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르 보호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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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47년부터 1956년까지 10년 가량 존재한 독일 내부의 프랑스의 보호령이다.
2. 역사
자르 보호령의 역사
2.1. 독일로부터 분리, 프랑스 보호령으로
2차 세계대전이 저물어가던 1945년, 4대 승전국인 미국, 프랑스, 영국, 소련은 패전국 독일을 4등분하여 서로 맡은 지역을 통치한다. 원래 자를란트는 미군의 통치 아래 놓여있었는데, 1945년 7월 전승국 사이의 점령지역 재조정 과정에서 프랑스의 손으로 넘어가게 된다.
자르 지방은 본디 프랑스와 독일의 접경지대로 양국의 문화적 요소가 공존하는 지역이었고, 1919년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자르 분지 지역이라는 프랑스의 관리 하의 국제 연맹 보호령이었던 때도 있었다. 이곳의 풍부한 석탄 및 발달한 광공업은 전쟁 기간 중 황폐화된 프랑스에게 무척이나 매력적이었기에[1] , 1947년 초 프랑스는 이 자르지역을 점령구에서 자치구역으로 전환시킨다. 이미 자치구역으로 전환 전이었던 1946년 12월, 자를란트 관세, 경제, 통화 동맹을 설립함으로 자를란트를 프랑스의 경제권에 편입, 자르 점령구 내에서 판매되는 독일산 제품들에 대해 각종 관세를 매기는 조치를 취했기 때문에 그리 놀랄만한 조치는 아니었지만, 당연히 독일 내부에서 항의와 분노의 목소리는 꽤 컸다.[2] 그리고 1947년 6월 자르 지역은 자르 마르크(Saar Mark)라는 자체 화폐를 발행한 데 이어, 11월부터는 아예 프랑스 프랑과 1대 1로 페그된 자르 프랑(saar franc)을 발행하고,[3] 자체 헌법과 자체 정부까지 세우면서 외견상 독립국의 기능을 수행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말이 자치정부이지 사실상 프랑스의 의중에 의해 좌우됐으며, 의회를 통해 선출되는 주 총리를 제외한 모든 정부 요인도 프랑스 정부에서 임명한 사람들이었던 데다가, 의원 선거조차도 친독 정당은 출마가 금지되는 등 프랑스의 괴뢰국이나 다름없는 신세였다.
비슷한 사례로 스트라스부르의 라인강 너머에 있던 독일의 도시 켈(Kehl)은 1945년 프랑스에 합병되어 독일인 주민이 추방되었다가, 1953년에 서독으로 복귀한다.
2.2. 프랑스 편입 실패
프랑스는 급기야 유럽평의회에 자를란트를 가입시키면서 정작 서독의 가입을 방해했고 서독은 1950년 7월에야 자국의 일개 주에 불과한 자를란트와 나란히 의석을 받는 수모를 감수하면서 유럽평의회에 제휴국 자격으로 가입할 수 있었고 1951년에 정식 회원국으로 승격되었다.
하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인하여 자르의 프랑스 편입은 이뤄지지 않았다. 첫번째 문제는 냉전이었다. 미국과 소련이 새로운 세계 질서의 주도자로 떠오른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프랑스는, 자신들이 주도하는 새로운 유럽을 만들어내는 차원에서 유럽 석탄 철강 공동체(ECSC, European Coal and Steel Community)[4] 를 창설한다. 여기에 서독의 도움은 필수적이었고, 한창 라인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급속한 경제 부흥을 이루고 있던 서독은 자르 지역의 경제를 좌지우지하게 된다. 또한 전후 빠른 경제성장을 거치고 있던 서독의 부유함은 자르 주민들을 유혹하기에 충분하였다.
또한 프랑스 제4공화국은 자신들의 대독 정책이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바이마르 공화국에게 가혹하게 굴어 아돌프 히틀러의 집권을 야기시켰던 것을 재현하고 있다는 고민을 가지게 되었다. 프랑스 기획청 장관 장 모네는 외무장관 로베르 쉬망에게 "1919년 우리가 실패한 것은 차별과 우월감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같은 실수를 저지르기 시작했다."면서 서독에 대한 프랑스의 고압적인 태도를 비판했다.
게다가 주민들의 여론도 문제였다. 독일계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주민들은 당연히 자르가 프랑스로 편입되는 것이나 프랑스의 관할에 속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상황이라[5] 프랑스가 자르를 잡아 둘 명분이 없었다. 하지만 자르 보호령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프랑스는 최후의 수단으로 서독에 자르 보호령의 유럽화, 즉 오스트리아처럼 독일(서독, 동독)과는 별개의 국가로 남겨두자는 제안을 했고, 서독이 이에 동의함에 따라 주민투표로 그 당부를 묻기로 하였다.
2.3. 서독으로 복귀
하지만 1955년 10월 23일 실시된 '자르 지위에 대한 주민투표'에서 프랑스가 제안한 유럽화 제안은 67.6%라는 압도적인 비율의 반대표를 받아 부결되었다. 이는 사실상 자르가 서독 반환을 원한다는 뜻과 다름없는 결과여서, 결국 프랑스는 결과를 승복하고 1956년 10월 27일 룩셈부르크에서 1957년 1월 1일부로 자르 보호령를 서독에 반환하는 것을 골자로 한 자르 조약을 서독과 체결하였으며, 1957년 1월 1일에 자를란트가 공식적으로 서독으로 반환되어 자르 보호령은 자를란트라는 이름의 서독의 연방주(Bundesland)가 돼서 오늘날에 이른다. 이를 두고 1990년 독일 재통일에 대비해 '''작은 독일 재통일'''(Kleine Wiedervereinigung)이라 부르기도 한다.
다만 프랑스 외무장관 쉬망은 자를란트를 ECSC 관리 체제 아래에 두어 서독의 석탄, 철강의 생산과 판매를 국제적으로 감시하게 되는데 이것이 훗날의 유럽연합의 시초가 된다. 그리고 자를란트 프랑은 1959년 7월 6일까지 법정통화로 쓰이다, 서독이 자를란트 프랑을 100프랑 대 0.85 독일 마르크로 교환해주면서 사라지게 된다.
3. 스포츠
- 자를란트 축구 국가대표팀(1950-1956)
- 1952 헬싱키 올림픽에도 참가하였다. 대한민국과의 인연도 있는데, 자를란트 대표로 출전한 복싱선수 헬무트 호프만이 플라이급 1라운드에서 대한민국의 한수안에게 TKO 패배를 당했다.
- 자를란트 에렌리가 - 1949년부터 1951년까지 자르 보호령의 축구 최상위리그 지위에 있었다.
[1] 그래서 서독 정부도 나중에 "석탄으로 보상할 테니 자르 돌려주셈"했지만 프랑스의 반응은... 하지만 프랑스는 후술했듯 여러 이유때문에 결국 석탄을 받고 자를란트를 서독에 돌려주었다. 1차대전 후 프랑스가 자르를 독일로부터 분리하여 보호령을 수립했을때도 자르의 탄광들과 경공업을 프랑스 재건에 사용하려 한 것이 배경이었다[2] 프랑스는 "보불전쟁, 1차 대전, 2차 대전까지 지난 70년 동안 3번이나 니들이 우리를 침략했으니 완충지대를 만들기 위해 우리도 이러는 거야!"라고 반박했고 미국을 비롯한 연합군도 이에 동조해줬다. 다만 그 이전 역사까지 생각하면 프랑스도 독일을 침략한 적이 많다.[3] 이는 모나코 프랑처럼 자를란트 내에서 프랑스 프랑의 사용이 가능해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실제 당시의 자를란트에서는 프랑스 프랑을 사용할 수 있었다.[4] 오늘날 유럽연합의 전신[5] 이미 1935년 주민투표에서만 봐도 독일로의 편입을 원하는 여론이 90.7%로 압도적이었던데 반해, 국제연맹의 관할로 남는 것을 원하는 여론은 8.9%, 프랑스 편입 여론은 0.4%에 그친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