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사라진 팀
1. 개요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으로 통합되어 사라진 대표팀을 다루고 있는 문서.
참고로 이 두팀의 기록을 승계하는 대표팀은 존재하지 않는다.
2. 동독 축구 국가대표팀
2.1.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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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독 축구협회 엠블럼.
'''친선경기의 세계 챔피언''' 이라는 별칭이 있던 대표팀.
2차대전 이후 생겨난 동독의 축구팀으로서 1990년 10월 3일 서독과 재통일 하면서 사라졌다.
1949년 단독 동독 정부가 생기고 2년 뒤 1951년에 FIFA에 가입신청을 한 뒤 1952년 동독축구협회가 정식 FIFA 멤버가 되었다.
1952년 9월 21일 바르샤바에서 폴란드와 역사상 첫 A매치를 가져 3대0으로 졌다. 첫 홈경기는 1953년 6월 14일 드레스덴에서 불가리아와의 평가전으로 0대0 무승부를 기록했다. 본래는 월드컵에도 참가하지 않다가 1954년 서독의 월드컵 우승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아 1958년부터 월드컵 예선에 참가하기 시작한다. 최고 성적은 1974년 서독에서 개최한 월드컵에서 2라운드(8강)에 진출한 것이다. 유일한 진출 경력이 서독 월드컵이라는 것이 역사의 아이러니. 또 서독월드컵에서 개최국 서독과 조별리그에서 맞붙어 위르겐 슈파르바서의 골로 1대0으로 승리하는 파란을 연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2라운드에서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네덜란드에게 차례로 발리며 탈락. 그 이후 다시는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지 못했다.
그래도 누가 독일 아니랄까봐 다른 국제대회에선 준수한 성적을 여러번 거두었는데 특히 올림픽 축구에 강했다. 1964년 독일을 대표하여 동독이 나가 올림픽 동메달을 처음 획득했고[1] 처음 단독으로 나간 1972년 뮌헨 올림픽 동메달,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금메달,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은메달을 획득하며 전성기를 달렸다. 청소년 대회에서도 곧잘 했는데, 1987년 FIFA 청소년 선수권[2] 에서 3위를 하기도 했다. 당시 마티아스 잠머의 FIFA 대회 데뷔무대. 1989년에도 본선에 올랐으나 이 때는 조별리그 탈락. 1989년에는 대신 16세 이하 대표팀이 FIFA 16세이하 선수권 본선에 올라가 8강에 갔다. 여러모로 독일의 이름값은 했다.
최다 출전자이자 최다 득점자는 요아힘 슈트라이히로 102경기 55골을 기록했다. 최장기 지휘 감독으로는 게오르크 부슈너가 1970년부터 1981년까지 전성기를 함께했다. 존재 당시 홈 경기장으로는 라이프치히의 젠트랄슈타디온을 주로 사용했다.
동독은 유로 1992 지역예선에서 서독, 웨일스, 벨기에, 룩셈부르크와 함께 5조에 편성되어 예선을 치룰 예정이었다. 오랜만의 공식 대회에서의 독일 더비로 관심을 끌었는데 1990년 8월 23일에 독일 통일을 10월 3일에 하기로 결정되어 동독 대표팀도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 9월 12일로 예정된 벨기에와의 예선 조별리그 첫 경기(원정)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친선경기로 그 성격을 바꿔 진행했고 동독이 2-0으로 승리하였다. 동독의 예선 잔여경기는 모두 취소되었고, 대신 서독 팀이 독일팀으로 바뀌어 남은 예선을 진행하였다. FIFA는 상황의 특수성을 인정해 모든 동독 대표팀 선수들에게 독일 대표팀에 출전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했고, 울프 키르스텐, 마티아스 잠머, 안드레아스 톰, 토마스 돌, 다리우스 보츠, 올라프 마르샬, 하이코 슐츠, 디르크 슈스터가 통일 독일 대표팀으로 합류했다.
2.2. 역대 전적
2.2.1. FIFA 월드컵
'''역대 월드컵 전적 순위 : 51위'''
'''⑧'''
월드컵을 밥먹듯이 나와서 기본 4강은 찍어줬던 서독과는 다르게 동독은 본선과는 거리가 멀었다. 45년간 분단생활하면서 딱 한 번 본선에 나갔는데, '''하필 유일한 본선진출이 서독에서 열린 월드컵이었다. 게다가 서독과 같은 조에 속했다'''. 같은 독일이지만 양독(兩獨)간의 미묘한 신경전은 당연히 있었고 실력을 떠나 어디가 이길까 궁금해하는 축구팬들이 많았는데, '''그 막강한 서독을 동독이 1:0으로 잡는 이변을 일으키고 동독이 조 1위로 8강에 진출했다'''. 결승골을 넣은 선수는 위르겐 슈파르바서[6] . 서독 감독이 직접 사과를 해야할 정도로 서독 팬들에게는 충격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동독은 8강 2라운드에서 네덜란드, 브라질, 아르헨티나라는 괴물들을 만나 고전한 반면, 서독은 폴란드, 스웨덴, 유고슬라비아에 전승을 거두고 결승에서도 네덜란드를 잡고 우승을 차지.[7] 이 대회 이후 네 번 연속 미끄러지고 결국 서독에 흡수통일되면서 동독의 처음이자 마지막 무대는 서독에서의 8강이란 호성적 하나만 남게 되었다.
그들에게 월드컵 예선은 이웃 서독과 달리 항상 고난의 연속이었다. 첫 참가한 1958년엔 체코슬로바키아에게 2연패하며 발렸고, 62년엔 헝가리에세 2연패 후 마지막 네덜란드와의 경기는 네덜란드가 비자 문제로 입국 거부를 때리면서 치뤄보지도 못한 채 탈락. 66년에도 헝가리에게 밀려 떨어졌고, 70년엔 선전했지만 이탈리아에게 승점 2점차로 아깝게 밀려 떨어졌다. 서독과 달리 예선전에 쉬운 조에 걸린 적이 단 한번도 없어서 가진 실력은 꽤 상당했지만 74년 이전까지 한번도 본선 진출을 못했다. 그래서 1974년 월드컵 8강진출은 지지리도 운이 없던 동독의 지난 월드컵 예선 도전사를 부각시키는 좋은 사례다.
하지만 78년 대회 예선에선 무패를 기록하고도 오스트리아에게 밀려 탈락했으며, 출전국이 확대된 1982년에는 5개팀이 2장을 놓고 싸워 여유가 좀 있던 여섯 조가 아닌 3팀이 1장을 놓고 싸우는 7조에 하필 배정되어 폴란드에게 광탈당했다. 1986년 대회 예선에는 프랑스,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와의 역대급 죽음의 조에 들어가며 1위 프랑스, 2위 불가리아에게 승점 1점 밀린 조 3위로 탈락, 마지막 참가대회였던 1990년 예선에도 조 2위 오스트리아에게 승점 2점차로 밀려 탈락하는등 매번 한 끝이 아쉬운 모습을 보이던 팀이었다.
다른 나라들과의 상대전적은 브라질 1패(1974), 서독 1승(1974), 아르헨티나 1무(1974), 네덜란드 1패(1974), 칠레 1무(1974), 호주 1승(1974)이었다.
대륙별 상대전적은 유럽 1승 1패, 남미 2무 1패, 오세아니아 1승이었다.
한 경기 최다득점 기록은 1974 조별리그 호주전 2:0 승, 최다실점 기록은 1974 2라운드 네덜란드전 0:2 패였다.
2.2.2. 올림픽
- 1964 도쿄 올림픽 : 동메달(명목상 단일팀)[8]
- 1972 뮌헨 올림픽 : 동메달(3, 4위전에서 소련과 비겨서 공동 3위)
- 1976 몬트리올 올림픽 : 금메달
- 1980 모스크바 올림픽 : 은메달
2.2.3. UEFA 유로
- 유로 1960 : 예선탈락
- 유로 1964 : 예선탈락
- 유로 1968 : 예선탈락
- 유로 1972 : 예선탈락
- 유로 1976 : 예선탈락
- 유로 1980 : 예선탈락
- 유로 1984 : 예선탈락
- 유로 1988 : 예선탈락
그러나 1980년 대회 본선 진출팀이 8개국으로 확장되면서 이제 그냥 조 1위만 하면 본선에 직행하는 상황이 되었는데 동독은 여전히 본선에 못올라갔다. 1980년 대회 예선에서 네덜란드와 폴란드에게 밀려 조 3위로 떨어졌고, 1984년 예선에선 벨기에와 스위스에게 밀려 탈락. 1988년이 제일 아까웠는데 86 월드컵 3위의 프랑스를 원정에서 1대 0으로 격파했는데도 소련에게 딱 한번 진것 때문에 2위로 밀려서 떨어졌다. 본선에 제일 근접했던 대회였다. 1992년 유로에도 참가하여 서독, 웨일스, 벨기에, 룩셈부르크와 한 조에 편성되었으나 독일 통일로 인해 팀 자체가 사라지며 같은 조에 있던 서독과 통일 독일 대표팀으로 참가하게 되었고 역사속으로 동독 대표팀은 사라진다.
3. 자를란트 축구 국가대표팀
3.1. 역사
2차대전 종전 직후인 1950년부터 1956년까지 프랑스의 지배를 받던 자르 보호령을 대표한 국가대표팀이다.[10] 자를란트 주민투표를 거쳐 1957년 1월 1일 서독으로 편입되면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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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를란트 축구협회(SFV) 엠블렘
FIFA는 독일 3국(서독, 동독, 자를란트)의 1950 브라질 월드컵 출전을 금지시켰다.
1950년 대회가 끝난 이후 대표팀이 조직되고 11월 22일 스위스와의 첫 경기에서 5대3의 승리를 거둔다. 1951년엔 오스트리아와 스위스를 연파했고, 1952년에는 프랑스도 이기는 등 독일계 팀의 위엄을 발휘했다. 자를란트가 1952년에 올림픽에 참가했을 때 아쉽게도 자를란트 축구 대표팀은 참가하지 않았다.
1952년부터 1954년까지 헬무트 쇤이 자르 대표팀 감독을 역임했다. 그가 이끈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예선에서 첫 경기 노르웨이를 이기며 산뜻하게 출발하나 같은 조 서독에게 2연패하며 탈락.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 자를란트 단독의 국제대회 참가기록이다.
이후 팀이 급속히 힘이 빠지면서 우루과이와의 친선전 1대7 대패, 유고슬라비아에게 1대5 대패, 프랑스에게 1대4, 포르투갈에게 1대6으로 연전연패 하는등 최약체화 되다가 1956년 6월 6일 네덜란드와의 친선전 2대3 패배를 끝으로 1957년 1월 1일 자를란트가 서독에 가입하여 소멸하면서 대표팀도 서독에 흡수되었다.
여담으로 자를란트의 가장 빅 클럽인 1. FC 자르브뤼켄은 자를란트 성립 이전 1948-49 시즌 프랑스 리그 2에서 뛰다가 리그 2 우승을 하고도 프랑스 클럽들의 반발로 승격 좌절된 뒤 프랑스 리그를 나오고 자를란트 독립 리그에는 참여하지 않다가 자를란트 대표로 1955-56 UEFA 챔피언스컵에 출전하기도 했고, 이후 서독 축구협회의 제안으로 서독 오베르리가로 편입되는 파란만장한 역사를 겪는다. 이 때의 FC 자르브뤼켄 멤버들이 대부분 자를란트 대표팀 멤버였기 때문에 신생팀인데도 나름 형편없는 실력은 아니었던 것.
3.2. 역대 전적
3.2.1. FIFA 월드컵
[1] 당시에는 동,서독이 독일 단일 대표로 올림픽에 참가하던 시절이라 동독과 서독이 서로 플레이오프를 벌여 이긴 팀이 유럽 지역예선에 출전했다. 1956년부터 1964년까지 이랬다.[2] FIFA U-20 월드컵의 옛이름[3] 제2차 세계대전의 전쟁범죄에 대한 징벌로 출전자격을 박탈당했다.[4] 조별예선에서 분단국 서독을 1:0으로 잡는 대이변을 연출하고 조 1위로 8강 진출, 8강 리그에서 조 3위로 탈락[5] 월드컵 본선 출전 비율[6]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14년 뒤인 1988년에 탈동(脫東)하여 서독으로 왔다(...). [7] 이 때문에 서독이 일부러 동독에게 져주기 게임을 했다는 의혹이 있다.[8] 이때는 통계 처리가 좀 복잡하다. 동독축구협회와 서독축구협회는 당시 따로 있었지만 올림픽 위원회는 독일올림픽위원회 하나였다. 그래서 독일은 지금의 영국처럼 월드컵은 따로 나가지만 올림픽은 단일 팀을 구성해야 했다. 이때 양쪽의 합의로 동서독 아마추어 대표(프로가 없는 동독은 사실상 국가대표)가 대결을 하여 이기는 팀이 독일 올림픽 대표로 지역예선에 나가기로 한 것. 맞대결에서 동독이 승리했고(1승 1패였는데 골득실에서 동독이 앞섰다.), 유럽 지역예선을 통과하여 본선 진출 후 3위를 했다. 그러므로 공식적으로 도쿄 올림픽 축구 3위 팀은 '동독'이 아니라 '독일'이다. 1956 멜버른 올림픽 때는 서독이 동독을 이기고 지역예선 통과 후 본선에 갔지만 메달을 따지 못했다. 도쿄 올림픽 공식 보고서에는 모든 경기 결과가 다 나와 있는데, 축구 지역예선 동서독 대결 결과까지 포함되어 있었다.[9] 당시에는 월드컵처럼 올림픽에도 전 대회 우승국 본선 자동진출권이 있었다.[10] 1956년까지 프랑스는 자를란트(Saarland)가 독일에 재편입되는 것을 반대했기에 자신들이 분리시켜 관리하였다.[11] 월드컵 본선 출전 비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