립 대학교인 도호가쿠엔대학 음악대학에 클라리넷 전공으로 입학했는데, 조선적 재일교포로서 일본 음대에 들어간 최초의 학생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지금도 국적이 조선적이고, 초중고 교육 과정을 모두 조선학교에서 수료한 재일교포는 일본의 국공립 대학교에 진학하는 것이 원칙적으로 불가능한데, 그나마 도호가쿠엔은 사립이었고 당시 음대 학장이었던 이구치 모토나리[1] 가 조선학교 학력도 일본 학교의 학력에 준하는 것으로 인정하는 대인배 기질을 발휘해 시험 응시를 허락하면서 극적으로 이루어진 입학이기도 했다.
도호 음대에 클라리넷 전공으로 입학한 후 지휘에 관심을 갖고 전향했다. 하지만 늦게 시작한 지휘 공부인 만큼, 본인은 모차르트 소나타를 치고 있을때 동기들은 협주곡을 치고 있었다며 자괴감을 느꼈다고 한다. 집안 형편도 넉넉치만은 않아 대학 4년 내내 아르바이트를 했으며, 노가다를 뛰기도 했고 오페라 공연 엑스트라, 클라리넷으로 잡다한 공연 등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했고 그렇게 번 돈으로 악보를 구매하였다고 한다.그리고는 음악 다방에서 본인이 신청한 클래식 음악이 나오기만을 기다리며 음악이 나오면 악보를 펴고 공부를 하는 등 꽤나 어렵게 공부를 한 듯 하다. 밥을 굶은 적도 많으며 아르바이트로 동포의 피아노 레슨을 하게 되었는데 그 집이 고깃집이여서 레슨을 가는 날 밥을 차려주어 유일하게 영양보충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고질병인 천식도 그 시절에 얻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2년여 동안 악보를 보는데 이골이 날 정도로 공부를 한 결과 2년 후 쯤에는 동기들과 비슷한 레벨에 이르렀다고 한다.
대학 3학년 때 학교의 관현악단 부지휘자 겸 지휘 연구생을 뽑는 오디션에 응시해 합격했고, 이후 오자와 세이지와 아키야마 카즈요시, 모리 타다시, 츠츠미 슌사쿠 등에게 지휘법을 배웠다[2] . 재학 중 도쿄 시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부지휘자로 활동하며 경험을 쌓았고, 1977년 졸업 연주회에서 오자와와 함께 공동 지휘자로 등장해 1부 무대를 지휘했다. 이듬해인 1978년 3월 14일에는 도쿄의 시부야 공회당에서 열린 도쿄 시티 필의 특별 연주회 무대에서 공식 데뷰했다.
이 때 공연 프로그램은 전체 연주 시간이 한 시간도 안될 정도로 매우 짧기는 했지만, 첫 곡부터 마지막 곡, 그리고 앵콜 곡까지 '''전곡이 모두 일본 초연'''이었던 공연이었다. 최성환의 관현악 '아리랑 환상곡' 과 김영규의 관현악 '청산벌에 풍년이 왔네', 윤충남의 피아노 협주곡 '조선은 하나다', 김영규와 김윤붕 공동 작곡인 교향곡 피바다, 그리고 앵콜로 연주된 고종환의 '임진강[3] ' 까지 모두 북한 작곡가들의 작품이었고, 이 때 녹음된 실황이 이후 데뷰 음반으로 묶여 제작되기도 했다. 최초의 조선적 출신 지휘자인 점 때문에 교포 사회에서 대단한 화제가 되었고, 이듬해 봄에는 평양에서 조선국립교향악단을 지휘해 공연과 녹음을 하기도 했다.
1979년 9월에는 3년 주기로 열리는 도쿄 국제 지휘콩쿠르에 참가했고, 여기서 2위 입상과 함께 특별상인 사이토 히데오 상을 최초로 수상해 화제가 되었다.[4] 콩쿠르의 1위 입상자에게는 해외 유학의 특전이 주어지고 있었지만, 김홍재의 경우 조선적이라 해외 유학을 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에 2위를 주는 대신 특별상을 같이 준 것으로 여겨졌다.
1980년 2월에는 다른 입상자 세 사람과 함께 삿포로와 도쿄, 요코하마, 나고야, 오사카, 후쿠오카 6개 도시에서 입상 기념 연주회를 지휘했고, 그 해 7월에는 200대 3의 경쟁률을 뚫고 지휘자 야마모토 나오즈미가 진행하는 TBS의 공개 연주회 프로그램인 '오케스트라가 왔다' 의 전속 지휘자로 발탁되어 신일본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비롯한 일본 각지의 관현악단을 지휘했다. 프로그램 종영 직후인 1981년에는 역시 NTV의 공개 연주회 프로그램인 '나의 음악회' 의 전속 지휘자로 영입되어 요미우리 일본 교향악단 등의 악단 및 일본 국내외 연주자들과 협연했다.
1981년부터는 도쿄 시티 필의 전임 지휘자가 되었고, 1985년과 1987년에는 나고야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교토 교향악단의 전임 지휘자를 겸임하기 시작했다. 1985년에는 한국 국적의 민단계 교포인 바이올리니스트 정찬우와 합동 연주회를 기획하기도 했지만, 한국에 머무르고 있던 정찬우가 출국금지크리를 먹는 바람에 무산되고 말았다.[5] 이렇게 한국과의 관계는 계속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북한과의 관계는 비교적 순조로워서 1987년에는 교토 교향악단을 이끌고 방북해 일본 관현악단 사상 최초로 평양과 원산에서 공연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1988년 7월에는 중국 베이징에서 중국 광파(방송) 교향악단을 객원 지휘했고, 교포 여성 1000명으로 구성한 합창단과 관현악의 협연 무대인 '1000명 콘서트' 를 오사카에서 지휘했다. 1989년에는 한민족의 화합과 통일을 주제로 한 '한겨레 음악회' 를 지휘하기 시작했으며, 첫 공연에서 윤이상의 관현악곡인 '광주여 영원히!' 를 지휘했다. 몇 달 뒤인 9월에는 일본 내 모든 직책을 사임하고 독일로 유학했고, 윤이상에게 개인적으로 현대음악 이론과 지휘를 배우면서[6] 1990년 10월에 평양에서 열린 범민족 통일음악회에 해외동포 지휘자로 참가했다.
음악회 참가 후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활동을 재개했고, 이 때부터 윤이상 관현악 작품들의 공연을 적극적으로 지휘하기 시작했다. 1991년에는 히사이시 조와 처음으로 협연 무대를 가졌고, 이듬해 도쿄 예술극장에서 신일본 필을 지휘해 협연한 실황은 음반으로도 발매되었다. 1992년 9월에는 뉴욕의 카네기홀에서 열린 제8회 한겨레 음악회를 지휘해 첫 미국 공연을 했고, 11월에는 윤이상 탄생 75주년 기념 음악제의 관현악 콘서트에서 신일본 필을 지휘했다.
1996년 3월에는 히사이시 조의 프로듀스로 도쿄 지하철 사린가스 살포사건 1주기 추모 음악회를 지휘했고, 1998년 3월에도 히사이시가 프로듀스한 나가노 동계 패럴림픽의 개막식 공연 지휘를 맡았다[7] . 같은 해 6월에는 와타나베 아키오[8] 음악상을 수상했고, 당시 일본에서 지휘자들에게 주어지는 양대 음악상을 모두 수상한 유일한 지휘자가 되었다.
2000년 6월에는 1985년에 개최하려다 무산된 정찬우와의 합동 연주회를 개최했고, 이 때 연주회 소식을 취재하러 온 KBS 제작진들이 만든 다큐멘터리가 방영되면서 한국에도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9] 그 해 10월에는 ASEM 한국 개최 기념 음악제에서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부소니의 피아노 협주곡[10] 을 아시아 초연하면서 한국 무대에 처음으로 등장했고, 이후 코리안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KBS 교향악단, 서울시립교향악단, 수원시립교향악단 등 남한 관현악단들을 객원으로 지휘했다.
2004년에는 통영 국제 음악제 개막 공연에서 윤이상의 오페라 '유령의 사랑' 을 아시아 초연으로 지휘했고, 이듬해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했다. 2006년 10월에는 국립극장에서 개최된 특별 연주회인 '겨레의 노래뎐' 에 출연해 처음으로 국악 관현악단을 지휘했고, 2007년 11월에 울산시립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로 취임해 2016년 10월까지 재임하였고 현재는 광주시립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다. 이외에 대전시립교향악단이나 대구시립교향악단 등의 연주회에서도 종종 객원으로 출연해 지휘하고 있다.
한국 국적을 취득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주요 활동지이자 거주지는 일본으로 되어 있고, '오케스트라가 왔다' 시절의 은인이었던 야마모토 나오즈미가 설립한 공연기획사인 밀리온 콘서트 협회의 전속 아티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일본 출신 지휘자들 중에는 비교적 이례적인 존재로 여겨지는데, 극적이고 다이나믹한 음악 만들기로 '대륙적 지휘자' 라는 평가를 주로 받고 있다. 초기에는 공식 데뷰 연주회를 몽땅 북한 관현악곡으로 꾸민 뱃심에서도 볼 수 있듯이 민족주의 경향이 강한 지휘자로 여겨졌는데, 이는 자신의 정체성을 일본인이 아닌 조선인으로 확실히 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조선적=친북주의자 혹은 북한 국적자' 라는 편견으로 바라보는 일본인들에게는 거부감을 안겨주기도 했다.
이 때문인지 일본에서 맡은 직책도 주로 상임이나 음악감독 급이 아닌 그보다 한두 단계 아래인 전임 혹은 전속 지휘자였다. 그나마 취주악단인 오사카시 음악단의 수석 지휘자를 역임한 것이 등급 상으로는 가장 높은 직책인 정도. 하지만 국적이나 민족성 문제를 떠나 지휘 실력 자체는 높게 쳐주고 있다. 심지어 도호음대 출신 음악인들 중에는 오자와 세이지나 야스나가 토루[11] 와 동급으로 쳐주는 이들도 있다. 국내에서도 실력에 비해 저평가된 지휘자 1순위로 꼽히며 충분히 수도권 주요 악단을 맡을 실력임에도 지방 악단만 맡고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는 사람도 꽤 있을 정도다.
2000년 이후에는 한국에서도 코리안 심포니를 비롯한 서울 쪽 주요 악단의 상임으로 영입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12] , 그 후로도 몇 년동안 객원으로만 이곳저곳에서 활동하다가 2007년에야 울산에서 첫 상임 직책을 맡았다. 이미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인 탓인지, 높은 직책에 대한 야심은 그다지 많지 않아 보인다. 이는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로, 공연 스케줄을 보면 프로 관현악단보다는 대학 관현악단을 비롯한 아마추어 악단들의 연주회를 지휘하는 횟수가 많다.
북한 작품 외에 윤이상 작품의 전문가로도 유명하고, 교향곡 세 곡과 오페라 한 작품을 비롯해 10여 편의 작품을 레퍼토리에 올려놓고 있다. 작곡가가 아닌 지휘자로써는 직접 윤이상을 사사한 거의 유일한 한국인으로 윤이상 음악에는 대한민국에서는 단연 독보적이다. 다만 한국에서윤이상 작품의 공연 빈도는 낮다. 아무래도 조심스러운 편인 것 같다. 이외에도 초기부터 거의 매주 방송되는 방송 연주회에서 지휘한 만큼 일찍부터 그 나이 또래 지휘자 치고는 방대한 곡목들을 소화했고, 취주악부 활동으로 음악을 시작한 만큼 관악 음악의 지휘에도 정통한 인물로 소개되고 있다.
히사이시 조와 10년 넘게 공동 작업하며 네 장의 앨범에서 같이 협연한 이력에서 보듯이 굳이 클래식만 올리는 연주회만 고집하지도 않는데, 일본의 유명 재즈 뮤지션들인 트럼펫 주자 히노 테루마사나 피아니스트 타카하시 아이코 등과도 협연한 기록을 갖고 있다. 1999년에는 바이오하자드 1~3편의 OST 일부를 미야케 카즈노리가 관현악 편곡한 오케스트라 앨범의 녹음과 공연 때 신일본 필을 지휘하기도 했다. 한국에 처음 공식 출반된 김홍재 지휘의 음반도 히사이시 조의 1992년 콘서트 실황인 'Symphonic Best Selection' 이었다.
한국에서 클래식 영역에 속하는 앨범들은 신나라레코드를 통해 간간이 발매되고 있는데, 1978년 데뷰 콘서트의 실황 일부와 윤이상 관현악 작품들, 2001년에 개최된 K-클래식 콘서트 실황 등이 담겨 있다.[13] 하지만 남북관계 경색 때문에 나머지 북한 관현악 작품들의 녹음은 아직 국내 정발이 요원한 상태고, 그 외의 취주악 앨범이나 게임/애니메이션 음악 관련 앨범 등도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만 구할 수 있다.
이렇게 정통 클래식부터 북한 음악, 윤이상 작품을 비롯한 현대음악, 국악 관현악, 크로스오버까지 꽤 광범위한 활동상을 보여주고 있는 지휘자지만, 한창 경력을 쌓아나갈 수 있었던 리즈시절에 조선적 소지자로서 경험해야 했던 이런저런 차별과 한계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탓에 딱히 커다란 야망을 가질 수도 없었던 인물이기도 하다.
외국에서 유학하거나 음악 활동을 하고 싶어도 무국적 난민으로 간주되어 업무 비자는 커녕 관광 비자 신청도 힘든 조선적을 오랫동안 유지했고
[14] , 미사일 발사나 납북 일본인 문제 등으로 북일 관계가 악화될 때마다 북한 국적자로 간주되어 예정된 연주회가 취소되는 등의 온갖 압박을 받아왔다고 하는데, 북한으로 거처를 옮긴 친척들이 있음에도 한국 국적을 택한 것도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을 듯 하다.
김홍재는 400여편의 방대한 레퍼토리를 가지고 있으며 대부분은 1980년~1988년 일본에서 한창 전성기를 누리고 있을 때 익힌 것으로 보인다.방송 공연을 할 떄는 일주일에 한 번 방영되는 TV프로그램이고, 어느정도의 기간동안은 프로그램이 중복되면 안되기 때문에 매주 다른 곡을 준비하다시피 했고 악단을 지휘할 때도 두 악단의 전임지휘자를 겸직한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다양한 레퍼토리를 갖게 될 수 있었다.
이 많은 레퍼토리 중에서도 그는 특히 드보르작과 더불어 소위 말하는 국민악파와 민족적 성향이 강한 작곡가의 곡에 특히 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무국적 조선인의 삶을 50여년 동안이나 살아온 그의 인생이 어느정도 반영되어 있는 것이라고 보여진다. 하지만 베토벤, 모차르트부터 슈트라우스나 스트라빈스키까지 이르는 현대음악까지 능하며 김홍재가 지휘봉을 잡으면 소위 말하는 "평타는 친다" 소리를 들을만큼 레퍼토리 편식이 없는 지휘자이다.
그리고 지휘자로써 바통 테크닉이 매우 깔끔하고 정확하기로 소문 나있다. 과한 동작이나 표현을 최대한 자제하면서 악곡에 최적화된 정석적인 비팅을 구사하며 악기별 신호도 일일이 다 내주면서 정말 친절하게 지휘한다. 때문에 한 번이라도 같이 연주해본 연주자들은 연주하기 가장 편한 지휘자 순위권으로 꼽으며 협주자들도 매우 선호하는 지휘자이다. 인간성 또한 매우 좋다고 하며 연주자 하나하나를 정말 인간적으로 대해주고 한번도 윽박지르거나 다그치지 않는다고 하며, 리허설 때는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는 스스로 말하길 "권위적으로 연주자들을 억누르려 하는 지휘자는 내가 제일 싫어하는 지휘자의 상이다. 지휘자는 말이 아니라 지휘봉 하나로 연주자들과 교감할 수 있어야 한다" 고 언급한 바 있다.
아버지인 김정민과 어머니 이판생은 모두 조선학교 교사로 정년 퇴임 때까지 재직하며 민족 교육에 힘썼고, 이 공로로 북한 정부로부터 공훈교원 칭호를 수여받기도 했다. 당연히 자식들도 모두 조선학교에서 교육받도록 했는데, 다만 일본이나 한국 국적으로 전환한 다른 교포들을 비하하거나 배척하는 등의 편협한 가치관을 심어주지는 않았다고 한다. 훗날 음악 활동을 할 때 민단계나 귀화 교포들과도 적극적으로 공연을 추진한 것도 어릴 적 가정 교육의 영향으로 여겨진다.
음악 재능은 주로 외갓집에서 물려받은 듯 한데, 특히 외삼촌 네 명은 모두 음악 활동을 하고 있었다. 외삼촌들 중 리철우와 리한우가 김홍재와 접점이 많은 인물들로 손꼽힌다. 리철우는 조선적을 유지하면서 일본에 거주하고 있고, 아코디언 연주자이자 작곡가로 활동하며 북한에서 공훈예술가 칭호를 받기도 했다. 김홍재가 음대에 입학하고 지휘자가 되기까지 뒷바라지를 해줬고, 이후에도 '코리아 아트 센터' 를 설립해 교포 관련 음악회의 대부분을 기획하고 프로듀스하는 공연 기획자 역할도 했다.
리한우 역시 형 리철우와 마찬가지로 아코디언 연주자로 음악 생활을 시작했고, 1960년 4월에 외갓집 사람들 대부분이 북송선 편으로 북한에 이주할 때 따라갔다. 이후 작곡가이자 음악연구사로 활동하면서 윤이상음악연구소 연구원을 맡기도 했고, 학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이 때문에 이 두 형제가 북한에서 음악회를 열거나 작곡집을 낼 때도 김홍재의 이름이 같이 언급되기도 했다. 하지만 김홍재가 국적을 한국으로 바꾼 후에는 쏙 들어가버린 듯 하다. 에휴...
1982년에 모교인 고베 조선고급학교 출신 후배인 김미순과 결혼했고, 각각 1983년과 1987년 생인 장남 김정윤과 차남 김정문 둘을 두고 있다.
金洪才, 1954.10.10~
재일교포 지휘자이자 전 광주시립교향악단 상임 지휘자. 2010년 현재 국적은 한국으로 되어 있다.
1. 약력
효고현 이타미 시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초중고등학교 교육은 모두 현내 조선학교들에서 받았으며, 아마가사키 조선중급학교 재학 중 취주악 동아리에 들어가 클라리넷을 배웠다. 고베 조선고급학교를 졸업한 뒤 1973년에 사립 대학교인 도호가쿠엔대학 음악대학에 클라리넷 전공으로 입학했는데, 조선적 재일교포로서 일본 음대에 들어간 최초의 학생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지금도 국적이 조선적이고, 초중고 교육 과정을 모두 조선학교에서 수료한 재일교포는 일본의 국공립 대학교에 진학하는 것이 원칙적으로 불가능한데, 그나마 도호가쿠엔은 사립이었고 당시 음대 학장이었던 이구치 모토나리[1] 가 조선학교 학력도 일본 학교의 학력에 준하는 것으로 인정하는 대인배 기질을 발휘해 시험 응시를 허락하면서 극적으로 이루어진 입학이기도 했다.
도호 음대에 클라리넷 전공으로 입학한 후 지휘에 관심을 갖고 전향했다. 하지만 늦게 시작한 지휘 공부인 만큼, 본인은 모차르트 소나타를 치고 있을때 동기들은 협주곡을 치고 있었다며 자괴감을 느꼈다고 한다. 집안 형편도 넉넉치만은 않아 대학 4년 내내 아르바이트를 했으며, 노가다를 뛰기도 했고 오페라 공연 엑스트라, 클라리넷으로 잡다한 공연 등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했고 그렇게 번 돈으로 악보를 구매하였다고 한다.그리고는 음악 다방에서 본인이 신청한 클래식 음악이 나오기만을 기다리며 음악이 나오면 악보를 펴고 공부를 하는 등 꽤나 어렵게 공부를 한 듯 하다. 밥을 굶은 적도 많으며 아르바이트로 동포의 피아노 레슨을 하게 되었는데 그 집이 고깃집이여서 레슨을 가는 날 밥을 차려주어 유일하게 영양보충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고질병인 천식도 그 시절에 얻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2년여 동안 악보를 보는데 이골이 날 정도로 공부를 한 결과 2년 후 쯤에는 동기들과 비슷한 레벨에 이르렀다고 한다.
대학 3학년 때 학교의 관현악단 부지휘자 겸 지휘 연구생을 뽑는 오디션에 응시해 합격했고, 이후 오자와 세이지와 아키야마 카즈요시, 모리 타다시, 츠츠미 슌사쿠 등에게 지휘법을 배웠다[2] . 재학 중 도쿄 시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부지휘자로 활동하며 경험을 쌓았고, 1977년 졸업 연주회에서 오자와와 함께 공동 지휘자로 등장해 1부 무대를 지휘했다. 이듬해인 1978년 3월 14일에는 도쿄의 시부야 공회당에서 열린 도쿄 시티 필의 특별 연주회 무대에서 공식 데뷰했다.
이 때 공연 프로그램은 전체 연주 시간이 한 시간도 안될 정도로 매우 짧기는 했지만, 첫 곡부터 마지막 곡, 그리고 앵콜 곡까지 '''전곡이 모두 일본 초연'''이었던 공연이었다. 최성환의 관현악 '아리랑 환상곡' 과 김영규의 관현악 '청산벌에 풍년이 왔네', 윤충남의 피아노 협주곡 '조선은 하나다', 김영규와 김윤붕 공동 작곡인 교향곡 피바다, 그리고 앵콜로 연주된 고종환의 '임진강[3] ' 까지 모두 북한 작곡가들의 작품이었고, 이 때 녹음된 실황이 이후 데뷰 음반으로 묶여 제작되기도 했다. 최초의 조선적 출신 지휘자인 점 때문에 교포 사회에서 대단한 화제가 되었고, 이듬해 봄에는 평양에서 조선국립교향악단을 지휘해 공연과 녹음을 하기도 했다.
1979년 9월에는 3년 주기로 열리는 도쿄 국제 지휘콩쿠르에 참가했고, 여기서 2위 입상과 함께 특별상인 사이토 히데오 상을 최초로 수상해 화제가 되었다.[4] 콩쿠르의 1위 입상자에게는 해외 유학의 특전이 주어지고 있었지만, 김홍재의 경우 조선적이라 해외 유학을 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에 2위를 주는 대신 특별상을 같이 준 것으로 여겨졌다.
1980년 2월에는 다른 입상자 세 사람과 함께 삿포로와 도쿄, 요코하마, 나고야, 오사카, 후쿠오카 6개 도시에서 입상 기념 연주회를 지휘했고, 그 해 7월에는 200대 3의 경쟁률을 뚫고 지휘자 야마모토 나오즈미가 진행하는 TBS의 공개 연주회 프로그램인 '오케스트라가 왔다' 의 전속 지휘자로 발탁되어 신일본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비롯한 일본 각지의 관현악단을 지휘했다. 프로그램 종영 직후인 1981년에는 역시 NTV의 공개 연주회 프로그램인 '나의 음악회' 의 전속 지휘자로 영입되어 요미우리 일본 교향악단 등의 악단 및 일본 국내외 연주자들과 협연했다.
1981년부터는 도쿄 시티 필의 전임 지휘자가 되었고, 1985년과 1987년에는 나고야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교토 교향악단의 전임 지휘자를 겸임하기 시작했다. 1985년에는 한국 국적의 민단계 교포인 바이올리니스트 정찬우와 합동 연주회를 기획하기도 했지만, 한국에 머무르고 있던 정찬우가 출국금지크리를 먹는 바람에 무산되고 말았다.[5] 이렇게 한국과의 관계는 계속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북한과의 관계는 비교적 순조로워서 1987년에는 교토 교향악단을 이끌고 방북해 일본 관현악단 사상 최초로 평양과 원산에서 공연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1988년 7월에는 중국 베이징에서 중국 광파(방송) 교향악단을 객원 지휘했고, 교포 여성 1000명으로 구성한 합창단과 관현악의 협연 무대인 '1000명 콘서트' 를 오사카에서 지휘했다. 1989년에는 한민족의 화합과 통일을 주제로 한 '한겨레 음악회' 를 지휘하기 시작했으며, 첫 공연에서 윤이상의 관현악곡인 '광주여 영원히!' 를 지휘했다. 몇 달 뒤인 9월에는 일본 내 모든 직책을 사임하고 독일로 유학했고, 윤이상에게 개인적으로 현대음악 이론과 지휘를 배우면서[6] 1990년 10월에 평양에서 열린 범민족 통일음악회에 해외동포 지휘자로 참가했다.
음악회 참가 후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활동을 재개했고, 이 때부터 윤이상 관현악 작품들의 공연을 적극적으로 지휘하기 시작했다. 1991년에는 히사이시 조와 처음으로 협연 무대를 가졌고, 이듬해 도쿄 예술극장에서 신일본 필을 지휘해 협연한 실황은 음반으로도 발매되었다. 1992년 9월에는 뉴욕의 카네기홀에서 열린 제8회 한겨레 음악회를 지휘해 첫 미국 공연을 했고, 11월에는 윤이상 탄생 75주년 기념 음악제의 관현악 콘서트에서 신일본 필을 지휘했다.
1996년 3월에는 히사이시 조의 프로듀스로 도쿄 지하철 사린가스 살포사건 1주기 추모 음악회를 지휘했고, 1998년 3월에도 히사이시가 프로듀스한 나가노 동계 패럴림픽의 개막식 공연 지휘를 맡았다[7] . 같은 해 6월에는 와타나베 아키오[8] 음악상을 수상했고, 당시 일본에서 지휘자들에게 주어지는 양대 음악상을 모두 수상한 유일한 지휘자가 되었다.
2000년 6월에는 1985년에 개최하려다 무산된 정찬우와의 합동 연주회를 개최했고, 이 때 연주회 소식을 취재하러 온 KBS 제작진들이 만든 다큐멘터리가 방영되면서 한국에도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9] 그 해 10월에는 ASEM 한국 개최 기념 음악제에서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부소니의 피아노 협주곡[10] 을 아시아 초연하면서 한국 무대에 처음으로 등장했고, 이후 코리안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KBS 교향악단, 서울시립교향악단, 수원시립교향악단 등 남한 관현악단들을 객원으로 지휘했다.
2004년에는 통영 국제 음악제 개막 공연에서 윤이상의 오페라 '유령의 사랑' 을 아시아 초연으로 지휘했고, 이듬해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했다. 2006년 10월에는 국립극장에서 개최된 특별 연주회인 '겨레의 노래뎐' 에 출연해 처음으로 국악 관현악단을 지휘했고, 2007년 11월에 울산시립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로 취임해 2016년 10월까지 재임하였고 현재는 광주시립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다. 이외에 대전시립교향악단이나 대구시립교향악단 등의 연주회에서도 종종 객원으로 출연해 지휘하고 있다.
한국 국적을 취득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주요 활동지이자 거주지는 일본으로 되어 있고, '오케스트라가 왔다' 시절의 은인이었던 야마모토 나오즈미가 설립한 공연기획사인 밀리온 콘서트 협회의 전속 아티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2. 음악 성향
일본 출신 지휘자들 중에는 비교적 이례적인 존재로 여겨지는데, 극적이고 다이나믹한 음악 만들기로 '대륙적 지휘자' 라는 평가를 주로 받고 있다. 초기에는 공식 데뷰 연주회를 몽땅 북한 관현악곡으로 꾸민 뱃심에서도 볼 수 있듯이 민족주의 경향이 강한 지휘자로 여겨졌는데, 이는 자신의 정체성을 일본인이 아닌 조선인으로 확실히 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조선적=친북주의자 혹은 북한 국적자' 라는 편견으로 바라보는 일본인들에게는 거부감을 안겨주기도 했다.
이 때문인지 일본에서 맡은 직책도 주로 상임이나 음악감독 급이 아닌 그보다 한두 단계 아래인 전임 혹은 전속 지휘자였다. 그나마 취주악단인 오사카시 음악단의 수석 지휘자를 역임한 것이 등급 상으로는 가장 높은 직책인 정도. 하지만 국적이나 민족성 문제를 떠나 지휘 실력 자체는 높게 쳐주고 있다. 심지어 도호음대 출신 음악인들 중에는 오자와 세이지나 야스나가 토루[11] 와 동급으로 쳐주는 이들도 있다. 국내에서도 실력에 비해 저평가된 지휘자 1순위로 꼽히며 충분히 수도권 주요 악단을 맡을 실력임에도 지방 악단만 맡고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는 사람도 꽤 있을 정도다.
2000년 이후에는 한국에서도 코리안 심포니를 비롯한 서울 쪽 주요 악단의 상임으로 영입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12] , 그 후로도 몇 년동안 객원으로만 이곳저곳에서 활동하다가 2007년에야 울산에서 첫 상임 직책을 맡았다. 이미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인 탓인지, 높은 직책에 대한 야심은 그다지 많지 않아 보인다. 이는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로, 공연 스케줄을 보면 프로 관현악단보다는 대학 관현악단을 비롯한 아마추어 악단들의 연주회를 지휘하는 횟수가 많다.
북한 작품 외에 윤이상 작품의 전문가로도 유명하고, 교향곡 세 곡과 오페라 한 작품을 비롯해 10여 편의 작품을 레퍼토리에 올려놓고 있다. 작곡가가 아닌 지휘자로써는 직접 윤이상을 사사한 거의 유일한 한국인으로 윤이상 음악에는 대한민국에서는 단연 독보적이다. 다만 한국에서윤이상 작품의 공연 빈도는 낮다. 아무래도 조심스러운 편인 것 같다. 이외에도 초기부터 거의 매주 방송되는 방송 연주회에서 지휘한 만큼 일찍부터 그 나이 또래 지휘자 치고는 방대한 곡목들을 소화했고, 취주악부 활동으로 음악을 시작한 만큼 관악 음악의 지휘에도 정통한 인물로 소개되고 있다.
히사이시 조와 10년 넘게 공동 작업하며 네 장의 앨범에서 같이 협연한 이력에서 보듯이 굳이 클래식만 올리는 연주회만 고집하지도 않는데, 일본의 유명 재즈 뮤지션들인 트럼펫 주자 히노 테루마사나 피아니스트 타카하시 아이코 등과도 협연한 기록을 갖고 있다. 1999년에는 바이오하자드 1~3편의 OST 일부를 미야케 카즈노리가 관현악 편곡한 오케스트라 앨범의 녹음과 공연 때 신일본 필을 지휘하기도 했다. 한국에 처음 공식 출반된 김홍재 지휘의 음반도 히사이시 조의 1992년 콘서트 실황인 'Symphonic Best Selection' 이었다.
한국에서 클래식 영역에 속하는 앨범들은 신나라레코드를 통해 간간이 발매되고 있는데, 1978년 데뷰 콘서트의 실황 일부와 윤이상 관현악 작품들, 2001년에 개최된 K-클래식 콘서트 실황 등이 담겨 있다.[13] 하지만 남북관계 경색 때문에 나머지 북한 관현악 작품들의 녹음은 아직 국내 정발이 요원한 상태고, 그 외의 취주악 앨범이나 게임/애니메이션 음악 관련 앨범 등도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만 구할 수 있다.
이렇게 정통 클래식부터 북한 음악, 윤이상 작품을 비롯한 현대음악, 국악 관현악, 크로스오버까지 꽤 광범위한 활동상을 보여주고 있는 지휘자지만, 한창 경력을 쌓아나갈 수 있었던 리즈시절에 조선적 소지자로서 경험해야 했던 이런저런 차별과 한계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탓에 딱히 커다란 야망을 가질 수도 없었던 인물이기도 하다.
외국에서 유학하거나 음악 활동을 하고 싶어도 무국적 난민으로 간주되어 업무 비자는 커녕 관광 비자 신청도 힘든 조선적을 오랫동안 유지했고
[14] , 미사일 발사나 납북 일본인 문제 등으로 북일 관계가 악화될 때마다 북한 국적자로 간주되어 예정된 연주회가 취소되는 등의 온갖 압박을 받아왔다고 하는데, 북한으로 거처를 옮긴 친척들이 있음에도 한국 국적을 택한 것도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을 듯 하다.
김홍재는 400여편의 방대한 레퍼토리를 가지고 있으며 대부분은 1980년~1988년 일본에서 한창 전성기를 누리고 있을 때 익힌 것으로 보인다.방송 공연을 할 떄는 일주일에 한 번 방영되는 TV프로그램이고, 어느정도의 기간동안은 프로그램이 중복되면 안되기 때문에 매주 다른 곡을 준비하다시피 했고 악단을 지휘할 때도 두 악단의 전임지휘자를 겸직한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다양한 레퍼토리를 갖게 될 수 있었다.
이 많은 레퍼토리 중에서도 그는 특히 드보르작과 더불어 소위 말하는 국민악파와 민족적 성향이 강한 작곡가의 곡에 특히 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무국적 조선인의 삶을 50여년 동안이나 살아온 그의 인생이 어느정도 반영되어 있는 것이라고 보여진다. 하지만 베토벤, 모차르트부터 슈트라우스나 스트라빈스키까지 이르는 현대음악까지 능하며 김홍재가 지휘봉을 잡으면 소위 말하는 "평타는 친다" 소리를 들을만큼 레퍼토리 편식이 없는 지휘자이다.
그리고 지휘자로써 바통 테크닉이 매우 깔끔하고 정확하기로 소문 나있다. 과한 동작이나 표현을 최대한 자제하면서 악곡에 최적화된 정석적인 비팅을 구사하며 악기별 신호도 일일이 다 내주면서 정말 친절하게 지휘한다. 때문에 한 번이라도 같이 연주해본 연주자들은 연주하기 가장 편한 지휘자 순위권으로 꼽으며 협주자들도 매우 선호하는 지휘자이다. 인간성 또한 매우 좋다고 하며 연주자 하나하나를 정말 인간적으로 대해주고 한번도 윽박지르거나 다그치지 않는다고 하며, 리허설 때는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는 스스로 말하길 "권위적으로 연주자들을 억누르려 하는 지휘자는 내가 제일 싫어하는 지휘자의 상이다. 지휘자는 말이 아니라 지휘봉 하나로 연주자들과 교감할 수 있어야 한다" 고 언급한 바 있다.
3. 가족 관계
아버지인 김정민과 어머니 이판생은 모두 조선학교 교사로 정년 퇴임 때까지 재직하며 민족 교육에 힘썼고, 이 공로로 북한 정부로부터 공훈교원 칭호를 수여받기도 했다. 당연히 자식들도 모두 조선학교에서 교육받도록 했는데, 다만 일본이나 한국 국적으로 전환한 다른 교포들을 비하하거나 배척하는 등의 편협한 가치관을 심어주지는 않았다고 한다. 훗날 음악 활동을 할 때 민단계나 귀화 교포들과도 적극적으로 공연을 추진한 것도 어릴 적 가정 교육의 영향으로 여겨진다.
음악 재능은 주로 외갓집에서 물려받은 듯 한데, 특히 외삼촌 네 명은 모두 음악 활동을 하고 있었다. 외삼촌들 중 리철우와 리한우가 김홍재와 접점이 많은 인물들로 손꼽힌다. 리철우는 조선적을 유지하면서 일본에 거주하고 있고, 아코디언 연주자이자 작곡가로 활동하며 북한에서 공훈예술가 칭호를 받기도 했다. 김홍재가 음대에 입학하고 지휘자가 되기까지 뒷바라지를 해줬고, 이후에도 '코리아 아트 센터' 를 설립해 교포 관련 음악회의 대부분을 기획하고 프로듀스하는 공연 기획자 역할도 했다.
리한우 역시 형 리철우와 마찬가지로 아코디언 연주자로 음악 생활을 시작했고, 1960년 4월에 외갓집 사람들 대부분이 북송선 편으로 북한에 이주할 때 따라갔다. 이후 작곡가이자 음악연구사로 활동하면서 윤이상음악연구소 연구원을 맡기도 했고, 학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이 때문에 이 두 형제가 북한에서 음악회를 열거나 작곡집을 낼 때도 김홍재의 이름이 같이 언급되기도 했다. 하지만 김홍재가 국적을 한국으로 바꾼 후에는 쏙 들어가버린 듯 하다. 에휴...
1982년에 모교인 고베 조선고급학교 출신 후배인 김미순과 결혼했고, 각각 1983년과 1987년 생인 장남 김정윤과 차남 김정문 둘을 두고 있다.
[1] 프랑스 유학파 피아니스트로, 도호가쿠엔 음대 창립 발기인 중 한 사람이었다. 현재 한국의 태림출판사에서 라이센스 간행하고 있는 슌주샤 피아노 독주곡 악보들의 대부분도 이 사람이 편집했다.[2] 후에 보스턴 심포니를 맡고 있는 오자와 세이지가 김홍재에게 전화를 걸어 미국으로 귀화해서 본인 밑에서 계속 수학하지 않겠냐고 권유했으나 조선적이라는 개념을 설명하기도 어렵고 또 김홍재 자신이 스스로 조국에 대한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정중히 거절했다고 한다. 오자와 세이지는 다소 섭섭하지만 뜻을 존중한다고 했다[3] 2번 항목의 노래로, 김홍재 자신이 관현악 편곡한 버전[4] 사이토 히데오는 첼리스트 출신 지휘자로, 일본 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지휘법 교재로 곧잘 쓰이는 '사이토 메소드' 의 창안자이기도 하다. 사이토는 1974년 죽기 직전까지 도호음대 관현악 지휘 교수로 재직 중이었고, 김홍재도 그의 지휘로 리허설과 공연을 경험한 바 있었다. 김홍재의 스승이자 일본인 명지휘자인 오자와 세이지가 어렸을 적 사이토 히데오 밑에서 도제식으로 공부했다고 알려져 있다.[5] 연주회의 무산에는 정치적 이유가 가장 크게 작용했다. 김홍재는 총련계 민족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북한 국적으로 흔히 오인하는 조선적이었기 때문에, 한국 정부에서는 정찬우가 김홍재와 합동 연주회를 하는 것을 이적 행위로 판단했다.[6] 윤이상 선생님은 제자들에게나 본인 스스로에게나 매우 엄격하신 분이였다고 처음 윤이상 선생님을 만났을때는 너무 무서웠다고, 함께 공부를 할 때도 스승의 엄격함 때문에 가시방석에 앉아있는 것 같았다고 밝힌 바 있다.[7] 일본에서 열리는 올림픽에 일본인이 아닌 외국인 그것도 조선적 출신의 인물이 지휘를 맡았다는 것 자체가 일본 내에서 김홍재의 위상을 그만큼 높이 산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8] 핀란드계 일본인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지휘자로, 시벨리우스 등 북유럽 작곡가들의 관현악 작품을 일본에 적극적으로 소개해 유명한 인물이다.[9] 사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에도 월간 예술잡지 '객석' 에서 일본 통신원이 몇 차례 인터뷰와 공연 기사를 올린 적이 있었지만, 일부나마 공연과 리허설 장면이 남한에 방영된 것은 이것이 최초였다.[10] 총 연주 시간 약 74~77분. 기네스북에 '세계에서 가장 긴 피아노 협주곡' 으로 올라가기도 했던 자비심 없는 곡이다(...).[11]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서 동양인 최초로 콘서트마스터(악장)를 역임한 바이올리니스트.[12] 후에 kbs교향악단 상임지휘자 자리에 거론되기도 하였다[13] 다만 2008년에 데뷰 30주년 기념 앨범으로 출반된 음반들 중 두 장짜리 앨범의 경우, 마지막 수록곡을 빼면 모든 곡이 반음 높은 음높이로 잘못 편집된 치명적인 실수를 담고 있으니 주의.[14] 스승들이 해외 콩쿠르 참가를 권했지만 이와 같은 이유때문에 영국 르바트 콩쿠르, 스웨덴 비커간테르리 콩쿠르, 덴마크 국제 콩쿠르, 독일의 카라얀 콩쿠르 참가를 포기해야만 했다. 여권을 만들 수 없으며 무국적자 신분으로 비자 신청을 해도 최소 6개월 이상이 소요되고 이마저도 승인이 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