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브라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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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vid McDowell Brown'''
1956년 4월 16일 ~ 2003년 2월 1일
미국우주 비행사로, 양차대전 이후 미군의 역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기인'''이자 '''먼치킨'''이었다. 하지만 NASA 우주왕복선 컬럼비아호의 STS-107 미션에 참가하여 미션을 수행하고 돌아오던 중 폭발사고로 유명을 달리하였다.
버지니아 주 알링턴 카운티에서 태어나고 자란 브라운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8년 윌리엄 메리 대학(College of William and Mary)에서 생물학 전공으로 학위를 딴 뒤 1982년 이스턴 버지니아 의과대학원(Eastern Virginia Medical School)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다. 하지만 대학 시절부터 그에게는 '''기인'''의 풍모가 보였다. 체조선수로 활동하면서 여러 지방으로 서커스 공연을 떠나 7피트짜리 외발자전거를 타는 등 스턴트 곡예를 즐겼으며, 어릴 적부터 항덕후의 본능을 가졌던지라 대학을 다니면서 항공 조종사 면허를 따기도 했다. 아마추어 라디오 기술 면허는 덤.
그렇게 그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의과대학 병원(Medical University of South Carolina Medical Center)에서 1년간 인턴을 수료한 뒤, 우연히 F-4 옆에 선 미합중국 해군 항공군의관이 소개된 모병 홍보물을 보고 숨겨왔던 항덕후의 본능에서 우러나온 전투기 모에를 체감함과 동시에 덕업일치를 다짐했다. 그렇게 브라운은 미 해군에 입대했다. 의사 같은 엄청난 인적자원이 제 발로 군에 찾아오자 모병관은 당연히 반색하며 군의관 훈련에 넣어줬고, 브라운은 가뿐히 수료했다. 그렇게 브라운은 1984년 해군 군의관으로 알래스카에서 근무하다 니미츠급 항공모함 USS 칼 빈슨의 항공군의관으로 배치된다. 이 항공모함 근무 시절부터 브라운은 항공군의관으로서 전투조종사들의 건강을 관리하면서 캐터펄트 발진과 착함을 수없이 많이 참관했고, 그 과정에서 비록 나이는 많지만 개인적으로 비행 면허도 따놓았던 자신도 훈련을 수료할 수 있겠다고 여겼다.
그렇게 1990년, 남들은 조종사로 복무한 뒤 전역하거나 민간 이직 준비하는 나이인 '''34세'''라는 초고령으로 브라운은 해군의 조종사 훈련에 입교하여 수석으로 수료하였다. 근 10년 동안 현역 군의관이 조종사 훈련에 투입된 것만도 유일무이한 사례였는데 수석으로 F/A-18, A-6 조종 자격을 딴 것은 역대 전무후무할 사례였다. 1992년부터는 A-6E 조종사로서 제7함대 소속 포레스탈급 항공모함 USS 인디펜던스의 이글 전투비행대(VA-115)에 배치되었다. 1995년에는 해군 테스트 파일럿 스쿨에서 항공군의관 겸 테스트 파일럿이라는 기이한(...) 직책을 따내며 테스트 파일럿들의 건강을 감독하였고, 강한 중력가속도를 받는 인간의 몸에 일어나는 현상에 대해 연구했다.
이후 1996년에는 NASA에 우주 비행사 후보(미션 스페셜리스트)로 선발되었다.[1] 우주왕복선ISS 미션의 지상 지원, 백업 팀에서 활동하면서 장기 체류 임무를 뛰고 온 우주비행사들의 신체변화에 대해 연구했고, 2003년 1월 처음으로 정규 비행 임무인 STS-107을 수행하게 되었다. 우주에서 생물학 실험에 쓰일 스페이스햅(SPACEHAB) 모듈의 첫 비행이어서, 브라운 외에도 의사 출신인 로렐 클라크가 동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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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에서의 단체 사진. 푸른 옷은 브라운, 조종사 윌리엄 맥쿨, 미션 스페셜리스트 마이클 앤더슨이고, 붉은 옷은 인도계 미국인 미션 스페셜리스트 칼파나 차울라, 사령관 릭 허즈번드, 로렐 클라크, 이스라엘 공군 대령으로 첫 이스라엘 우주비행사가 된 페이로드 스페셜리스트 일란 라몬.
STS-107은 1월 16일 순조롭게 발사, 궤도에 진입하였다(고 '''보였다'''). 함께 첫 미션을 수행한 동료이자 자신처럼 미 해군 항공군의관이었던 로렐 클라크와 함께 여러 생물학, 의학 실험을 수행했다. 15일 22일 24분에 걸쳐 브라운은 생애 첫 우주비행을 수행했다. 하지만, '''이 미션은 컬럼비아 궤도선의 재돌입 도중 공중폭발'''이라는 끔찍한 비극으로 끝나며 브라운과 여섯 우주비행사들의 목숨을 앗아가고 말았다. 텍사스 상공에서 산산조각난 채로 루이지애나까지 흩어져 추락한 컬럼비아호의 잔해와 우주비행사들의 유해는 여러 수색대원들의 목숨까지 추가로 앗아가며 오랜 기간에 걸쳐 수습되었고, 브라운의 유해는 사고로부터 한 달이 넘어서야 신원확인이 마무리되며[2] 고향이기도 한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알링턴 국립묘지 추모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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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은 하지 않아서 유가족은 아버지와 어머니만이 있었고, 휠체어에 앉아서 통곡하는 늙은 아버지의 모습에 전미가 울었다. 장례식에서는 F/A-18 편대의 추모비행이 있었고, 미 해군은 항공우주의료센터의 이름에 로렐 클라크와 브라운의 이름을 붙였고 소행성에도 이름이 붙는등 모교와 사회 각계각층에서의 추모가 이어지고 있다.
비슷한 사례의 인물로 소니 카터가 있다. 이 쪽은 '''축구선수'''로 활동하다가 해군 항공군의관이 된 뒤 31세의 나이로 전투조종사가 되었던 인물. 이 쪽은 1989년 국방부 기밀 위성 미션인 STS-33을 수행하고 무사히 돌아왔지만 1991년 4월 아틀란틱 사우스이스트 항공 2311편 추락 사고로 사망했다. 사망 당시 STS-42 미션에 배정되어 있었다.
[1] 마크 켈리, 스캇 켈리 쌍둥이와 리사 노왁, 최초의 여성 ISS 엑스퍼디션 사령관 페기 윗슨, 그리고 컬럼비아 참사에서 같이 희생되는 로렐 클라크, 윌리엄 맥쿨과 동기이다. ISS의 개발을 앞두고 뽑힌 기수라서 인원 규모가 역대 최대인 44명에 달한다.[2] 상공에서 폭발한 것만으로도 신원확인이 어려운데 우주에서 실험에 썼다가 같이 귀환하던 미생물들이 살아남아 증식하면서 극히 일부만이 형태를 유지했던 우주선 잔해와 승무원들의 시신, 유품마저 엄청난 훼손을 입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