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를란트

 


<colbgcolor=#000> '''자를란트
Land Saarland
'''
[image]
[image]
'''주기(州旗)'''
'''주장(州章)'''[1]
[image]

'''위치'''
'''행정'''
<^|1> {{{#!wiki style="color: #373A3C; margin:0 -10px -5px"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2px -12px"
<colbgcolor=#ffce00> '''국가'''
<colbgcolor=#fff>독일 [image]
'''시간대'''
(UTC+1/+2)
'''주도(州都)'''
자르브뤼켄

'''인문환경'''
<^|1> {{{#!wiki style="color: #373A3C; margin:0 -10px -5px"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2px -12px"
<colbgcolor=#ffce00> '''면적'''
<colbgcolor=#fff>2,569.69km²
'''인구'''
986,887명(2019년)
'''인구밀도'''
384명/km²

'''정치'''
<^|1> {{{#!wiki style="color: #373A3C; margin:0 -10px -5px"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2px -12px"
<colbgcolor=#ffce00> '''주총리'''
<colbgcolor=#fff>토비아스 한스[6]
'''주의회'''
<colbgcolor=#ffce00> '''여당'''

'''24석 / 51석'''

'''17석 / 51석'''
'''야당'''

'''6석 / 51석'''

'''2석 / 51석'''

'''2석 / 51석'''
'''연방하원'''

'''3석 / 10석'''

'''3석 / 10석'''

'''1석 / 10석'''

'''1석 / 10석'''

'''1석 / 10석'''

'''1석 / 10석'''
'''연방상원'''
3석

1. 개요
2. 역사
3. 지리
4. 사회
4.1. 인구
4.2. 정치
4.3. 경제
4.4. 언어
5. 행정구역
6.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Saarland, 자를란트 주 '''
독일의 연방주 중 하나로, 도시주를 빼면 가장 작은 크기의 주이다.
이 지역과 관련이 많은 프랑스에서는 프랑스어로 (La) Sarre(사르)라 한다.

2. 역사


원래 이 곳에 거주하던 민족은 게르만족이 아닌 켈트족이었다. 이후 이 지역을 정복한 로마 제국에 의해 벨기에 속주로 편성되었고 이주해온 로마인과 원주민인 켈트족이 어울려 살았다. 이후로 프랑크 왕국신성 로마 제국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하지만 프랑스와 접경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30년 전쟁 이후로 프랑스는 이곳에 여러번 공격을 감행했다. 대대적인 공격만 1635, 1676, 1679, 1734년 무려 네 차례. 이는 루이 14세를 비롯한 당시 부르봉 왕가의 왕들이 라인강을 프랑스의 국경선으로 삼는 팽창적 영토확장 정책을 추구했던 것과도 맥락이 닿아있다.
원래 1919년 베르사유 조약 이전까지 자르 지방은 프로이센, 바이에른, 올덴부르크의 영지로 나눠어져 있었고, 이 지역을 총칭하는 특별한 지명은 없었다. 때문에 베르사유 조약에서 이 지역을 독일에서 분리할때 이곳을 지칭하기 위해 이곳의 지리학적 명칭을 사용하여 자르 분지 지역(Saarbecken gebiet)이라고 지칭했고 여기에서 자를란트(Saarland)라는 지명이 확립되어 갔다.
프랑스 혁명 이후 나폴레옹은 이 지역을 프랑스 영토의 일부분으로 삼는데 성공한다.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1814년 파리 조약에서 프랑스의 1792년 국경을 기준으로 프랑스 영토를 줄이는 와중에서도 자를란트 지역은 프랑스령으로 남을 뻔 했으나 빈 회의도중 나폴레옹이 엘바섬에서 탈출하여 1790년 1월 1일 현재 국경으로 프랑스 영토를 축소시키기로 합의 결국 백일천하 후 이 지역은 프로이센 왕국바이에른 왕국의 영토로 돌아갔다.
이후 나폴레옹 3세시절이었던 프랑스는 1865년경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전쟁 기운이 감지되자 우호적 중립을 대가로 자를란트를 요구했으나 비스마르크는 애매한 답을 내놓으며 프랑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되 프랑스의 우호적 중립은 유지시켰고, 이로 인해 빚어진 프랑스와 프로이센간의 갈등은 보불전쟁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전쟁은 프랑스의 패배로 끝났고, 자르 지역은 이 전쟁의 결과 세워진 독일 제국의 영토로 남았다.
자르(Saar)라는 독립된 지역 개념은 1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뒤에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자르 분지 지역이라는 이름의 국제연맹 감독 하 자치지역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생기게 된다. 자르 지역의 풍부한 석탄, 철강석 등의 자원 때문에 프랑스는 침략국 독일의 영토인 이 지역을 자신의 영토로 삼고자 했고, 영국의 동의까지 이끌어 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당시 협상국은(특히 미국은) 민족 자결주의를 명분으로 내세웠기에 독일계가 대다수였던 인구구성을 무시할수 없었고, 결국 미국의 제동으로 한발 물러서 1920년부터 15년간의 국제연맹 관할이 결정된다. 하지면 당연하게도 여전히 이러한 조치는 독일 국내에서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키면서 자르의 독일 복귀에 대해서는 독일내 정파를 불문하고 한 목소리를 내기에 이른다.
자를란트는 명목상 국제연맹 관할이었지만, 사실상 프랑스의 관할이었다.[2] 프랑스는 북아프리카 식민지인 출신 위주로 구성된 군대를 진주시켜 자르 지역에 주둔시켰으며 이 지역의 석탄과 철강을 사용했다. 또 자르 지역을 프랑스에 동화시키기 위해 프랑스어 공립학교를 설치하고, 1923년부터 프랑스 화폐만을 사용하도록 하였고, 1925년 1월 10일에 프랑스 관세 지역에 통합시키는 일들을 했다. 그에 반발한 이들이 1925년 6월 19일에 주도 자르브뤼켄에서 4만여명 규모의 독일 영토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자르 지역의 모든 정당은 독일로의 귀속을 지지했다.
프랑스에선 투표가 일어나면 독일로의 합병이 뻔했기 때문에 투표 연기나 뭉개기 전략으로 외교전을 폈으나 결국 국제연맹의 관할이 종료되는 시점인 1935년 1월 13일 독일로의 귀환 문제에 관한 주민투표 자르 국민투표가 실행되었고, 투표 결과 독일 합병 91%, 국제연맹 잔류 8%, 프랑스 합병 1%로 독일로의 복귀가 결정되었다. 1935년이 나치 정권 때라 자를란트 합병을 나치의 음모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으나 국제연맹의 감시 하에서 치뤄진 민주적 선거이기 때문에 나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어쨌든 나치 정권에 도움을 준 건 사실이다. 공산당사회민주당 좌파에서 현상 유지를 주장했기 때문인데 투표 결과가 저렇게 나오니 거의 박멸되다시피한 공산당과 사민당 계열은 매국노라고 욕을 퍼먹었기 때문이다. 이곳은 독일계 지역에다가 알자스-로렌과 달리 지속적으로 독일계 국가가 통치했기 때문에 프랑스로 편입되려는 여론은 없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극초반에 프랑스와 영국 연합군이 일시적으로 이곳 자르를 공격하기도 했지만, 그들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형식상이나마 자신들이 폴란드를 포기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었기에 대략 10km 가량을 전진하는 시늉만 하다가 다시 요새화된 기지로 돌아오는 가짜전쟁이 일어난다. 이후 프랑스 침공이 독일의 승리로 끝난뒤 자르 지역은 일시적으로 알자스-로렌과 같은 행정구역으로 편입되기도 했으나, 독일이 패망한 후 이 지역은 미국 관할지역이 되었다.
그러나 이곳의 풍부한 석탄과 철강 자원은 프랑스가 지속적으로 군침을 흘렸기 때문에,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프랑스는 이곳을 프랑스의 영토로 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종전 후 자르는 미군 관할지역 내에 포함되어 있었으나 프랑스는 자르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프랑스가 NATO 탈퇴로 외교적으로 고립되자 서독에서는 프랑스를 구슬려서 석탄 채굴권을 프랑스에 보장하는 조건을 제시했다. 하지만 자를란트를 차마 포기할 수 없었던 프랑스는 최후의 수단으로 자를란트를 공화국으로 독립시키자는 안을 서독 정부에 제안했고 서독 정부에게 이에 대한 합의를 받아냈다. 그리고 1955년 자를란트를 공화국 독립을 결정하는 주민투표가 실시되었으나 찬성 32%, 반대 68%로 기각되었다. 대부분의 주민들이 독일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라인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독일의 경제 성장을 긍정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는 자를란트 주민들이 사실상 독일로의 귀속을 원한다는 결과와 다를 것이 없어서 결국 1956년 독일과 프랑스는 룩셈부르크에서 자를란트를 독일로 반환하는데 합의했고 1957년 자를란트는 독일의 연방주로 가입하게 되었다. 그 대신 프랑스의 석탄 독점 채굴권은 1970년대까지 지속된다.
한편 이 곳은 독일이 분단된 시절에도 동독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쉽게 방문할 수 있는 곳 중 하나였다. 자를란트의 노이키르헨(neunkirchen)은 동독의 권력자인 에리히 호네커의 고향이어서, 호네커의 고향을 견학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방문할 수 있었기 때문.

3. 지리


주의 남서쪽 영역에 흐르는 모젤 강의 지류 자르 강을 경계로 프랑스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으며 룩셈부르크와도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 북쪽으로는 라인란트팔츠주와 마주하고 있으며 주 면적 전체의 1/3이 산림으로, 산림이 울창한 것으로 유명한 독일 내에서도 가장 숲이 발달해있다.

4. 사회



4.1. 인구


100만명에 조금 못 미치는 인구수로 독일 내에서 인구가 두 번째로 적은 주이지만, 인구밀도는 도시주(베를린, 함부르크, 브레멘)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다음으로 높아 사람이 몰려 사는 주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구 자체는 독일 통일 이후로 꾸준히 감소세를 보였다.
바이에른 주와 함께 가톨릭의 세력이 가장 두터운 주이다. 전반적으로 주도 자르브뤼켄을 포함하여 도시는 프랑스와의 국경지대에 발전해있기에 사람들도 국경지대에 주로 몰려사는 편.

4.2. 정치



전반적으로 기민련이 강세를 보이고 있는 곳이다.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중반을 제외하고는 계속해서 기민련이 주정부에서 여당 자리를 지키고 있다.
좌파당도 의외로 매 선거마다 꾸준히 원내에 진출하는데 사민당에서 탈당해 좌파당을 창당한 오스카르 라퐁텐 전 연방 재무장관이 지금도 자를란트 주의회 의원으로 재직하고 있다.[3]

4.3. 경제


1873년 세계 최초의 현대식 제철소로 건립되어 유럽 산업화의 상징물로 유명세를 떨쳤던 푈클링어 제철소(Völklinger Hütte)[4]가 이 지역에 자리잡고 있었을 정도로 과거에는 석탄 및 철강 산업이 지역 경제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지만, 20세기 후반부터 이들 산업이 유럽 내에서 점차 사양세를 걷게되면서 지역 성장동력도 함께 둔화되어 현재까지도 독일 내 구서독 지역들 중에서 물가 및 소득수준 등의 경제력이 가장 떨어지는 편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1990년대 들어서 부터 주정부 차원에서 반도체, 전자, 컴퓨터, 바이오 등의 첨단 산업분야를 적극적으로 육성하기 위해 세제 혜택 등을 내세우며 기업체 및 연구소 투자 유치에 힘을 쏟고 있다. 이의 결과물들로서 1990년대 후반 한국과학기술연구원의 유럽연구소가 자르브뤼켄에 설립되어 자를란트 대학교와 함께 공동연구를 수행하며 한독간 학술연구교류의 교두보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독일 보쉬 렉스로스에서 Industry 4.0으로 대변되는 4차 산업혁명 프로젝트의 연구를 위해 자르브뤼켄 인근 홈부르크 공장에 최첨단 생산시스템을 대규모로 투자해 운영중이다.

4.4. 언어


전통적으로 독일과 프랑스의 접경지대이며 프랑스가 자신들의 영토로 하고자 최근 몇 세기 동안 많이 노력했던만큼, 독일과 프랑스의 문화가 병존하는 지역이다. 그러나 지역 주민들은 대체로 독일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편이다.
전반적으로 독일인들은 프랑스어를 많이 구사할 줄 아는 편인데,[5] 이 지역은 상술한 역사적인 배경까지 겹쳐서 거의 모든 주민들이 불어를 구사할 줄 알며 프랑스어와 독일어 이중언어구사자가 매우 많다.
자를란트주 정부는 2043년까지 프랑스어-독일어 이중언어지역으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2017년 자료에 의하면 응답자의 61.6%가 이 언어 정책에 긍정적이거나 약간 긍정적이라고 응답했고 38.4%가 부정적이거나 약간 부정적이라고 응답했다. 지역별로는 프랑스와 접하는 남부지역에서 긍정적 혹은 약간 긍정적이라고 응답한 사람들이 많았고 프랑스와 접하지 않는 북부지역은 부정적이라고 응답한 사람들이 많았다.
2020년 1월 28일, 자를란트주 정부가 세번째 로드맵을 발표하였다.

5. 행정구역



[image]

6. 관련 문서



[1] 왼쪽 위: 자르브뤼켄 백국, 오른쪽 위: 트리어 선제후국, 왼쪽 아래: 로렌 공국, 오른쪽 아래: 팔츠츠바이브뤼켄 공국을 의미한다.[2] 비슷한 경우가 단치히 인데 인구의 80%가 독일계 주민이라 차마 폴란드에 합병시키진 못하고 국제도시 산하 자유도시라고 쓰고 폴란드가 관리하는 식민지나 다름없이 통치했다.[3] 참고로 라퐁텐은 1985년부터 1998년까지 자를란트 주총리를 역임했었다.[4] 1986년 경영난 및 시설 노후화를 이유로 문을 닫았고, 이후 인류 최초의 현대식 제철소라는 가치를 인정받아 199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어 자를란트의 대표 관광지로 활약중이다.[5] 불어가 중세 이후 유럽의 국제어라 중/상류층에 속한 독일인이라면 대부분 불어를 유창히 구사할 줄 알기도 했고, 2차대전 이후로는 연합군이 독일 전역을 점령했을 시기 프랑스군이 불어를 교과과정에서 제2외국어로 지정할 것을 요구했다.(제1외국어야 당연히 영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