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엔 갭

 

'''다리엔 갭'''
'''Darién Gap''' | '''Tapón del Darié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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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지도상 다리엔 갭의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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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위치'''
[image] 파나마 다리엔 주 야비사
[image] 콜롬비아 안티오키아주 투르보
'''분류'''
자연 습지
'''길이'''
87 km
1. 소개
2. 역사
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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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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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엔 갭의 사진.
파나마콜롬비아 사이의 거대한 늪지대.
이 다리엔 지역은 현대에 와서도 지구상 극한 오지 중 하나로, 팬 아메리칸 하이웨이에서 유일하게 끊긴 구간이기도 하다. 파나마의 야비사(Yaviza)와 콜롬비아의 투르보(Turbo) 간 사이에 존재하며, 정글과 늪지대로 악명 높은 곳이다. 특히 이 구간에서 과거의 FARC나 현재의 ELN 등 게릴라 반군이 활동하고 이 틈을 타서 마약 카르텔과 범죄자들이 이곳 저곳을 오가기 때문에 더욱 위험해졌다. 그나마 라팔마 같은 경우에는 다리엔 주에 속하고 다리엔 주의 주도고 건물들도 있고 꽤 괜찮지만, 이곳도 과거 콜롬비아 마약 카르텔이 남미에서 중미로 이동할 때 거치는 곳이기도 했기 때문에 다리엔 주는 애초에 방문하지 않는 것이 좋다. 다리엔 국립공원의 경우에는 더하다.
이 구간을 지나려면 목숨 걸고 지나가야 한다. 자칫 잘못하다가 실종되면 못 찾게 되는 불상사가 난다. 주의하자, '''이곳에서 사고가 나면 여행자 보험 보상을 받지 못한다'''. 87 km(54마일) 정도의 비교적 짧은 구역이지만 아무리 깡이 좋은 사람이라도 파나마에서 페리를 타고 콜롬비아로 이동하는 것이 대다수이다. 가끔 모험의 목적으로 횡단하는 용자도 있는데, 잘 알려진 바로는 오토바이로 횡단한 사람도 있다.

2. 역사


스코틀랜드 왕국은 17세기 후반 전반적으로 "불운한 칠년" (Seven ill years)라고 불리는 엄청난 가뭄과 경제난이 겹치며, 이 와중에 자코바이트와의 내전도 잘 안 풀리면서 스코틀랜드의 유력 귀족 가문과 도시 자치회들은 대부분이 파산, 혹은 파산 직전에 몰리게 된다.
여기서 이웃나라 잉글랜드 왕국에서 식민지 경영으로 막대한 부를 챙기는 걸 본 스코틀랜드 왕국은 국부의 근원이 식민지에 있다고 판단하고, 새로이 식민지를 건설할 곳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에 식민지를 세울 만한 곳은 아메리카뿐이었고, 아메리카는 이미 잉글랜드와 스페인 두 나라가 양분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다가 발견한 곳이 바로 이 다리엔으로, 입지는 좋은데[1] 오지 중의 오지라서 거주민도 없었고 딱히 주인이라고 주장하는 국가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스코틀랜드의 귀족들은 전재산을 끌어모아 이곳에 다리엔 계획(Darién scheme)을 수립, 스코트인들을 이곳으로 이주시키고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무역 거점을 건설하겠다고 계획했다.
1695년 스코틀랜드 의회는 스코틀랜드 은행을 설립했고, 각지의 귀족들이 돈을 긁어모아 약 40만 파운드, 현재로 5300만 파운드에 해당하는 거금을 모금했다. 현재 우리나라 돈으론 800억 원이 넘는 거금이었다. 원래는 동인도 회사를 모방에 인도와 아프리카 등지를 침략할 생각이었지만 책임자 윌리엄 패터슨은 그보다는 파나마 등지에 더 관심을 가졌고, 이게 다리엔 계획으로 이어지게 된다.[2]
하지만 이곳은 사실상 스페인의 영토였으며, 거주민만 없다뿐이지 인근의 스페인인들은 자신들의 영토라고 여겼고, 그들은 스코트인 이주민들을 공격해 몰아냈다. 참고로, 당시 스코틀랜드 국왕 윌리엄 2세(잉글랜드에선 윌리엄 3세)는 스페인과 전쟁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 스코트인들을 방치했다.(...) 게다가 공격으로부터 살아남은 사람들조차 설상가상으로 엄청난 모기떼가 몰고 다니는 전염병에 싸그리 죽어나갔고, 결국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며 스코틀랜드는 빚더미에 앉게 되었다.
결국 진퇴양난에 빠진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이에 대한 타개책으로 18세기 초 앤 여왕에게 스코틀랜드 왕국잉글랜드 왕국의 합병을 건의했고, 앤은 이를 승인하여 두 나라는 하나로 합쳐졌으니, 이가 바로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즉 '''영국'''이다. 정복왕 키나드 1세가 픽트족과 스코트족을 통합하고 스코틀랜드를 세운 지 864년째, 그리고 제임스 1세&6세 이래로 두 나라가 같은 왕을 모신 지 104년째였다.
지정학적으로 현대 파나마 운하와 그리 멀지도 않고 지도상으로만 보면 남북미를 연결하는 엄청나게 중요한 전략적 거점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17-18세기 기술력으로 여기를 뭔 간덩이도 엄청나게 크고, 실력도 그만큼 되는 특출난 생존왕 콩키스타도르 소수가 아닌 대규모 인력과 물자가 이동할만한 '''정기 교역로'''로 개발할 능력을 가진 나라는 아무도 없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걸쳐 공사한 파나마 운하도 처음에는 9년 가까운 공사를 했음에도 완전히 말아먹었음을 생각하면 그보다 기술력이 훨씬 열악했던 당대에는 당장의 입지 조건만 보고 건설하는 것은 무리 중의 무리였다. 그나마 비슷한 시기에 늪지대에 건설한 러시아 제국의 샹트페테르부르크도 건설 과정에서 수만 명이 죽어나갔는데도 우격다짐식.으로 건설을 해서 완공시킨 것이다.
그래도 인구수도 포화상태에 다다르고 가까운 데에 위치한다면 이런 지역들도 어떻게든 배수작업을 하고 숲을 베어내서 개간 작업을 진행하는 일은 역사시대 이전부터 많이 행해졌던 일로 실제로도 황하나 갠지스강, 장강의 상당수 지역, 베를린 등 수많은 지역이 이런 식으로 개간이 이루워졌고, 아메리카에서도 이미 상당수 지역에서 원주민들에 의해 오래전부터 행해졌던 일이기는 하지만 스코틀랜드는 애초부터 인구가 적은 데다가 다리엔 갭과는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에 이러한 지역에서 개간 사업을 벌일 역량이 없었다. 이러한 점에서 이미 스코틀랜드인들이 어느정도 주거해서 입지를 다져놓은 북아메리카에서 일을 벌이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 스페인 자체도 중남미 식민지를 육로로 연결하겠다는 발상은 진지하게 한 번도 민적 없고, 대서양 멕시코-누에바 그라나다, 태평양 멕시코-페루 같은 주요 식민지 간 무역, 교류는 죄다 해로로 해결했으며, 이 때문에 애초에 카리브해에선 대해적시대가 열렸던 것이다.[3]
이후로도 다리엔 갭 사이에 고속도로나 철도를 깔겠다는 계획이 있었지만 구제역과 같은 질병 확산 문제, 환경 파괴에 따른 반대 운동으로 1970년대와 1990년대 두 차례 추진하다가 무산되었다. 물론 일이 잘 풀리면야 남미와 북미 지역의 물류 비용이 크게 싸지는 영향이야 있겠지만 미국 입장에서는 남미와의 상업적, 정치적으로 필요한 교통은 해운과 항공 운송으로 충분히 해결하고 있고, 또한 중남미 일대의 치안이 불안하고 마약도 판을 치는 상황에서 여기에 도로가 깔려 봤자 밀입국 혹은 마약 수송만 많아질 것이기에 적극적이지 않은 면도 있다.[4] 기술적인 난이도야 정주영이나 일론 머스크 같은 중공업, 건설업의 신화적인 인물들이 들으면 코웃음을 칠 수준 밖에 되지 않지만 어려운 여건을 감수하고 만들 가치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난관이라고 할 수 있다. 만들 순 있어도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것이다.

3. 기타


엠베라-워우난(Embera-Wounaan) 족과 쿠나(Kuna) 족이 원주민으로 거주하고 있다. 카누가 이들의 운송수단이다.
러시아에도 라스푸티차라는 극악한 늪지대(뻘밭)로 인해 질로프 갭(Zilov Gap)이라는 동네가 있지만, 이곳은 예전부터 시베리아 횡단철도도 있었고 도로교통도 거의 완공을 눈앞에 두고 있는 상태라서 과거의 악명으로 남을 전망이다.
세계테마기행 2020년 3월 3일 파나마~코스타리카 편에서 다리엔 갭 안에 있는 엠베라족의 마을에 방문했다. 파나마 야비사를 거쳤으며 엠베라족 마을까지는 카누를 타고 3~4시간이나 가야 했다.

[1] 북미와 남미 사이에 있으며 태평양과 대서양간의 거리도 그리 멀지 않아 장악만 해도 북남미를 오갈 때마다 통행료를 받을 수 있고 운하를 건설하면 태평양과 인도양을 오가는 상선 등에게도 통행료를 물 수 있다. 그러나 당시 기술로 이 동네에 운하를 놓는 것은 꿈도 못꾼다.[2] 여담으로 파나마 운하도 그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된 것이었다.[3] 애초에 근세의 스페인 식민지 제국은 태반이 핵심 식민 도시만 관리하고, 나머지 지도 상의 광활한 '면'은 같은 유럽인들이 볼 내수용 지도에서만 '이게 다 스페인 땅이다'라 표시하고 실제로 개발이나 진출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자. 아예 원주민들의 자치권을 국가 차원에서 공인한 실질적으로 원주민 영역이었다. 게다가 다리엔 갭보다 북쪽에 있고 좀 더 살만한 마야 문명권도 이런 지정학적 여건과 아즈텍과 달리 뚜렷한 수도가 있는 중앙집권화 된 제국이 아닌 여러 군소 도시 국가들 상대로 게릴라전을 펴야 하는 살벌한 여건 때문에 1530년대부터 시작해서 '''1600년대쯤 돼야 간신히 '정복'이라 부를 만한''' 영향력을 겨우 행사했는데 그보다 더 악랄한 자연환경의 다리엔 갭은 제대로 뚫겠다는 발상조차 못했다. 후에 북아메리카에 들어서는 미국도 그렇게 서부개척시대에 열심히(?) 원주민을 몰아냈음에도 다 밀어내는 데는 건국 후 1세기나 걸렸음을 감안하면.[4] 다리엔 갭 구간을 대한민국 고속도로마냥 자동차전용도로 + 오토바이 및 자전거 통행금지 + 폐쇄식 유료구간 (입구에서 통행권 받은 뒤 출구에서 요금 지불)으로 만들면 출입 차량을 통제할 수 있으므로 조금은 낫겠지만 팬 아메리칸 하이웨이라는 이유로 무료구간으로 놔둘 수도 있다. 게다가 오토바이 자체를 통행금지 시킬 경우 아메리칸 대륙 특성상 반발이 클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