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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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敦義門
조선시대 한양의 서쪽 대문으로 이름은 ''''의(義)를 북돋는 문''''이라는 뜻이다. 조선시대 한성에서 평안도 의주까지 이르는 제1간선도로의 시발점이었으며, 외교사절이 오면 국왕이 직접 마중을 나가는, 나라의 중요한 문이었다.
2. 위치
서대문이라는 이명(異名) 때문에 서울 서대문구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 중구 정동 현 경향신문 사옥 앞 정동사거리의 자리에 위치한다. 중구 서쪽 지역은 1975년에 서대문구에서 중구로 편입되었기 때문에 1975년까지는 실제로 서대문구에 돈의문 터가 있었다. 동대문구와 같은 경우다.
3. 역사
1396년 한양의 2차 성곽공사를 마무리할 때 8개 성문을 지었는데, 돈의문도 이때 세워졌다. 당시 위치는 지금의 독립문 근처 사직동 고개쯤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태종 13년(1413)에 풍수학생(風水學生) 최양선(崔揚善)이 풍수적으로 돈의문 자리가 좋지 않다고 주장하여 돈의문이 폐쇄되었다.[2]
태종은 대신할 문을 어디에 세울지 의정부에 명하여 찾게 했는데, 이때 태종의 대표적 권신 안성군 이숙번의 집 앞에 있는 옛길을 따라서 문을 세우면 좋겠다는 의견이 나왔다. 그러자 이숙번은 '''상왕 정종이 기거하는'''(...) 인덕궁 앞 작은 동네가 길을 새로 내어 문을 설치할 만한 곳이라고 다른 의견을 내자 조정이 그대로 따라 서전문(西箭門)을 세웠다. 서전문은 경희궁이 있던 서쪽 언덕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경복궁의 좌우 팔과 같은 지역의 지맥을 손상시키지 않으려면 사람과 말의 통행을 금지시켜야 합니다.
ㅡ 조선왕조실록 1413년 6월 19일
세종 4년(1422)에 세종은 서전문을 헐어버리고 오늘날 신문로 언덕 위에 새롭게 문을 세운 뒤 이름을 옛날과 같이 돈의문이라 하였다. 이 문이 바로 지금 우리가 아는 그 돈의문이다. 백성들은 세종이 세운 돈의문을 '새로 세운 문'이라는 뜻으로 '''새문'''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구한말에 정동에 들어선 새문안교회도 '새문 안에 세운 교회'라는 뜻으로 이름을 붙였다. 육조거리에서 돈의문까지 잇는 길을 새문안길(신문로)라 불렀으며, 이게 현 도로명 체계에서도 그대로 사용되었다.
'새문'이란 호칭이 '막을 색(塞)'에서 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권신 이숙번은 돈의문 근처에 큰 집을 짓고 살았는데, 문으로 사람이 통행하고 마소가 오가므로 시끄럽다는 이유로 문을 막아버리고 통행을 금했다 하여 색문(塞門)[3] 이라 부르고 부근 마을을 색문동(塞門洞)이라 하였는데, 후에 새문, 새문동으로 음이 변했다는 것이다.
세월이 지나 돈의문의 성문과 성루가 낡자 숙종 37년(1711)에 다시 지었다.
시간은 흘러 일제강점기 1915년, 일제는 경성(서울)을 개발하며 전차궤도를 복선화[4] 하려했는데 돈의문이 방해가 되었다. 총독부가 처음에는 흥인지문과 돈의문을 모두 헐기로 했으나, 흥인지문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입성한 문이라는 이유로 헐지 않고 문 양쪽 성벽만 없애 전차 노선을 유지하였고 돈의문만 철거했다.
'''그렇게 조선 초부터 약 5백년간 서쪽 대문 역할을 하던 돈의문은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그 이후 철거된 돈의문의 기와와 목재는 경매에 부처져 염덕기라는 자에게 205원 50전에 팔렸고[5] 나머지 체성의 석재와 주변 성벽은 도로 공사 자재로 사용되었다고 한다.총독부 토목국 조사과에서는 돈의문의 경매입찰은 진행하였고 염덕기라는 사람에게 205원 50전에 낙찰되었다.
ㅡ 1915년 3월 7일. 매일신보
철거과정에서 돈의문의 편액(현판)만은 남았는데, 창덕궁의 행각에 보관해오다가 1992년에 덕수궁 궁중유물전시관 수장고를 거쳐 2005년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이관되었고, 2014년부터 한양도성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4. 돈의문 증강현실 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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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과 흥인지문만이 남아있던 탓인지 돈의문의 이명인 서대문은 각종 지명에 남았지만, 정작 사람들은 서대문은 어디 있는지 관심도 없는 비운의 대문이 되었다(...). 일제가 철거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도 남아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숙정문은 있긴 하지만 북악산 내에 있어서 존재감이 적다.
복원에 대한 논의 끝에 서울특별시는 서대문고가도로를 철거하고 2013년 완공을 목표로 돈의문을 복원하기로 결정했다. 2015년까지 서울 성곽도 복원될 예정이었으며, 그러면 복원된 숭례문과 함께 4대문과 성곽이 복원되는 셈이었다. 이는 돈의문 복원을 위한 자료수집 중에 국립 고궁 박물관에서 돈의문 현판을 발견하였기에 가능하였다. 그러나 돈의문 외형 사진 몇 장, 현판 말고는 복원 근거 자료가 전무하다는 의견으로 현재로서는 복원이 무산[6] 되었다는 게 중론이다. 교통체증, 교통문제, 예산문제, 토지문제 등 현실적인 문제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사항이며, 인근의 경희궁마저 2004년 이후 사실상 복원이 중단되었으므로 돈의문 복원은 끝내 결정되지 않았다.
2018년 12월 6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우미건설, 문화재청, 서울시, 제일기획이 현실적인 문제를 감안하여 돈의문의 증강현실 복원을 결정, MOU를 체결했다. 약 8개월 뒤인 2019년 8월 20일 증강현실 복원이 완료되어 터로 알려진 정동사거리에 돈의문 조형물을 설치하여 스마트폰의 증강현실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해 돈의문을 현실감 있게 체험할 수 있게 되었다. 기사
5. 둘러보기
[1] 현판 뒷면에는
'''辛卯十一月十五日 幼學臣 趙潤德 奉敎書, 己巳二月十八日 營建所改造'''
'''신묘년(1711) 11월 15일 유학 조윤덕이 쓰고, 기사년(1749) 2월 18일 영건소에서 개조'''
라는 글이 음각되었다.[2] 같은 이유로 창의문과 숙정문도 함께 폐쇄되었다.[3] 그 후로 사람들이 이숙번의 집 앞을 지날 때마다 '색문가'. 즉 성문을 막아버린 집안이라며 손가락질했다고 전한다.[4] 당시 한양의 전차 노선은 마포에서 돈의문, 흥인지문을 지나 청량리까지 운행되었다. 현재의 수도권 전철 5호선 마포역 ~ 종로3가역, 수도권 전철 1호선 종로3가역 ~ 청량리역 구간이 해당된다. [5] 당시 쌀 한가마니가 16원 정도였다고 한다. 현재 시세로 치면 200만원 정도.[6] 일제시대에 촬영된 사진을 보면 숭례문이나 흥인지문과는 다르게 한가운데에 크게 문이 있고 성루는 (2층 누각인 숭례문, 흥인지문과 달리) 단층 누각
'''辛卯十一月十五日 幼學臣 趙潤德 奉敎書, 己巳二月十八日 營建所改造'''
'''신묘년(1711) 11월 15일 유학 조윤덕이 쓰고, 기사년(1749) 2월 18일 영건소에서 개조'''
라는 글이 음각되었다.[2] 같은 이유로 창의문과 숙정문도 함께 폐쇄되었다.[3] 그 후로 사람들이 이숙번의 집 앞을 지날 때마다 '색문가'. 즉 성문을 막아버린 집안이라며 손가락질했다고 전한다.[4] 당시 한양의 전차 노선은 마포에서 돈의문, 흥인지문을 지나 청량리까지 운행되었다. 현재의 수도권 전철 5호선 마포역 ~ 종로3가역, 수도권 전철 1호선 종로3가역 ~ 청량리역 구간이 해당된다. [5] 당시 쌀 한가마니가 16원 정도였다고 한다. 현재 시세로 치면 200만원 정도.[6] 일제시대에 촬영된 사진을 보면 숭례문이나 흥인지문과는 다르게 한가운데에 크게 문이 있고 성루는 (2층 누각인 숭례문, 흥인지문과 달리) 단층 누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