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따이한

 

1. 개요
2. 배경
2.1. 강간 피해설
3. 차별과 편견
4. 해결 방안
5. 일본에서의 물타기
6. 여담
7. 관련 문서


1. 개요


Lai Đại Hàn / 𤳆大韓[1]
베트남 전쟁 시기에 파월 한국군 혹은 한국인 노무자와 현지인들 사이에서 혼인 관계로 태어났거나 강간 피해로 태어난 혼혈아들을 베트남에서 부르는 명칭. 한국인 아버지와 베트남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것이다. 정확한 숫자는 추산하기 힘들지만 부산일보에서 추산하기로 최소 5천 명이고, 이밖에 1만 명설, 2만 명설도 있으며 최대 3만명까지 잡기도 한다.
미군과 베트남 여성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도 최소 2만에서 최대 10만에 이른다고 알려졌다. 미국 정부는 1987년부터 한국, 필리핀, 베트남 등 과거 미군 주둔지역에서 태어난 2세들에 대하여 이민을 받아주고 있다.

2. 배경


베트남전의 복잡한 배경으로 인해 그때 한국에서 태어난 혼혈아들처럼 이들도 전쟁이 끝난 뒤 대부분 어려운 삶을 살게 된다. 당시 베트남은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으로 나뉘어 전쟁 중이었고 한국군과 한국 노무자들은 남베트남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1973년 모두 철수하게 되는데 전쟁이 북 베트남의 승리로 끝나 남베트남이 멸망하자 이들의 운명도 비참하게 뒤틀리게 된다.

중앙일보 정치 실화 청와대 비서실에 연재된 기사에 따르면 1975년 베트남 패망 당시 한국정부는 일반의 인식과 다르게 이러한 한/베트남 혼혈들에 대한 정책을 수립했고 이들이 한국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게 분명하면 교민철수 행렬에 넣어주었다. 문제는 사이공 함락이 너무나 긴박하게 일어난 터라 일부 외교관 마저도 탈출에 실패했다는 점[2], 한국 대사관에서 파악한 교민+라이따이한의 수보다 훨씬 많은 인원이 탈출을 요청했다는 점, 그리고 일부 몰지각한 교민들이 전혀 무관한 현지인들에게 거액을 받고 라이따이한들의 자리를 매매하는 바람에 막상 탈출해야 할 2세들이 탈출하지 못함 등의 이유로 남겨졌다고 한다.
파월 참전자들은 라이따이한 문제를 군인보다는 전역한 한국 출신 노무자들에 의한 것으로 주장한다. 그에 대한 이유로는 한국군이 전술기지 내에서 엄격하게 통제된 생활을 했다는 점[3], 파월 한국군의 베트남내 복무기간 (Tour of Duty)이 1년이 약간 안 된다는 점, 당시에는 군인들이 현지에서 제대 후 기술자로 정착하거나 외국계 회사에서 근무하는 경우가 있었던 것, 혹은 아예 기술자로 정착하는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다만 반드시 엄격한 통제가 이뤄졌느냐 하면 그것도 아닌데, 실제 파병 한국군의 증언으로 한국군도 막장인 장교나 부사관이나 사병이 무단으로 나가 성폭행 사건을 저지르거나 사건을 일으킨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적발된 케이스는 헌병대로 넘겨 처벌했으며, 실제로 일부 부대는 부대원들이 만에 하나 성폭행 사건을 일으킬까봐 '알아서' 일부 윤락업소로 사병들을 교대로 보내게 해주기도 했다는 증언이 있다. 참고로 월남여성을 비하하는 단어인 '콩까이'는 원래 이런 윤락업소 여성들을 일컫는 은어였다.[4]
어쨌든 참전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현지에서 제대한 군인들이 민간인 신분으로 자유롭게 지내면서 높은 확률로 '현지처'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스스로 인정하는 이들도 꽤 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현재에도 일부 남성들이 동남아의 몇몇 나라에서 벌이는 것과 비슷하다.
미군 헬기 조종사로 백마부대에서 근무한 미군 출신의 증언을 따르자면 (48 AHC 공격 핼기 중대, 화력지원이나 부상자 수송임무를 맡음) 영내에서는 한국 사병들은 부대를 나가는 절차 자체가 엄격하고 도시에 있는 윤락업소 등은 비싸서 한국군 사병 월급으로는 택도 없었다는 것이다. 대신 영관급 장교들은 도시로 나가는 것을 몇번 보았지만 그들이 윤락업소를 찾아간 건지 아니면 다른 볼일이 있어서 간 건지는 모른다고 한다. 일단 나트랑과 닌호아에 주둔한 백마부대 한정이지만 상황상 다른 부대도 비슷했을 것이라고 보인다.

2.1. 강간 피해설


라이따이한 중 일부가 한국군에 의한 강간으로 태어났다는 주장은 지속적으로 제기되어왔다. 전시에 베트남 해방 전선(베트콩)은 한국군을 포함해서 자신들과 적대시 하는 모든 파월군이 고문, 학살, 강간 등의 전쟁 범죄를 밥먹듯이 저질렀다고 선전하는 게 매우 흔했다. 다만 실제 강간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증언이 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초대 공동대표로 있는 윤정옥 전 이화여대 교수는 일본군 위안부 연구를 널리 알린 것으로 유명한데, 베트남전에서의 성범죄에도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베트남전에서의 성범죄와 살상에 대해 한국이 일본에 요구하듯이 사죄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2019년 1월 '라이따이한의 정의'라는 단체가 # 영국 하원 의회에서 연설을 하는 등 입지를 다지면서 이 문제에 대해 영국 유력인사들의 참여를 이끌어내고 있다. 유엔 인권위에 제소하여 일단 50명의 라이따이한 DNA를 한국에 보내어 파월 한국군의 DNA 자료와 비교하여 한국 핏줄을 찾으려는 계획을 세우고, 최종 목표를 대한민국 정부의 인정과 사과로 설정하고 밀어붙이고 있다.# 이 단체는 대한민국 정부에 DNA 샘플을 보내겠다고 했으나 어떤 종류의 협조도 거절당했다고 주장한다. 애초에 라이따이한과 대조할 DNA조사군과 개인정보를 알려줘야 하는데 파월장병들의 자발적인 동의가 없으면 국내법과 충돌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베트남 전쟁의 참전용사들의 증언에 의하면, 낮에는 손 흔들고 친절하게 대해주는 마을인데 밤이 되면 땅굴에 숨어있던 베트콩이 튀어나와 수류탄 죽창 등으로 부대원들을 살해하고 도망치는 일이 반복되다보니, 눈이 뒤집혀 베트콩을 잔인하게 토벌하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고 한다. 마을 밑에 땅굴이 있는데 신고하지 않았다는 건 이 마을 사람들이 먹여주고 숨겨줬다는 것이고, 베트콩이 딱히 군복을 입거나 하는 것도 아니라서 마을 사람 일부가 베트콩일 수도 있기 때문에, 무기 안 들었다고 단순히 무고하지 않다고 볼 수도 있다.[5]
하지만 베트남 사람들 입장에서는 자기 가족이나 친구가 한국군의 손에 죽게 되면 베트콩을 은근히 편들게 되는 등, 온갖 방법으로 뒤틀린 베트남 전쟁은 이 사람이 적인지 아군인지, 군인인지 민간인인지 구분할 수 없는 복잡한 양상을 보였다. 무고한 베트남 사람들의 살해, 강간 범죄, 고문 등이 벌어진 배후에는 이런 생사가 오가는 상황에서 베트남 사람들에 대한 편향된 인식과 분노가 크게 작용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 문제는 당시 참전 동맹국이었던 미국과의 입장 문제와 참전용사들의 명예 문제, 그리고 일본의 억지 물타기 등이 있기 때문에 매우 복잡하다.
무엇보다 한국의 관련 단체들이 진상조사를 하려고 해도 베트남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협조를 해주지 않는다. 베트남 정부는 예전부터 베트남 전쟁에 관한 것은 사과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공고히 해왔고, 이는 베트남 전쟁이 본인들의 자랑스러운 승전의 역사이고 베트남 통일의 토대가 되었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북베트남(현 베트남 정부의 뿌리)에 의한 남베트남 인사 대규모 숙청과 민간인 학살, 강간이 같이 드러나 현 베트남의 정부의 명분을 흔들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3. 차별과 편견


전쟁 때의 라이따이한이라면 헤어짐에 있어서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있다고 치더라도 이후에 베트남과의 경제 교류 재개 이후 태어나게 된 신 라이따이한들 또한 적지 않다. 라이따이한과 그 어머니들은 편모 슬하에서 남편 없이 홀로 자식을 키우며 사는 것도 힘든데 자국에서도 심한 차별 속에서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 마치 우리나라에서 혼혈이 암묵적으로 차별받는 것과 비슷하다.
민족주의공산주의를 주사상으로 하는 새로운 베트남에서는 이들은 그들 부모가 외세와 결탁하여 태어난 출신성분이 나쁜 자식들로 취급된 것이다. 일설에는 베트남 정부에서 라이따이한 아이들의 진학을 제도적으로 막았다는 말도 있다. 게다가 자식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들의 어머니도 우리나라말로 표현하자면 화냥년같은 끔찍한 욕을 듣는 일이 많다고 한다.

4. 해결 방안


아버지 찾아주기, 교육지원 등 라이따이한에 대한 지원은 주로 민간단체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라이따이한 남성이 재판을 통해 한국 국적을 취득한 일도 있지만 2006년 국적 부여가 검토된 적이 있을 뿐 정부차원의 체계적인 지원은 아직 없다.[6] 절대 다수의 라이따이한들은 한국으로부터 그 어떤 처우도 받지 못하고 있다. 1990년대 베트남과 수교가 제기되면서 모 잡지에 관련 이야기를 어느 선교사분이 연재한 것에 의하면, 대한민국은 주민등록 제도가 잘 되어 있어서 아버지 찾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한다. 문제는 아버지란 작자들이 책임지기를 싫어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 문제를 일으킨 원인을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지금이라도 문제의식을 갖고 책임지는 자세로 해결책을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도 드문 예지만 어느 파병 한국군은 20년이 지나서 베트남으로 찾아가 과거 관계를 가졌던 여성을 찾아갔고, 커버린 아들까지 만나 재회를 하고 사죄와 같이 아주 베트남으로 가서 재혼한 경우도 있다. 그 외에 한-베트남 수교가 이뤄진 후 베트남으로 돌아와서 상대 여성과 자식을 찾던 한국인 남성도 상당히 많았다고 한다. 이 중에는 위 사례와 마찬가지로 다시 합친 사례도 종종 있는 듯 하다.
  • 한 사례 - 베트남에서 현지처를 둔 한국인 기술자가 패전을 앞두고 현지처와 아들을 남겨두고 떠나면서 생활비 조로 집을 한 채 마련해주고 귀국했다. 그러나 베트남의 차별정책으로 재산을 다 빼앗긴 현지처는 자국인 군인과 재혼하여 자식을 두었으나 사별. 라이따이한 자녀에 대한 차별정책과 여자 홀몸으로 여러 자식을 부양해야 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한-베트남 수교 이후 베트남인 가족을 찾아 온 어떤 한국인을 통해 전 남편에게 국제전화를 통해 도움을 청했다. 전 남편은 귀국 후 가정이 깨지고 경제적 어려움을 겪어 중동에 건설기술자로 나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그녀와 연락이 되었고 책임감을 느껴서 한국인 자녀들에게 사실을 털어놓고 베트남으로 귀국했다. 그 곳에서 다시 합쳐서 식당을 차리고 생활했는데 자신이 재혼했다는 사실을 말할 수 없었던 베트남 여성이 라이따이한 자녀만 데리고 오고 나머지 자식들은 몰래 숨겨놓고 돌보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한국인 남편이 자신이 뭐라할 자격이 없다고 여겨서 그 자식들을 데리고 왔다고 한다.[7]
반대로 베트남과의 수교 이후 친부를 찾아 한국으로 온 라이따이한을 통해 남편이나 아버지의 베트남인 현지처의 존재를 알고 가정이 깨진 사례도 있다고 한다. 물론 이건 남자 쪽 책임이 있으니 라이따이한들에게 책임을 돌리는 건 억지다.
근본적 해결책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민간에서는 대한민국의 기독교 단체의 지원에 의해서 직업 훈련 학교 등의 지원 시설이 설립되었고, 2세, 3세를 위한 무상 직업 훈련과 한국어 교육을 지원하는 등의 활동이 실시되기도 하였다.[8]
다만 현재도 베트남에 거주하는 파월 참전장병들은 라이따이한 아버지 찾아주기 등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베트남이 적화통일하면서 모든 한국사람들이 나몰라라 하면서 도망간 게 아니고 정말로 어쩔 수 없이 가족을 두고 간 사람들도 있기에 힘들게나마 재회를 하는 경우도 있다.

5. 일본에서의 물타기


일본극우혐한 세력들은 일본군 위안부 관련 기사마다 라이따이한을 자주 언급하며 일본군 위안부의 물타기용으로 라이따이한 소재를 쓰고 있다. 이들은 라이따이한을 한국판 위안부라 왜곡하여 알리거나 인식하고 있다. 또한 혐한 상당수는 라이따이한이 학살사건이나 학살 장소로 오해하는등 무엇인지 모르고 오직 위안부를 부인하기 위한 수단으로 쓸뿐이다.
라이따이한은 어디까지나 '''한국인과 남베트남인 사이에 태어난 2세들'''을 칭한 명칭이며, '''이들이 베트남 내에서 겪는 차별 대우와 한국인 아버지들의 책임'''이라는 주제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사죄와 책임'''이라는 주제는 전혀 다른 별개의 사안이지만 이를 동일시하며 어떻게든 우리만 잘못한 게 아니라 한국도 잘못했다 혹은 다른 쪽도 한 것이니 우린 잘못 없다는 식의 정신승리를 하며 책임회피와 물타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6. 여담


뜬금없이 베트남의 연예인 쩐 티 킴 응안이 라이따이한이란 소문이 한국 온라인상에서 돌았던 적이 있다. 이들의 근거는 이름에 킴(kim)이 들어가서. 물론 사실은 아니다. 첨언하자면 베트남도 한자 문화권으로 중국의 한자발음을 도입한 나라라서 마찬가지 배경을 가진 우리나라와 유사한 발음이 상당히 많다.[9] 베트남 인명도 알고보면 한자 표기가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호치민은 '胡志明'이라서 한국어식으로는 '호지명'으로 읽힌다. 그래서 국제결혼한 베트남 여성들이 한국식 이름을 지을 때 베트남어의 한자표기를 찾아서 쓰기도 한다.
시사IN 기사에 의하면 아프리카판 라이따이한도 있다고 한다. 수가 많진 않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게 이슈가 되는 이유는 한국인 아버지들이 한국으로 도망을 가서 연락을 끊었기 때문이다. 독일인이나 미국인 아버지는 대부분 태어난 사생아들을 본국으로 데려갔지만, 한국인 아버지들은 그냥 엄마에게 애들을 맡기고 사라져버렸다고 한다. 기사 참고 한국 내부에서 자중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한다.
영화 의형제에서 고창석이 분한 베트남인 폭력배 두목도 라이따이한으로 나온다. 사건을 맡고 있는 경찰이 라이따이한이라고 말해주며 베트남 사람들보다도 지독하다고 한다.
미군도 비슷한 문제를 자주 겪었으며 이런 혼혈들을 아메라시안(Amerasian)이라고 부른다. 이후 이들에게 미국 시민권을 주는 문제로 오랫동안 갈등을 겪었다고 한다.

7. 관련 문서



[1] '大韓'이야 '대한'을 의미하고, '𤳆'는 쯔놈문자인데, 경멸적인 어감으로 '혼혈'을 의미한다. '라이' 부분은 男(사내 남)과 來(올 래)가 한 글자로 이뤄진 것이다. 일부 기기에선 베트남 문자가 정상적으로 표시되지 않으니 주의[2] 중앙정보부 무관인 이대용 공사와 몇명의 외교관, 그리고 100여 명의 교민은 결국 탈출에 실패한다. 이대용 공사 일행은 몇년 뒤에 겨우 추방의 형식으로 오게 되고 교민들은 1년 뒤 호주나 태국을 통해서 귀환한다.[3] 우리나라 비무장지대의 GP초소 생활과 비슷하다고 보면 될 듯하다.[4] 베트남어로 꼰가이con gái(昆丐)는 아이+여자, 즉 소녀, 딸이라는 뜻으로 단어 자체가 여성을 비하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즉 정상적인 표현이다. 다만 조선인의 일본식 발음인 조센징 또한 단어 자체에는 비하적인 표현이 없지만 당시의 상황도 그렇고 화자들이 비꼬고 무시하는 태도로 한국인을 대했기 때문에 한국인들에게는 비하적인 느낌으로 남아있는 것과 비슷한 상황. 당시 한국인들에게 꼰가이=윤락업소여성 이었던 것.[5] 반대론자들은 보통 이런 주장을 간도참변을 들어 비판한다. 한인 마을이 독립군에 협력했으니 일본제국군의 행동도 정당하냐는 주장. 실제로 월남전 관련 논쟁은 일본 극우의 물타기와 일본과 우리가 달라야 한다는 주장이 대립하면서 굉장히 복잡하다.[6] 사실 이들이 현재는 엄연한 베트남 국민인 이상. 한국에서 일방적으로 '전원에게 국적 부여' 같은 조치를 취하는 것은 현실 국제 정치에서 논란의 여지가 크다.[7] 라이따이한과 모친들이 겪은 어려움, 한-베트남 수교 이후 이들을 둘러싼 여러 사실을 한꺼번에 알 수 있는 사례이기에 기재.[8] 관련기사 1 2[9] 쩐 티 킴 응안의 킴(kim)도 실은 金의 베트남식 독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