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레스덴 국립 관현악단
1. 개요
독일 작센 주의 주도 드레스덴을 거점으로 하고 있는 오케스트라. 독일의 대표 오케스트라이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오케스트라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정식 명칭은 독어와 영어 표기에 있듯이 드레스덴 작센 국립 관현악단.
2. 연혁
창단 시기가 '''1548년'''까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작센 선제후였던 모리츠 공작이 만든 궁정악단을 그 시초로 잡고 있다. 독일 뿐 아니라 이탈리아 등지에서도 초빙된 수많은 음악인들이 카펠마이스터[1] 로 부임해 악단의 지도를 맡았고, 그 중에는 작곡가로 후세에 이름을 남기고 있는 하인리히 쉬츠나 카를 마리아 폰 베버, 리하르트 바그너 같은 대단한 인물들을 찾아볼 수 있다.
다만 원래부터 지금의 규모에 맞먹는 대규모 악단은 아니었고, 연주 편성이 확대된 것은 1841년에 건축가 고트프리트 젬퍼가 설계해 완공한 궁정오페라극장(젬퍼오퍼)의 오페라 상연에 상시 동원되기 시작하면서였다. 19세기 후반에는 오페라 외에 관현악 연주회에도 출연하기 시작했으며, 카펠마이스터는 아니었지만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도 자주 출연해 자작 관현악 작품들을 직접 지휘하기도 했다.
베버나 바그너 등이 재임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19세기에는 전통적인 음악의 도시인 빈의 국립가극장 오케스트라, 멘델스존 등이 재임했던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등과 더불어 독일, 오스트리아 지역을 대표하는 오케스트라였다고 할 수 있다.
1차대전 이후에는 군주제의 붕괴에 따라 궁정 호칭을 떼고 국립 관현악단이 되었으며, 프리츠 라이너, 프리츠 부슈, 칼 뵘 등이 카펠마이스터를 역임하며 악단의 전통을 이어갔다. 다만 1933년 나치 집권 후에는 다른 악단과 마찬가지로 유대인 단원에 대한 강제 탈퇴 조치나 유대인 음악가와의 협연 금지 등의 제재를 받았고, 1944년에는 괴벨스의 국민 총동원령에 따라 강제 해산되기도 했다. 1945년에는 드레스덴 폭격으로 인해 국립오페라극장이 망했어요 상태로 대파되어 상주 공연장을 잃어버렸다.
종전 후 불행히도 소련군의 점령지역에 속하게 되었고 이는 독일이 통일될 때까지 45년간 악단의 발전에 큰 장애물이 되었다. 소련 군정기에 생존 단원들을 중심으로 다시 활동이 재개되었다. 요제프 카일베르트가 카펠마이스터에 취임하면서 악단은 빠르게 정상화되기 시작했다. 이후 동독 정부가 수립되었다. 동독 정부는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를 국가의 간판 악단으로 내세웠지만, 동독의 제한된 여건은 악단 발전에 상당한 걸림돌로 작용했다. 지휘자 섭외, 연주여행, 녹음, 악기 조달 등 여러면에 있어 많은 제약을 받았다.
그래도 워낙 전통과 명성에 빛나는 악단인지라 동독 시절에도 요제프 카일베르트, 루돌프 켐페, 프란츠 콘비츠니, 로브로 폰 마타치치, 오트마 주이트너, 쿠르트 잔데를링 등 역량있는 지휘자들이 차례로 재임했다. 하지만 동독의 제한된 여건 때문에 2~4년의 단기 재임에 그쳤다. 지휘자들이 자주 바뀌게 되면서 악단은 꾸준히 성장하는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1967년 잔데를링이 사임한 후 1968년부터 1975년까지 상임지휘자(카펠마이스터)가 장기 부재한 상황이 벌어졌다. 오랜 공백을 깨고 1975년 카펠마이스터에 취임한 헤르베르트 블롬슈테트는 부임 시점에서는 전임자들보다 네임밸류가 떨어지는 지휘자였다. 하지만 블롬슈테트는 전임자들에 뒤지지 않는 뛰어난 음악적 역량을 발휘하면서 1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재임하면서 악단을 안정화시켰고 본인 역시 세계적인 지휘자로 성장했다.
1985년에는 한스 퐁크가 카펠마이스터에 취임했고, 같은해 본거지였던 국립오페라극장이 40년 만에 재건되면서 상주 공연장을 되찾았다. 한스 퐁크는 음악적 역량에 있어서 전임자들에게 크게 떨어진다고는 볼 수 없는 건실한 중견 지휘자였지만 대중적 인지도가 많이 떨어졌기에 이 시기에 악단은 다소 침체된 모습을 보였다.
동독 기간 동안 지휘자 영입에도 어려움이 많았고, 경제적으로 큰 이익이 될 수 있는 음반 녹음이나 연주 여행 또한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는 침체될 수 밖에 없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에서 워낙 유서 깊은 악단이었던 관계로 70년대에 명목상 중립국인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 주기적으로 초청되기도 했다. 또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의 뛰어난 가성비를 노리고 EMI와 도이치 그라모폰(DG)이 여러 난관을 뚫고 드레스덴까지 와서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카라얀 지휘), 트리스탄과 이졸데(카를로스 클라이버 지휘)라는 대규모 음반 녹음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카라얀, 클라이버 같은 거장 지휘자들 역시 기꺼이 드레스덴으로 와서 녹음 작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제한 사항이 많았는지 EMI, DG 모두 단발성 녹음으로 그치고 말았다.
1990년 독일이 통일되고 이제는 완전히 자유로운 서방 세계에 속하게 되면서 악단은 다시 빠르게 성장하면서 과거의 명성을 되찾기 시작했다. 통일 후에도 국립 관현악단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오페라 무대에서는 간혹 드레스덴 국립오페라 관현악단이라는 다른 명칭으로도 출연하고 있다.
1992년 당시 한창 떠오르고 있던 지휘자 주세페 시노폴리가 카펠마이스터로 취임했다. 시노폴리는 악단의 주력 레퍼토리에 정통했을 뿐만아니라 당시 소속음반사였던 DG를 통해 많은 음반을 출시했다. 악단이 장기로 하고 있던 브루크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의 레파토리가 음반으로 출시되면서 호평을 받았고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는 과거의 빛나는 명성을 빠르게 회복해 갔다. 시노폴리와 함께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는 새로운 리즈시절에 접어들었으나 안타깝게도 2001년 시노폴리가 급서하고 말았다.
2002년 거장 베르나르드 하이팅크가 카펠마이스터 취임하면서 시노폴리 서거로 인한 충격을 빠르게 수습하며 시노폴리 때 시작된 악단의 전성기를 이어갈 것으로 예측되었다. 그러나 2003년 새로 극장 감독에 취임한 게르트 우에커가 하이팅크와 마찰을 빚었고 결국 2004년 하이팅크가 조기 사임하고 말았다. 이후 3년간 카펠마이스터가 공석이 되면서 악단은 다소 표류하는 모습을 보였다. 2007년 파비오 루이지가 새로운 카펠마이스터에 취임했다. 하지만 루이지는 전임자들에 비해 커리어와 네임밸류가 확연히 떨어졌기 때문에 취임 당시 여러 논란과 우려가 제기되었다. 루이지는 예상보다는 안정감 있는 해석을 보이며 우려했던 것보다는 악단을 잘 이끌어나갔지만 화려했던 전임자들에 비해서는 아쉬운 점이 없지 않았다.
2012년 독일의 차세대 거장으로 꼽히던 크리스티안 틸레만이 카펠마이스터로 취임했다. 틸레만은 이 자리로 오기 위해서 뮌헨 필과 다소 불미스럽게 이별했고 그동안 떠돌던 그의 다소 고압적이고 독선적인 성격에 대한 소문과 맞물려 일각에서는 다소 우려의 눈빛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틸레만은 현재까지 장기 집권하면서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에 헌신하며 이런 우려를 불식시켰다.
3. 역대 카펠마이스터 / 상임지휘자
명예 호칭인 '궁정악장(Hofkapellmeister)' 을 받은 이는 별도 주기했다. 현재는 상임지휘자(Chefdirigent/Principal Conductor)가 공식명칭이다.
- 요한 발터 (Johann Walter, 재임 기간 1548–1554)
- 마테우스 르 메스트르 (Mattheus Le Maistre, 재임 기간 1555–1568)
- 안토니오 스칸델로 (Antonio Scandello, 재임 기간 1568–1580)
- 조반니 바티스타 피넬리 (Giovanni Battista Pinelli, 재임 기간 1580–1584)
- 로기에르 미하엘 (Rogier Michael, 재임 기간 1587–1619)
- 하인리히 쉬츠 (Heinrich Schütz, 궁정악장. 재임 기간 1615–1672)
- 빈첸초 알브리치 (Vincenzo Albrici, 재임 기간 1654–1680)
- 조반니 안드레아 본템피 (Giovanni Andrea Bontempi, 재임 기간 1656–1680)
- 카를로 팔라비치니 (Carlo Pallavicini, 재임 기간 1666–1688)
- 니콜라우스 아담 슈투룽크 (Nicolaus Adam Strungk, 궁정악장. 재임 기간 1688–1700)
- 요한 크리스토프 슈미트 (Johann Christoph Schmidt, 궁정악장. 재임 기간 1697–1728)
- 안토니오 로티 (Antonio Lotti, 재임 기간 1717–1719)
- 요한 다비드 하이니헨 (Johann David Heinichen, 재임 기간 1717–1729)
- 조반니 알베르토 리스토리 (Giovanni Alberto Ristori, 재임 기간 1725–1733)
- 요한 아돌프 하세 (Johann Adolph Hasse, 궁정악장. 재임 기간 1733–1763)
- 요한 고틀리브 나우만 (Johann Gottlieb Naumann, 궁정악장. 재임 기간 1776–1801)
- 페르디난도 파에르 (Ferdinando Paer, 궁정악장. 재임 기간 1802–1806)
- 프란체스코 모를라키 (Francesco Morlacchi, 궁정악장. 재임 기간 1810–1841)
- 칼 마리아 폰 베버 (Carl Maria von Weber, 궁정악장. 재임 기간 1816–1826)
- 칼 고틀리브 라이시거 (Carl Gottlieb Reißiger, 궁정악장. 재임 기간 1826–1859)
- 리하르트 바그너 (Richard Wagner, 궁정악장. 재임 기간 1843–1848)
- 칼 아우구스트 크렙스 (Carl August Krebs, 재임 기간 1850–1880)
- 율리우스 리츠 (Julius Rietz, 궁정악장. 재임 기간 1874–1877)
- 프란츠 뷜너 (Franz Wüllner, 궁정악장. 재임 기간 1877–1884)
- 에른스트 폰 슈흐 (Ernst von Schuch, 궁정악장. 재임 기간 1884–1914)[2]
- 프리츠 라이너 (Fritz Reiner, 재임 기간 1914–1921)
- 프리츠 부슈 (Fritz Busch, 재임 기간 1922–1933)
- 칼 뵘 (Karl Böhm, 재임 기간 1934–1943)
- 칼 엘멘도르프 (Karl Elmendorff, 재임 기간 1943–1944)
- 요제프 카일베르트 (Joseph Keilberth, 재임 기간 1945–1950)
- 루돌프 켐페 (Rudolf Kempe, 재임 기간 1949–1953)
- 프란츠 콘비츠니 (Franz Konwitschny, 재임 기간 1953–1955)
- 로브로 폰 마타치치 (Lovro von Matačić, 재임 기간 1956–1958)
- 오트마 주이트너 (Otmar Suitner, 재임 기간 1960–1964)
- 쿠르트 잔데를링 (Kurt Sanderling, 재임 기간 1964–1967)
- 마르틴 투르노프스키 (Martin Turnovský, 재임 기간 1966–1968)
- 헤르베르트 블롬슈테트 (Herbert Blomstedt, 재임 기간 1975–1985)
- 한스 폰크 (Hans Vonk, 재임 기간 1985–1990)
- 주세페 시노폴리 (Giuseppe Sinopoli, 재임 기간 1992–2001)
- 베르나르드 하이팅크 (Bernard Haitink, 재임 기간 2002–2004)
- 파비오 루이시 (Fabio Luisi, 재임 기간 2007–2010)[3]
- 크리스티안 틸레만 (Christian Thielemann, 재임 기간 2012-)
4. 특징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데다가 오랜동안 동독에 속해 있으면서 악단 고유의 톤칼라가 오랫동안 유지되어 왔다. 관악기 파트 뿐만 아니라 현악기 파트도 다른 오케스트라와 다른 특유의 고유한 톤칼라가 있었다. 하지만 통일이 되고 현재는 다른 오케스트라와 마찬가지로 악단 고유의 사운드가 많이 희석되었다.
특히 금관군, 특히 트럼펫 파트는 독일의 다른 남동부 오케스트라들처럼 매우 강하고 날카로운 사운드를 냈다. 트럼펫 파트는 베를린 필에서도 사용했던 몽케 트럼펫을 사용했는데, 베를린 필보다 더 강렬한 사운드를 들려줬다. 다만 독일이 통일된 후 슈타츠카펠레의 전매특허와도 같았던 강렬한 트럼펫 사운드는 다소 퇴색한 편이다. 호른 파트는 솔로이스트로도 유명한 페터 담이 수석으로 재직했는데, 페터 담 특유의 심한 비브라토는 이 오케스트라 사운드가 불안정하게 들리는 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 페터 담이 은퇴 후 현재는 매우 안정되고 풍부한 호른 사운드를 들려준다. 동독 시절 플룻 수석도 진폭이 큰 비브라토를 구사했는데 매우 아름다운 소리지만 때로는 앙상블의 안정감을 해쳤다.
드레스덴의 루카스 성당은 좋은 음향으로 정평이 나 있는데,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도 이곳에서 많은 녹음을 남겼다. 특히 70년대 다소 잔향있는 음향을 추구했던 EMI와 매우 궁합이 잘 맞았는데, 요훔이나 블롬슈테트와 녹음한 브루크너 교향곡 녹음에서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의 아름다운 현악 사운드가 잘 살아있다.
동독 시절에는 악단의 좋은 기량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체제하에 있었기 때문에 많은 음반 녹음을 남기지는 못했다. 하지만 70년대에는 비용이 많이 드는 대형 오페라 녹음을 종종 녹음하기도 했다. 카라얀의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클라이버의 '마탄의 사수', '트리스탄과 이졸데' 녹음 등이 이루어졌는데, 서독에서 녹음할 때보다 비용을 많이 절감할 수 있었기 때문에 번거로운 절차에도 불구하고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를 기용한 녹음이 성사되었다.
오페라와 연주회 모두를 소화한다는 점에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도 유사점이 많다. 오페라와 콘서트를 포괄하는 방대한 연주횟수 때문에 단원수가 많은 편이며, 빈 필과 마찬가지로 관악기의 수석단원은 세 명씩 있다. 19세기 이래의 카펠마이스터들은 국립오페라극장의 음악 감독도 겸임하는 것이 보통이다. 다만 이것이 오히려 지휘자들에게 과중한 업무로 돌아와 꽤 스트레스가 되기도 하며, 이 때문인지 20세기 초반 이후로 카펠마이스터를 맡는 지휘자들은 대부분 10년 이상의 장기 재임을 하지 않고 있다.
워낙 오래된 악단인 탓인지 비교적 보수적인 성향을 갖고 있으며, 연주하는 레퍼토리도 주로 독일어권 음악의 기본 작품들이 중심이 되고 있다. 하지만 동독 시절에는 아무래도 공산주의 국가들의 큰형님 격이었던 소련의 영향력이 강대했기 때문인지 러시아 음악을 위시해 수많은 동구권 음악이 연주되기도 했다.
통일 후에는 이러한 보수적인 색채를 완전히 빼지는 않더라도, 다른 언어/문화권의 음악이나 현대음악도 조심스럽게 공연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다만 다른 악단들 보다는 꽤 어려워 하거나 연주해도 좀 이질적인 음악이 나온다고들 하는 듯. 정명훈도 객원 지휘자로 이 악단을 이끌고 유럽 순회 공연을 했는데, 이 때도 근현대 음악의 연주는 호불호가 많이 엇갈렸다고 한다.
물론 2007년부터는 다른 악단들처럼 동시대 작곡가 중에서 한 시즌 동안 활동하는 상주 작곡가를 임명해 신작을 위촉하는 등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같은 해 4월에는 유럽 문화 재단에서 수여하는 세계 음악 유산 보존상을 받기도 했다. 전통을 유지하며 혁신을 받아들이는 운영 정책이 어떤 성과를 거둘 지 귀추가 주목되는 악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