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의용수비대

 


1. 개요
2. 창설
3. 구성
4. 활약
5. 임무 완료
6. 고난
6.1. 논란
7. 이후
8. 대중매체에서
9. 관련 문서


1. 개요


1953년부터 1956년까지 약 3년 8개월 동안 일본독도 무단 침입에 맞서 독도를 지킨 민간 조직이다.

2. 창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일본은 전란을 틈타 세차례에 걸쳐 불법적으로 독도에 무단 상륙, 1948년 미군의 폭격 연습 과정에서 희생된 한국 어부의 위령비를 파괴하고 독도에 '''시마네현 오키군 다케시마(島根縣隱岐郡竹島)'''라는 나무 표지판을 세우는 등 불법 영토 침략을 공공연히 저질렀다. 이에 6.25 전쟁에 참전하였으나 부상을 입고 대한민국 육군 특무상사로 전역한 울릉도 출신 홍순칠울릉도에 살고 있던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1] 아직 한국전쟁이 끝나지 않은 시점인 1953년 4월 20일 독도의용수비대가 결성되었다.
무장 및 장비들은 대장이자 당시 울릉도 최고의 부자였던 홍순칠이 직접 부산으로 찾아가 오징어를 팔아 군자금을 마련해서 각종 무기와 장비를 구입하였으며, 결성 이후에는 대원들의 모금을 통해 구입하였다. 또한 경북도경(울릉경찰서라는 이야기도 있다)에서 지원받은 박격포, 중기관총, M1 개런드로 무장했다. 이후 목재, 전답, 산을 팔아서 계속 군자금을 보충했다.

3. 구성


대장은 홍순칠 본인이 맡았으며, 편제는 각각 15명으로 이루어진 전투대 2조, 울릉도 보급 연락요원 3명, 예비대 5명, 보급선 선원 5명 등 총 45명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이 중 3명을 제외하면, 대부분 한국전쟁에 참전한 경험이 있는 전투원 출신이었다. 이후 12명이 탈퇴하면서 최종적으로 수비대에 남은 인원은 33명으로 기록되었다.
  • 수비대 대장 - 홍순칠
  • 수비대 부대장 - 황영문
  • 제1전투대 - 대장 서기종
  • 제2전투대 - 대장 정원도
  • 후방지원대 - 대장 김병렬
  • 교육대 - 대장 유원식
  • 보급대 - 대장 김인갑
  • 대원
    • 고성달
    • 구용복
    • 김경호
    • 김수봉
    • 김영복
    • 김영호
    • 김용근
    • 김장호
    • 김재두
    • 김현수
    • 박영희
    • 안학률
    • 양봉준
    • 오일환
    • 이규현
    • 이상국
    • 이필영
    • 이형우
    • 정의관
    • 정재적
    • 정형권
    • 조상달
    • 최부업
    • 하자진
    • 한상용
    • 허신도

4. 활약


  • 1953년 6월 일본 오게(大毛) 수산고등학교 연습선 지토마루 호를 독도 서도 150m 해상에서 나포해 이들을 일본으로 돌려보냈으며, 같은 해 7월 일본 해상보안청 소속 순시선이 독도에 접근하자 위협사격을 가해 이들을 격퇴시켰다. 이 싸움이 수비대가 일본에 맞서 벌인 첫 전투이다.
  • 1954년 6월 홍순칠 대장 등은 독도 동도 바위에 한국령(韓國領)이라는 글자를 새겨 넣었다. 같은 해 8월 23일, 독도에 접근하려는 일본 순시선을 총격전 끝에 다시 격퇴, 같은 해 11월 21에는 1,000t급 일본 순시선 3척 및 항공기 1대와 총격전을 벌여 역시 격퇴하였다.[2]] 여담으로 이 때 독도의용수비대는 당시 일본 순시선에 비해 열악한 무기로 무장한 상태였다. 그러나 수비대는 독도 정상쯤에 큰 통나무에 검은 칠을 해 가짜 대포를 만들어 일본 함선의 눈을 속이는 기지를 발휘해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 1956년 12월 30일, 무기와 임무를 국립 경찰에 인계할 때까지 독도의용수비대는 독도를 지키는 데 전념하였다.

5. 임무 완료


하지만 개인이 군대를 꾸리는 일은 만만치 않았고 마침내 마지막 남은 재산까지도 수비대 유지에 날려버린 홍순칠은 계속 자신들의 업무를 정부에서 맡아주길 요청했지만 정부에선 근무환경이 너무 열악하다고 난색을 표하기만 했고 배속된 경찰들은 근무를 거부하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일본의 항의가 거세짐에 따라 한때 홍순칠이 해적이란 주장이 제기되어 홍순칠을 주한미군이 체포하여 한국 정부에 인계하기도 했다. 홍순칠은 자신이 전재산을 바쳐 독도를 지켰다고 국회의 청문회에서 주장했고 청문회는 홍순칠에게 동정적으로 바뀌어 정부가 뭘 했길래 애국자를 해적으로 몰았냐고 내무, 외무, 국방장관에게 항의하는 지경에 이르러 홍순칠은 석방되었다.
1956년 12월 30일 마침내 기존의 업무를 국립경찰 소속 독도경비대에 인계함으로서 이들의 기나긴 임무는 끝이 났다. 이 공로로 홍순칠은 1966년 5등 근무공로훈장을, 나머지 대원들은 방위포장을 수여받았다. 10명의 의용수비대는 경찰 소속으로 전환하여 그 뒤로도 근무를 계속했다. 그러나 임무를 마친 뒤에도 이들은 독도 방파제 설치를 정부에 건의하는 등의 독도 지키기 및 독도 가꾸기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6. 고난


일본과의 교전 중에선 사상자가 없었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전달한 위문품을 받는 과정에서 위문단 한 사람이 놓고 온 카메라집을 가져다 주던 중에 허학도 대원이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다. 독도에 수비대원들이 지낼 막사와 계단 등을 만드느라 허위로 징용영장을 만들어 울릉도의 목수와 기술자들을 불법으로 징용하여 수비대 기지를 만들었는데 이 과정에서 기술자 몇명이 사고로 목숨을 잃기도 했다. 또 군자금의 부족이 심각하여 제주도 해녀들을 불러 해물을 채취하여 팔아서 군자금을 마련하려 했지만 인건비도 나오지 않을 정도라서 그만두어야 했다.
1969년, 1972년 독도개발계획서를 경상남도에 제출하며 실효적 지배를 강화하도록 재촉했으나, 당시 일본의 눈치를 보던 위정자들은 점차 그를 눈엣가시로 보기 시작했다. 결국 홍순칠 대장은 1974년 12월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사흘 동안 고문을 당했다. 중정의 요구는 더 이상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떠들지 말라’는 것이었다. 다시는 글을 쓰지 못하도록 그의 오른손을 부러뜨리기도 했다고 부인 박영희 여사가 전했다. 그가 고초를 겪었음에도 언론은 정권의 통제로 보도하지 못했고, 훗날 국정원과거사위나 진실화해위에서도 거론되지 않았다.
또한 신군부는 1980년대 초 그가 독도 지킴이로 북한 방송에 소개되자, 그를 즉각 체포해 극렬한 고문을 가하여 간첩 조작을 하려 했다. 결국 고문 후유증으로 홍 대장은 1985년에 서울로 이주했고, 1986년, 폐암으로 숨졌다. 박정희 때처럼 일본 등 외국 차관에 의존했던 전두환 정권은 독도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민간인 출입을 막았고, 심지어 노래 ‘독도는 우리땅’을 비공식적으로 금지곡으로 지정하기까지 했다. (한겨레 칼럼 : 박정희 정권은 왜 독도지킴이의 손을 부러뜨렸나)

6.1. 논란


1. 2006년 오마이뉴스에서 독도수비대에 대한 위와 같은 내용이 사실은 과장되었다는 보도를 해서 논란이 된 적이 있다.
2. 독도의용수비대의 창설시기가 1953년이 아니라 1954년이라는 주장도 있다.
"국토보호를 목적으로 1954년 정부 보조없이 단독으로 울릉도 출신 대원 30명을 모집하여 다액의 사재를 들여 1956년 8월까지 독도를 수비하여 3차에 걸친 교전을 통하여 일본의 일본의 침입을 방지함으로서 대한민국 영토수호에 헌신 노력하였음"-총무처 작성, 1966.4.6
그러나 국가보훈처는 1953년 4월부터 1956년 12월까지 독도경비대원으로 활동했다는 주장을 인정하고 있다.
2017년 10월 27일, 국가보훈처는 울릉도에서 독도의용수비대기념관 개관식을 열고,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이 기념사를 했다. 기념관은 1953년 4월 부터 1956년 12월까지 활동한 것으로 기록돼있다.
"1953년부터 1956년 까지 3년 8개월 동안 33명이 활동"했다는 내용은 당시 수비대장이었던 홍순칠의 수기 <이 땅이 뉘 땅인데>에도 기록돼 있으며, 홍순칠의 수기는 병적기록, 경찰인사기록, 외무부 발행 독도문제개론, 영토표석 관련 문서철(국가기록원 소장), 경상북도 경찰국 조사보고서 등에서 확인 가능하다.

7. 이후


한국 정부는 이들의 공로를 인정해 1996년 4월 홍순칠 대장에게 국가보훈 삼일장을 추서하고, 나머지 대원에게 보국훈장 광복장을 수여했다. 2005년에는 독도의용수비대 지원법이 제정되었으며, 이 법을 토대로 2008년 독도의용수비대 기념사업회가 공식 출범했다.
현재 순직한 독도의용수비대원 전부는 현재 국립대전현충원 독도의용수비대 묘역에 잠들어있다.

8. 대중매체에서


1986년MBC 단편 베스트셀러 극장에서 단편 드라마 독도수비대가 방영[3]되기도 했으며, 1989년 MBC에서 TV피쳐 시리즈 1탄으로 '''독도수비대'''라는 드라마를 제작하였으나, 막대한 제작비와 동시녹음 등의 노력에도 불구, 각본 및 연출상의 허술함으로 인해 좋은 평을 받지 못했다.
1989년판의 원작은 김교식 작가의 소설 <아, 독도 수비대>이며 극본은 김운경, 편집은 조인형, 연출은 이진석 PD가 각각 맡았으며, 배우 강인덕이 홍순칠 대장, 권재희가 홍순칠의 부인, 김성찬이 황영문, 나영진이 차기복, 유퉁이 정원팔, 정명환이 최대업, 최불암이 이승만 대통령, 백인철이 김종원, 최낙천이 일본 영사, 성우 김기현이 일본 함장으로 나왔다. 내무부 치안본부와 울릉군청, 울릉경찰서, 해양경찰대, 철도청, 한국문예진흥원, 국립중앙박물관, 인천직할시청, 영화여자상업고등학교 등이 제작에 협조했다.
1996년 일본독도 영유권 주장 및 망언 등으로 인해 국민정서상 반일감정이 고조되고 격화되면서 MBC에서 때맞춰 1996년 8월 재방영하였으며, 2005년 태원엔터테인먼트가 다큐멘터리 <독도>와 묶어 DVD로 냈다.(참고 자료)

9. 관련 문서



[1] 대장인 홍순칠을 포함한 대부분의 대원들은 한국전쟁 초기 참전 경험이 있는 전투원 출신들이었다.[2] 이 전투에서 일본측은 16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등의 피해를 입었으며, 이 사건 이후 일본은 한국측에 항의각서를 보내기도 했다. [3] 이것도 해군에서 제작/지원하여 한국 해군 구축함이 동원되어 포격하는 모습도 보여줬다. 일본 해상자위대 함장으로 김무생이 나와 일본어로 대사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