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읍성
1. 개요
조선 경상도 대구도호부에 있었던 읍성.
선조 23년인 1590년, 일본 침략을 대비하기 위해 쌓은 성으로, 임진왜란 이후에는 경상감영 보호 치소로 사용되다 1906년 경상북도 관찰사 서리 겸 대구군수 친일파 박중양이 불법 철거하여 지금은 그 흔적이 남아있지 않다.
다만 지명은 남아있는 상태로, 동성로, 서성로, 남성로, 북성로 나 성내동, 서문시장, 남문시장, [1] , 서문로 [2] 등이 대표적인 예다.
2014년 대구광역시에서는 경상감영 · 대구부 관아 · 대구읍성 복원에 2022년까지 400억을 투입한다는 경상감영 복원 정비사업 계획을 발표하였다.
2. 구조
대구읍성의 성벽은 지금의 중구 지역 대부분, 그러니까 지금의 동성로, 서성로, 남성로, 북성로 거리를 따라 있었다. 둘레는 2.7 KM, 높이는 5M에 달했다고 한다. 읍성 동서남북으로는 서울의 숭례문, 돈의문, 숙정문, 흥인지문과 같은 역할을 하는 진동문, 달서문, 영남제일관[3] , 공북문의 사대문과, 동/서 소문이 있었으며 성 모퉁이에 망루가 4곳 있었다. 읍성 안에는 경상감영, 객사(달성관)가 있었으며 경상감영을 중심으로 대구부의 관청들이 즐비하였다. 읍성의 남서부와 동남부를 중심으로 백성들의 주거지역이 형성되어 있었고, 특히 달서문과 진동문 밖에서는 큰 시장이 열렸다. 대표적인 것이 서문시장이다. 읍성 안에서는 약령시도 열렸는데, 중국의 상인들이 찾아와 장사하기도 했다.
3. 철거
강화도 조약 이후 대구에도 많은 일본 상인들이 들어와 살았으며, 주로 성곽 밖에 살고 있었기에 상권을 넓히려던 일본인들에게 대구읍성은 골칫덩이로 생각되어 왔다고 한다. 이에 일본 상인들과 당시 대구에 주둔하던 일본군 수비대들은 의도적으로 읍성의 허술한 부분을 여기저기 무너뜨리고 다니기 시작했다.이후 일본인들 사이에서 대구읍성을 철거해야 한다는 주장이 높아지자, 당시 부임된 경상북도 서리 겸 관찰사 친일파 박중양이 '옛 것을 고쳐 새 것으로 만든다 는 명분 아래 대구읍성 해체를 시작했다.한국인과 일본인 인부 60여 명을 부산에서 고용해 대구로 불러들여 철거를 시작했다. 그러나 조정의 허가 통지가 내려오기도 전에 해체한 불법 철거였다. 읍성을 한창 헐어내는 와중에 조정에서 성벽 철거를 중단하라고 내려왔지만 박중양은 대구읍성의 철거를 밀어붙였다.
이 때 철거된 읍성의 돌들은 여기저기로 팔려나가 동산의료원, 약전골목, 선교사주택, 신명고등학교, 계성고등학교 등이 지어지는데 쓰여 여기저기 흩어졌다.
4. 현재
현재에는 읍성자리를 따라 나있는 길과 지명 말고는 이곳이 대구읍성 터라는 비석을 보기 전에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대구시에서는 동성로 가로수 뿌리보호대에 옛 대구읍성길이라는 표식을 새겨두거나 서성로와 대우빌딩 뒤편으로 대구읍성 조형물을 세워두는 등 대구읍성의 존재를 알리고, 2022년을 목표로 대구읍성 복원계획을 세우는 중이긴 하지만 정작 시민들은 별 관심이 없어보인다. 발굴 및 사료조사가 계속 진행중이지만 완전 복원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그도 그럴것이 이미 대구읍성이 있었던 자리는 대구의 최중심가로 자리잡은지 오래라서, 유동인구도 많고 각종 상점들이 즐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동성로는 대구경북지역은 물론 전국구 번화가로 거듭난 상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