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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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海一
1947년 음력 1월 29일 ~
1. 개요
대한민국의 군인, 제독. 25대 대한민국 해군참모총장을 지냈다. 본관은 영양(英陽)[1]#.
2. 생애
1947년 경상북도 울진군 온정면 외선미1리 안마을에서 농업에 종사하던 아버지 남중출(南重出)[2] 과 어머니 낙안 오씨 오월랑(吳月■)[3] 사이의 6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선미초등학교(폐교), 평해중학교, 후포고등학교(15회)를 졸업한 뒤 1968년 해군사관학교 26기로 입학하였다.
3. 경력
1972년 항해소위로 임관했다. 제주함장, 해군본부 인력계획처장, 제3해상전단장, 목포해역방어사령관[4] 등을 거쳐 한미연합사 인사참모부장[5] 으로도 재직했다. 제2함대 사령관과 해군작전사령부 부사령관, 해군본부 인사참모부장, 국방부 인사복지국장[6] , 해군교육사령관을 거쳐 문정일 제독에 이어 해군참모총장에 올랐다. 2006년에 퇴임했고 후임자는 송영무 제독(해사 27기)이었다. 제독치고는 작전 외에도 인사, 복지 등과 관련된 직무 경험을 많이 했다.
진급 당시 연이은 파격으로 해군 장교단 내에서 말이 많았다. 소장에서 대장 진급까지 단 6개월이 걸렸다. 해군교육사령관 보직이 당시 소장 보직이었으나 중장으로 상향되면서 진급했고 곧이어 대장으로 진급하였다. 전임자인 문정일 제독과 3기수 차이인데 이 정도 기수차가 큰 인사는 잘 없다.[7] 그래서 선임 당시에 선배들이 많이들 갈려나갔다.
해군참모총장에는 보통 해군작전사령관이 임명되는데 당시 작전사령관이었던 윤연 제독(해사 25기)이 금품수수 의혹 등이 불거지자 한직인 교육사령관이 올라간 것이란 얘기가 돌았고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윤광웅의 후광을 받은 거라는 소문도 돌았다.관련글[8]
윤연 제독과 함께 당시 하마평에 올랐던 김성만(해사 25기) 제독은 북한 해군의 NLL 침범 당시 보고누락을 했다는 이유로 제껴졌다는 분석도 있었다.
전역 후 한 인터뷰에서 정부가 군의 합동성 강화를 추진하는 과정이 지나치게 독단적인 것 같다는 소회를 남겼다. 관련기사
[1] 현감공파(縣監公派) 18대손 '''해(海)''' 호(浩) 항렬. 영양 남씨 26세.#[2] 족보명 남중진(南重鎭).[3] 남씨대동보 1권 대광공후 현감공파(영양 본관) 415쪽에는 오월남(吳月南)으로 기재되어 있으며, 오익목(吳翼睦)의 딸이다.[4] 제3전단은 후에 목포해역방어사령부로 개편되었다.[5] 주로 대한민국 해군이 보임한다.[6] 당시 국방장관이 조성태였으며 완벽을 지향하는 업무처리 스타일로 인해 휘하 참모들을 질책하는 일이 많아 참모들이 피곤해했다.[7] 해군 내의 동명이인 참모총장을 연달아 지낸 김종호 제독들이 각각 10기, 13기로 3기수 차이이긴 하다. 엄현성 제독(해사35기)의 해군참모총장 후임으로 심승섭(해사39기)가 지명됐고 해사36,37,38기 선배들이 해군을 떠나게 됐다.[8] 그런데 이 글은 2006년 10월에 쓰여졌는데 그가 해군총장이 된 것은 2005년 3월의 일이다. 2006년 10월에 해군총장에 오른 사람은 송영무 제독이고 국방장관은 김장수였다. 어디선가 2005년 3월에 쓰여진 글을 2006년 10월에 퍼온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