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툴리우 바르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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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4월 19일 ~ 1954년 8월 24일
포르투갈어: Getúlio Dornelles Vargas
1. 개요
브라질 대통령이자 독재자.
2. 생애
1882년, 브라질 남부 히우그란지두술 주에서 태어났다. 목장주 가문 출신으로, 법대를 졸업한 후 변호사가 됐고, 1908년 주의회 의원이 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연방 하원의원, 재무장관을 지낸 후, 1928년 히우그란지두술 주지사가 됐다.
당시 브라질에서는 커피 지주들이 주축이 된 상파울루 공화당과 미나스제라이스 공화당이 협약을 맺고 번갈아가면서 대통령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1930년 대선에서 상파울루 출신의 워싱턴 루이스 후보가 같은 주 출신의 줄리우 프레스치스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면서 양자의 동맹이 깨지게 된다. 히우그란지두술 주지사였던 바르가스는 미나스제라이스의 지지를 받아 1930년 대선에 출마했으나 대통령 당선에 실패하였다.
그러나 그해 7월 바르가스의 러닝메이트였던 부통령 후보 주앙 페소아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히우그란지두술과 미나스제라이스에서는 반란이 일어났다. 이어서 군부에 의한 10월 쿠데타가 일어났고, 그들의 추대로 임시 대통령이 된다. 당시 브라질은 대공황의 여파로 브라질의 주요 수출품으로, 브라질의 경제 윈동력이었던 커피 산업이 위기에 처해 있었는데, 바르가스는 커피 가격을 상승시키기 위해 과도하게 많이 생산된 커피를 사들여 폐기하는 정책을 취했다. 1932년 상파울루에서 반란이 일어나기도 하였으나 이는 진압되었다.
1934년 브라질에서는 신헌법이 제정되고 바르가스는 1934년 4년 임기의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1930년대 브라질에서는 통합주의행동당(AIB)을 비롯한 파시즘 조직들과 민족해방동맹(ALN)을 결성한 공산주의자들이 세력을 불려 갔는데, 그 전부터 국가보안법 등을 제정해 이들의 충돌을 통제하려고 하던 바르가스 정부는 1935년 공산당의 봉기가 진압된 후 좌익 세력에 강경한 탄압을 가했다. 1937년 선거를 앞두고 바르가스는 친위 쿠데타를 일으킨 후, 포르투갈 제2공화국을 모방하여 이스타두 노부(Estado Novo)[1] 를 선포하고 전체주의 독재 정치를 하였다. 파시스트 통합주의자들은 쿠데타를 지지하였으나, 바르가스는 통합주의자들을 기용하지 않았고, 이에 통합주의자들은 대통령궁을 습격하여 바르가스를 쫓아내려 하였으나 진압당했다. 바르가스는 더욱 강하게 중앙집권화를 추구하였으며, 경제적으로는 수입대체산업화를 추진하고, 산업화 인력을 공급하기 위해 교육에도 투자를 하였다.[2] 바르가스는 공산당을 비롯한 좌익 세력을 탄압하고, 노동조합을 통제하면서도 공산당과 사회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정책 자체는 받아들여서 노동 관련 법을 제정하고 최저임금제를 도입하는 등의 친노동자적인 행보를 보였다. 또한 대중을 향한 선전을 통해 노동자들의 수호자라는 이미지를 구축하기도 하였다. 이전까지 백인들에 의해 저급한 문화로 여겨졌던 삼바와 반대로 백인 일색의 스포츠였던 축구가 모든 브라질 사람이 향유하는 문화 아이콘이 된 것도 바르가스 시대의 일이었다.
브라질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처음에는 중립을 지켰다. 나치 독일은 처음에는 브라질의 쿠데타에 우호적이었으나, 바르가스가 통합주의자들을 제거하는 등 국내 파시스트들과 거리를 두면서 양국 간의 사이는 멀어지게 되었다. 브라질은 1942년 1월 추축국과 관계를 끊고, 이후 독일 잠수함이 브라질 상선을 격침시키자 1942년 8월 추축국에 선전포고하면서 연합국으로 2차대전에 참전하였고, 브라질군이 1944년 이탈리아 전선에 파병되었다. 그러나 이와 함께 브라질 내에서는 독재 국가가 연합국으로 참전하는 모순에 대한 비판이 커지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져갔다. 결국 바르가스는 1945년 선거 실시를 약속하였고, 자신도 노동계가 주도한 브라질 노동당(PTB)의 결성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1945년 10월, 그를 지지하던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그는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난다. 군부는 새로운 헌법을 제정해 브라질 제4공화국을 선포한다.
하지만 바르가스는 노동자들의 지지를 얻고 있었기에, 1950년 대선에 출마해 1951년 브라질의 대통령이 된다. 바르가스는 차관을 들여와 농업 국가이던 브라질의 공업화를 추진하였으나, 2차 대전 이후 심각해진 브라질의 인플레이션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1953년 바르가스는 노동부 장관으로 노동조합과 연관된 인물인 주앙 굴라르를 임명했는데, 보수파들은 이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또한 바르가스는 커피에 대해 복수환율제를 도입해 이로 얻은 수익을 공업에 투자하려 하였으나, 이 역시 미국과의 마찰을 빚게 된다. 1954년 바르가스 정부가 최저임금 100% 인상을 발표하자 보수파는 크게 반발했고, 이 와중에 바르가스의 측근들이 언론인 카를루스 라세르다에 대한 암살 시도를 벌이는 사건이 벌어졌다. 군부는 바르가스의 사임을 요구했고, 바르가스는 1954년 8월 24일 권총으로 '''자살'''하면서 생을 마감했다.
바르가스가 자살하자 분노한 대중들이 거리로 나서면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결국 카페 필류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하고, 1955년 대선에서는 민주사회당의 쿠비체크가 대통령으로, 노동당의 주앙 굴라르가 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3. 평가
그의 평가는 브라질에서 엇갈리는 편으로 브라질의 산업화를 선도하고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장하고 의무교육을 대대적으로 도입했으며 인종차별과 여성차별 등의 악습을 해결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면서 브라질 사회의 통합을 적극적으로 주도했다는 긍정적인 평과 함께 임기 전반기에 파시즘의 영향을 받은 독재정치를 펼친데다가 2기 집권시에는 민주주의적인 정책을 펼쳤다고 하지만 경제적으로 침체일로에 빠졌다는 점때문에 비난을 동시에 받는다. 그리고 바르가스는 비록 분배정책을 펴고 노동자와 여성, 흑인들의 권리를 향상시켜서 브라질의 발전을 도모한것 자체는 높게 평가하면서도, 목장주 출신이라는 출신성분 덕택에 대지주들을 제압해서 집권했음에도 막상 토지개혁에는 미적지근거렸고, 덕택에 현재까지도 소수의 지주들이 브라질 농토의 대부분을 독식하는 구조가 유지되어서 브라질 사회의 문제점인 극심한 빈부격차가 유지되었다는 한계점을 지적하는 평도 있다.[3]
전반적으로1930년 군부의 쿠데타로 집권한 이후 장기 집권을 한 독재자이면서도, 동시에 소수 엘리트에 의한 과두 지배 체제를 무너뜨린 중남미 포퓰리즘의 선구자격이 되는 인물 중 하나로 이 때문에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것도 있다. 이웃나라 아르헨티나의 후안 페론과도 비교되기도 하는 인물로 파시즘의 영향을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인종차별을 철폐하는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는 점은 미묘하다. 바르가스의 이름을 따서 설립된 제툴리우 바르가스 재단은 현재도 중남미에서 열 손가락안에드는 싱크탱크로 유명하다. 그 만큼 엄청난 족적을 남겼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