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동검
1. 개요
청동기 시대에 쓰이던 검. 말 그대로, 청동으로 만들어진 검이다.
녹슨 상태가 청색이지, 사실 주조 직후 색깔은 한국 것은 보통 은색이고, 중국 것은 보통 금색을 띠고 있다.
이는 아연을 섞느냐(한국) - 주석을 섞느냐(중국)의 차이로, 고조선을 포함한 북방계와 남방 중국계 문명 발생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다. 시험에선 다른 시대 유물이랑 보기로 묶어놓고 같은 시대 유물을 골라보아라 하는 문제가 자주 나오므로, 국사를 치는 사람은 상식 레벨로 익혀두는 게 중요하다.
2. 역사
용도는 크게 2가지로 제사용, 전투용.
제사용의 청동검은 대표적으로 비파형 동검이 있는데, 이름 그대로 비파처럼 생겼으며 청동기 시대에는 군장의 '''권력의 상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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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5세기경. 미케네 시대 그리스 조각품
한국에서 동검이 무기로 쓰였는가 쓰이지 않았는가에 대해서는 아직 학자들도 공통된 의견을 내놓지 못한 상황이다.
비파형 동검은 무기로 쓰기에는 실용성이 매우 떨어졌으나, 세형 동검의 경우 경우 날이 매우 잘 마연된 것은 아직도 손이 베일 것 같은 날카로움을 유지하고 있으며, 일부 세형 동검에서는 혈흔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언뜻 보면 무기로 사용되었을 법 하다.
문제는 동검의 경도다. 동검은 땅에 떨어뜨리면 날이 휘어지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깨져버린다. 만약 진짜 싸움에 동검을 들고 나갔다간 몇 번 휘두르지도 못하고 바로 두동강이 나 버릴 것이다.[3] 그렇기 때문에 세형 동검에서 발견된 혈흔을 감안하여 일부 학자들은 동검이 제사용 제물을 바치거나 포로를 처형할 때만 무기로 사용되었지 실용적인 전투 무기로 사용되지 않았다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또한, 철제 무기류가 본격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하는 목곽묘 단계에 접어들면 그나마 잔존하고 있던 칠초동검의 부장까지 완전히 소멸되어버린다. 즉 철제 무기가 보편화되어 가는 시점에서 동검의 가치는 사라진 것이다.
2.1. 한국
한국에서 출토되는 청동검은 다른 지역의 것에 비해 아연 함유량이 높다고 한다. 이것은 한반도에서 독자적으로 청동검을 만들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보통 한국에서는 의제도구로 쓰인 경우가 많으나, 대체적으로 초기 청동기 시대 때 만들어진 비파형 동검과, 후기 청동기시대부터 철기 시대 초기까지 만들어진 세형 동검으로 나뉘어진다. 비파형 동검은 날이 갈리지 않았기 때문에 의식용 도구로 사용되었다.
세형 동검은 전투용보다는 주로 의식용 도구로 쓰였을지도 모른다는 설이 있었다. 이전에 이렇게 추측한 근거는 한국 세형 동검의 경우 칼날과 손잡이 연결부가 약한 구조로 되어 있어 전투에서 몇번 휘두르다 보면 손잡이가 부러졌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라는 추정이었다. 위 사진에서 보듯 중국의 청동검은 손잡이와 통짜로 만들어져 손잡이가 부러질 염려가 없다.
그런데 이후 밝혀진 바로는 세형동검은 분명히 무기로 사용되었다. 발굴된 세형 동검들은 대부분 거푸집에 끼워보면 닳아서 안 맞는다든지,[4] 피로 추정되는 철분이 묻어있다든지 하는 식으로 무기로 사용한 흔적이 있다. 세형 동검이 사용되던 시절에는 철기와 혼용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리고 한마디 더 붙이면 '''한국에 청동제 농기구는 사용되지 않았다'''. 일단 청동이 귀한 금속이다보니 전 세계적으로도 청동제 농기구는 그리 많지 않다. 철기시대 초창기의 철제 무기는 청동 무기보다 질이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철기시대로 이행한 이유는 구리와 주석에 비해 철은 너무나도 흔했기 때문. 일례로 주석이 나오지도 않고 무역을 통해 수급하는 것도 불가능했던 몇몇 문명권에서는 구리를 그대로 사용하다가 바로 철기시대로 건너뛰기도 했다.
게다가 한반도는 청동의 주재료인 '''구리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도 구리는 일본에서 수입하여 충당했고 그래도 부족하면 사찰의 종을 몰수해 녹여 구리를 회수하곤 했다.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중고등학생들은 청동기 시대라는 말만 듣고 전투에서 '''주로''' 청동기 무기를 사용했다고 '''낚이곤 한다.''' 한국사 문제에 세계사를 열심히 공부해서 적용하게 되면 낚일 수도 있다.
사실 상식적으로 역사에 청동제 무기나 농기구를 누구도 사용하지 않았을 리 없지만 사용했다면 이는 보편적 조류에서 '특이한 예'로 기록되기 마련이다. 교과서에서는 이런 내용을 소개하지 않을뿐더러 이런 걸 내려면 따로 사료나 사진 자료를 준비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수능이든 내신이든 이런 식으로까지 괴악하게 문제를 내면 욕을 처먹기에 누구도 이렇게 내려고 하지 않는다. 사학과에 가서 공부를 한다면 모르겠지만. 고등학교 수준이라면 역사의 특이점보다는 보편성과 일반론에 더 주목하자.
실제로는 여전히 석기가 무기로 더 많이 쓰였고, 일상 용품도 대부분 석기와 지금까지 남아 있 건 거의 없지만 목기였다.
2.2. 해외
국내와는 대조적으로 중국이나 스키타이와 그리스 등 대부분의 경우 무기로 사용되었다.
히타이트 또한 청동기로 번영한 문명을 이루었고 심지어는 청동제 무기를 사용하는 진나라가 철제 무기를 사용하는 연나라를 바르고 중국통일을 했다. 이는 전국시기 금속 가공기술의 발달 때문인데, 이 시기의 청동검은 깨지는 데에 대한 저항력도 당시의 철검과 비교해서 맞먹거나 우월했다. 월왕구천검 참조.[5]
2.3. 철기 시대
철기 시대가 되면서 철검의 생산성이 엄청나게 좋았던 덕분에 '''밀려서 사라졌다'''.
단 좋았다는 뜻이 오늘날 보듯이 철이 더 단단해서라는 의미는 아니다. 초기의 철기는 가공 기술의 부족으로 불순물 함유량이 매우 높아서 굉장히 잘 깨졌다. 오히려 청동검보다도 내구도가 낮았던 것. 청동검은 주로 강한 충격을 받으면 그냥 휘기만 했으므로 나중에 고쳐쓸 수 있었지만 철기는 깨지거나 부러지면 버려야 했다. 그리고 내식성에 있어서도 청동의 상대가 안 된다.[6] 철의 장점은 청동의 재료인 구리, 주석, 아연 등에 비해 매우 구하기 쉬웠다는 점이다. 중국 전국시대 내지 고조선~삼한 시대에는 철괴가 바로 화폐로도 쓰일 정도였으니.
그러나 사실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특히 춘추시대까지는 대부분의 무기는 청동제였다. 월왕구천검이라든가 하는 것도 전부 청동제.
전국시대에도 진시황의 秦나라의 주 병기는 청동제였다. 이는 해당국 영토에 구리광산, 주석광산이 많이 있나 철광산이 많이 있나로 갈라진다. 무기의 완전철기화는 한대 이후로, 그전까지는 청동도 많이 쓰였다.
무기뿐만 아니라 갑옷도 철기화의 이득을 많이 받았다. 청동 갑옷은 무게가 엄청나기 때문.
3. 제조 과정
주로 거푸집에 청동물을 부어 만드는 주조방식이 대부분이다. 한국의 경우 각각 청동검의 한 면을 파낸 2개의 거푸집을 붙여서 주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이로 인해 거푸집의 틈사이로 청동물이 흘러나와 거푸집에서 갓 꺼낸 청동검에는 청동 찌꺼기가 잔뜩 붙어있었으며, 날 역시 날카롭지 못하고 뭉툭했다. 그렇기에 날에서 청동 찌꺼기를 떼어내고 추가로 숫돌로 갈아 날을 세우고 광을 내는 과정을 거쳐야 청동검 한 자루가 완성된다. 검의 손잡이의 경우, 검과 손잡이를 한 번에 주조하는 일체형과 검신만 따로 주조하여 나무로 된 손잡이에 끼우는 방식이 있었는데, 한국에서는 주로 후자의 방식이 사용되었다.
동검과 함께 동검을 담을 나무로 된 칼집이 제작되기도 하였는데, 가끔가다 동검이 칼집에 넣어진 상태로 발굴된 사례가 몇이나마 있다. 다만, 칼집에 넣어진 채로 땅속에서 매우 오랜 기간동안 방치되었기 때문에 칼집과 검이 일체화되어 칼집에서 검을 빼는게 사실상 불가능해지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나무 칼집에는 옻칠을 하기도 했는데 이를 칠초동검이라 부른다. 이 칠초동검은 철기가 본격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할 시점까지 살아남아 최후의 청동검이 되었다.
4. 여담
묘하게 많은 RPG에서 철검보다 성능이 낮은 애매한 무기로 나오는 일이 많다.
사실, 철검이 이미 널리 쓰일 정도라면 청동검은 박물관에나 들어 있을 테니 조금 고증이 안 맞는 상황이지만.
[1] 요동지역과 한반도의 대표적인 청동검이다.[2] 한국의 동검과 달리 검신과 손잡이가 일체화되어있다.[3] 허나 하술하겠지만, 청동검이 활발히 제조될 당시엔 기술 수준 때문에 철제무기가 더 쉽게 부러졌다. 청동검이 무조건 전투용 무기가 아니었다고 할 수 없는 이유.[4] 그러나 청동검의 제작 과정이라는 것이 단순히 '청동물을 거푸집에 넣고 식으면 꺼낸다'로 끝나는게 아니다. 거푸집에서 꺼낸 뒤에 날에 붙어있는 청동 찌꺼기를 떼어내고 추가로 돌로 갈아 광을 내고 날을 세우는 과정이 뒤따라야 비로소 청동검 한 자루가 완성된다. 따라서 제작 과정을 완전히 마친 청동검은 당연히 돌로 갈아냈으니 거푸집에 딱 맞을 수가 없다. 오히려 거푸집에 딱 맞는 청동검이 있다면 그것은 제작 과정을 완전히 마치지 않은 미완성품이란 얘기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청동검이 거푸집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 전투에 이용되었다는 결정적인 이유가 될 수는 없다.[5] 물론 이때 철검은 가공기술이 청동기보다 부족했기 때문. 이후 풀무의 발명으로 고온을 사용하기 쉬워져서 철기 가공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면서 청동기는 역사 뒷편으로 사라진다.[6] 당시의 청동검이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에 비해, 철기는 종류 불문하고 전부 부식되어 형체만 간신히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