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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徐庶
(170? ~ 234?)
1. 개요
후한 말과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자는 원직(元直). 초명(初名)은 서복(徐福). 예주 영천군 사람. 어머니는 서모.
2. 정사
2.1. 초기 생애
서서에 대한 기록 중에 本單家子(본단가자), 즉 단가의 자식이라는 내용이 있다. 여기서 단가(單家)란 친척이 없는 단독 가구를 의미하며, 친족 간에 상부상조가 굳건하던 당시 시대상에 비추어 보면 서서는 매우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다고 생각된다.
또한 젊은 시절에는 임협, 격검(검술)을 좋아하며 불량하게 살았다. 실상은 시장바닥에서 패거리를 지어 칼 휘두르고 다니던 건달이었다는 뜻이다. 대략 189년 정도에 서서는 다른 사람을 위해 원수를 갚아준 후 얼굴에 하얀 흙을 바르고 머리를 흩트려서 얼굴을 숨긴 채 달아나다 관원에게 붙잡혔다. 관원이 그의 이름을 물어도 서서는 입을 닫고 말하지 않았다. 이에 관원이 그를 수레에 태우고 기둥에 묶고는 북을 치며 저자 거리를 돌아다녔으나 감히 그를 식별하는 자가 없었다. 그러다가 그의 일당들이 그를 풀어줘 죽을 뻔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마음을 고쳐먹은 서서는 무기를 버리고 학문을 닦기 시작했다.[1]
처음에 학사에 나오자 여러 유생들은 그가 예전에 도적질했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하려 하지 않았다. 이에 서서는 늘 성실하고 겸손하게 행동하였고 마침내 동향인 석도와 친애하게 되었다. 중원에 전란이 일자 석도와 함께 남쪽으로 와서 형주에 의탁했다. 도착한 후 또한 제갈량과도 서로 친하게 지냈다.
상랑전에 주석으로 달린 양양기에 따르면 상랑은 젊어서 사마휘를 스승으로 모셨으며, 서서, 한숭, 방통 등과 친하게 지냈다.
<제갈량전>에 따르면 제갈량은 늘 자신을 관중, 악의에 비교했으나 당시 사람들은 이를 수긍하지 않았다. 오직 친한 벗으로 지내던 최주평, 서서만이 참으로 그러하다고 인정했다.
<제갈량전>에 주석으로 달린 위략에 따르면 제갈량은 형주에 있었는데, 건안 초, 석도, 서서, 맹건 등과 함께 타향에서 공부했다. 이 세 명은 정밀하고 세세하게 공부했으나 제갈량은 홀로 전체의 큰 내용을 살피는 방식으로 공부했다. 매양 새벽부터 밤까지 차분하고 침착하게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크게 읊조리며 세 사람에게 말했다. "경(卿) 세 사람이 벼슬하면 가히 주자사나 군태수까지 오를 것이오." 세 사람이 제갈량 자신은 어떠한지 물었으나 제갈량은 웃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2.2. 유비 휘하에서
제갈량전에 주석으로 달린 양양기에 따르면 신야에 머물던 유비가 사마덕조(사마휘)에게 세상 일에 관해 물었다. 사마휘는 자신은 평범한 사람이라 모른다며 시무를 아는 준걸은 복룡과 봉추가 있다고 말한다. 그들이 누구인지 유비가 묻자 사마휘가 말했다. "제갈공명(제갈량)과 방사원(방통)입니다."
제갈량전에 따르면 유비가 신야에 주둔 중일 때 서서는 유비를 섬겼다고 한다. 유비는 서서와 만나고 그를 중히 여겼다. 서서가 유비에게 제갈량을 천거하며 말했다. "제갈공명은 와룡(臥龍)입니다. 장군께서는 어찌하여 그를 쓰지 않으십니까?" 유비가 말했다. "그대가 데리고 오시오." 서서가 말했다. "이 사람은 가서 만나볼 수는 있으나 몸을 굽혀 오게 할 수는 없습니다. 장군께서 의당 몸을 낮추시고 방문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유비가 제갈량을 직접 방문했고 세 번 만에 만날 수 있었다.
아무리 유표에게 빌붙어 사는 객장 신세라지만 유비는 한나라의 좌장군(左將軍)에 의성정후(宜城亭侯)요, 당금 천하에 명성이 자자했다. 그런 유비더러 누구인지도 모를 유생을 찾아가라는 서서의 발언은 참으로 당황스러운 것이었지만 유비의 행동은 더욱 놀라웠다. 그는 서서가 말한 대로 직접 제갈량을 찾아간다. 그것도 세 번이나 연달아서 그만큼 인재를 갈구한 것이고, 동시에 그만큼 서서의 안목을 믿었던 것이겠다.[2]
갑자기 유표가 죽고, 유종은 조조가 형주를 정벌한다는 것을 듣고 사자를 보내 항복을 청했다. 유비는 번성에서 이 일을 듣고 군사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도망갔다. 제갈량은 서서와 함께 유비를 뒤따랐다.
서서가 유비와 작별한 것은 장판파의 도주로 잘 알려진 바로 그 시점이다. 한진항을 향해 도주하던 유비군은 장판교를 지나 벌판에 이르자 조조군 기병대의 추격에 의해 행렬이 붕괴, 유비를 따르던 민초들이 학살당하고 물자가 실린 치중대는 물론 유비와 중신들의 가족들이 타고 있는 마차 또한 조조군에게 크게 노획되기까지 하는 상황이었다. 이때 서서의 모친이 타고 있던 차량 또한 조조군에게 탈취되었기에 서서의 모친이 조조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모친이 붙잡히자 서서는 유비에게 "당신을 따른 것은 가슴이 시킨 일이었으며 지금 어머니가 조조군에 붙잡혀버리셔서 어머니를 구하고자 당신을 떠나는 것도 제 가슴이 시킨 일이므로 이해해주십시오."라는 말을 남기고 조조군으로 가서 항복했다. 제갈량은 유비와 남쪽으로 떠났고, 서서는 석도와 함께 북쪽으로 갔다.
이 상황의 문제는, 당시 조조 입장에서는 서서가 일부러 노리고 붙들어야 할 만큼 대단한 인재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모친이 붙잡혔어도 누구 모친인지 알았을지는 의문이며, 서서가 모친에게 갔다가 같이 도망칠 수도 있었을 텐데, 그 후로 그냥 조조 진영에 뿌리를 내렸다.
사실 흥미로운 것은, 충(忠)이 효(孝)보다 우선시되는 후대[3] 와는 달리 당대의 인물들은 이러한 선택에 대해 딱히 비판을 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이와는 정반대의 선택을 한 강유는 어머니를 저버렸다는 비판을 받기조차 했다. 그러니 당대 시각으로는 서서의 이런 선택도 크게 이상한 건 아니었다. 물론 그런 상황에서조차 흔쾌히 서서를 보내준 유비의 배포도 인정해 주어야겠지만.
2.3. 위나라에서
조조에게 투항한 뒤 서서는 팽성상(《수경주(水經注)》 권23)을 거쳐 황초 연간(220~226년)에 우중랑장을 거치고 어사중승 같은 주로 감찰관 직을 맡았다. 여기서 우중랑장은 황제를 모시는 일을 담당하는 광록훈 휘하에 있는 비2000석 관직이고, 어사중승은 관리와 백성들을 감찰하는 직책이다. 상당히 높은 고위직으로 삼공의 일원이자 최고 감찰관인 어사대부 바로 밑의 관직으로 꽤나 높은 직위에 오른 것이다. 서서는 어사중승에 오르기까지 이름을 서복으로 하다가 서서로 개명했다고 여겨진다. 즉, 개명을 여러 번 하지 않았을 가정하에 유비 수하 시절의 이름은 줄창 서복이었다.[4]
여기서 우중랑장, 어사중승은 겸직이 아니라, 역임한 순서로 보는 것이 옳을 것으로 보인다. 먼저 기록을 살펴보면 "至黃初中,韜仕歷郡守、典農校尉,福至右中郎將、御史中丞。"이라 하여 석도는 군수와 전농교위를 역임했다고 하며, 서복(서서)는 우중랑장, 어사중승에 이르렀다 한다. 이것은 우중랑장 어사중승을 겸임한 것이 아니라 우중랑장을 거쳐 어사중승에 이르렀다고 봄이 타당하다. '至' 이후 역임한 관직을 나열하는 것은 일반적인 기록형태이기 때문이다. 이는 홍이손의 《삼국직관표》에서도 살펴볼 수 있는 부분으로 홍이손은 우중랑장 항목에 역임한 이에 서복(서서)을 둠으로써 서서가 우중랑장과 어사중승을 각각 역임했음을 밝히고 있다.
동화전에 따르면 제갈량이 후에 승상이 되어서, 아랫사람들에게 가르치며 말하였다. "진실로 서원직(서서)의 십분의 일과 동유재(동화)의 힘써 부지런함을 따를 수만 있다면, 나라에 충성함은 물론이요, 나도 가히 잘못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당신들이 서서의 1/10 정도만 해줘도 내가 편하겠다.'는 뜻이다.
또 제갈량은 "모름지기 관리들은 많은 사람들의 지혜를 한데 모으고 유익한 충언을 널리 받아들여야 한다. 서로 작은 의견 충돌조차 피하려고 하여 자유로운 토론을 거리낀다며 나라의 손해가 클 것이다. 토론을 통해 서로를 뜻을 공유하면 이는 마치 해진 짚신을 버리고 구슬과 옥을 얻는 것과 같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이란 참으로 어려우니 이러하기가 쉽지 않은데 오직 서원직만이 이렇게 처신하면서 미혹되지 아니했다." 라고 말했다. 제갈량의 발언으로 미루어보건대 서서는 여러 사람들과 의견을 자유로이 교류하면서 좋은 방안을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했던 걸로 보인다.[5] 그러나 그런 과정을 통해 결국은 나라에 이로움을 가져다주었으니 제갈량은 그만큼 서서를 진심으로 높이 평가한 것이다.
나중에 제갈량이 북벌하고 있던 태화 연간(227~232년)에 공명의 학우였던 서서, 맹건, 석도 등이 위나라에서 맡고 있던 직책을 알게 되자[6] 그가 말하기를, "위(魏)에는 선비가 너무 많구나! 어찌 저 두 사람이 저렇게 쓰인단 말인가?"하고 탄식하였다. 객관적인 시각에서 보면 서서의 직책이 그렇게 낮은 지위는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공명이 입에서 저런 말이 나왔으니 서서는 상당한 능력의 소유자였을 듯하다.[7] 서서는 그로부터 몇 년 뒤에 병으로 죽었는데 정확한 몰년은 알려지지 않았다.
서서가 정사에서도 지략가였는지는 알 수 없다. 개인 열전이 없고 사적은 촉서 제갈량전의 주석을 통해서만 간략하게 전해지는데, 그에 대한 기록이 너무 미비하기 때문에 어떤 인물이었는지 알기 힘든 것이다. 서서가 맡은 직책이나 제갈량의 말로 미루어볼 때 적어도 행정 능력은 뛰어났던 걸로 보인다. 그러나 시대의 명재상 제갈량이 높이 평가하기도 했고,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나 건달 노릇이나 하면서 심지어 남을 대신해서 사람을 해치기까지 하던 밑바닥 인생에서 시작하여 마침내 국가의 고위직에까지 오른 서서의 재능이나 노력은 결코 함부로 깎아내릴 수 없을 것이다. 심지어 조비가 건국한 위나라는 가문과 집안의 힘이 무척이나 중시된 국가였는데도 서서는 오직 스스로의 노력만으로 그런 제약을 이겨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서서는 한 시대의 인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처럼 뛰어난 지략가로 나온다. 정사에서는 그냥 제갈량이 인정한 친구로 유비에게 한 것이라곤 제갈량을 천거한 것밖에 없는데 나관중은 여기에 살을 덧붙여서 행정가에 가까운 그를 일류 책사 중 하나로 만들었는데 이게 엄청난 열광을 받은 것. 물론 제갈량이나 방통보다는 한 수 아래인 것으로 나온다. 이는 서서의 뛰어난 책략을 보여주고, 그가 위나라로 가면서까지 천거한 제갈량의 등장을 독자들을 기대하게 만들어 주기 위한 소설적 장치이다. 마침 정사에서도 서서는 제갈량이 동화와 비견하여 높게 평가한 인물이고 어머니가 위나라에 포로가 되어 본의 아니게 유비를 떠난 인물이며 위나라에 가서 책사로 활동하진 않았으니 끼워 맞추기에도 적당했을 것이다.
나관중은 단가(單家)라는 단어를 '선(單)씨 가문'이라고 잘못 해석하여, 서서의 다른 이름인 복(福)과 합쳐 서서가 선복(單福)이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는 내용을 연의에 첨가하였다. 그리고 이는 서서가 친구의 원수를 죽이고 도망다니던 시기에 사용한 것이라는 것과 더해져서 왜 가명을 사용했는지도 설명해놨으니, 하여간 나관중의 짜맞추는 실력 하나는 알아줘야 한다. 한국 번역본에서는 "단복"과 "선복"이 비슷하게 쓰이는 편.
첫 등장은 유비가 채모의 계략에 빠져 도망치다가 적로 덕분에 단계를 뛰어넘고, 수경선생 사마휘의 집에서 잠시 머물 때 나온다. 이 때 서서는 유표를 찾아갔으나 실망하고 유비를 찾아가고 있다가 사마휘의 집에 잠시 들른 것으로, 서로 만나지 못하고 엇갈린다. 그리고 정사와 달리 사마휘는 복룡과 봉추의 정체를 알려주지 않는다.
이후 신야에서 서서는 거리에서 노래를 불러 유비의 이목을 끈 뒤, 자신을 "단복(또는 선복)"이라고 소개한 뒤 그의 군사가 된다. 그리고 여광, 여상 형제를 계략으로 격파하고, 이어서 조인이 친 '팔문금쇄의 진'을 깨고 조인과 이전을 격퇴시킨다.
조인 등의 보고를 들은 조조가 서서의 재능을 탐내자 정욱이 꾀를 쓴다. 정욱이 서서의 어머니 서모를 후하게 대접하자 서모가 정욱에게 감사의 편지를 쓴다. 정욱은 그녀의 필체를 흉내내 서서에게 허도로 오라는 거짓 편지를 보낸다.
이 편지에 속은 서서는 유비와 헤어지면서 조조를 위해서는 어떠한 계책도 주지 않겠다고 말하고 제갈량을 천거한다. 이때 복룡과 봉추가 각각 제갈량과 방통을 뜻한다는 것을 알려주기도 한다.
그렇게 꿈에 그리던 어머니를 만나기는 하였으나, 서모는 기뻐하기는커녕 어진 군주를 버리고 허도에 왔다면서 "네 이놈! 내가 널 그렇게 가르쳤느냐?"라면서 호되게 꾸중하면서 한탄하였고, 마침내는 자살을 한다. 이 일화에서 서모가 "여자가 글씨를 안다는 것부터가 걱정을 낳게 한 근본 원인이다(女子識字憂患)."라고 한탄하면서 식자우환이라는 사자성어가 생겼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가능성은 적다. 이후 유비에게 항복을 권유하라는 조조의 명령을 받고 유비에게 찾아오지만, 정작 서서는 유비에게 절대로 항복하지 말라고 충고해 주었다.
정사에서는 그냥 유비랑 함께 도망치다가 어머니가 사로잡히자 어머니를 따라 갔다고만 나오는데, 유비의 인품과 덕치를 강조하는 연의에선 유비의 부하가 가족이 사로잡혀서 배신하고 도망갔다고 하기엔 애매해서 좀 더 각색해 유비의 덕치에도 어쩔 수 없는 배신 사유를 만들기 위해 어머니의 편지와 함께 그 배신이 잘못 되었다는 표현을 하기 위해 서모까지 자살 시킨다.
이후 제갈량이 본격적으로 유비 진영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자 조조에게 제갈량이 매우 뛰어난 인재임을 설명한다. 조조가 "서서 그대도 뛰어난 인재인데, 그대와 비교하면 어떤 수준인가?"라고 질문하자 서서는 '저와 감히 비교할 수도 없습니다. 제가 반딧불이라면 제갈량은 보름달입니다.'라는 비유를 한다.
적벽대전 직전, 방통이 연환계를 퍼뜨리고 조조의 진영에서 탈출하기 직전 외딴 곳에서 "연환계를 써서 우리 조조군을 몰살시킬 셈이구나!"라고 떠봐서 방통을 깜짝 놀라게 했다. 방통이 "이 책략은 우리 강동 81주 백성들의 목숨이 달려 있네."라고 말하자 "그럼 이 80만 장병들의 목숨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란 대화를 나눈다.
다행히 서서는 연환계를 깨트릴 생각은 없었고,[8] 방통에게 자신이 몸을 피할 계책 하나만 알려달라고 한다. 그리고 방통의 계책대로 서량의 마등이 쳐들어온다는 헛소문을 군중에 널리 퍼트린 뒤, 이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는 조조에게 허도를 지키며 후방에서 뒤처리를 하겠다고 나선다. 조조는 이 계책에 넘어가 서서에게 군사 3천을 주고, 서서는 장패와 함께 전장을 떠나 멀리 피하게 된다. 이것이 연의에서의 마지막 등장이다.
4. 기타 창작물
[1] 참고로, 서서가 이런 무지막지한 전과를 쌓고 다니던 188-189년경에 제갈량은 8~9살짜리 꼬맹이였다. 띠동갑이라고 쳐도 개과천선할 때 고작 20대 초반으로 많이 젊다. 따라서 두 사람은 나이 차이가 상당히 많이 났을 것이고, 여러 미디어믹스에서 이들을 동년배 친구처럼 묘사하는 것은 고증오류이다.[2] 자치통감의 음주자 호삼성의 의견에 따르면 '서서가 한 마디 하는 말을 듣고 유비가 세번이나 자기를 굽히고 갔다는 것은 그만큼 서서를 중히 여기고 믿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라고 하였다.[3] 유교가 교조화된 근세 시대[4] 특이하게도 좋은 글자인 복을 버리고 나쁜 글자인 서로 개명했는데 혹자들은 제갈량의 북벌 즈음에 회한에 차 개명하지 않았나 추정하기도 한다.[5] 실제로도 생각이 다른 사람들끼리 토론을 하면 충돌하다가 서로 감정만 상하기 십상인데, 서서는 그런 분쟁의 여지를 잘 중재하며 합의을 도출하는 능력이 탁월했던듯 하다.[6] 석도는 태수와 전농교위(典農校尉)를 역임하였다. 맹건은 정동장군(征東將軍) · 양주 자사(凉州 刺史)에 임명되었다. [7] 그러나 이런 시각도 있다. 어사중승이 말이 좋아 관리감찰직이지, 실상 현대에서도 감찰이란 게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경우가 많을뿐더러 출신만 영천이지, 진짜 성골들인 진씨, 순씨등에 끼기는커녕 단가 출신이고, 그마저도 범죄 경력에 적 진영 출신에 온갖 안 좋은 딱지가 붙어있는 서서가 가진 어사중승이라는 직책이 실질적으로 어느 정도의 발언/감찰권이 있었을까 하는 시각이다. 즉, 위나라에서 작정하고 서서를 허수아비 고위직책에 덩그러니 세워 놓은 거 아니냐는 것. 제갈량이 한탄한 것도 그런 위나라의 어사중승이라는게 실제론 별거 아니라는 상황을 통찰했기 때문이 아니냐는 것이다. 물론 일단 서서가 어사중승을 지낸 시기가 황초(조비)~태화(조예) 연간인 걸로 보아, 그래도 '아직은' 조예가 맛이 가기 전이고 하니 그렇게까지 어사중승 자리를 깎아 내릴 필요는 없겠지만.[8] 애초에 조조 밑으로 들어가게 되었어도 충심은 여전히 유비에게 있었던 것에 더불어 조조가 자기 어머니를 돌아가시게 만든 원흉인 만큼 그를 도울 마음이 없는게 당연지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