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르 1세
1. 어린 시절과 즉위
어머니 예카테리나 2세와 사이가 안좋던 파벨 1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파벨 1세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 예카테리나 2세로부터 떨어져 당시 러시아 차르였던 옐리자베타 여제 밑에서 키워졌듯이, 알렉산드르 1세도 (동생인 콘스탄틴과 함께) 태어나자마자 부모로부터 떨어져 할머니인 예카테리나 2세 밑에서 교육받고 자랐다. 자유주의적인 교육을 받았다고 전해지나 예카테리나 말년에는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보수적으로 기울었고, 황실 교육은 상대적으로 널널한데다가 알렉산드르와 콘스탄틴 모두 이른 나이에 결혼으로 교육이 중단되어 깊은 수준의 교육을 받지는 못했다.[1]
아버지인 파벨 1세는 약간의 정신이상이 있었고[2] 피해망상이 암살 의심으로 발전했는데 정적들이 이를 이용하여 가족들이 파벨 1세를 암살한다는 헛소문을 내서 가족들을 궁정에서 내쫓기도 했다. 파벨 1세는 귀족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예카테리나 2세 시절의 정책들을 파기해 귀족의 특권을 제한하고 차르 중심적으로 바꾸려 했지만 즉위 5년만에 불만을 품은 귀족들에게 끔살당했다.
그리고 얼떨결에 황위에 오른게 알렉산드르 1세.
이때 알렉산드르 1세는 많은 죄책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의 암살 계획을 그도 알고 있었고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딱히 막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당시 상황은 아버지 파벨 1세가 자신을 암살한다는 음모론에 빠져 황후이자 알렉산드르 1세의 친모인 마리아 표도로브나(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도로테아)와 이혼하고, 그 사이에서 난 자식들(자신과 둘째 남동생, 셋째 남동생, 막내 남동생)의 계승권까지 박탈하려 할 정도로 매우 좋지 않았다. 사전에 암살을 알고 있었고 일이 벌어지고 난 후 죄책감까지 느꼈음에도 암살을 막지 않은 것은 바로 이 때문. 따라서 암살 후에도 미적지근한 모습을 보였는데 암살자들을 추방이나 처형하지도 않고 포상하지도 않았고 그냥 면직하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즉위교서에서도 아버지 파벨을 추모한다면서 반대로 정책은 예카테리나 시대로 돌아간다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다.
즉위년도는 1801년. 이미 예카테리나 대제 때부터 시작된 프랑스 혁명은 러시아 상류층에서도 걱정하고 있었는데, 하필 알렉산드르 1세가 즉위할 때 서유럽에서 떠오른게 이미 프랑스를 넘어 이 시기 유럽 역사의 아이콘이자 고유명사가 되어버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였다. 여기서부터 자유주의자로 교육받아 왔지만 혁명의 물결에 맞서 이를 탄압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알렉산드르 1세의 치세가 시작된다.
2. 나폴레옹 전쟁
나폴레옹과의 악연의 스타트를 끊게 만든 건 바로 아우스터리츠 전투다. 러시아는 제2차 대프랑스 동맹에서 1799년에 강화하고 나선 손을 빼고 있었는데 오스트리아가 SOS를 치자 유럽의 균형을 위해 다시 참전했다. 알렉산드르는 군사 면에서 배운 바도 없었는 데다[3][4] 젊은 혈기로 미하일 쿠투조프의 말을 씹고 적을 가볍게 여긴 탓에 여기서 무참히 깨졌다. 이후 러시아군은 독일.폴란드 원정에서도 10만 대군을 파견하여 나폴레옹에 맞서지만 프리틀란트 전투에서 패전하자 차르는 아우스터리츠에서의 호전성과 달리 군과 신하들의 반대를 거부하고 결국 틸지트 조약을 체결하였다. 여기서 패전하긴 했지만 러시아를 유럽 지배의 파트너로 삼고 싶어한 나폴레옹의 구상과 개인적 호감 등이 더해져서 양국은 명목상으론 동등한 대우를 받고 강화한다. 1809년엔 스웨덴이 영국 쪽으로 기울자 러시아를 같은 편으로 묶어두려던 나폴레옹에게 핀란드 점유를 인정받고 1809년부터 핀란드 대공을 겸한다.
하지만 대륙 봉쇄령은 러시아의 국익에 도움이 안 되었기 때문에 대륙 봉쇄령을 대놓고 씹으며 여전히 영국과 교역을 계속했고, [5] 거기다가 프랑스는 프랑스대로 대륙 봉쇄령을 강화하려고 라인강 서안의 영토에만 프랑스 제국 영토를 둔다는 합의를 나폴레옹이 깨고 라인강을 넘어 엘베강 하구의 항구까지 프랑스령으로 합병하는데 여기엔 외가 친척이 다스리는 올렌부르크 공국도 포함되어 있었다. [6] 이에 항의하여 1811년 프랑스 대사 쿠라긴 공작을 소환하기에 이른다. 결국 나폴레옹은 다음해 알렉산드르를 굴복시키기 위해 러시아 원정에 나섰는데 처음에는 무력시위 정도로 끝나겠지 하고 심각한 충돌이 일어날거라곤 예상치 못했다고 한다. 프로이센 국경 코앞인 빌뉴스(현 리투아니아)에서 댄스파티 중에 소식을 듣고 황급히 도주. 겨우 4일 후 빌뉴스는 나폴레옹이 접수하게 된다.
군사 분야는 황태자인 동생 콘스탄틴이 원래 담당했기 때문에 군무에는 전혀 아는 바가 없지만, 남북전쟁 당시 정치인들이 북군에게 했던 것 마냥 궁정에서 일일히 장수들을 컨트롤하다가 여러 병크를 겪은 후 결국 신하들의 간청에 총사령관을 임명하는데 1군 사령관이자 군무장관이던 바클라이 드 톨리[7] 를 임명했으나 어디까지나 바지사장이었다. 러시아 원정의 승인으로 꼽히는 청야전술을 전혀 이해도 못하고 승인하지도 않았다. 거점이 적에게 넘어갈 때마다 총사령부를 질책했고 사사건건 전술에 간섭했다. 결국 스몰렌스크가 함락되고 나선 드 톨리를 경질하고 러시아인 쿠투조프를 그 자리에 앉혔다.[8] 그러나 이후에도 간섭은 그치지 않아 쿠투조프가 모스크바를 포기할 때부터 나폴레옹을 추격할 때까지 사사건건 전술은 물론 인사문제까지 시어머니마냥 간섭했다. 심지어 쿠투조프의 참모장 베니히센[9][10] 을 첩자로 활용하여 총사령부의 동향을 감시했고 동생 콘스탄틴 대공을 보내 군권을 인수하려고도 했으니 군사적으론 거의 똥별이나 다름없었다.
1813년 초반엔 새로운 징집에 반대하고 국경 밖에서 싸움엔 이길 확률이 떨어진다 하여 새 전쟁을 반대하는 쿠투조프를 경질하려 했으나 국가 원로에다 큰 공을 세웠기에 박대는 했지만 경질은 못하는데 쿠투조프가 쇠약해져 알아서(?) 사망하자 비트겐슈타인을 새로 임명한다. 이후 비트겐슈타인이 또 삽질을 하자 이전에 이용해먹고 버렸던 바클라이 드 톨리를 다시 임용했다.
드레스덴 전투 때는 동맹국이 승기를 잡아 프랑스군을 공격하면 승리할 확률이 높았는데 알렉산드르가 참관하러 온다고 하루를 기다리는 바람에 공격 투입시기를 놓쳐서 패전.
그러나 '''결국'''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프랑스군에게 괴멸적인 타격을 입히고 나폴레옹을 몰락시켰다. 그리고 1814년, '''드디어''' 파리에 입성했다.
3. 나폴레옹 시대 이후 빈 체제
'''유럽의 해방자'''라고 불리며 열렬한 지지를 받은 알렉산드르 1세는 당연히 빈 회의에서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 영국의 외무장관 캐슬레이 자작(제 2대 런던데리 후작)와 함께 가장 큰 영향을 발휘하였다. 빈 회의에서 러시아가 폴란드 전체를 차지하고 프로이센령 폴란드(포젠)을 러시아에 넘기는 대신 프로이센이 작센을 모두 차지할려고 결탁하였으나 러시아의 힘이 커지는 것을 원하지 않은 오스트리아와 영국이 견제하였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입장을 굽힐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폴란드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아무도 원하지 않았던''' 신성 동맹을 결국 체결시키며 크림 전쟁때까지 유럽에서의 대규모 전쟁을 막는다.
하지만 신성 동맹 제의에서 알 수 있듯이 알렉산드르 1세는 젊을 적 시기의 계몽주의에 크나큰 실망을 하게 되었고, 이후 대표적인 반동 군주로 알려지게 된다. 예를 들어 초기엔 계몽주의 성향이었던 스페란스키를 중용하고 정부를 체계화하는데 주력했지만, 이후 보수적인 아렉쳬예프를 중용하여 정책을 180도 돌린다. 거기에 미신 같은 것에 빠져들었다고 하니,[11] 안 그래도 상대적으로 막장이었던 기존의 차르 체제와 러시아 사회구조에 불만이 쌓인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알렉산드르 1세는 일단은 구국의 영웅이었기 때문에 재위 중엔 혁명은 모두 꿈도 못꿨다. 그는 황후 바덴의 루이제와의 사이에서 두 딸만을 남겼고 아들이 없었기에 제위는 동생에게 넘어갔다.
결국 알렉산드르 1세가 죽자마자 계몽적이었던 둘째 동생 콘스탄틴을 차르로 추대하려는 데카브리스트의 난이 일어났다. [12] 그리고 이걸 진압하며 즉위한 알렉산드르의 셋째동생 니콜라이 1세는 러시아의 반동 체제를 더욱 더 굳건히 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데카브리스트 반란을 주도한 자들은 대부분 알렉산드르 1세가 세운 대학들에서 지식을 배운 학생들이었거나 알렉산드르가 나폴레옹 역관광시킬 때 파리로 데려가 파리물(...)을 먹고 온 젊은 장교들이었다. 결국 알렉산드르 1세는 후반기 통치기를 통해 러시아의 차르중심적 절대왕정을 고수하는 정책을 세우게 되지만, 19세기 후반에 러시아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는 러시아의 인텔리겐치아 계층 역시 알렉산드르에 의해 태어난 것이다. 여기서 우여곡절은 니콜라이 1세 문서 참조.
참고로 나폴레옹 전쟁을 다룬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도 등장하는데, 역시나 인자한 멍청이 포지션이다.
4. 표도르 쿠즈미치 전설
공식적으로는 크림 반도로 요양을 가 있는 도중에 사망했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러시아에서는 알렉산드르 1세가 사실 크림 반도에서 사망하지 않고 은둔하여 성직자가 되었다는 도시전설이 널리 퍼져있다. 19세기 시베리아에서 활동했던 정교회 성직자이자 훗날 러시아 정교회의 성인으로 시성된 '표도르 쿠즈미치(Фёдор Кузьмич)'가 사실 은둔한 알렉산드르 1세라는 이야기다. 알렉산드르 1세는 부황인 파벨 1세 암살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했던 일에 대한 죄책감과 젊었을 적 자신이 품었던 계몽주의, 자유주의적 통치의 꿈과 달리 빈 체제 이후 자신이 직접 반동 정책을 펼치게 되면서 겪게 된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나타난 내적 갈등, 1824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대홍수로 발생한 시민들의 막대한 인명 피해를 목격하고 난 뒤에 든 절망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현실 정치에 큰 환멸을 느꼈다고 한다. 재위 말년, 차르는 황후와 측근들에게 평범한 시민이 되어 스위스에서 살고 싶다고 이야기하거나 수도원으로 가서 성직자와 장시간 독대를 하는 등 권력에 대한 미련을 버리는 모습을 보였다.
그 후 알렉산드르 1세는 황후와 함께 크림반도로 요양을 가고 곧 사망하였다. 하지만 알렉산드르 1세가 사망할 무렵 그때까지 계속 써 왔던 황후의 일기가 비어 있었고 임종 의식도 제대로 치루어지지 않는 등 수상한 조짐들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더군다나 임종 당일에 차르의 건강은 그렇게 나쁜 편이 아니었다.
황제의 최측근들 역시 미심쩍은 모습을 보였는데 알렉산드르 1세의 사망 후 측근들이 차르의 관을 여는 것을 거부했으며, [13] 주치의는 차르의 사망 증명서에 서명하는 것을 거부했다.
얼마 뒤 시베리아에서는 표도르 쿠즈미치라는 노인이 출현하였는데, 치유 능력으로 유명세를 펼치기 시작하였다. 놀랍게도 이 성직자의 행동거지나 모습이 10년 전에 죽은 알렉산드르 1세와 똑같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심지어 알렉산드르 1세의 하인이 표도르 쿠즈미치를 만난 후 '''"이 분은 선황이셨던 알렉산드르 1세 폐하이시다."''' 라는 말을 할 정도로 모습이 흡사했다고 한다. 농노 출신이라는 사람이 궁정예법을 잘 알고 있었고 알렉산드르 1세의 파리 입성에 대해서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니 논란이 될 만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표도르 쿠즈미치가 알렉산드르 1세라는 소문이 러시아 전역에 쫙 퍼졌다. 그 후 이러한 소문에 부담을 가진 쿠즈미치가 은거한 후에는 이게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후일 조사한 것에 따르면 '''알렉산드르 1세의 관은 텅 비어 있었다고 한다.''' 출처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2012년 1월 8일에 이 전설을 방영했다. 여기서는 성직자가 아니라 광부(...)로 등장한다.
5. 기타
- 18세기부터 모호크 머리를 했던 패션 선구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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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폴레옹과 싸운것이 제일 유명하지만 남쪽으로 동유럽과 카프카스 지방을 점령하여 러시아의 영토를 넓히기도 했다. 강대국에서 호구로 바뀌어가던 오스만 제국을 여러차례 털어먹고 심지어 카프카스 산맥 남쪽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페르시아 카자르 왕조도 쳐바르며 카프카스 일대의 소국들을 각개격파 하였고 이때 정복한 땅들은 러시아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14] 그리고 체첸과 러시아의 피로 얼룩진 갈등의 역사가 시작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재위기간] 24년[1] 어쨌든 자유주의 성향으로 알려져서 나폴레옹이 알렉산드르에게 어느 정도 개인적인 호감을 느끼게 된다.[2] 지금에 와선 훗날 정적들에게 과장된 면이 많다고 한다.[3] 군대는 동생 콘스탄틴 대공이 군인 교육을 받고 황실을 대표하여 담당했다.[4] 물론 그렇다고 콘스탄틴 대공이 전쟁에 도움이 많이 됐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유능한 스코틀랜드 출신 독일 태생의 바클라이 드 톨리를 헐뜯는 등 전쟁 전반에 걸쳐서 형처럼 똥별 짓을 더 많이 했다.[5] 러시아는 산업이 낙후되어 수입을 하려면 곡물을 수출해야 하는데, 산업 혁명으로 농산물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영국과의 교역이 끊긴다면 러시아에게 큰 손실이었다.[6] 나폴레옹이 청혼한 넷째 여동생을 여기에 시집보내버리기도 한다. 올덴부르크공의 후계자와 결혼.[7] 발트 태생으로 조상은 스코틀랜드계다. 러시아군 주류와 달리 청야전술을 시도해서 표트르 바그라티온을 비롯한 주전파와 극심한 갈등을 빚었고 미하일 쿠투조프도 처음엔 드 톨리를 무지하게 깠다. 독일에서 망명한 외국인 출신 장교들을 등용했으며 여기엔 클라우제비츠도 있었다. 현재에는 그의 전술이 옳다고 하지만 당시엔 외국인에 대한 배타적 감정과 청야전술로 겁쟁이 독일인이라 무지하게 까여서 결국 해임되나 총사령관만 해임되고 1군은 계속 맡는다.[8] 쿠투조프는 원래 청야전술에 부정적이었고 "한번도 싸워보지도 않고 모스크바를 내주진 않겠습니다." 하고 차르를 안심시켰는데 실상 실무를 맡고보니 생각이 달라져서 나중엔 "모스크바는 싸워보고 포기한다는거지 포기 안한다고 하진 않았는데요?" 드립을 쳤다.[9] 독일 출신으로 아버지 파벨 1세의 암살과 관련이 있었다. 프리틀란트 전투의 지휘관이었는데 레프 톨스토이의 평으론 지휘보단 전투보고서 작성 실력이 월등히 높아 문관이 어울릴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다.[10] 실제로도 베니히센은 나폴레옹의 책략에 크게 낚여 프리들란트 전투에서 아일라우에서 얻은 이점을 상당부분 날려 먹었다. 비록 상대가 나폴레옹이었다고 쳐도 이때 베니히센의 지휘는 상당히 졸렬했기에 러시아에서도 크게 까여 결국 베니히센은 짤리게 된다.[11] 나폴레옹 전쟁 이전에는 종교에 무관심했지만, 나폴레옹 전쟁을 치르면서 열렬한 종교인이 되어 러시아 원정에서 나폴레옹이 이끈 프랑스 대군을 몰아낸 다음 프랑스 본토로 진군하는 도중에는 길에서 잠시 쉬는 시간마다 성경을 꺼내서 읽을 정도로 변했다. 심지어 인간이 성욕을 끊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황당한 사이비 종교인 거세파(...)의 교리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기까지 했다. [12] 콘스탄틴 대공은 알렉산드르 사망 전에 자식이 없는 알렉산드르의 황태제였는데 1820년 귀천상혼한데다가 계승권도 포기했다. 그래서 17세 연하 동생 니콜라이에 양보하는데 자세한 건 니콜라이 1세 문서 참조.[13] 출처 : "알렉산드르 1세의 후기 생애" 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14] 사실 제정 러시아의 기본 강령이었던 남하정책의 일환으로 200여년에 걸쳐 지속적으로 이뤄지던 일이다. 이때 호되게 털린 오스만과 페르시아는 나폴레옹에게 사절단을 보내어 '러시아 좀 막아줘요!' 하며 사정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