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우경화
1. 개요
일본의 거대 여당인 자민당은 태평양 전쟁의 전범들은 물론, 그 이전에 메이지 유신을 이끈 삿초동맹(薩長同盟)의 세력이 직간접적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1] 대표적으로 전 총리인 아베 신조는 조슈 번 세력의 후손이며, 이전 총리인 아소 다로는 사쓰마 번 세력의 후손이다. 그 외에 태평양 전쟁 1급 전범이었다가 사법거래로 불기소처분을 받은 아베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역시 조슈 번 세력의 후손)가 자민당의 주요 창립 멤버이기도 했다.
태생이 자유당과 민주당의 합당 형태인지라 파벌이 매우 다양해서, 과거에는 이시바시 단잔이나 미키 다케오, 스즈키 젠코, 후쿠다 야스오같이 나름대로 온건한 인물도 총리로 재직했고, 심지어는 고노 담화의 그 고노 요헤이 같은 사람도 있었다. 다만 1990년대 온건 성향의 보수본류 계열들이 대거 탈당하여 신당을 차리고[2] 2000년대 이후부터는 우익 성향의 보수방류 계열의 총리들이 쏟아지면서 좀 더 우경화되었다.
일단은 자민당의 당 강령 등에는 극우적인 성향을 보이는 내용은 들어있지 않다. 자민당이 대놓고 극우성향을 표방했으면 세계평화를 기치로 내건 '''공명당'''과 연립정부 구성 자체를 못했을 테니까. 다만 아베 신조 총리 취임 이후 평화헌법을 개정하려는 시도를 꾸준히 하고 있어 우려의 목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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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 중에는 가선 우익이 유명하다. 대체로 사진처럼 트럭이나 버스 개조한 것[3] 들을 타고 다니면서 방송하거나 군가를 틀고 다니는 우익단체 야쿠자들의 지원도 받는 편이고[4] 일본은 투표율이 낮은 편이라 가두 우익 등의 동원력 있는 우익들이 강세를 누린다. 근래에는 넷 우익들이 거리로 갑툭튀하는 편인데 가두 우익과는 상당히 다르다. 가두 우익이나 정통 우익들은 보통 재계나 정계의 입장을 내세우며 반공주의 등에 입각하는 편이지만 넷 우익들은 인종차별 성향을 매우 강하게 드러낸다.[5] 사실 넷 우익은 인종차별 말고는 딱히 이론적인 기반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죄다 인터넷에서 긁어모으거나 몇 안 되는 칼럼니스트들을 레퍼런스로 활용하는 수준이니. 일본이 요새 국력이 많이 시원찮고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젊은이들이 극우주의 또는 배타적인 국뽕에 빠져드는 경향이 있어 이런 넷 우익 출신들은 꽤 인기가 있다. '''물론 그들 사이에서만.'''[6]
이 중에는 단순한 극우를 넘어 국제적으로 매우 위험한 이들도 있다. 호국지사의 모임(護国志士の会)이란 무리인데 '''나치 깃발'''을 들고 행진하면서 '고노 담화 재검증은 물론 나치 독일도 재평가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나치를 찬양한다는 건 지금 범세계적 국제기구가 된 UN 회원국 전부를 대적해 위험에 빠뜨리는 짓인데 대체 어디가 호국인지 모르겠다.[7]
일본의 우익 단체를 정리해놓은 위키백과 한국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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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에서 혐한시위하는 일본인들.
김대중 전 대통령이 2006년 10월 11일 전남대에서 ‘한반도의 현실과 4대국’이라는 강연회에서 스스로 민주주의를 일군 한국과 달리 일본은 민주주의를 외세에 의해 받아들였고 이에 대한 주체세력이 없기 때문에 군국주의가 부활할 것이라며 일본의 우경화에 대해 예견한 적이 있다.[8]“최근 일본을 보면 일본이 급격히 우경화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일본 사람들이 자기 손으로 민주주의를 안 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전후에, (전쟁 이전에) 군국주의 하다가, 갑자기 항복하고 나서, 맥아더가 들어와서 민주주의를 하라고 하니까 민주주의를 한 겁니다. 그래서 일본은 민주주의의 주체세력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과거의 군국주의 시대의 세력이 다시 부활한 겁니다.”
"외세나 우연에 의해서 민주주의를 하면 그런 것은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 이것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일각에서는 일본의 극단적인 우경화의 끝이 핵무장으로 가결짓고 중국이나 러시아와의 핵전쟁으로 이어질 수도 있어서 인류 멸망 시나리오 중 아니냐는 말도 있다."중·일 핵전쟁 시 1억 명 이상 사망"
2. 일본의 재무장과 집단적 자위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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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되면 이미 재무장이나 집단적 자위권을 넘어선 수준[9] 으로 전쟁을 원하는 것이다.
일본의 우익들은 집단적 자위권으로 대표되는 군사력 증강에 관심을 갖는 경우가 많고 특히 넷 우익들의 경우 20세기 중반 미국과 싸웠던 '''황군'''의 기치를 되찾자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추축국의 재무장과 그로 인한 비극을 이미 인류는 제대로 한번 겪었기 때문에 외국, 특히 일본에게 당해본 적이 있는 중국, 한국, 러시아에서는[10] 굉장히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것이 포인트.
다만 동남아시아 쪽에서는 중국과 심각한 남중국해 분쟁을 겪고 있어서 일본의 재무장을 바라기도 한다.
더욱이 미국 오바마 정권이 제창한 '아시아 재균형 정책(Pivot to Asia)'의 일환으로 일본을 '미국의 아시아 대리인'으로 내세워 군사력 증강을 공공연히 묵인하고 더 나아가 지원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미국의 동맹국이라는 간접적 고리가 엮여있는 한국으로서는 일본의 재무장 및 군사력 증강에 대해 태클걸기가 곤란한 상황이다.
그리고 2015년 9월 19일, 일본 헌법 9조를 엿먹이고, 타국에 자위대 파병이 가능하게 되었다.
3. 일본 우익사관, 우익 정치이론, 역사왜곡 관련
지난해 2014년 8월 아사히 신문이 일본군 위안부 관련 과거 기사 가운데 16건을 오보로 인정하고 취소한 일은 일본 우익들이 전방위적으로 발호하는 계기가 됐다. 우파 성향의 언론이 가장 먼저 움직였다. 산케이 신문, 요미우리 신문 등은 잇따라 '아사히 신문=매국의 DNA'와 같은 원색적인 표현을 써가며 공격했다. 아베 신조 총리를 비롯해 정치인들도 여기에 가세했다.
아사히는 단지 요시다 세이지(사망)란 인물의 증언을 토대로 한 기사를 취소했을 뿐인데 이들은 내친김에 위안부 강제 동원 자체를 부정하고 나섰다. 주변국 반발과 여론 악화를 의식해 위안부 강제성을 인정하고 사과한 고노(河野) 담화를 부정하지는 못하면서도 '고노 담화를 계승하되 검증한다'는 기괴한 논리로 흠집냈다. 위안부를 '군사적 성노예'로 규정하고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을 권고한 유엔 인권위원회의 '쿠마라스와미 보고서'에 대해 철회를 공식 촉구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일본의 움직임에 미국 의회조사국(CRS)은 '아베 정권이 역사를 들쑤시고 있다'며 우려를 나타냈다.
민간 차원의 우경화 움직임도 심상치 않다. 지난해 일본 출판가에 ‘혐한(嫌韓)’ 서적 바람이 분 것은 물론 온라인 중심으로 이뤄졌던 혐한 활동도 오프라인으로 확대됐다. 2009년 7,000명이였던 혐한단체 재일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모임[11] 회원은 지난해 15,000명으로 2배 이상 늘었다. 활동도 점점 과격해져 전직 아사히 신문 기자에 대한 테러 협박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의 잔학성을 담은 할리우드 영화 <언브로큰> 관계자의 입국을 막기까지 했다. 이에 조지프 나이 미국 하버드 대학교 석좌교수는 '''"요즘 일본은 1930년대 일본을 떠올리게 한다"'''고 꼬집었다.[12]
일본 우익들은 메이지 유신에서부터 일제 패망 직전의 역사를 황금기라고 부르며 그리워하지만, 정작 일본 경제, 정치, 국방, 외교가 안정되고 중산층이 가장 많이 늘어난 풍요로운 시기는 일본 제국 시대라기보다는, 패망 후 1960년~1970년대다. 이 시기는 일본이 식민지가 없고 영토도 축소되었으며 군대도 없음에도 한때나마 미국 경제까지 위협했던 시기이며, 오늘날의 일본을 만든 토대가 되었다.[13] 그리고 이 시기의 일본은 정치와 언론 모두 극우가 아니라 친미, 친한 성향의 중도우파가 주도하였다. 당시 집권당이었던 일본 자유민주당도 지방자치 레벨에서는 사회당, 공산당과도 협력하면서 복지를 대폭 강화할 정도로 유연했으며 전반적으로 중도파들이 당을 이끌었다.[14]
3.1. 일본 우익단체들의 파벌구조
일본의 우익운동 자체는 1800년대 중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사상화가 진행되었지만, 현존하는 우익파벌들은 전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일본의 주요 우익 파벌들은 크게 5가지로, 주로 정치권에 기반을 두며 사상적으로는 전쟁전 사상가들에 기반을 두는 본류-전통우익, 전후 야쿠자의 성장과 함께 등장한 행동파-임협계우익, 60년대 반공운동 속에서 성장한 반공우익, 반공에 집중하는 우익단체들에 반발하며 등장한 민족파-신우익, 종교단체들에 기반을 둔 종교우익, 그리고 오늘날 가장 어그로를 많이 끌고 있는 넷 우익이 그것이다.
물론 이러한 구분과는 별개로 실제 우익단체들의 내부인사들은 서로 밀접하게 각 파벌을 오가면서 활동하기도 하며, 필요에 따라 적극적으로 협력하곤한다. 예컨데 주로 정치권에 기반을 둔 본류-전통우익단체들은 마찬가지로 사회 고위층에 위치한 종교 우익단체들과 밀접한 협력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들 단체들은 주로 폭력단에 기반을 둔 임협계 우익들을 자신들의 손발로 활용하기 위해 자금을 지원하는 등의 관계를 맺고 있다.
다만 특수한 케이스가 넷 우익 단체들인데, 최근에는 기존 우익단체들의 과격행동파 인사들이 유입되고 있지만, 대부분의 넷 우익 단체들은 인터넷을 통해 혐한사상에 기반해 자연발생한 단체들이고, 이들 조직의 활동은 본류-전통우익들의 입장에서는 쓸데없이 이미지를 망친다며 불쾌하게 여겨진다고 알려져 있다.
3.1.1. 전체적인 현황
오늘날 흔히 우리가 뉴스를 통해 접하는 과격한 우익활동들은 대부분 200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넷 우익 단체들에 집중되어있다. 이들 넷 우익 단체들은 일본 내 대부분의 우익단체들도 그리 좋지 않게 보는 집단들인데, 특히 '''재특회'''같은 개또라이들의 행동들은 매우 유치한데다가 불필요한 어그로를 끈다고 보기 때문에 이들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다만 유독 재특회같은 넷 우익 단체들이 어그로를 끌어서 그렇지 우익단체들도 내부적으로는 비슷한 수준의 혐한사상을 거진 공유하는 편이다. 애초에 재특회의 혐한 활동은 이런 기존 우익단체들이 만들어낸 혐한 사상과 주장에 기반하고있으며[15] , 이들의 활동자금은 기존에 탄탄한 기반을 둔 여러 우익단체들로부터 일부 흘러나오고 있다.
재미있는 점은 오늘날 재특회를 비롯한 넷 우익 단체들의 수뇌부가 과거 우익단체들 안에서도 너무 과격해서 써먹기 힘들었던 인사들이 투입되면서 사실상 기존 우익단체들의 손발처럼 변해가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최근에는 지리멸렬하게 분산되어 활동하고있던 넷 우익 단체들이 어느 정도 느슨한 연합체를 구성하기 시작하는 현상이 관서권의 넷 우익 단체들을 중심으로 많이 발견되고 있다.
이외에도 최근 넷 우익 단체들은 내부적으로 너무 과격한 행동을 한다 싶은 구성원을 솎아내는 작업이 계속되고 있는데[16] , 이러한 작업들도 사실은 본격적으로 기존 우익단체들이 넷 우익 단체들을 통제하려는 시도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기도 한다.[17]
3.1.2. 본류-전통 우익 (보수본류)
본류-전통 우익은 일본 내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적, 사상적 기반을 둔 우익집단이다. 패전 후, 천황의 인간선언으로 사상적 기반을 잃은 일본 우익단체들은 이후 미 점령군에의해 대부분이 강제해산되었고, 동시에 공직에 참여했던 중심 인사들이 추방되거나 전범으로 잡혀가면서 완전히 몰락하게 된다.
그러나 동북아시아 정세변화로 인해 미점령군은 민주화보다는 반공정책을 우선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기존에 전범으로 지정되었던 우익 지도자들과 공직에서 추방되었던 우익인사들을 다시 기용하면서 이들을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1952년의 대일강화조약 발효를 전후로 신규단체를 형성하거나 과거의 단체를 재건하기 시작했고, 대부분이 정치권과 밀접한 연관을 맺으며, 각종 정치테러와 시위에 집중하였다.[18]
이들 본류우익은 우익단체들 중에서도 가장 정치적으로도, 재정적으로도 탄탄한 기반을 가지고 있는데, 대부분의 창립인사 및 지원자들에 2차 대전 이전부터 계보가 이어져 내려오는 기성정치권의 정치권 인사들이 많을뿐만 아니라, 미 점령군에 의해 공직에서 쫓겨난 후 전후 복구사업으로 큰 돈을 번 사업가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때문에 오늘날 일본 사회의 중추를 이루고 있는 엘리트 집단들에 이들이 많이 침투되어있는데, 이들은 대부분이 자신들만의 리그를 형성하고있고, 투표와 정권 획득 등 실질적으로 일본을 좌지우지하는 데에 관심이 많다보니, 가두에서 시위하는 찌질이(...)들에게 관심을 주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최근에는 하시모토 토오루의 정치적 약진 등에서 보이듯이 이러한 "구태의연한 보수 정치인"의 틈새시장을 공략한 새로운 우익 경향의 정치인들이 등장하고 있어 이들의 단단한 세력이 점차 변화를 맞이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존재한다.
3.1.3. 임협계 우익
임협계 우익은 일본 내 우익단체들 중에서도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던 우익단체들이자, 동시에 규모가 가장 컸던 단체들이다. 야쿠자와 같은 폭력 조직들과 연계되어 있었기에 임협계 우익이라 불린 이들 단체들은 경술국치 당시의 우치다 료헤의 현양사부터 시작해서 상당히 긴 역사를 자랑하는 어용 정치깡패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러한 조직들은 사실 일본 외에도 장제스의 남의사 등의 사례에서 나타나듯이 다른 국가들에서도 흔히 나타나는 조직들이기도 하다.
임협계 우익들은 대부분 1960~70년대 노동운동의 탄압과정에서 크게 성장하였다. 당시 일본정부와 정치권은 노동 및 학생운동을 견제하려는 목적으로 이들을 간접적으로 후원하였고, 이들 조직들은 일본 정부와 적대적 관계에 있는 대사관, 언론단체, 일본 공산당, 일본교사노조 등의 건물이나 시위현장을 습격하여 방해하는 방식으로 활동하였다.
대부분의 임협계 우익단체들은 우익단체의 탈을 쓴 폭력단이거나, 폭력단의 자금을 받아 활동하는 단체들이었는데, 흥미롭게도 일본 내 야쿠자 보스들 중에는 재일조선인들이 상당히 많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다른 우익단체들에비해서 혐한 활동의 비중이 적은 편에 속한다.[19] 물론 이들도 혐한 사상이 없는 건 아니라서,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야쿠자계 극우를 싫어하는 이유 중 하나로 '''지들도 재일인데 정치가에 기생하려고 동족인 재일교포들 괴롭히는 웃기는 놈들이라서'''라고 할 정도다.
임협계 우익은 극우단체들 중에서도 종교계 우익단체들과 함께 외부적으로 자신들을 적극적으로 포장하는 데에 집중하는 단체들이기도한데, 오늘날 많은 신우익단체들이 대놓고 길거리에서 어린 학생들을 괴롭히는 식의 혐오활동을 하는데에 반해 보다 정제된 가두활동에 집중하는 편이다.[20] 실제로 임협계 우익의 인사들은 재특회가 학교에 가서 아이들이나, 길가는 할머니에게까지 욕설을 퍼붓고 괴롭히는 것을 보고 "얘네들이 무슨 우익이냐, 친피라(양아치) 수준도 안 된다"라며 비교 자체를 불쾌해하기도 한다. 다만 폭력단이 관계된만큼 이들의 경우 전성기인 1960~70년대의 경우 노동운동이나 시위현장에서는 참가자들에게 차를 몰고 돌진하는 등 무자비한 폭력활동을 마구 벌이기도 했다.[21]
3.1.4. 신우익(민족파)
민족파-신우익 파벌은 반공이라는 틀 속에서 기존에 정치권을 장악한채 현상유지에만 몰두하는 전통우익을 비판하면서 형성된 집단이다. 이들은 196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일본의 좌익학생운동에 반발하여, 학원 정상화를 주장하면서 결성되었다.
1960년대의 안보 투쟁[22] 이후, 일본은 세계에서 사회운동과 학생운동이 가장 강력한 나라 중 하나가 된다. 일본의 사회 운동은 좌우 양쪽에서 거세게 일어났는데, 신좌파가 기존 일본 공산당을 위시한 경직된 구조를 혁파하기 위해 급진성을 띄고 일어났다면, 이들은 "반공, 친미를 넘어서 일본의 본연의 모습으로" 이행할 것을 주장했다. 이들은 기존 우파에 대한 불만족에서 터져나온 집단으로, 스스로를 우익이라기 보다는 "민족파" 내지는 "민족주의자"로 부르는 것을 선호했다. 때문에 신우익은 민족주의와 반체제성을 동시에 띄고 있었는데, 반공주의에 매몰되지 않을 것을 주장했기 때문에 이들은 민족주의적인 부분을 강조했다.
특히 이들은 포츠담 체제 타도, 자주헌법 제정, 자주 방위체제 확립 등을 주장하며 반체제, 국가혁신을 주장하였고, 천황 민족주의를 주장하는 과거의 우익 지도자 일부와 미시마 유키오 등을 중심인물로 삼아 활동하였다. 재미있는 점은 사상적 기반을 준 몇몇 인물들과 별개로 실상 대부분의 구성원 다수는 이러한 전쟁전의 세대들과는 거리가 먼 전후 세대들이었다는 점이었다.
이들은 패전 후 서구의 자유주의를 흡수하고 "품위있는 우익"을 강조하기 때문에, 재특회의 양아치같은 발언에는 강하게 반발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다만 그렇다고 이들이 얌전한 것만은 아닌데, 기본적으로 보수주의적 혁명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1970년대에는 일본 공안당국으로부터 신좌파 과격집단과 비슷한, 아니 거의 동급의 과격단체로 찍혀서 추적을 당했다. 실제로 이 당시 신우익 집단들 중에는 경단련[23][24] 을 습격하여 인질극을 벌인 사건도 있다. 이 쯤 되면 사실상 국가사회주의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이들은 주로 1960년대까지 좌익학생운동과 대립하며 그 규모를 키웠지만, 좌익학생운동이 쇠퇴하면서, 대립항을 잃고 마찬가지로 급속히 쇠퇴하였고[25] , 결국 이후에는 많은 수가 전통 우익단체에 잠시 몸을 담다가 넷 우익 단체들의 활동에도 일부 참여하는 등 여러 우익단체들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고 오늘날에는 주로 언론사 등에 많이 침투하여 활동하고 있다고 알려져있다.
신우익 단체들 중 가장 대중적으로 유명한 단체는 일수회인데, 이 단체의 고문이자 유명 논객인 스즈키 쿠니오는 아예 재특회 반대 시위에 참여했다. "우익의 품위를 떨어뜨린다", "일본은 기본적으로 와(和)의 민족인데, 레이시즘과 헤이트 스피치는 일본의 기본정신에 어긋난다"라는것이 주요 이유다.
3.1.5. 종교우익
종교우익은 종교집단들을 중심으로 하는 우익세력들을 말한다. 신사본청을 중심으로하는 신도 종교세력과 함께[26] 불교단체 및 수양종교, 생장의 집과 같은 사이비 종교단체들의 느슨한 연합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종교우익은 종교법인이라는 방패 뒤에서 막강한 조직력과 자음력을 확보하여 1970년대 원호법제화 운동으로부터 세력을 크게 확대시켜나갔다. 이들의 조직력과 자금력은 그 자체로 선거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보니 많은 정치인들이 이들의 행보에 동조하였고, 종교우익은 자신들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건국기념일의 공식행사화나 원호법제화, 스모 등의 국기화와 같은 국가주의를 고취하는 활동을 전개해나갔다.[27]
특히 이들은 학계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바탕으로 교과서 검정제도를 강화하는 방식을 통해, 후일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등의 등장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종교우익은 최근 국내에서 가장 주목을 받고있는 우익단체인 일본회의를 중심으로 하고 있는데, 일본회의 항목에서 설명되고 있는 것처럼 이 조직은 종교우익중에서도 가장 힘이 쎈 신사본청의 메이지신궁과 생장의 집 인사들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3.2. 반한 데모 주도
재특회는 동경 시내에서 우익 성향의 데모를 벌이고 있으나 조회수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니코니코 동화에서 5만 명 정도의 조회수가 전부이다. 대부분 정치적 열정이 있고 '''시간이 남아도는''' 넷 우익들이 클릭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재특회의 일부 회원들이 신오쿠보에서 해프닝에 가까운 방식으로 반한 데모를 시작했다. 그러다가 이것이 점점 규모가 불어난 것. 이때까지도 일본의 미디어들은 "관심을 주면 오히려 키워주는 격"이라며 보도를 거의 하지 않았는데 오히려 한국 언론들이 이를 기사화하고 연일 보도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 소식이 역수입되어 일본 언론의 전파를 타기 시작했다.
이쯤 되자 일본의 우익 단체들이 이런 식의 증오 범죄에 가까운 데모를 어떻게 좀 해야겠다 싶었는지 우파에서 생각하는 탈원전 데모[28] 를 주도하는 단체들과 몇몇 젊은 우익단체들을 중심으로 재특회에 대한 지속적인 비난을 하고 있다. 이윽고 신오쿠보에서 반혐오집회라는 맞불집회가 열리기 시작하고 시위 현장에서 극우 단체들과 반혐오시위자들이 충돌하는 진풍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이 시위에는 일본의 재무장과 반미자주 및 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통일전선의용군 멤버들, 1970년대 일본 신우익 운동의 거두였고 신우익 전국조직 중 가장 막강한 조직력을 발휘한 일수회의 창립자이자 유명한 평화주의 우익 칼럼니스트 스즈키 쿠니오도 참가했다. 쉽게 말해 정통 우익들이 들고 일어난 것.
사실 한국에는 일본의 폭력적인 극우 단체만 집중적으로 조명된 탓에 일본의 우익들이 얼마나 방대한 스펙트럼을 지니고 있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검은색 밴을 끌고 다니면서 방송을 하는 단체들은 사실 야쿠자와 연계가 있는 경우가 종종 있고 일수회를 비롯한 단체들은 일본의 민족주의와 자주국방 노선을 지지하는 평범한 열도의 우익 단체라고 할 수 있다. 원칙적으로 일본 우익도 인종차별이나 민족 차별은 자신들의 강령에 포함되어 있지도 않고 긍정하지도 않는다. 다만 자신들의 민족적, 문화적 순수성을 지키고자 할 뿐.
일본 우익들이 단순히 한국에 대해 호의적인 스탠스를 취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후지TV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인 적이 있다. 그 이유도 가관인 게 그저 후지TV가 한국 드라마를 많이 방영한다거나 K-POP, 한류를 많이 띄워주는 방송사라는 이유만으로(…). 정작 자매회사인 산케이신문은 우익 신문이다.
최근에는 "양이(攘夷·오랑캐를 몰아내자)"라는 반서방주의까지도 시위를 벌였다.
3.3. 징병제 도입 주장
대표적으로 미우라 루리라는 국제정치학자가 징병제를 주장한다. 징병제를 해야 민족 의식과 연대 의식이 생겨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의 징병제는 일본 헌법에 반하고, 일본 내에선 전쟁에 대한 두려움이 강해 징병제를 그 전까지만 하더라도 함부로 주장하지 못하였으나, 미우라 루리같은 사람이 꾸준히 매체에 나와 주장하면서 이제는 일본의 대표 오피니언들도 하나둘씩 징병제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정치권에서 징병제를 주장하는 사람은 없다. 전쟁에 대한 반감과 징병제를 하게 되면 당장 젊은 세대들이 군대로 가야 하기 때문에 표심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대만이 아무리 한국을 싫어해도 한국의 제28보병사단 의무병 살인사건을 '''한국판 훙중추(韓版洪仲丘) 사건'''이라고 보도하고 관심을 보인다는 것은 도리어 공감대가 생긴 사례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영 설득력 없는 시나리오는 아닌 셈. 카미카제#s-6 항목에도 알 수 있듯이 군대는 싸움을 위해 존재하지만 '''사람이 죽기 싫은 건 국적을 가리지 않는다'''. 오히려 일본이 더 미쳐갈수록 우리 쪽으로 공감대를 통해 설득시키는 건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이유는 간단하다. '''다이묘들은 군대에 안가기 때문.''' 실제로 전쟁 직후 세대들, 즉 천황 폐하를 외치던 세대들이 정치인으로 집권한 버블 경제 시기 당시에는 일본인들이 이렇게까지 개차반이지는 않았다. 또 독일이 2번 전쟁을 일으키고 드디어 청산을 완벽히 했듯이 일본이 피를 덜 흘렸기도 하고 말이다. 언젠가는 한 판 붙을 가능성이 있으나 싸우면서 친해진다고, 싸우고 나서는 오히려 더 관계가 나아질 확률이 높다.
이시하라 신타로 전 도쿄도 지사가 일본에도 징병제를 도입해서 국민들의 썩어빠진 정신상태를 뜯어고치자고 했다가 40살 이하의 일본인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다.# 이 탓에 이시하라 신타로의 지지율은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3.4. 반미 성향
자민당과 아베 내각이 미일공조를 강하게 주장하고 있어서 아직까지는 일본 극우 내에서도 소수 성향에 불과하나 일본이 우경화되고, 역사 미화가 진행될수록 점차 늘어나고 있다. 반미 성향의 일본 극우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대표적으로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와 도쿄 대공습에 대한 반감 때문에 존재한다. 더 나아가 GHQ에 대한 역사적 반감과 왜 항상 일본에게만 국제 사회에서 전쟁 책임을 묻고 잔인함을 따졌을 때 미국이 더한 짓을 했는데 왜 책임을 안 묻냐가 그들의 논리이다.
일본 정치인들 중에선 마루야마 호다카#, 아오야마 시게하루가 주장했다.
4. 일본 우익사관, 우익 정치이론
- 대동아 공영권
- 도요토미 히데요시
- 순국7사묘
- 식민지 근대화론[29]
- 일본 우익사관/학자
- 야스쿠니 신사
- 정한론
- 난징 대학살 사건
- 만주국
-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 신공왕후
- 삼광 작전
- 식민사관
- 위안부 문제
- 일본서기
- 임나일본부설
- 일본어 위키백과의 대만을 뺀 극동 주변국가 관련 정치/역사/국제정세 관련 문서들.
- 헐 노트
- 후지무라 신이치
5. 일본의 우익 정치가와 학자
- 고이즈미 준이치로[30]
- 고이소 구니아키
- 기시 노부스케
- 타카다 마코토
- 도조 히데키
- 무츠 무네미츠
- 시게미츠 마모루
- 사이고 다카모리
- 이시하라 신타로
- 아베 신조[31]
- 아베 노부유키
- 이토 히로부미[32]
- 야마가타 아리토모
- 오카와 슈메이
- 요시다 쇼인
- 히라누마 기이치로
- 히로타 고키
- 후쿠자와 유키치
6. 극우/혐한 기업
7. 일본의 넷 우익
8. 일본의 반우익(反右翼)
우익 성향의 아베 신조 정권이 자리잡고 있는 만큼 일본에서 우익 성향이 큰 것은 사실이지만, 당연하게도 모든 사람들이 이런 우익 사상에 동조하는 것은 아니며 일본 내에서도 반우익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또한 넷 우익, 혐한초딩도 일본 내에서도 반우익들한테 까이고 있는 실상이다.
최근 들어 일본에서도 재일 한국인이 많아지면서 이러한 반우익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로 인해서 재일 혐오 시위 vs 혐오 반대 시위, 우익 시위 vs 반우익 시위, 혐한 시위 vs 인종차별반대 시위 등이 지속적인 충돌을 빚고 있다. #
안티파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안티파 계열 단체가 처음 진출한 아시아 국가도 일본이다. 일본 내에서 우익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33]
그러나 젊은 사람은 거의 없고 대부분 나이가 꽤 있는 사람들이다. 일본의 노년층들 중 80대 이상의 초고령자들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비참한 현실을 눈앞에서 목도한 사람들이라서, 70대 이하의 다소 어린 나이의 노인이나 중장년층들은 전공투와 안보투쟁 등으로 대변되는, 자민당을 포함한 우익 인사들에 대한 반대 운동이 대대적으로 벌어지는 현실 속에서 자라왔기 때문에, 젊은이들보다도 훨씬 진보적인 성향을 띌 수 밖에 없다. 반면, 젊은이들은 자민당의 우세가 공고해진 199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냈고, 그 와중에서 일본의 우경화가 공고해지는 속에서 교육을 받고 자랐으므로, 우익으로 빠진 이들이 매우 많다. 실제로 현재 아베 신조 정권의 지지자는 10~20대 젊은이들이 대부분이다. 이에 반해, 한국은 반대로 65세 이상의 노년층이 박정희, 전두환으로 대표되는 보수정권 시절의 경제발전 시기의 혜택을 직간접적으로 가장 많이 본 세대이기에 그 시절에 대한 소위 말하는 추억 보정 때문에 보수주의자가 된 사람들이 많고, 그런 시절을 체감하지 않고 군사 정권에 대항하며 민주화 운동을 주도한 40, 50대의 386세대, 즉 연령적으로 중간에 낀 세대가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성향을 보이고, 20대는 박근혜 탄핵 집회 등을 계기로 정치에 활발하게 참여하는 경향이 보인다. 특히 이들은 분배와 평등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이는 조국 사태에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하지만, 젊은 진보주의자들이 일본에서 씨가 마르다시피한 건 아니다. 위에서 언급하듯이 안티파 계열 단체가 나타나거나, 모리토모 학교 비리 사건으로 인해 아베 신조와 자민당에서 대한 분노가 폭발하여 아베 수상에 대한 대대적인 퇴진 시위가 벌어지는 등[34] , 젊은 진보주의자들도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으며, 그 수는 날로 증가하는 추세다. 요즘의 젊은이들, 특히 그 중 여성들[35] 은 한국과의 교류가 큰 관계로 적어도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반한, 혐한 성향이 그리 크지 않고[36] , 오직 정치적인 부분에서만 반한 성향을 드러내는 이들이 더 많은 관계로, 제대로 된 역사 공부를 한 이들 사이에서 혐한에서 친한으로 전향하는 경우도 점차 늘고 있다[37] . 이런 이들 중에서 자국 혐오적인 혐일이 되는 경우도 많이 있는 편이다.
8.1. 일본 내 반우익 성향의 인물
취소선이 쳐진 사람은 우익을 반대하는지의 여부가 애매한 사람이다.
- 친한, 친중 성향을 보이는 일본인 중 일부[38]
- 재일 한국인, 재일 중국인 중 대다수
- 2차 대전 이전에 미국으로 이주한 일본계 미국인들[39]
- 나가이 고: 이 사람은 우익 뿐만 아니라, 인간의 폭력성 자체에 대한 혐오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사람이다. 그래서 반인륜적, 반민주주의적 사상을 가진 자들을 서슴없이 깐다. 그의 대표작인 데빌맨이나 인기작 중 하나인 파렴치 학원이 대표적이다.
- 나카타 죠지: 본인 트위터에서 자민당이 추구하려는 개헌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였다. 해당 트윗은 카도와키 마이가 리트윗 하였다.
- 노나카 히로무: 자민당 소속의 정치인으로, 당의 특성 상 보기 드문 대표적인 친한파 정치인이자, 좌파 성향 정치인이었다[40] . 한국을 포함한 여러 전범 피해국들에게 지속적인 사과와 화해를 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했고, 그래서 2018년에 눈을 감는 순간까지 극우에 대해 격하게 반대하였다. 이는 그 자신이 일본 사회의 전통적인 피차별계층인 부라쿠민 출신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가뜩이나 극우들에게 차별받는 계층의 사람이 우익에게 동조해봤자 차별만 더 심하게 받을 뿐이라서 그렇다[41] .
- 리테라(언론사): 다른 언론사들이 친 아베, 친 우익적 성향을 보일 때 이 언론사는 진짜 대범하게도 아베와 우익을 향해 촌철살인으로 비판을 하며, 한국을 옹호하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또한 같은 극좌 언론사인 일간 겐다이와는 계정을 팔로우 하고 있다.
- 마루야마 마사오: 정치학자다. 어느 정도 동양에 대해 까는 경향이 있었던 헤겔의 사상에 큰 영향을 받아서, 군국주의가 일본을 망쳤다면서 눈을 감는 순간까지 신랄하게 비판하고, 일본 내 극우들을 씹어댄 사람이다.
- 마치야마 토모히로 : 영화평론가이자, 아버지가 한국인인 하프 코리안이다. 위안부 망언을 한 사다모토 요시유키와 고레에다 히로카즈를 조롱하는 우익들, 재일한국인들에 대한 편견을 불러일으킬수 있는 헛소리를 내뱉은 미우라 류레이등에게 강도높은 비판을 하는걸로 유명하다. 애초에 이 인물은 일본 극우들에게 적대감을 품고 있기 때문에 넷 우익들에게 인신공격을 자주 당한다.
- 무라야마 도미이치: 일본사회당 소속의 전(前) 일본 총리. 자민당과의 연정을 통해서 집권한 1995년 8월 15일 일본의 전쟁범죄와 식민지 지배에 대해 공식적인 사과를 담은 무라야마 담화를 발표하였다. 이 무라야마 담화는 비단 무라야마 한명의 개인적인 견해가 아니라 내각회의의 의결을 거친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발표로 그 이후 현재까지 취임한 모든 일본 총리는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한다는 공식견해를 유지하고 있다. 무라야마 도이치의 이 진솔한 사과로 한때 한일관계에 상당한 훈풍이 불었다. 무라야마는 총리 퇴임 이후에도 현재까지 일본 사회의 우경화 경향을 계속 비판하면서, 진솔한 사과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 무라카미 하루키: 일본의 한 세대를 풍미한 작가로 대접받는 소설가. 이 사람은 비단 극우뿐만 아니라, 전체주의에 근거해서 악행을 벌이는 것 자체를 싫어한다. 쉽게 말하면, 떼로 몰려다니면서 나쁜 짓하는 걸 싫어한다는 뜻이다. 당연히 하루키가 싫어하는 '나쁜 짓'에 지금의 일본 정부의 행보도 포함되어 있다.[42] 한 가지 사례로, 일본의 극우 단체인 마르코폴로의 후원 하에 몽골 여행을 간 바 있었는데[43] , 거기서 할힌골 전투에서 소련-몽골 연합군이 일본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것을 기리는 승전비를 보고서 '일본 정부는 할힌골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거짓말하면서도 이걸 노몬한 사건이라고 부르면서 작은 사건인양 축소하고 있다'고 비웃는 발언을 해서 이 여행을 후원해준 마르코폴로 측과 극우들을 대노하게 만든 바 있다. 또 무라카미 하루키는 일본군 위안부같은 자국의 전쟁범죄에 대해서 피해를 입은 나라들이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사과해야 한다는 매우 개념찬 발언을 해서 극우들의 암살 협박을 받기도 했었다.
- 미야자키 하야오: 한국에서 바람이분다 때문에 극우 논란이 일어난 것과는 정반대로 극우를 가열차게 깐다. 동시에 반전주의 성향도 있어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모노노케 히메, 천공의 성 라퓨타 등에서 이러한 자신의 성향이 강렬하게 반영되어 있다.
- 미즈시마 세이지: 일본의 애니메이션 감독. 좌파주의, 반전주의 성향을 아낌없이 드러내고 있다. 밑의 리스트에 나와있는 작품들 중의 다수 (UN-GO, 콘크리트 레볼루티오 초인환상)을 제작하였으며, 강철의 연금술사 이나 건담 OO 등에서도 전쟁의 허무함과 평화에 대한 갈망, 다른 자들에 대한 이해에 대한 메시지가 다수 삽입되어 있다. 일본 넷우익 계열 오덕들이 대단히 싫어하는 인물이며, 특히 UN-GO를 제작할 당시에는 테러 협박까지 당할 정도였다.
- 미즈키 시게루: 게게게의 키타로의 원작자. 일본군에 징집되었을 당시의 경험들을 만화로 그렸으며, 그의 원작을 계승한 게게게의 키타로 6기에서는 일본의 침략에 대한 고발이 잘 드러난다.
- 사잔 올 스타즈: 일본의 국민 록 밴드.[44]
- 사카모토 류이치: 일본 뮤지션들 중에서도 특히나 좌파 성향이 두드러지는 사람이라서, 아베 신조가 2015년에 평화 헌법 개정을 시도하자, "일본의 헌법과 민주주의를 수호하자."[45] 며 국회의사당 앞에서 시위를 하기도 했다. 2017년 6월 6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국과 일본이 여권이 없이 왕래가 자유로워지기를 희망한다."고 피력했다. 사카모토 류이치 "한국과 일본, 작은 EU처럼 됐으면."
- 사토 켄지: '일본은 우경화로 인해 속국이 될 것이다.' 라는 책을 쓴 작가로서 우익 비판적 성향 및 아시아 유화주의로 유명한 성향의 인물이다.[46]
- 쓰루넨 마루테이: 핀란드 출신이지만, 귀화했으니 여기서 언급한다. 일본이 좋아서 일본으로 귀화까지 한 전형적인 일빠이지만, 일본의 우경화까지는 찬동하지 않아서 극우들을 대차게 씹은 바 있다.[47]
- 야마모토 타로: 2008년 일본의 한 방송에서 독도를 한국에게 돌려줘야 한다고까지 주장한 배우. 2011년 후쿠시마 원전사고 후 반핵 운동가로 활동했으며 2013년 '참의원'에 당선되어 현재 일본 생활의 당 대표가 되었다. 정치에 입문한 뒤 줄기차게 전쟁 반대와 일본 안보법 반대를 외치고 있다.# 다만 이 사람의 말은 걸러들을 필요는 있다. 야마모토 타로는 극렬 친중주의자로 분류하는 의견도 있어 만일 중국이 똑같은 행보를 보인다 해도 똑같이 쓴소리를 할 지는 미지수. 그의 자국의 우경화 반대가 그의 친중적인 성향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라는 지적이 같은 자국 내 반(反)극우주의자들 사이에서도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48] . 하지만 현재 레이와 신센구미의 당수로 진보세력 내에서 진정성 있는 행보로 큰 신뢰도를 얻고 있고, 우경화 세력에 대항해 정치대형을 바꾸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 야스히코 요시카즈: 무지개빛 트로츠키, 하늘의 혈맥, 왕도의 개 등의 역사 만화로 유명한 만화가이다. 범아시아주의의 열렬한 지지자이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 일본이 과거 한국, 중국 등에 저지른 잘못들을 적극 사죄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49] 그가 자국 내 극우들을 열렬히 반대하고 자국의 부끄러운 흑역사를 사정없이 까발리는 것은 이와도 관련이 깊다.
- 오시이 마모루: 견랑전설이나 기동경찰 패트레이버 극장판2을 보면 일본의 우경화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공각기동대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다만, 이 사람은 너무 반대로 가서 전공투를 미화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 오에 겐자부로: 극우를 가열차게 깔 뿐만 아니라, 일본 공화주의 운동의 열렬한 지지자여서 천황 제도 자체를 까기도 한다. 오죽하면 그가 1994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할 때도 스웨덴 국왕이 시상식장에 나와서 상을 수여한다는 사실에 불쾌해 하면서, "나는 스웨덴 국민들이 주는 상을 받는다."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 와타나베 신이치로: 잔향의 테러의 감독
- 우에무라 타카시: 아사히 신문의 전 기자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대대적으로 알리고, 위안부 피해자들의 배상과 명예회복을 위해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 유키노 사츠키
- 이와이 슌지: 영화 러브레터#s-2의 감독으로 알려진 그 사람 맞다. 트위터를 통해 센가쿠 열도 문제에 대해서 일본의 우익과 일본 정부를 깐적이 있다.#
- 일간 겐다이: 상술한 극좌 친한파 언론사인 리테라와는 계정을 팔로우한 사이이며, 다른 언론사들이 친 우익 성향을 보일 때 이 언론사 또한 대범하게도 우익과 혐한을 팩트폭력으로 비판하고 있다.
- 일본 황실[51]
- 나루히토: 아키히토 상황과 미치코 상황후의 큰아들이자, 현재 일본의 천황.
- 미치코 황후
- 아키히토: 前 일본의 천황: 일평생 야스쿠니 신사에 발도 안 들인 것은 물론이고, 해외 순방 도중 (일본군에 의한) 희생자의 넋을 기리는 추도비에 꼭 인사를 했으며[50] 이 사람은 일본군이 태평양 전쟁에서 얼마나 뻘짓을 했으며, 동시에 얼마나 미친짓을 많이 했는지 두 눈으로 직접 본 사람이다. 당시 아키히토는 초등학생이었던 자신의 시야보다도 더 수준낮은 작전을 짜고서는 좋다고 박수치는 수많은 똥별들에게 "그냥 병력을 소모하는 것에 불과한 것 아닌가?"라고 팩폭을 날린 적이 있었던 만큼 일본의 우경화에 단호히 반대한다. 또, 현 아베 신조의 '덴노 헤이카 반자이' 가 허울일 뿐, 실제로는 천황을 앞세워 자기 정권의 장기화만 노리고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더욱 우경화에 반대하는 것도 있다.
- : 극우를 반대하는지의 여부가 애매해서 취소선을 친 채로 기술한다. 일단 그가 극우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 것과는 별개로 본인은 극우에 대해 지지하는 언행을 보인 적이 없으며, 되려 일본의 우경화를 우려하는 발언을 한 적도 있다. 또한 2013년에 도쿄에서 개최된 도쿄국제도서전에서 박경리의 토지의 일본어 번역판을 집어서 읽거나, 조선통신사의 행렬도를 구경하는 모습이 포착되어서 그동안의 극우적 행보가 다 연기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된다.
- 츠쿠다 타카야: 독도가 일본 땅이라는 주장은 다시 검토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까지 한 인물.
- 카리야 테츠: 만화 맛의 달인의 스토리 작가[52] 인 그 사람이다. 자신이 스토리를 담당한 만화 일본인과 천황에서 일본인 입장에서만 아니라 한국인 입장에서도 가히 충공깽스러울 수준으로 천황제와 일본 극우를 무자비하게 물어뜯는다.[53] 비록 카리야 테츠는 현재 호주에 살고 있지만, 아직 일본 국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므로 여기에서 설명한다.
- 카도와키 마이: 나카타 죠지가 올린 아베 내각이 주장하는 개헌에 대한 위험성을 경고하는 글을 리트윗 하였다.
- 코야마 리키야: 평화 헌법 옹호 세력인 9조 모임의 회원이다.
- 쿠로야나기 테츠코: 인기 방송인 겸 평화운동가다. 어린 시절에 제2차 세계 대전을 겪으면서 느낀 고통스러운 기억때문에 지금도 자국의 우경화는 동조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에 대해 열렬히 반대한다. 그녀가 쓴 수필인 창가의 토토에 이런 평화주의적인 생각이 그대로 담겨있다.
- 타카하시 카즈키: 만화 유희왕을 만들어낸 그 사람이다. 아베 신조 정권을 대놓고 매국 정권이라고 비난하는 등, 반우익 성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 하토야마 유키오: 일본 민주당 소속의 전(前) 일본 총리. 우리나라의 서대문형무소를 방문하여 유관순 열사가 복역하던 방에 헌화하고는 추모비에 참배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국이 한국을 식민지배한 것에 대해 사과하고 도게자까지 했다![54][55][56] 당연히 한국인들에게 까임방지권을 얻었다.
- 간 나오토: 일본 민주당 소속의 전 총리. 담화를 통해 식민지 지배의 강제성을 인정했고,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하는 정치인들을 열렬히 비판하였다.
- 후지타 사유리[57] : 한국에 거주하는 방송인.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져서, 일본인으로서 자국의 전쟁 범죄에 대해 사죄한다는 말을 하거나, 위안부 피해자 지원 단체에 거액의 돈을 기부하기도 했다. 거기다가 이런 자신에 대해 재일이라며 디스하는 넷 우익들에게 "그게 뭐 어때서?"라는 뉘앙스로 역으로 일침을 날렸다[58] .
- 히로이 오지: 레드 엔터테인먼트 회장이자 게임 디렉터. 그의 대표작인 사쿠라 대전 시리즈부터가 반군국주의 성향이 강하며, "일본은 과거사를 반성하고 우경화를 경계해야 한다. 사쿠라 대전은 철저한 반전(反戦)게임이다." 라고 인터뷰하여 철저한 반군국주의 노선임을 밝혔다. 아쉬운 점은 사쿠라 대전의 배경이 한국에겐 민감한 1920년대인 데다가 반군국주의 메시지가 가장 강력한 사쿠라 대전 2가 한국에 정발되지 않아서 어필되기 어려웠다.[59]
8.2. 우익 비판적 메세지를 담은 작품
- 도라에몽: 일단 작가인 후지코 F. 후지오부터가 반전성향을 강력하게 띠는 인물이며, 작중 일본제국주의나 일본의 우경화를 비판하는 대목이 자주 나온다. 극장판 양철의 미궁 편에서는 대놓고 욱일기를 풍자하는 연출이 나왔고, '코끼리와 아저씨' 편에서는 주인공인 도라에몽과 노진구가 전쟁에서 어차피 일본 제국이 패배할거라며 일본군 장교한테 팩트폭력을 날리다가 죽을 뻔한 장면도 있다[60] .
- 공각기동대 STAND ALONE COMPLEX: 작품 내의 일본 정부가 헌법 9조를 무력화하려 시도하고 국외 '진출'을 호시탐탐 노리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작품 자체는 이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견지하고 있다. 참고로 1기는 정치적 요소보다는 철학적, 사회적 요소에 더 집중한반면 위에서도 언급된 오시이 마모루가 각본에 참가한 2기는 대놓고 일본의 재무장과 우경화, 군국주의화를 다루는 등 정치적 발언의 수위가 훨씬 높다.
- 동쪽의 에덴: 내용도 내용이지만, 바로 위 작품의 20년 전이 배경이다.
- 린의 날개 애니판
- 맛의 달인
- 맨발의 겐: 군국주의를 비판한 만화이다.
- 메탈슬러그 시리즈: 모덴군부터가 독일 국방군을 본따 만든 존재이고, 특히 메탈슬러그 3에서는 일본군 패잔병 잔당을 적으로 등장시키기도 하였다. 추축국 세력을 동시에 희화화시키고 우스꽝스럽게 묘사하여 비판하는 작품.
- 바람의 검심
- 사쿠라 대전 시리즈: 상단에 언급된 히로이 오지의 작품. 일본 제국 시절을 미화하냐는 의혹과는 상반되게, 오히려 제국주의를 사정없이 비판한다. 2편의 주제도 부제에서 드러나듯이 반전이며, 최종 보스는 아예 초강경한 극우 군인이다.
- 왕도의 개
- 일본인과 천황: 위의 맛의 달인을 만든 카리야 테츠가 만든 만화다. 맛의 달인 자체는 요리에 대한 만화라서 우익에 대한 비판은 지나가는 얘기 수준으로 나오는데 반해, 이 만화는 대놓고 우익을 씹는 작품이다. 만화의 주제도 일본의 군주제를 노골적으로 비판한 것과 천황의 존재를 악용하여 자기들의 억지 주장을 정당화한 극우들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하는 것이다[61] . 때문에 이 만화의 작가인 카리야 테츠는 우익들에게 살해 협박까지 받았으며, 때문에 호주로 이민을 간 뒤에는 귀국을 거부하는 실정이다[62] .
- 일본침몰: 아예 원작자인 코마츠 사쿄부터가 과거 일본 공산당의 당원으로서 활동한 이력이 있는 좌익 중의 좌익이며, 그가 쓴 일본침몰의 내용 중에는 "이것은 한국을 포함한 주변국들에게 저지른 만행에 대한 인과응보다!"라는 대사까지 포함되어 있다.
- 잔향의 테러: 이쪽은 우익만 까는게 아니라 아베 신조 정권까지 까는 등 엄청 강도높고 노골적이게 비판을 가하며 패전국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주제에 발버둥 친다거나 헌법 개정 등 일본이 국가적으로 저지르는 만행들도 깐다.
- 조커 게임 - 과거 일제시대 군인들을 비꼬거나 풍자하는 스토리를 가지고있다. 그외에도 상당히 강도높은 비판이 많다.
- 제독의 결단: 코에이에서[63] 내놓은 태평양 전쟁기의 일본군 해군이 전쟁을 수행하던 것을 고증하는 게임인데, 문제는 게임 자체가 극우들을 게거품물고 쓰러지게 만드는 요소들을 엄청나게 포함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거나,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 및[64] 이 와중에 등장하는 일본군 육군의 병신짓이 잘 고증되어있는 등(...), 당시의 일본군과 이들을 옹호하는 극우들을 한큐에 까는 작품이다.
- 지금, 거기에 있는 나: 지금, 거기에 있는 나정부와 권력세력에 의하여 철저하게 세계의 인권과 생존권을 유린하는 전개가 도드라지도록 나오는데, 이 모습은 전체적인 주제의식으로 나타나 더 나아가서는 충격적인 참상을 보여주며, 교훈적인 느낌을 받을 정도이다. 독재, 전체주의, 제국주의, 인권유린, 소년병, 카미카제, 위안부 등의 소재가 적나라하게 나오는데, 일본 제국시절이라고 말을 안했을 뿐이지 뭔가 찔리는 극우세력에 의하여 많은 욕을 먹은 작품이기도 하다.
- 진격의 거인 - 작품 초기 이사야마 하지메작가의 트위터 우익 발언 의혹 등으로 우익 논란이 불거진 작품이나, 최근의 진행분들을 보면 극우라 보기엔 굉장히 어렵다. 전쟁 과정에서 희생당하는 병사 개개인의 감정과 고통을 현실적으로 조명하며, 97화에서 테오 마가트의 대사를 통해 군국주의를 직접적으로 비판한다. 예거파와 그들의 선동에 지배되는 군중의 모습을 통해 일본의 우경화 문제를 꼬집기도 하며, 지크 예거의 과거를 다룬 편에서는 세뇌 교육과 왜곡 교육의 폐해와 문제점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특히 지크 예거, 마레 제국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90화 전후로 더욱 심화되었다. 심지어 최근 화에는 막나가는 주인공의 행동이 다른 인물들의 입을 빌려 너무 심하다고 할 정도. 작품 자체에 표현의 방법이 극단적인 부분이 많고 그러한 극단적 연출을 스토리가 지남에 따라 반전을 넣어 뒤집는 형국이라 단편적인 장면만 본다면 우익으로 오인할 수 있으나 추후 우익적인 요소들이 완전히 뒤집어지고 전쟁과 집단주의의 어두운 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등 전체적으론 반극우적 성향에 가깝다. 이사야마 하지메작가의 트위터 논란 역시도 트위터 계정을 작가의 계정으로 판단할 수 있는 증거가 없는 추측성 루머이기에 해당 트위터 논란으로 매도하는 건 옳지 않다.[65][66]
- 최종병기 그녀: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는데도 옥쇄를 다짐하겠다는 부사관에게 조용히 사랑하는 사람 곁으로 돌아가라는 치세의 대사만 봐도 드러난다. 우익 뿐만 아니라 전쟁 자체를 반대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 콘크리트 레볼루티오 초인환상
- - 작품 내 악으로 묘사되는 '시빌라 시스템'의 정체가 마치 현재 일본 정부와 비슷하게 풍자되어 묘사된다. 다만 직접적인 우익 언급은 거의 없어 애매하다.
- UN-GO - 이 작품은 천황까지 부정할 정도로 일본에 대해 상당히 노골적인 디스를 한 작품.
9. 관련 문서
[1] 한국은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거치면서 기득권이 많이 사라진 편이다. 그에 비해 일본은 제2차 세계 대전 때도 본토는 침략당한 적이 없을 뿐더러, 관료가 필요했던 미국에 의해 전범재판에서 대부분 실형을 면했기 때문에 구시대의 기득권들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한국과 일본이 공유하는 많은 악습이나, 일본의 부락민 차별 문제(部落問題)와 같은 부조리도 이에 기인하는 면이 크다.[2] 특히 평화헌법을 중시하는 '비둘기파'들이 많이 빠져나갔다.[3] 이런 것들을 데코토라라고도 한다.[4] 가두 우익 중에는 야쿠자가 있다.[5] 가두 우익이나 정통 우익들도 한국이나 중국, 미국 등을 싫어하기는 하지만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대놓고 그러지는 않는다. 오히려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한국과 손잡는 방법도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있다. 역사인식 문제 때문에 번번히 기회를 놓치곤 하지만, 한국과 손잡지 않으면 사실상 절대로 상대하지 못할 정도로 중국이 커버렸기 때문에 여전히 포기는 하지 않는다. 때문에 양식있는(?) 일본 우익들은 역사인식 문제만 제외하면 한국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려고 해서 이런 내막을 모르는 무식한 넷 우익들에게 재일이라고 욕먹을 정도다.[6] 넷 우익 문서를 참조하면 알겠지만 현실의 넷 우익들은 그들 특유의 행동방식 때문에 일반인들은 물론이고 같은 우익 세력으로부터도 기피되는 대상이다.[7] 실제로 아직까지 남아있는 2차 대전 관련 조항 중 하나에 지난 추축국 출신의 국가가 조금이라도 다시 세계의 안전을 위협하는 조짐이 보이면 선전포고 없이 공격이 가능하다는 내용이 있다. (적국조항)[8] 독일의 사례에 대입해보면 일본 제국 당시의 일본은 1차 세계 대전 당시까지의 독일 제국과, 1947년 이후부터 2차 아베 내각 이전까지의 일본은 바이마르 공화국 당시의 독일과 비슷하고 2차 아베 내각 이후의 일본은 대공황 이후 혼란에 빠져서 나치가 점점 세력을 키워가던 1930년대의 독일과 유사하다.[9] 스가 요시히데도 자민당 내의 강경파로 여겨지는데 그런 사람까지도 학을 떼게 만들 정도로 극우라는 것이다.[10] 러시아는 조금 다르긴 하다. 러일전쟁과 적백내전 때 공격당한 것을 빼면 소련이 할힌골 전투, 만주 작전 등으로 일본을 일방적으로 발라버렸기 때문. 그리고 위 사진에서도 나와 있듯이 쿠릴 열도 분쟁으로 대립하는 일본이 한국과 더불어 대표적인 친미국가 중 하나이기 때문에 태평양에서 일본 세력이 미국과 더불어 공고해지는 것을 싫어하는 면이 더 강하다.[11] 일명 재특회[12]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조지프 나이는 단순한 대학 교수가 아니라 국제정치학계의 세계적인 거물학자로 미국 정부의 대외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이다. 빌 클린턴 대통령 시절에는 직접 행정부에 참여해서 냉전 종식 이후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을 입안하였다. 주한미군과 주일미군 도합 10만 명을 핵심으로 한국과 일본을 미국의 하위 군사동맹국으로 묶어놓고 이 바탕위에서 중국의 해양 진출을 견제하면서 아시아에서 미국의 패권을 유지한다는 '''나이 이니셔티브'''는 지금까지도 미국 정부의 기본 정책이다. 원래 냉전 종식 이후 미국의 아버지 부시 대통령과 공화당 정권은 재정적자를 이유로 주한미군 전면 철수, 주일미군 대폭 축소로 방향을 정했으나, 클린턴 집권 이후 조지프 나이는 장래에 미국의 유일한 경쟁자가 될만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 재정적자를 감수하고서라도 동아시아 지역에 반드시 거대한 미군을 유지해야 한다고 역설했다.[13] 식민지 문서에 들어가보면 알겠지만 식민지를 확보한 초반이라면 몰라도 후반에는 오히려 식민지를 운영하는데 드는 유지비가 식민지를 통해 얻는 소득보다 한참을 웃돌았으며, 식민지인들의 저항운동을 진압하거나, 자국의 인재를 식민지에 파견하는 등 식민지 관리하다가 오히려 본국 관리가 소홀해지는 등의 문제로 국가 역량을 감소시키는 원인 중 하나가 식민지다. 또, 당시 일본군 군국주의로 미쳐돌아가던 시기였는데 군국주의 문서를 보면 알다시피 군국주의는 생산활동 없이 소비만 하는 군을 국가 최우선으로 여긴다는 점으로 인해 끊임없이 국가 역량이 감소하며, 이 역량 감소를 막기 위해 끊임없이 국민을 전쟁터로 내몰아야 한다는 문제가 있다. 이로 인해 일본 제국 당시의 일본은 그야말로 껍데기 뿐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메이지 유신과 1차 세계대전으로 쌓은 근대화의 역량을 전부 날려먹었다. 그리고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이 터지고 나서야 일본은 2차 세계대전으로 날려먹은 국가 역량을 다시 쌓아올릴 수 있었다.[14] 그러나, 당시는 전쟁이 끝난지 얼마 안 되어서 아직까지 전쟁이 어떻게 진행되었으며, 당시 일본군이 얼마나 미쳐돌아갔는지를 국민들이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는 점도 있었고, 고도 경제 성장이 이루어지던 시기였기에 잃어버린 20년이 지속되는 지금처럼 국민들의 불만이 쌓일 일이 그닥 없었으며, 냉전의 영향으로 당시 일본에게 있어 한국은 중국과 소련, 북한으로부터 지켜줘야 하는 힘없는 동생 정도의 인식이 강했다는 점도 염두해야 한다. 실제로 일본의 우경화가 지속되고 독도 도발이 본격화되던 시기는 잃어버린 10년이 지속되어 잃어버린 20년이 되면서 '이러다 일본이 영영 일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이 일본인들 사이에서 크게 자리잡던 시기와 일치한다. 거기다 한국이 한강의 기적이라는, 민주화와 경제성장을 동시에 이룩하는 전대미문의 성장을 보여주고,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GNP의 역전이 일어나고, 삼성이 소니를 잡는 등 한국이 일본을 추월하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자, 일본인들의 불안감은 더욱 가중되었고, 이로 인해 우경화가 지속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15] 재특회는 인터넷에서 형성된 극단적인 성향의 세력들이 집단화된 단체로, 다른 우익단체들과 비교해봤을 때 구체화된 단체의 철학이나 추구하는 이념을 찾아보기 힘들고, 단지 혐한, 극우와 같은 정치적 레토릭만을 추종한다는 특징을 가진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의 우익단체들은 이들의 행동을 불쾌하게 여기면서도 이들의 활동을 묵인한 채 일본의 우경화라는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만 써먹고 있다. 실제로 최근들어 아베 내각은 헤이트스피치와 같은 극단적 차별행위에 대해 제약을 거는 등 자신들이 원하는 선에서만 행동하기를 원하는 경향을 보인다.[16] 재특회의 창립자인 사쿠라이 마코토가 의장자리에서 물러나고 개인활동을 하게 된 것도 넷 우익 단체 내부에서의 솎아내기라는 설이 있다. 본인은 재특회를 위해서 물러난 것이라고 말하고는 있지만.[17] 넷 우익 단체들은 대부분 인터넷을 통해 자연발생했지만, 실제 구성원들이 대부분 사회적으로 제대로 된 일거리도 없는 빈곤층이 많다보니 외부활동을 위한 자금에 매우 쪼달리는 경우가 많다. 이들 조직의 활동에 기존 우익단체들이 자금을 지원하고, 자신들 단체의 인사들을 파견하여 조종하고 있는 정황이 최근에 매우 많이 발견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카츠라다 사토시이다.[18] 이들 조직들 중 가장 유명한 사례로는 대일본애국당이 있는데, 그 유명한 아사누마 이네지로 암살사건의 주범이 바로 이 대일본애국당 소속이었다.[19] 애초에 일본 내 혐한 여론과 극우사상의 결합은 주로 신 우익이이 대두되기 시작한 1990~2000년대부터 크게 성장하였고, 이전까지 일본 내 극우사상은 반공과 노동운동 탄압 등이 중심이었다.[20] 흔히 차량을 동원한 가두연설 등이 이들의 주요 홍보 전략 중 하나이다.[21] 임협계 우익의 폭력 활동은 1990년대 이후 폭력단대책법 등 폭력단 자체에 대한 일본 정부의 본격적인 진압이 시작되면서 급감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까지 일본 정치권에서는 공공연하게 이들의 활동을 지원해 도구로 써먹었지만, 폭력단들이 위험할 정도로 사고를 많이 쳐대자 결국 손절하고 본격적으로 진압하면서 이들의 영향력은 급속도로 쇠퇴하게 되고 그 영역을 재특회 등의 신우익이 차지하게 된다. 실제로 당시 임협계 우익단체에서 활동했던 이들 중에는 폭력단의 지원이 끊기자 신우익단체들로 갈아탄 이들도 있다.[22] 미국과 일본의 군사동맹 관계를 규정한 미-일 안보조약의 체결을 둘러싼 사회적 충돌. 극좌부터 극우까지 일본 내의 모든 정치세력, 정당, 언론, 시민사회단체, 학생운동, 노동운동이 양쪽으로 쪼개져서 격돌했다.[23] 경제단체연합회. 일본 대기업들의 협력조직으로 일본판 전경련. 사실 삼성 이병철 회장이 일본 경단련을 보고 본따서 만든 게 현재 한국의 전경련이다.[24] 대기업들이 모금한 막대한 정치자금이 경단련을 통해서 자민당에 전달되고, 자민당은 반대급부로 철저하게 대기업에 유리한 정책을 법안으로 만들고, 이런 법안을 고시 출신의 행정관료들이 안정적으로 집행하는 게 자민당 38년 일당통치, 이른바 55년 체제를 가능케 한 철의 삼각동맹(자민당-경단련-관료그룹)이었다. 즉 경단련은 일본 자민당의 핵심인 전통우익 세력의 가장 중요한 정치기반.[25] 추가로 공안의 집중마크를 당한 것도 크다.[26] 다만 신사본청의 경우 실질적으로는 단체 자체가 힘을 가진게 아닌 메이지신궁이나 이세신궁같은 하위의 신사들이 실제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것에 가깝다. 신사본청은 어디까지나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들 신사들이 서로 교류하기위한 연락단체의 성격이 강하다.[27] 이들은 심지어 야스쿠니 신사를 국영으로 바꾸는 로비도 시도한 바 있다. 다만 이건 주변국가들의 반발이 워낙 심할 수 밖에 없는 문제로 정치인들도 리스크를 회피하기 위해 이에 동조하기를 꺼려했고, 결국 실패했지만, 종교우익은 이 실패를 바탕으로 수상이나 정치인들을 적극적으로 야스쿠니에 참배시키는 방향으로 전략을 전환하였다. 실제로 일본 정치권내에 있는 '다 같이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모임'이라는 이름의 사모임을 만든 것도 바로 종교우익단체들이다.[28]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 이후 좌파적 환경운동의 노선이 아닌 일본의 공동체주의를 중심으로 한 우익들이 모여서 시작한 반핵 데모.[29] ##[30] 다만 이 사람은 온건 우파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문서 참고. 그는 취임기 당시에는 한국에서 욕을 엄청 먹었지만 현재는 아베 신조라는 더한 인간이 나오면서 어느 정도 재평가를 받고 있다.[31] 헌법개정과 주변국, 특히 한국과의 갈등을 인위적으로 극대화하여 동해와 독도를 분쟁지역화시키고 일본 재무장을 실현시키고자 했다.[32] 혐한은 아니었지만, 한국을 자국의 제국주의 정책의 희생양으로 삼거나, 일본이 우경화되는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다.[33] 일본의 경우 대체적으로 정치권 등에서 강하게 우경화를 주장하면 언론에서 이성을 되찾자는 식으로 톤을 다운시키기도 한다.[34] 옆나라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박근혜 퇴진 운동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마침 아베 신조 퇴진 운동이 벌어진 시기도 박근혜 퇴진 운동이 끝난 직후였다.[35] 사실 이건 우리나라에서 드러나는 20대 성별 간 정치 스탠스 차이와 매우 흡사한 양상을 띤다.[36] 오히려 혐한은 아직까지는 중장년층들 사이에서 더 많이 보이는 편이다. 당장 극우 성향의 네임드 혐한 인사인 스즈키 히로유키나 타카다 마코토도 아주 젊은 사람이라고 보기엔 나이가 좀 있는 이들로, 7, 8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냈던 이들이며, 정치권에서 극우 정당을 이끄는 이들도 대부분은 중창년층 이상인 경우가 대다수다. 또, 과거 전공투 등을 지지하던 좌파 성향 인사들은 한국의 우파들이 자민당을 포함한 일본 내 우익 인사들과 교류나 친분이 깊은 것을 지적하는 경우도 많은데, 이 때문에 좌파이면서도 동시에 혐한이기까지 한 타루미 토타같은 케이스까지 나왔다.[37] 일본의 역사교육은 한국에서 일어난 한국사 국정화 사태를 뺨칠 정도로 한 술 더 뜨는 막장이 된 상황이다. 자국 정부가 벌이는 역사왜곡이 반영된 내용이 버젓이 교과서에 실려서 학생들에게 교육되고 있으며, 이것이 자국민에 대한 일종의 우민화 정책으로 이어져서 우경화를 더욱 부추기고 있는 편이다. 물론, 이런 저질 역사교육을 받은 이들도 일단 학문의 자유가 충분히 보장되는 일본에서 사학과에 진학하기라도 하면, 그제서야 왜곡이 없는 올바른 역사를 배우게 되므로 기존에 가지고 있던 혐한 성향을 거두게 된다. 그런데 모든 이들이 사학과로 가는 건 아닌지라서, 대부분은 반한과 친한 사이를 오가는 애매한 위치에 서게 되고, 일부는 아예 혐한초딩이 되어 양심따위는 엿바꿔먹는 존재로 타락하게 된다.[38] 왜 전부가 아니냐면, 친한파나 친중파인 일본인의 상당수가 연예인이기 때문이다. 우경화가 극심해진 지금의 일본 사회에서 섣불리 입바른 소리를 했다가는 스스로의 커리어가 박살나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경화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소설가, 영화 감독 등의 예술가나, 정치인들이다.[39] 이들은 일본의 우경화와 군국주의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 진주만 공습을 기점으로 미국과 일본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일본계라는 이유로 자국에서 차별받기도 했으며, 그 차별적 시선을 무마하기 위해서 일본 제국을 타도한다는 명분 하에 자원입대까지 했던 사람들이 많다. 그러니 위안부 문제나 우경화 문제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수 밖에...[40] 다만 노나카 히로무가 정계에 몸담던 시절의 자민당은 포괄정당으로서의 성격이 강했음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노나카와 똑같은 성향인 오부치 게이조도 이 시기에 수상으로 재직했다.[41] 같은 이유에서 혐한 인사로 유명했던 부라쿠민 출신 정치인인 하시모토 도루도 현재는 혐한 성향을 거두고, 친한까지는 아니더라도 한국의 편을 들어주는 모습을 제법 보여주었다.[42] 무라카미 하루키는 소설 1Q84에서 극좌 또한 깐 바 있다. 작중에서 '선구'라는 사이비 종교 단체는 본래 극좌 계열의 자연친화주의적 공동체였다가 종교 법인화하면서 이상한 방향으로 변질된 것으로 나오며, 그 선구의 자매 단체였던 '여명' 또한 아사마 산장 사건을 모티브로 한 가상의 사건인 '모토스 산장 사건'의 주범으로 등장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눈에는 극과 극은 통하는 것으로 보이는 듯하다.[43] 오해하지 말자. 이 사람은 누가 공짜로 여행을 보내준다면 흔쾌히 가는 것이고, 여행비를 지원해주는 사람이 극우이건, 극좌이건 간에 그딴 거 따지지 않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이런 후원자의 의도와 반대되는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평소 발언을 보면, 아나키즘 성향의 좌파임을 알 수 있다.[44] 일본에서 국민밴드급의 위상을 지닌 밴드이다. 이 사람들은 친한파의 대명사로 불리는 초난강을 뺨칠 정도로 친한의 끝장을 보여주는 이들이다.[45] 평화 헌법을 개정하려는 자민당의 속내도 문제지만, 평화 헌법의 개정을 위해 자위대에게 폭넓은 권한을 부여하려는 개정안을 통과시킬 때의 과정 또한 옆 동네의 날치기 통과를 쌈싸먹는 병크 투성이였다.[46] 한때는 혐한이었으나 최근에는 아베 반대파로 전향하게 된 애니메이터 히라마츠 타다시가 이 자의 팬이다. 특히, 히라마츠는 이 자의 팬이 되면서부터 한일 경제 전쟁에 대해 일본이 잘못했다며 철저하게 한국을 옹호하고 있으며, 한국과 전쟁을 해서 독도를 빼앗자고 주장한 마루야마 호다카 의원을 디스하기도 하였다.[47] 애초에 이 사람은 좌파 성향이니 극우라면 가루가 되도록 까고도 남을 사람이다.[48] 생각해보자. 친중 성향이라서 자국의 군국주의화에 반대하던 사람이 중국의 팽창주의 정책에 반대하리라고 볼 수 있겠는가? 야마모토 다로라는 인물을 냉정하게 평가하면, 한국으로 치면 종북주의자로서 친박을 까고 있는 격이다. 물론, 그의 친중 성향이 이 정도로 과격하지는 않지만, 분명 자국의 우경화를 뺨치는 시진핑의 독재와 티베트 및 위구르에 대한 박해와 강제적인 동화정책, 그리고 동북아시아와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거의 대부분을 자국의 위성국으로 삼으려는 계획인 A2·AD 계획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분명하다.[49] 이 점에서 아시아주의를 주장했던 안중근이나, 쑨원이 그의 작품에서 매우 긍정적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반대로 아시아주의를 빙자해서 대동아 공영권이라는 이름으로 자국의 침략 야욕을 미화한 도조 히데키 등은 그야말로 음흉한 악당으로 묘사되고 있다. 심지어는 자국 내에서 존경의 대상이 되는 이토 히로부미나 무츠 무네미츠 같은 사람들도 제국주의자라는 점 때문에 철저한 악인으로 묘사된다.[50] 이명박 전 대통령이 "아키히토 일왕이 한국을 방문하기 전에 사과해야 한다."라고 발언했다가 일본 국민들의 어그로를 끌었을 때에 정작 본인은 "그렇게 할 의향이 있다."라고 말했다는 설이 있는데 이것은 찌라시에 의한 가짜뉴스로 밝혀졌다. 애초에 천황은 국정에 1도 개입할 수 없어 정치 발언을 할 수 없다.[51] 현재의 일본 황실은 일본 정부의 우경화 기조를 매우 안 좋게 보고 있다. 심지어 대한민국 등의 주변국으로부터 극우 성향이라고 알려져 있던 후미히토 황자조차도 일본의 우경화에 대해 우려하는 발언을 했을 정도이다. 그런데 후미히토의 경우, 극우주의자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는데 자세한 건 문서 참고.[52] 흔히 만화가로 알려져 있는데 아니다.[53] 이 사람은 위의 미야자키 하야오나, 사카모토 류이치, 오에 겐자부로급으로 진보 성향이 매우 강한 사람이다. 이렇게나 극우를 노골적으로 씹는 것도 이상한 건 아니다.[54] 도게자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일본인들 사이에서 도게자는 진정으로 사죄의 뜻을 밝힐 때나 하는 것이다. 만화 도박묵시록 카이지에서 달군 철판 위의 사죄랍시고 불판 위에서 도게자를 하는 장면이 나온 걸 생각해보자. 그리고 일본 시대극에서 사죄한다는 말이 나오면 사죄드린다는 사무라이가 할복 자살하는 것이 거의 클리셰화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55] 영화 이치 더 킬러를 보면 카키하라 마사오가 야쿠자 두목들 앞에서 사죄드린다며 자신의 혀 끝을 잘라내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니까 일본인들 사이에서 사죄드린다는 말은 이를 목숨으로 갚을 수도 있다고 말하는 식의 무진장 과격한 발언이다. 하토야마 유키오가 얼마나 강경한 성향을 지녔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56] 다만 오해를 피하기 위해 기재하자면 내각총리대신으로 재직중에 한 것은 아니다. 퇴임 후 방한했을 때의 일.[57] 한국 내에 거주하는 사람이라서 여기에 등재하는게 맞는지에 대해 이론의 여지는 있을 수 있지만, 일본 국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므로 일단 여기에 서술한다.[58] 참고로 후지타 사유리는 재일 한국인이 아니며, 혈통 상으로나, 국적 상으로나 분명한 일본인이다.[59] 문서를 참조하면 알 수 있지만 사쿠라 대전은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했을 경우를 가정한 대체역사물이다.[60] 같은 작가의 다른 작품인 키테레츠 대백과에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문제의 그 장면에서 중일전쟁기의 중국 다롄으로 시간여행을 하던 강기태와 코로스케 일행에게 관동군 병사들이 냅다 총을 갈겼다.[61] 카리야 테츠 본인의 공화주의 성향 때문인지, 천황을 중심으로 한 일본의 군주제를 만악의 근원 취급하고 있으며, 자국의 우경화에 대해서도 이게 다 천황 때문이다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 때문에 실은, 극우들 뿐만 아니라, 좌파면서도 군주제 자체에 대해서는 우호적이거나 중립적으로 보던 일본인들까지 뒤집어지게 만들었다.[62] 카리야 테츠의 호주 이민은 순전히 자녀교육때문이었고, 일본인과 천황은 이민간 뒤에 만든 작품이지만, 호주라는 나라 특유의 진보주의적인 분위기의 영향을 깊게 받은 덕에, 원래부터 있었던 그의 진보적인 성향에 불을 지르게 되었다. 그렇게해서 나온 작품이 바로 일본인과 천황과 맛의 달인이었던 것이다.[63] 삼국지 시리즈로 유명한 코에이맞다.[64] 플레이어가 뭔가를 하려고 하면 육군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엄청 재수가 좋지 않은 이상 열에 아홉은 '육군은 해군의 제안을 반대한다.'며 플레이어가 뭘 하게 두지 않는다.[65] 게다가 문제의 트위터 계정의 식민지 수혜론적 주장을 작품 내에서 자기들이 잘 살려고 발전시켜준게 아니냐며 정면으로 반박하는 장면도 나온다. 트위터 계정이 작가 계정이라 보기엔 여러모로 정황이 맞지 않다.[66] 또한 조선일보와 있었던 인터뷰에서 일본이 우경화하지 않을 것이며, 과거 일본이 주변국에 굉장한 민폐를 끼쳤었다고 발언하였다. 일본의 대표적인 좌파인 마치야마 토모히로를 존경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