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흐메드 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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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어: محمد علی پاشا المسعود بن آغا(Mehmed Alī Pāşā el-Mes‘ūd bin Āġā)
아랍어: محمد علي باشا (Muḥammad ‘Alī Bāshā)
알바니아어: Mehmet Ali Pasha
터키어: Kavalalı Mehmet Ali Paşa
1769년 3월 4일 ~ 1849년 8월 2일
1. 개요
2. 생애
3. 평가
4. 이름 논란


1. 개요


오스만 제국의 이집트 총독으로, 이집트 최후의 왕조이자 무함마드 알리 왕조 이집트 왕국의 시조.

2. 생애


지금은 그리스 영토인 오스만 제국마케도니아 카발라의 알바니아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일찍이 여의고 숙부 밑에서 자랐으나 숙부에게서 그 능력을 인정받아 카발라의 징세관으로 활동하였고 뒤이어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이집트를 침공했다가 실패하고 철수하자 숙부에 의해 이집트를 재점령하기 위해 이집트로 파견된 카발라의 알바니아인 용병 부대의 부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집트에 온 알리는 당시 혼란스러웠던 이집트 상황 속에서 자신의 권모술수를 한껏 발휘하여 이집트의 권력을 장악하는데 성공했고 혼란스러운 이집트를 평정한 공으로 1805년 술탄 무스타파 4세로부터 이집트 태수를 임명받았다. 이후 알리는 현지 군벌로 군림해온 맘루크들을 숙청하고 독재권력을 강화해 사실상 국왕으로 군림했으며, 총독직을 세습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과 전쟁하기도 했다. 또한 이집트의 근대화에 많은 족적을 남겼다.
당시 이집트는 셀림 1세맘루크 왕조를 멸망시키고 이집트를 영토로 편입한 이래 오스만의 지배 하에 있긴 했었으나 실질적으로는 맘루크 왕조 멸망 이후에도 계속해서 특권층으로 군림하던 맘루크들이 반자치적으로 다스리던 지역이었고, 수도 코스탄티니예에서 직접 파견한 태수한테 반항적으로 굴고 수틀리면 반란을 일으키는 맘루크는 아주 큰 골칫거리였다. 하지만 맘루크의 저항을 분쇄하고 이집트를 중앙정부에 귀속시키는 일은 당시 서서히 기울어가고 있던 오스만의 상황으로는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침공해와 맘루크를 박살을 내버리더니 그 나폴레옹은 영국군한테 쫓겨 프랑스 본국으로 돌아가고 영국군 역시 얼마 안 가 이집트에서 철수하자 이집트에는 권력의 공백이 발생하였다. 맘루크가 쇠약하진 틈을 타 이집트를 장악하려는 중앙정부와 이집트의 권력을 되찾으려는 맘루크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였고 이런 상황에서 이집트 한가운데에 놓이게 된 메흐메트 알리에게 있어서 이 권력 공백은 자신에게 충성하는 알바니아인 용병을 이용해 이집트를 장악할 절호의 기회였다.
이런 상황에서 알리는 정적들을 하나씩 제거하는데, 특히 당시 이집트의 토착 지배층이었던 맘루크의 숙청 과정은 기술할만 하다. 그는 먼저 자신이 연출한 약탈을 통해 울라마, 상인, 민중을 선동해 맘루크를 몰아냈다. 또한 당시 제국 행정부가 임명한 이집트 태수를 허수아비로 만든 뒤 알바니아인 부대를 통해 이집트 전역에 조세행정을 설치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발생한 반란들은 알바니아인 부대로 진압함과 동시에 이 알바니아인 부대도 소모시킨다.[1] 종국에는 몰아냈던 맘루크들에게 환영식을 열어준다는 이유로 카이로에서 학살을 일으켜 이집트에서 절대권력을 구축한다. 이를 통해 몽골 침공 이후 이 지역을 지배했던 맘루크 계층은 완전히 소멸되었다.
또한 이슬람 원리주의를 이끄는 와하브 운동의 불길이 커지면서 군벌세력화되었는데, 이들은 이집트를 통치하는 데에서도 위협적일 뿐 아니라 칼리프 자리를 가지고 있던 오스만 제국에게도 정치적 위협이었기에 무함마드 알리는 이들을 진압하면서 정치적인 자산을 쌓을 수 있었다. 또한 오스만과 이집트를 분리시키기 위해 이집트에서 오래 전 사어가 된 콥트어를 부활시키려는 노력까지 하였다. 기존 지배계층이 소멸되자 알리는 혈족과 가신을 중심으로 이집트의 정권을 다졌고, 제국 행정부는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했으나 알리의 군사력과 이집트의 안정된 세입에 그를 용인했다.
집권 이후 알리는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방식으로 이집트의 사회 경제를 재조직한다. 농민을 동원해 면화 곡물 재배에 투입하고, 무역 독점으로 발생한 차익을 인프라와 교육, 보건, 군대에 전면적으로 투자하여 이집트를 탈바꿈시킨다. 그러나 나일강을 정비하는 인프라 준설은 공사 과정에서 많은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내몰았고, 관세로 산업을 보호하며 성장시켰으나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강제동원된 이들이었다. 교육을 위해 아이들을 강제로 부모와 떨어뜨렸으며 강력한 군사력은 인구의 약 2.6%를 처우가 열악한 상비군으로 만들었고 징병에 대한 저항에는 폭력으로 대응했다. 심지어 병역을 피하고자 자발적으로 불구가 된 이들을 모아 불구자 부대를 편성하기까지 한다. 오스만 제국 행정부는 이러한 이집트의 성과에 인상을 받지만 같은 성과를 낼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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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카이로의 알리 모스크
메흐메트는 이후 자신의 개혁을 통해 재조직한 이집트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본격적으로 실력 행사에 나섰다. 1805년 와하브파를 신봉하며 훗날 사우디아라비아를 세우는 네지드의 사우드 가문이 아라비아 반도에서 반란을 일으켜 메카메디나, 두 성지를 점거하자 오스만의 술탄 마흐무트 2세는 메흐메트 알리에게 사우드 가문의 반란을 진압할 것을 명했다. 그 와중에 1807년 영국이 나폴레옹 전쟁의 영향으로 이집트에 원정군을 보내 공격하자 격렬하게 저항하여 물리치기도 했다.
1811년 메흐메트 알리는 진압군을 헤자즈에 파견하였고 1년여 만에 헤자즈를 수복하였다. 사우드 가문이 이끄는 반란군은 와해되었고 메흐메트는 훗날 반란의 씨를 남기지 않도록 사우드 가문을 추격하여 말살할 것을 명령해 2년여에 걸친 추격전 끝에 사우다 가문의 구성원 대부분이 포로로 잡혀 처형당한다. 그리고 사우드 가문의 저항 역량은 이 때 메흐메트 알리에 의해 뿌리채 뽑히는 바람에 이후 19세기 말까지 사우드 가문은 네지드에서 숨죽여 지내며 세력을 다시 키우게 된다.
사우드 가문의 반란을 진압한 것을 계기로 메흐메트 알리는 점차 자신의 군주인 술탄의 지시에서 벗어나 자신의 뜻대로 군대를 움직이기 시작한다. 자신의 세력을 불리기 위해 다음 먹잇감을 노리던 메흐메트의 눈에 띈 다음 목표는 수단이었다. 수단은 각종 자원과 금, 노예가 풍부하지만 이집트에게 저항할 만한 강력한 세력을 갖추지 못하고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에 침공 목표로 아주 적당한 땅이었다. 1820년 메흐메트는 5천여 명의 군대를 수단에 파견하여 수단 정복을 명령했다. 수단을 침공한 이집트군은 센나르 술탄국을 멸망시키고 수단을 이집트의 영향권으로 편입시켰다. 이후 수단은 1956년 수단 공화국으로 독립할 때까지 이집트의 보호 하에 들게 된다.
한편 1821년 그리스에서는 오스만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시도한 반란이 일어났다. 오스만 제국은 예전에도 그리스에서 반란이 여러번 일어났으나 모두 진압에 성공한 만큼 마찬가지로 그리스의 반란 진압에 나섰으나 이번에는 예전과 달리 그리스 독립군의 격렬한 저항에 쉽게 진압이 되지 않았다. 그리스인들의 격렬한 저항에 당황한 술탄은 메흐메트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메흐메트는 본국에 지원군을 보내주는 대가로 크레타모레아를 얻으며 자신의 이집트 총독 자리를 임명직에서 세습직으로 바꿔달라고 요구했고 한시가 급했던 술탄은 메흐메트의 요구를 수용했다. 곧바로 메흐메트는 자신의 아들 이브라힘 파샤를 사령관으로 한 지원군을 모레아로 파견한다. 이 때 하필이면 그리스는 지휘권을 두고 독립군끼리의 내전이 벌어지는 바람에 내전의 피해를 극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오스만 - 이집트 연합군과 맞서 싸워야했고 결국 중부 그리스를 빼앗기고 독립군의 근거지인 모레아의 대부분을 상실하여 오스만 - 이집트 연합군에게 진압당하기 일보 직전까지 간다.
이 순간 타이밍 좋게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3대 열강이 그리스의 편을 들어 그리스 독립 전쟁에 개입하였고 오스만 - 이집트 연합군에게 반란 진압을 중단하고 그리스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했다. 기껏 반란 진압 직전까지 왔는데 이제 와서 도루묵 상태로 돌아가기 싫었던 오스만과 이집트는 열강의 제안을 당연히 거부했고 열강은 자신들의 요구를 거부한 댓가를 나바리노 해전으로 치르게 해주었으며 이후 자신들의 군사력으로 그리스 일대의 오스만 - 이집트 연합군을 차례차례 무장해제시켰다. 열강은 그리스 민족에게 자결권이 있음을 선포하였으며 이후 직접 나선 러시아는 오스만에 전쟁을 선포하여 오스만을 박살내버리고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무참하게 패배한 오스만은 마지못해 그리스의 독립을 인정했다.
기껏 술탄을 도와서 전쟁에 참전했더니만 전쟁에서는 져버리고 콩고물 하나 얻지 못한 메흐메트는 대신 시리아라도 내놓으라고 요구했고 술탄이 거부하자 메흐메트는 수틀린 나머지 반란을 일으킨다. 프랑스 장교들이 지휘하는 이집트군은 연이은 전쟁의 충격으로부터 아직 헤어나오지 못한 오스만군을 격파하고 시리아, 팔레스타인을 점령한 뒤 곧장 이스탄불로 향했다. 아무리 오스만 제국이 개혁이 완료되지도 않았고 예니체리가 남긴 상처가 여러곳에 남아있었다고는 하나 어처구니 없는 졸전이었다. 하지만 19세기 세계 최강대국 영국의 입장에서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로부터 인도를 보호하는 방파제로서의 가치가 있었다. 유럽 열강의 이해관계로 오스만 제국은 팔레스타인 영토는 보존했고 이집트는 형식적인 제국의 영토로 남았으나 크레타와 시리아, 헤자즈 등을 통째로 무함마드 알리에게 내주어야 했다.
이후 마흐무트 2세탄지마트 개혁을 가속하면서 무함마드 알리가 크레타, 시리아와 헤자즈를 점령한 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자 곧바로 8만 대군으로 시리아를 침공한다. 그러나 4만여명의 이집트군의 반격에 의해 패배하였고 알렉산드리아를 봉쇄하기 위해 출항했던 오스만 제국 해군이 알리에게 투항하는 바람에 마흐무트 2세는 홧병으로 지병이던 결핵이 악화되어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유럽 열강은 이집트에게 이집트 및 다마스쿠스의 영유를 조건으로 철수를 요구했으나, 프랑스가 이집트를 후원하고 있었으므로 무함마드 알리는 '''옛 이집트-시리아 왕국을 재건하여 독립하는 것을 넘어서서 아예 콘스탄티노플까지 정복하여 오스만에 갈음하는 새로운 이슬람 제국을 세우겠다'''는 야망 하에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영국이 함대를 파견하고 열강의 연합군에게 크게 패배하자 크레타와 시리아, 헤자즈 등의 점령지를 오스만에게 반환하고 오스만 제국의 형식적인 속국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알리는 최초의 목적인 이집트와 수단의 세습을 확립했고, 이후 1956년까지 이집트를 통치하게 되는 이집트의 마지막 왕조인 무함마드 알리 왕조를 설립하게 된다. 이집트의 왕은 아니고 총독이라는 칭호를 사용했지만 권력은 왕이나 다름없었다. 메흐메드 알리의 후손들은 1914년부터 술탄을 자처하였으며, 1922년 영국이 이집트의 독립을 인정하고 독립국이 되면서 비로소 왕이라는 칭호를 쓴게 된다.
이로서 이집트는 여전히 형식적으로는 오스만 제국의 속령이긴 하지만 사실상 오스만 제국에서 떨어져 나가게 된다. 다만 당시 기록을 보면 이때 이집트에서는 여전히 오스만 제국으로 세금을 납부했으며, 1860년대까지 오스만 제국 전 속령중 가장 세입이 높은 지역이 남동유럽 다음으로 바로 이집트였다. 그래서 이후 이집트의 독립은 오스만의 세수를 감소시켜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다. 그와 후손들은 술탄이나 에미르로 칭한적은 없으며 오스만 제국의 총독(Khediv)로서 이집트를 통치해 왔으며 정기적으로 공물도 오스만 제국에 납부해왔고 오스만 제국이 재기불능의 상태에 빠진 1915년이 되어서야 술탄을 칭하게 된다.
1848년 아들 이브라힘 파샤에게 총독자리를 양보했으나 이브라힘 파샤가 결핵에 걸려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하고 차남의 아들인 손자 압바스 파샤에게 총독자리가 돌아갔다. 1849년 8월 2일 알렉산드리아에서 사망하여 시신은 이집트의 무함마드 알리 모스크에 매장되었다.

3. 평가


알리의 생애에 대해 이집트의 경제학자 아민은 강력한 독립국가와 근대화를 달성하고 외세의 압박에 굴하지 않았기에 훗날 가말 압델 나세르의 생애와 공통된 점이 있다고 호평했다. 군사적 연전연승은 맘루크조의 바이바르스에 필적된다고 평가 받기도 했다. 레바논의 역사가 필립.K.히티는 19세기 이집트의 역사는 메흐메드 알리의 이야기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프랑스의 교육제도를 본받아 의무교육을 실시했고 군제개혁,세제,행정,통상,농업,산업 분야에 많은 개혁을 실시해 이집트를 근대화 시켰다. 메흐메드 알리 그 자신도 청결을 중시하고 검소하며, 인품이 좋아 많은 이들의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메흐메드 알리의 통치는 맘루크들이나 이슬람 원리주의자들 못지 않게 가혹했다. 면화 농장에서는 농민들이 면화를 재배하다 죽어갔으며 세금을 안 내면 꼬챙이에 꿰이는 등 비참한 대우를 받아야 했고 공장과 교육은 전쟁터로 내 보낼 병사들을 만들기 위한 '병기창'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메흐메드 알리는 전쟁에서 승승장구했음에도 정작 시리아 등의 점령지에서 전혀 민심을 얻지 못해 더 나아가지 못하고 발목이 잡혔으며 남북전쟁 이후 미국 남부의 면화 공급이 풀리면서 이집트 면화의 수입이 급감하자 농민들은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이 시기 산업화는 서구 열강 본국 내에서조차 도시가 농촌을, 공장이 노동자를 말 그대로 착취하는 지옥과도 같은 수준이었고 무함마드 알리는 더 빠르게 산업화를 하겠답시고 여기에 더한 착취와 수탈을 했다. 그렇게 해서 키운 산업은 군사적 투자로 재편되었고 이집트의 실질 경제 상태는 매우 취약했다.
또한 지정학적 영향이 너무나도 컸다. 19세기 최강대국 영국의 입장에서 이집트는 영국과 인도를 잇는 최고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영국은 이집트 문제에 끝없이 개입했고, 이러한 과정에서 알리는 산업 발전에 필수적인 관세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한다. 상술했듯이 오스만 제국을 러시아로부터 인도를 지키는 방파제로 인식한 영국의 이해에 따라 알리의 부상은 용납될 수 없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무하마드 알리는 1차 세계대전까지 이어지는 동방문제, 발칸과 이집-중앙아시아, 조선, 쿠릴열도까지 이어지는 영국과 러시아의 지정학적 경쟁인 '그레이트 게임'의 시작을 알렸다. 이러한 세계사적 무게는 발전 도상의 독립하지 못한 지방 정부 수장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하튼 무하마드 알리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유라시아의 지정학적 경쟁과 중동 특유의 가문-혈족 중심 지배체제의 기원, 그리고 중동 근대화 과정의 시조로 볼 수 있는 인물이다.

4. 이름 논란


그러나 정작 세계사에서 무함마드 알리라고 알려져있는 인물이지만, 그는 알바니아 출신 지배자였으며, 평생 알바니아어와 터키어만을 모국어로 사용했다. 터키어로는 메흐메트 알리(Mehmet Ali)로 '''평생 아랍어는 한마디도 못했던 인물'''인 만큼 학계에서는 이렇게 부르기도 한다. 이후 이집트를 통치한 그의 후손들도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터키인으로 갖고 있었다.
그가 개인이라면 터키어식으로 메흐메트 왕조라 부르는 게 옳겠지만, 알리는 평범한 일반인이 아니라 이집트의 통치자이며 이집트 무함마드 왕조의 창시자이다. 이런 경우 개인의 정체성이 아니라 가장 주된 직위의 언어를 기준으로 불러주는 것이 관례적이다. 예를 들어 잉글랜드리처드 1세는 영어를 거의 못하는 프랑스인에 가깝지만 노르망디 공작 리샤르 4세나 아키텐 공작 리샤르 1세로 지칭할 때가 아니면 프랑스어인 리샤르로 부르지 않으며, 영국의 국왕 조지 1세도 사실상 독일인이지만 하노버 선제후로서 지칭할 때를 제외하면 게오르크 1세라 부르지 않는다. 카를 5세는 네덜란드인에 가까우며 그가 통치한 스페인에서는 카를로스 1세로 불리지만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타이틀을 갖고 있었으므로 독일식인 카를 5세로 부른다. 표트르 3세 또한 본래 독일인이었으며 러시아 제국의 황제가 된 후에도 독일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다가 비참하게 몰락했지만 독일식으로 페터라고 부르지 않으며, 부계로는 스웨덴 및 덴마크 왕실과 혈연이 있었지만 북게르만식으로 페테르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네덜란드의 국부인 침묵공 빌럼 1세 또한 본래 독일인이었고 네덜란드를 독립시키기 전에는 당시 네덜란드를 지배하던 스페인에 충성했지만 독일식으로 빌헬름 1세라고 부르거나 스페인식으로 기예르모 1세라고 부르지는 않으며, 프랑스계 국가인 오랑주 공국의 공작을 겸했지만 오랑주 공작으로서 지칭할 때가 아니면 프랑스식으로 기욤 1세라고 부를 일은 거의 없다.
원칙적으로 19세기 이집트는 독립국에 가까웠지만 명목상으로는 오스만 제국의 총독령이었으므로 터키어로 부를 수도 있겠으나, 술탄을 자처한 이후에는 터키 외의 나라에서는 이집트의 언어인 아랍어식으로 무함마드 왕조라 한다. 같은 집안인데도 메흐메트라 부르다가 후손을 무함마드로 바꿔부르면 헷갈리니까 메흐메트 알리도 무함마드 알리로 널리 알려진 것이다.
[1] 이후 메흐메드 알리는 수단을 정복한 이후 알바니아인 군인 상당수를 멀리 수단에 파견하여 징세 업무를 맡김으로써 보상 및 견제를 동시에 해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