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교

 


'''杜喬
두교
'''
'''최종직위'''
태위(太尉)
'''성씨'''
(杜)
''''''
(喬)
''''''
숙영(叔榮)
'''생몰 기간'''
91년 ~ 147년 11일
'''고향'''
사례(司隸) 하내군(河內郡) 임려현(林慮縣)
'''태위 재임기간'''
147년 6월 ~ 147년 9월 9일
1. 개요
2. 생애
2.1. 초기 생애
2.2. 양기에게 원수를 지다
2.3. 이고와 함께 뜻을 관철하다
2.4. 무고를 받아 옥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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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의 명신 자는 숙영(叔榮), 하내군 임려현 출신 이고(李固)와 함께 후한의 명신으로 이름을 날렸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두교의 집안은 대대로 이천석관(二千石官)의 집안이였고 두교는 효행으로 유명해졌다.
사도(司徒) 양진(楊震)의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관직에 진출하였다.
그후 남군태수(南郡太守)을 거쳐 동해국상(東海國相)을 지내다가 시중(侍中)으로 조정에 입조한다.
142년 8월 21일 두교, 주거(周擧), 수광록대부(守光祿大夫) 주허(周栩), 풍선(馮羨), 난파(欒巴), 장강(張綱), 곽준(郭遵), 유반(劉班)을 각 주군(州郡)에 파견하여 인재를 천거하고 관리를 감시하게 하였다.
두교는 광록대부의 대리격으로 연주(兖州)를 순찰하였는데 억울하게 좌천되어있던 태산태수(太山太守) 이고(李固)의 공적을 천하의 제일이라 칭송하였다. 이 덕분에 이고는 장작대장(將作大匠)이 되었다.
그후 태자태부(太子太傅)를 역임하다 대사농(大司農)으로 승진하였다.

2.2. 양기에게 원수를 지다


영창태수(永昌太守) 유군세(劉君世)가 황금으로된 문사(文蛇)를 만들어 양기에게 바치자 익주자사(益州刺史) 충고(沖暠)가 이를 발견해 유군세를 체포하고 역참을 통해 밝혔다.
영창태수(永昌太守) 유군세(劉君世)가 황금으로된 문사(文蛇)를 만들어 양기에게 바치자 익주자사(益州刺史) 충고(沖暠)가 이를 발견해 유군세를 체포하고 역참을 통해 밝혔다.
이에 양기는 충고에게 악감정을 가지게 되었고, 마침 파군(巴郡) 사람 복직(服直)이 스스로를 천왕(天王)이라 칭하며 수백명과 봉기하였고, 충고와 파군(巴郡太守) 응승(應承)은 복직의 토벌에 실패하였다.
양기는 이 기회에 충고와 응승을 모함하였고 체포하게 하였으나 이고가 상소를 올렸다. 양태후는 이고의 상소를 보고서 충고와 응승을 면직만 시키었다. 문제가 된 문사(文蛇)는 대사농으로 보내졌고, 양기는 대사농(大司農) 두교(杜喬)에게서 이것을 빌려보려 했으나 두교는 거절하였다.
후에 양기의 어린 딸이 죽자 양기는 공경(公卿)들에게 장례에 참석하라 하였지만 두교만은 장례에 오지 않았고, 양기는 두교에게 앙심을 품게 하였다.
두교는 이후 광록훈(光祿勳)으로 승진한다.

2.3. 이고와 함께 뜻을 관철하다


한질제가 양기에게 독살 당하자 이고와 사도(司徒)인 호광(胡廣), 사공#s-2(司空) 조계(趙戒) 등과 함께 청하왕(淸河王) 유산(劉蒜)을 황제로 세울려 하였으나 조등(曹騰)에게 언질을 받은 양기의 협박과 같은 말에 대부분이 겁먹어 유지(劉志)를 황제로 세워야한다고 말을 바꾸었다. 그러나 두교는 이고와 함께 마지막까지 유산을 황제로 세우는 뜻을 꺾지 않았다.
결국 이 일로 이고가 면직되었고, 호광이 태위가 되지만 얼마안가 파직되어 두교가 147년 6월 태위로 임명되었다.
힌환제가 황위에 올라서자 자신을 도와준 양기의 친족과 환관들에게 제후에 봉할려하자 두교는 상소를 올려 만류하였다.

옛날 명군(明君)은 모두 현명한 인재를 등용하고 죄를 진 자를 벌하는 일에 힘썼사옵니다. 나라를 잃은 군주라 하더라도 조정에 곧은 신하와 작위를 책봉하는 일은 전고(典誥)의 편(篇)이 없겠사옵니까? 신이 근심스러운 것은 현명한 인재를 얻어도 그의 계책을 쓰지않고 법령이 정해졌음에도 시행되지 못하며, 훌륭한 말을 들어도 신뢰하지 못하며 참소하는 말을 들어도 그 이유를 살피지 않는 것이옵니다.

폐하께서는 번신(藩臣)에서 제위에 오르셨사오니 천하사람의 마음을 이으셔야 하온데, 충성스럽고 현명한 자들에게는 예를 차리지아니옵고 주위 측근들만을 봉하오니 양씨집안과 환관 가운데 보잘 것 없는 자들이 공로를 세우지도 않은 채 인수를 차고 있으며 공로를 세운 공신들의 봉토를 빼았고 있사옵니다. 이 어지롭고 참람한 일을 어찌 말로 표현하겠사옵니까? 공이 있으나 상을 주지 않사오니 선과 희망을 잃었사옵니다. 간사하여도 힐난받지 않고 악행을 저질러 흉한 일을 하였사옵니다.

그러무로 폐하께서 형벌에 쓰는 도끼를 진열해 놓아도 사람들은 두려워 하지 아니옵고, 작위를 나누어 준다하더라도 사람들이 권하지 못하올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끝까지 행해진다면 어찌 정사를 어지럽히는 것에 끝나겠사옵니까? 몸을 죽게하고 나라를 망치니 어찌 신중하지 않겠사옵니까?

물론 암군의 대명사격인 환제는 그 상소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8월 18일 양기는 순열황후 양씨(順烈皇后 梁氏)의 동생을 황후로 세웠다.(환제의헌황후 양씨) 양기는 예를 갖추어 이를 영접할려 했으나 두교는 전례를 들어 들어주지 않았다. 양기는 범궁(氾宮)을 상서로 삼을려 하자 두교는 범궁에게 뇌물죄가 있다면서 거절하였고 이 일로 양기는 두교를 거슬리다고 판단하였다.
조정에서는 믿고 의지했던 이고가 파면되자 조야의 관리들은 모두 두교를 우러러보았다.
하지만 9월 9일 낙양에서 일어난 지진을 빌미로 태위에서 파직된다.

2.4. 무고를 받아 옥사하다


환관 당형(唐衡)과 좌관(左悺) 환제에게 참소하며 말하였다. "폐하께서 제위에 오르실때 이고와 두교는 폐하께서는 황실의 제사를 받들지 못할거라 말하였사옵니다" 환제는 이일로 이고와 두교에게 원한을 가지게 됐다.
147년 11월 청하국(淸河國) 사람 유문(劉文)과 형주 남군(南郡)의 요적(妖賊.요사스런 도적)인 유유(劉鮪)가 청하왕을 옹립시키려하지만 곧 발각되었다. 이에 청하국상(淸河國相) 사고(謝暠)를 위협하였지만 따르지 않아 유문이 사고를 죽이고 유문과 유유는 체포되었다.
양기는 옳다구나 싶어 이 일로 이고와 두교를 체포하게 하였다. 그러나 양태후는 두교만은 불허하였고 결국 이고만이 옥에 갇혔다.
이고는 결국 2번을 옥에 갇힘 끝에 옥사하였고, 이고가 죽은 다음날 양기는 두교에게 자진(自盡, 자살)하게 하였으나 두교는 듣지 않았고, 양기가 출동시킨 기병에 의해 붙잡혀 옥살이 끝에 옥사하였다.
양기는 이고와 두교의 시신을 성 북쪽 사거리에 버려두도록 하고 이 곳에서 곡을 하는 자들은 죄를 묻는다고 하였다.
두교의 옛 부하인 진류군(陳留郡) 사람 양광(陽匡)은 낙양에 도착하자 부탁하여 하문정리(夏門亭吏)가 되고 붉은 두건을 머리에 두르면서 12일 동안 이고와 두교의 시신을 지켰다. 이에 도관종사(都官從事)가 양광을 잡아서 보고하니 양태후는 마찬가지로 사면해 주었다. 양광은 대궐에 이르러 상서를 올려 이고와 두교의 시신을 수습해 고향에서 장사를 지낼 수있게 하여 달라고 청하니 태후가 이를 허락하였다. 양광은 마침내 이고와 두교의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르고 같이 이고의 시신을 지켰던 곽량, 동반과 함께 은거하여 벼슬을 하지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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