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자와 세이지

 




'''小澤 征爾'''

'''본명'''
오자와 세이지(Seiji Ozawa)
'''출생'''
1935년 10월 1일(89세)
만주국 펑톈[1]
'''직업'''
지휘자

2015년 10월 1일, 마르타 아르헤리치, 사이토 키넨 오케스트라와 함께한 본인의 80세 생일 축하 공연
1. 개요
2. 생애


1. 개요


일본 출신의 세계적인 지휘자.[2]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보스턴 심포니, 사이토 키넨 오케스트라, 빈 국립 가극장의 음악감독을 역임했으며,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주요 객원 지휘자로 활동하여 두 악단의 명예 회원으로 추대되었다.
동아시아인으로 최초로 서구에서 유명해진 지휘자다. 유명해진 정도가 아니라 거장의 반열에 오른 유일한 동아시아인 지휘자. 서양인들이 자신들의 최후의 보루로 여겼던 영역 중 하나인 클래식 지휘 분야에서 세이지 오자와가 세계적인 지휘자로 인정받으면서 '동아시아인도 클래식 지휘 분야에서 성과를 낼 수 있다, 그것도 최고 수준으로'라는 것을 처음으로 입증해 보였다. 동아시아인이 머리는 좋아도 워크 홀릭에다가 문화를 즐길 줄 모른다는 편견이 있던 서양인의 인식을 전환하는데 큰 역할을 한 인물 중 하나다. 오자와는 과거에 동아시아인이 서양인의 음악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수없이 받았다. 오자와가 악단을 지휘하는 모습을 보면 단순히 지휘봉을 휘두르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도 음악에 심취한 듯 흥에 겨워 들썩거리는 퍼포먼스가 특징이다.
동양인으로서 인도 출신 주빈 메타가 세이지 오자와보다 조금 먼저 성공했지만, 인도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아리아인은 인도-유럽어족으로서 기본적으로 유럽인과 동일한 인종으로 간주되는데다가 주빈 메타는 인도에서도 이란계인 소수 민족 파르시 출신이기 때문에 인종적으로 서양인과 동일하다. 때문에 오자와의 성공은 메타의 성공과 차별화된다.

2. 생애


1935년 현지에서 치과의사를 하면서 동시에 만주국 협화회 장춘지부장이었던 오자와 가이사쿠의 3남으로 태어났다. 이름은 당시 가이사쿠가 친하게 지내던 만주군 참모인 이타가키 세이지로(板垣 征四郎)와 이시와라 간지(石原莞爾)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
1941년 중국 베이징에서 지내다가 아버지를 제외한 전 가족들이 일본 도쿄로 건너오게 된다.
1945년 우연히 피아노를 치는 걸 보고 재능을 알아챈 아버지[3]와 큰 형은 아버지가 시계를 팔아서 산 피아노를 리어카에 싣고 집에 가지고 왔고, 이 피아노를 세이지는 열심히 연주했다고 한다.
1948년 세이죠 학원 중등부에 입학하는데, 당시 집안이 상당히 가난했기에 어머니가 부업까지 하면서 가르쳤다고 한다.
1951년 세이죠 학원 고등부에 입학하게 되자 어머니의 먼 친척이자 지휘자인 사이토 히데오가 운영하는 지휘학원에 입학했고, 사이토의 권유로 1952년 토호여학교 고등부(남녀공학)에 편입하며 1955년 토호단기대학에 입학하여 1957년 졸업하게 된다.
졸업 이후 군마 교향단에 가거나 도쿄 필하모니 부지휘자로 활동하던 중, 1958년 지인의 도움으로 1959년 프랑스 유학을 가게 된다.
1959년 Besançon 국제 음악제에서 1위를 하는 등 유럽 현지에서 제법 활약을 하게 되었다.
1960년에는 미국 보스턴에서 상을 받는다. 이때 마음에 들어한 레너드 번스타인에 의하여 1961년 뉴욕 필하모닉의 부지휘자(assistant conductor)가 되었다.
1962년 샌프란시스코 심포니를 지휘하며 지휘자로 데뷔했다.
1965년 토론토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로 취임하여 1969년까지 재임했다.
1968년 러시아혼혈인 이리에 미키[4]와 결혼하게 된다. 두 사람 사이에서는 작가 오자와 세이라, 배우 오자와 유키요시가 태어난다.
1970년 샌프란시스코 심포니의 상임지휘자로 취임하여 1977년까지 재임했다.
1973년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에 취임하여 빈 국립 가극장 음악감독에 취임하던 2002년까지 29년간 재임하여 악단 최장수 지휘자가 되었다. 보스턴 심포니는 1994년 새 탱글우드 콘서트 홀을 건립하여 "세이지 오자와 홀"이라고 명명하였다.
1980년대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주요 객원 지휘자 중 한 명이 되었으며, 로린 마젤, 리카르도 무티, 다니엘 바렌보임, 클라우스 텐슈테트 등과 함께 베를린 필의 차기 상임지휘자 후보군으로 꼽혔다. 80년대 후반 카라얀을 대신해서 베를린 필의 해외순회 공연을 이끌기도 했다. 그러나 1989년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로는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선출되었다.
1980년대 이후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주요 객원지휘자가 되었으며, 특히 1990년대 빈 필을 가장 자주 지휘하는 핵심 지휘자 중 한 명이 되었다. 또한 빈 필의 해외순회 공연을 여러차례 이끌기도 했다.
1992년 일본 내외의 명연주자들을 모아 사이토-키넨 오케스트라를 창단했다.
2002년 1월 1일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신년음악회를 지휘했다.
2002년 빈 국립 가극장의 음악감독으로 취임하여 2010년까지 재임했다.
2010년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명예 단원으로 추대되었다.
2016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명예 단원으로 추대되었다.
하버드 대학교를 포함한 5개 대학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가족도 여러모로 화려한데, 먼저 그의 아들인 오자와 유키요시는 배우이다.[5] 그의 둘째 형인 오자와 토시오(小澤俊夫)는 일본의 유명한 독문학자이며[6], 토시오의 아들이자 세이지의 조카인 오자와 켄지는 일본 시부야계를 대표했던 가수이자 사회운동가이다.

[1]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 성 선양[2] 태어난 곳은 중국이다. 2002년 빈 필하모니 신년음악회 당시 라데츠키 행진곡을 연주하기에 앞서 다양한 국적의 연주자들이 자신들의 모국어로 새해인사를 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오자와 세이지의 바로 앞 차례에서 서양인 연주자가 일본어 인사를 했다. 관중들이 폭소하는 와중에 오자와는 중국어 새해인사를 했다.[3] 가이사쿠는 가족들이 도쿄로 가고 나서 베이징에서 여러가지로 활동했고, 전쟁 말엽에는 중일전쟁에 대한 일본군의 태도를 강하게 비난했는 데 당시 그의 뒷배였던 이타가키나 이시와라는 관동군에 없었지만 그들과의 친분 덕택에 결국 일본군에 의하여 일본으로 강제 추방처리되었는 데 그리고 얼마 안 가 일본이 패전하게 되었는 데 이때 중국측은 그를 현상수배했다고 한다.[4] 이리에의 조부는 러시아 백군으로 활동하다 내전 패전 후 만주로 건너갔다. 이후 도쿄로 유학을 간 이리에의 부친은 일본 여성과 결혼하여 한동안 도쿄에서 살다가, 만주에 볼 일이 있어서 간 직후 행방불명되었는데 2019년 NHK 패밀리히스토리 방송을 통해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패전 직전 만주로 간 직후 소련군이 만주로 진격하는 바람에 도망치지 못한 채 그대로 포로로 잡혀, 스파이죄 등으로 징역 25년형을 선고받아 카자흐스탄 강제수용소에서 수감되어 있다가 수감 9년째에 사망했다.[5] 유키요시는 아나운서 타키가와 크리스텔과 교제하였고 결혼 발표까지 했지만, 크리스텔의 섹스 비디오 스캔들이 터진 이후 결별했다. 이후 크리스텔은 2019년 정치인 고이즈미 신지로와 결혼했다.[6] 중국 시절의 일본 제국의 병폐를 직접 본 사람이다 보니, 그는 과거에 대한 반성없는 일본에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참고로 이 분은 아주 어렸을 때 얼굴쪽에 심한 화상을 입은 후유증으로 인해 학창시절 주변에서 이러한 것때문에 이지메를 당하는 등 고생을 제법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