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몽골 인민혁명당 숙청 사건
1. 개요
1966년 - 1976년 사이에 중국에서 벌어진 몽골인 학살사건.
2. 내몽골 인민혁명당의 결성
1920년대 이후 몽골의 공산주의 혁명으로 외몽골이 독립해 나가자 내몽골에 살고 있던 몽골인들도 중국으로부터의 독립과 내외몽골의 통일이라는 목표로 내몽골 인민혁명당을 조직하였다. 그러나 일본 제국이 이 지역에 괴뢰국인 몽강국과 만주국을 세운 이후에 몽골독립운동을 가혹하게 탄압하면서 조직은 와해되었다.[1]
만주국 붕괴 이후 중국 동북사성의 북서부인 싱안총성이 내몽골 인민 공화국으로 독립을 선언하자, 조직을 재건한 내몽골 인민혁명당은 이에 호응하여 몽골 대통합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청대부터 이어진 내외몽골간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고 여기에 2차대전 시 소련과 중화민국간 동맹도 겹쳐 중국 공산당과 연합하게 되었다. 하지만 국가 운영이 힘들어지자 중국 공산당의 몽골인 간부 우란후(1906~1988)의 의견에 따라 내몽골 인민 공화국은 발전적 해체라는 명목으로 1945년 정부가 해산되었고 내몽골 인민혁명당도 중국 공산당에 흡수통합되면서 일단락 되었다.
3. 문화대혁명과 몽골인 학살
1966년, 문화대혁명의 광기가 온 중국을 휩쓸면서 마오쩌둥은 내몽골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를 더욱 강화하려는 목적에서 덩샤오핑을 내몽골로 파견했다. 덩샤오핑은 내몽골 자치구 정부주석을 맡고 있던 우란후를 소환한뒤 '''분열주의자''', '''지역주의자'''라고 맹비난을 퍼붓고 실각시켜버렸다. 우란후는 저우언라이가 보호해 이름을 왕자력이란 한족풍으로 바꾸고 나서 은거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또한 중국 정부에서 이미 해체된 내몽골 인민혁명당이 다시 재결성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수많은 몽골인들이 이 내몽골 인민혁명당 분자로 간주되어 잇달아 검거 투옥당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후 내몽골 자치구는 정부가 폐지되고 인민해방군의 군정이 시행되었으며 1970년에는 주변 각 성에 갈갈히 찢어져 분배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몽골어로 된 출판 행위도 금지되었다. 몽골인 학살 광풍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동북삼성, 신장 위구르 자치구, 티베트, 간쑤성 등에서 몽골인들을 닥치는대로 분열주의자, 지역주의자 누명을 씌워 체포 투옥한후 온갖 고문을 가한 끝에 살해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몽골인들은 그 과정에서 혀와 코를 베이거나, 뜨거운 물을 맞거나, 이빨을 뽑히거나 목이 매달렸다. ~ 이런 광풍은 1976년 마오쩌둥이 죽고 나서야 겨우 진정되었다.
1980년 중화인민공화국 최고인민검찰원의 공식 발표에 의하면 16,222명이 직접적으로 학살되었고, 81,808명이 영구 장애를 입었으며, 34만 6천여 명이 체포되었다. 피해자의 75%가 몽골계였다. 다른 추측에 의하면 2만에서 10만여 명이 학살되었고, 수십만 명이 피해를 입었다. 희생자는 대부분 몽골계였다. 중화인민공화국 국가통계국 조사에 의하면 1964년 당시 몽골계 인구는 1,965,766명이었다. 공식 발표로만 거의 1%의 몽골계가 사망했고, 이 수치는 5%까지 올라갈 수도 있다.
내몽골 인민혁명당 숙청 사건의 지역별 사망자[2] :
시린궈러 맹(锡林郭勒盟)-1,863명
이커자오 맹(伊克昭盟)-1,270명
우란차부 맹(乌兰察布盟)-1,686명
바옌나오얼 맹(巴彦淖尔盟)-363명
저리무 맹(哲里木盟)-3,900명
후룬베이얼 맹(呼伦贝尔盟)-2,307명
4. 학살의 원인은?
학살의 원인은 중소간의 갈등과 내몽골 지역에 대한 지배권 강화에 있었다. 스탈린 사망이후 니키타 흐루쇼프가 스탈린 주의에 대한 비판을 시작하면서 마오쩌둥은 이를 못마땅해한 끝에 중소간에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마오쩌둥은 소련의 사실상의 위성국가인 몽골이 '''내몽골을 분리독립시켜서''' 통합 몽골을 세우지나 않을까 걱정했다.
5. 사건 이후
1979년, 내몽골 자치구가 다시 설치되었고 우란후도 복권[3] 되긴 했으나 이미 수많은 몽골인들이 학살되고 난 이후였다. 문화대혁명 기간에 분열주의자로 몰려 학살당한 소수민족들이 한둘이 아니었으나 중국은 지금까지도 이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 이때문인지 중국의 몽골족은 많이 한족화되어 있는 실정이다. 그나마 만주족만큼 극단적으로 한족에 동화되지는 않은 게 다행일 정도.
일본으로 귀화한 내몽골 출신 인류학자 양해영(楊海英 양하이잉)이 유일하게 이 사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는 학자이며 그의 저서 "묘비없는 초원(墓標なき草原)"은 이 사건을 다루고 있는 거의 유일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