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뉴세문경

 


정문경(精文鏡) 다뉴세문경 출처
다뉴세문경을 확대한 모습 출처
국보 제141호 정문경 (精文鏡) 다뉴세문경 출처
국보 제141호 정문경 (精文鏡) 다뉴세문경 출처
[image] '''대한민국 국보 제141호'''
'''정문경'''
精文鏡


'''소재지'''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로 369, 한국기독교박물관 (상도동,숭실대학교)
'''분류'''
유물 / 생활공예 / 금속공예 / 무속구
'''수량/면적'''
1개
'''지정연도'''
1971년 12월 21일
'''제작시기'''
청동기시대(BC 4∼3)
1. 소개
2. 내용
3. 용도
4. 제작시기
5. 제작방법
6. 바깥고리
7. 국보 제141호
8.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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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확대경을 대고 봐야할 정도로 세밀한 선을 그었다.
선은 1만 3천여 개가 넘는데, 선과 선 사이 간격은 0.3 mm 에 불과하다.


'''다뉴세문경'''(多鈕細紋鏡)은 한반도의 청동기 시대 문화를 대표하는 청동 거울 유물로, '''정문경(精文鏡)''' 또는 '''잔무늬거울'''이라고도 부른다.
한반도 후기 청동기 시대 ~ 초기 철기 시대에 만들어진 청동으로 된 거울. '다뉴세문경'이라는 이름은 많은 고리를 뜻하는 옛말 다뉴(多鈕)에다 세밀(세; 細)한 문양(문; 紋)이 그려진 거울(경; 鏡)이라는 의미다. 한 면은 거울로 비출 수 있도록 하고, 뒷 면에는 거울을 멜 때 사용하는 고리인 '뉴(鈕)'가 2개 있다.
1971년 12월 21일 국보 제141호로 지정되었으며, 지름은 21.2 cm로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충청남도 논산시에서 출토되었다고 한다.[1]

2. 내용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청동거울'은 한반도 남부지역과 중국, 일본에서도 흔하게 출토되는 대표적인 유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1960년대 논산시에서 지금까지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청동거울 한 점이 새롭게 발견되면서 학계는 큰 충격을 받았다. 지름 21.2 cm 안을 큰 원 세 개로 구획을 나누고[2] 0.3 mm 간격으로 선 1만 3천여 개로 세밀하고 기하학적인 무늬를 새긴, 그동안 학계에 보고된 적이 전혀 없는 '''새로운 청동거울'''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3] 이후 이런 '다뉴세문경'들은 전남 화순군 대곡리 마을(1971년), 충남 예산군 동서리 마을(1978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반교리 갈동 유적(2007년) 등 한반도 곳곳에서 추가로 발굴이 되었다. 다뉴세문경은 북방계 청동문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예로, 중국보다 먼저 만든 것이며, 국보 제141호 정문경(精文鏡)은 현존하는 '다뉴세문경'들 중에서 가장 정교한 것이다.

3. 용도


당연한것이겠지만 청동기 시대 당시 '거울'은 아무나 갖지 못했다. 의 뜻을 전하는 제사장의 권력을 상징하는 신비한 힘을 가진 물건이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이는 함께 출토되는 '청동방울'을 봐도 그 샤먼적인 성격을 추정할 수 있다. 애당초 거울은 태양숭배사상(太陽崇拜思想)과 관계가 깊은 유물[4]로서 다뉴세문경 또한 당시 제사장들의 샤머니즘적인 제사의식의 용도로서 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참고로 다뉴세문경에 사용된 '삼각형문'은 주술에서는 재생을 뜻한다고 한다. 즉, 다뉴세문경은 청동기 시대 당시 의제도구(儀祭道具)로서 제작되고 사용되었다는 거다.

4. 제작시기


청동거울의 제작시기는 대략 기원전 4세기 전후로 본다. 이 시기에는 '초기 철기 시대'에 해당하며 세형 동검을 중심으로 하는 청동기 세공기술이 매우 발전하여 다양한 청동기 장신구를 제작했다.

5. 제작방법


다뉴세문경의 세밀한 문양들은 '확대경'을 대고 봐야 제대로 보일 만큼 매우 세밀하기 때문에 예전부터 그 제작 방법을 두고 '''논란'''이 많았다. 그 때문인지 정문경의 '''놀라운 제작기술''' 때문에 세간에는 정문경을 현대 기술로도 복제할 수 없다는 소문이 떠돌았고 언론에서 이를 유포하기도 했다.[5]
이후 다뉴세문경의 제작 비밀을 풀기 위해 여러 연구진들이 복원에 뛰어들었지만 수백 개에 이르는 동심원과 간격 0.3 mm인 세밀한 선들을 정교하게 그려내는 도면작업에서 수차례 실패를 겪었고 거푸집이 깨어지거나 문양이 뭉개지는 등 그 제작 과정에 다가가는 데만 '''수십 년'''이 걸렸다.
현재까지 알려진 '다뉴세문경의 제작 방법'은 크게 아래 세 가지로 좁혀진 상태이다.
  • 밀랍주조법: 활석과 같은 석재에 문양을 새기고 밀랍으로 떠낸 다음 밀랍 모형에 진흙을 씌우고 열을 가해 밀랍은 녹여내고 진흙 거푸집에 주조하는 방법
  • 사형주조법: 모래와 진흙을 굳힌 판에 문양을 새긴 다음 쇳물을 부어 주조하는 방법
  • 석제주조법: 활석에 직접 문양을 새겨놓은 다음 쇳물을 부어 주조하는 방법
거울의 섬세한 문양은 다치구(오늘날의 컴퍼스와 유사한 도구)를 사용하여 한꺼번에 여러 개의 동심원을 그린 다음 뾰족한 도구를 이용해 사이사이를 메워 만들었다고 추정한다. 현대에 들어 밀랍주조법이나 석제주조법을 사용해 다뉴세문경을 제작하는 데 성공한 사례가 있었지만, 그 어느 것도 '''2500여 년 전 만들어진 원본'''의 정교함을 아직까지도 완벽히 재현해 내지는 못했다고 한다.[6]

6. 바깥고리



7. 국보 제141호


다뉴세문경이란 초기철기시대에 나타난 청동으로 된 거울로 잔무늬거울이라고 한다.

잔무늬거울의 뒷면에는 거울을 멜 때 사용하는 고리인 뉴가 우리나라의 경우 한쪽으로 치우친 곳에 2개가 돌출되었다. 또한 청동기 시대에 주로 보이는 거칠게 무늬를 새긴 거울(거친무늬거울)에 비해, 작은 삼각형을 기본으로 하여 기하학적 무늬를 세밀하게 새긴 것이 특징이다.

이 다뉴세문경은 지름 21.2㎝로 뉴가 2개이며 내구(內區), 중구(中區), 외구(外區)로 3등분 되어있다. 각 구마다 작은 삼각형 무늬를 교차하는 방식으로 세밀하게 장식하였다. 외구에는 동심원 무늬가 2개씩 짝을 지어 균형있게 8개를 배치하였으며, 주석이 많이 들어가 빛이 잘 반사되게 만들었다.

현존하는 잔무늬거울 가운데 크기면에서 가장 크고 문양도 가장 정교한 우리나라 초기철기시대를 대표하는 유물이라 할 수 있다.


8. 같이보기



[1] 참고로 국보 제146호로 지정되어 있는 '강원도 출토 일괄 유물'(현 명칭은 '전 논산 청동방울 일괄(傳 論山 靑銅鈴 一括)') 또한 국보 제141호 '정문경'과 같은 장소에서 출토된 ‘일괄 유물’이다. 도굴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한 것 같다.[2] 내구(內區), 중구(中區), 외구(外區)로 3등분했다.[3] 다뉴세문경의 성분을 분석한 결과 구리주석의 비율이 '''65.7:34.3'''으로 밝혀졌는데, 이는 기원전 12세기 중국 문헌인 '주례고공기(周禮考工記)'에 실린 '거울을 만드는 황금비율'과 거의 일치하여 오늘날 사용되는 거울과 견줄 수 있을 만큼 반사도나 선명함이 뛰어났으리라 추정한다.[4] 거울의 재료는 주석이 많이 합금된, 소위 백동(白銅)이기 때문에 햇빛이 더욱 잘 반사되었다.[5] 국보 다뉴세문경 제작비밀 풀렸다[6] 물론 현대의 과학기술을 쓰지 않고 당시의 기술수준을 감안해서 제작할 때 아직까지 재현하지 못했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