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타샤 할린스 살해사건
1. 개요
1991년 3월 16일,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에서 리쿼 스토어를 운영하던 한인 이민자 1세대 두순자가 자신의 가게에서 15세 아프리카계 미국인 소녀 라타샤 할린스(Latasha Harlins)를 리볼버 권총으로 사살한 사건이며 이는 1992년 로스앤젤레스 폭동에서 한인 이민자들[1] 의 상점이 많은 피해를 입는 주 원인이 되었다.
2020년, 미니애폴리스-세인트폴 시위에서 아시아계 미국인의 미국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이라는 주제로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에 기여한 몽족계 미국인 경찰 토우 타오(Tou Thao)가 구설수에 오르며 재조명받고 있다.[2]
2. 역사적 배경
1970~1990년대를 중심으로 다수의 한국인들의 미국 이민이 이루어지기 전, 1950~1960년대 미국에서는 미국 흑인 민권 운동이 대규모로 일어났다. 미국 내 인종 분리, 투표권 제한, KKK의 린치와 박해, 백인 폭동 등의 흑인 차별에 반대하여 마틴 루터 킹을 위시한 평화적 시민 불복종과 맬컴 엑스를 위시한 무장 투쟁 등 온건파와 강경파를 아우르며 저항이 이루어졌고, 이러한 움직임 중에는 아시아인을 포함한 비흑인 유색인종의 연대 또한 존재했다. 일례로, 1969년 흑표당의 창립자인 휴이 뉴턴이 체포되자 이를 반대하며 흑표당원의 옷차림을 하고 "블랙 파워와 연대하는 황화론(yellow peril supports black power)"이라 적힌 팻말을 든 아시아인 시위자의 사진은 그러한 연대를 상징하는 사진으로 유명하며, 해당 문구는 21세기 현재도 Black Lives Matter 운동을 지지하는 아시아계 미국인들에 의해 자주 인용된다. # 이에 1964년 미국 연방 민권법 통과 및 선거권이 보장되며 얼마 뒤 이민국적법(Immigration and Nationality Act of 1965)[3] 이 통과되었다. # 이를 계기로 수많은 아시아인들이 합법적으로 이주할 수 있었고[4] 많은 한국 이민자들이 로스앤젤레스에 정착했으며 한인 타운의 형성과 이민 사회의 성장에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레이건의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인한 저소득층의 확대 및 이란-콘트라 사건으로 인한 미국 사회 내 코카인 범람으로, 1984년 로스앤젤레스에서는 2~7월 사이에 코카인 관련 사건이 도시에서 전례없는 수준으로 폭발했다.[5] # 또한 레이거노믹스로 인한 교도소 민영화로 미국 흑인과 히스패닉계 미국인 초범 및 저소득층 재소자들로부터 범죄자 양성이 급속도로 이루어졌으며 이에 다수의 갱단이 출현 및 확산되었고, 이러한 갱단에 의한 범죄 중에서는 한인을 대상으로 한 범죄도 있었다. 이로 인해 상당수 한국인 업체들은 흑인 손님들을 차별했고 흑인 직원 고용을 거부하기까지 이르게 된다.
이렇게 흑인과 한국인 커뮤니티 사이에서는 긴장의 기류가 흘렀으며, 많은 흑인들이 로스앤젤레스 남중부 지역에서 성장하고 있는 한국 이민자 공동체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 당시 뉴스 보도는 "일부 흑인들은 한국인들을 흑인 사회를 이용하는 상인 계급으로 보고 있다"고 언급했으며, 일부 한인들에 의해 흑인들에게 가해진 인종차별에도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LA 폭동 당시 한인 자경단 중 한 명이었던 이성진에 의하면 그 때 당시 한국 사람들이 주류점을 운영하면서 흑인 상대로 돈을 벌면서도 흑인이나 히스패닉들을 등한시 했으며 인종차별은 한국인들도 많이 했다고 술회했다. #
하지만 그런만큼 같은 유색인종이자 사회적 소수자에 속한다는 점에서 흑인과 한인 커뮤니티 사이에서는 연대도 이루어졌다. 1992년 당시에 LA 타임스에서 일하던 한국계 미국인 존 H. 리의 말에 따르면 그 때 LA 타임스에서는 한국과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을 적대적인 관계로 특징짓는 기사를 게재하고 있었고 그것에 대해 집중보도를 했다고 밝혔다. 리는 이에 대해 불만을 가졌으며 실제로 흑인과 친화적인 한인들도 많았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 두순자의 살인 직후 흑인과 한인 커뮤니티 양측에서 협력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의견이 함께 나왔으며, # '흑한동맹(Black-Korean Alliance)'의 에드워드 장은 "양 공동체간의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 더 이상의 비극을 막기 위한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흑인 주류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이다"라고 밝혔으며, 흑인 교회와 한인 교회 사이에서 추모 예배 또한 이루어졌다. #
즉, 한국인과 흑인 커뮤니티 사이의 민족적, 사회적 갈등이 있었음은 사실이지만 이를 흑백논리적 관점으로 바라보며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한국계 미국인 커뮤니티 사이의 갈등을 집중보도한 기사들이 인종적 갈등을 더 고조시키는 원인이 되어 버린 셈이다.
라타샤 할린스의 살해 13일 전인 1991년 3월 3일, 아프리카계 미국인인 로드니 킹은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집단 구타를 당하게 되고, 이에 대한 흑인 사회의 인종차별에 대한 분노는 극에 달해 있었다.
2.1. 가해자: 두순자
사건 집행 유예 보고서를 준비한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보호 관찰관에 의해 따르면 두순자는 1943년 출생으로, 1976년에 미국에 도착한 한국 태생 미국 시민이었다. 미국에 거주 한 10년 동안 두순자는 의류공장에서 일했으며 그녀의 남편은 수리공으로 일했다. 그렇게 부부는 돈을 모아 산 페르난도에서 첫 주류 판매점을 구입했고 후에 이 가게를 팔고 소거스에서 또 다른 편의점을 구입했다.
두순자 씨의 가족은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1989년에 Empire Liquor Market을 인수하였는데, 편의점의 주 이용자는 지역 갱단과 마약 판매자였고 1990년 말 강도사건이 일어나 잠시 가게 문을 닫은 이후 막 다시 연 상태였다. 두순자의 아들은 계속된 강도 사건 때문에 부모에게 가게를 닫자고 계속 주장하고 있던 상황이었다고 증언했다.
2.2. 피해자: 라타샤 할린스
라타샤 할린스(Latasha Harlins)는 1976년 일리노이 주 이스트세인트루이스에서 태어난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이다. 1981년, 그녀의 가족은 10년 뒤 라타샤가 살해 될 곳에서 불과 몇 블록 떨어진 로스앤젤레스 남부에 있는 89번가와 브로드 웨이 근처에 이사해 살았다. https://www.blackpast.org/african-american-history/harlins-latasha-1975-1991/# 라타샤의 아버지, 에이콥 시니어(Acoff Sr.)는 라타샤의 어머니, 크리스털 할린스(Crystal Harlins)를 지속적으로 학대했으며 자식들 앞에서도 폭력을 가했다. 결국 라타샤의 부모님은 1983년에 이혼을 했고, 2년 뒤인 1985년 11월 27일, 크리스털은 전 남편의 여자친구에게 총에 맞아 숨지게 된다. 그리고 라타샤와 그녀의 형제들은 할머니 루스 루슬린(Ruth Ruthlin)의 손에 맡겨지게 된다. 어머니의 죽음은 라타샤에게 정신적으로 심각한 영향을 미쳤고[6] , 그 결과 할머니와 이모에게 반항하게 된다.[7]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타샤는 학교에서는 착실한 학생이었는데 그녀의 사촌에 의하면 라타샤에겐 여러명의 친구가 있었고 학교생활에 착실이 임하여 6학년과 7학년에는 Honor Roll이라는 상도 받았다.[8] 또한 라타샤는 청소년 센터에서 치어리더 조수로 참가했으며 그 외에 훈련팀 멤버 그리고 여름 주니어 캠프 상담역으로도 참여했다.[9] 라타샤는 사망했을 당시 만 15세였으며 Westchester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이였다.
3. 사건 내용
이하의 내용은 법률보고서와 CCTV 영상을 참조하였다.
두순자 가족은 LA에서 Empire Liquor Market라는 리쿼 스토어를 운영했다. 사건이 일어난 1991년 3월 16일 아침, 라타샤 할린스는 가게에 들어가서 오렌지 주스 한 병을 가방에 넣고[10] 손에 돈을 쥐며 계산대로 걸어갔다. 하지만 두순자는 라타샤가 오렌지 주스를 가방에 넣은 것을 목격하자 도둑으로 단정했고 그녀에게 욕설을 했으며 오렌지 주스를 훔치려고 했다고 몰아갔다. 이에 라타샤는 두순자에게 오렌지 주스를 지불할 의도가 있었다고 답하였다. 그럼에도 두순자는 라타샤의 가방에서 주스를 가져가기 위해 손을 뻗어 라타샤의 스웨터를 잡아 자기 앞으로 끌어당겼고 라타샤는 그에 저항했다. 그 과정에서 라타샤는 두순자의 안면부를 가방으로 가격했고 두순자가 옷을 놓지 않고 더 끌어당기려 하자 주먹으로 안면부를 2번 가격했다. 두순자가 옷을 놓고 계산대 뒤로 기대자 라타샤는 계산대 위에 있는 자신의 가방을 가져가려 했고 두순자는 다시 가방을 잡아당기며 이를 저지했다. 그 과정에서 라타샤는 한번 더 주먹을 날렸고 두순자는 라타샤의 가방과 함께 카운터 뒤 바닥으로 쓰러졌다. 이 과정에서 오렌지 주스는 가방에서 카운터 앞 바닥으로 떨어졌다. 두순자는 다시 일어나 뒤로 물러나있던 라타샤에게 의자를 던졌다. 하지만 의자가 빗나갔고 두순자는 계산대 근처에 있는 38 구경 리볼버를 꺼냈다. 두순자가 리볼버를 권총집에서 꺼내고 있을 때 라타샤는 카운터 앞바닥에 떨어진 오렌지 주스를 주워 두순자에게 건네주었다. 두순자는 오렌지 주스를 손으로 내쳤고 라타샤가 가게 밖으로 나가려 뒤돌자 3피트 거리에서 그녀의 후두부를 총격했다. 라타샤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4. 세부사항
사건은 1991년 3월 16일 아침 두순자와 그녀의 가족이 소유하고 운영하는 두 개의 주류 판매점 중 하나인 Empire Liquor Market에서 발생했다. 원래 Empire Liquor Market는 남편인 빌리 두(Billy Du)와 아들인 조셉 두(Joseph Du)가 담당했는데 사건 당일 날 두순자는 아들을 대신해 가게에서 일하게되었다. 빌리는 사건 당일 날 아침에 아내와 함께 판매점에 있었지만 그 전날 밤 늦게까지 일해 두순자의 요구로 차에서 잠을 청했다.
라타샤 할린스가 가게에 들어오기전에 가게 안에는 두순자와 두 손님인 (또한 이 사건의 증인인), 13살 러키샤 콤즈(Lakeshia Combs)와 그의 동생인 9살 이스마일 알리(Ismail Ali)가 있었다.
4.1. 두순자의 증언
법률보고서에 나와있는 두순자의 증언에 의하면 라타샤는 가게에 들어오자마자 주스가 있는 냉장고로 향했고 오렌지 주스 한 병을 가방에 넣어 카운터로 걸어갔다. 두순자는 가게에서 많은 소매치기범을 관찰한 적이 있는데[11] 이 경험으로 인해 라타샤가 오렌지 주스를 훔쳐간다고 단정했다.[12] 라타샤가 계산대로 오자 두순자는 오렌지 주스에 대한 돈을 지불하도록 요청했고 이에 라타샤는 “무슨 오렌지 주스요?” 라고 답변했다고 했다. 이에 두순자는 라타샤가 주스를 훔치려고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13]
또한 두순자는 라타샤가 갱단에 있는 맴버라고 생각했다고 증언했다. 예전에 두순자는 아들 조셉에게 미국의 갱단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물어본적이 있었고, 이에 조셉은 바지랑 재킷을 입고 불빛 운동화를 신으며 모자나 헤어밴드나 헤드밴드를 쓴다고 답했으며 가방을 가지고 있거나 두꺼운 재킷을 입고 있다고 했다. 또한 아들은 재킷이 튀어나왔는 사람들을 조심하라고도 말했다.
그리고 라타샤가 자신의 얼굴을 한 번 더 가격했으면 죽었을 것이고 자신을 죽이겠다고 협박까지 했다고 증언했다.
4.2. CCTV 영상
'''하지만 공개된 폐쇄회로 영상은 두순자의 증언과 일치하지 않았다.'''[14] 두순자는 라타샤가 자신을 죽이겠다고 협박을 했다고 증언했는데 영상을 보면 두순자가 먼저 라타샤의 옷을 잡아채서 자기 앞으로 끌어당기고 있고 이로 인해 라타샤가 계산대로 끌려가는 모습이 보인다. (영상 0.02초 참조) 두순자가 먼저 라타샤에게 폭행(assault)을 가한 것.[15] 이에 저항하기 위해 라타샤는 가방으로 두순자의 얼굴을 쳤고 그럼에도 두순자는 다시 두손으로 옷을 잡아채서 끌어당겼다. (영상 0.05초 참조). 두순자가 계속 옷을 놓지 않자 라타샤는 주먹으로 얼굴을 2번 가격했다. 한마디로 방어기제로 볼 수 있다.[16] 이 CCTV 영상으로 인해 라타샤가 두순자에게 살해 협박을 했다는 증언은 사실로 보기 어렵게 되었다. 라타샤의 폭력으로 인해 생명 위협을 받았을 수도 있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어도[17] 이는 두순자의 폭력에 저항하기 위한 방어기제로 볼 수 있으며 정말로 라타샤가 두순자를 죽일 의향이 있었다면 두순자의 손이 옷에서 떨어졌을 때도 폭행을 가했을 것이다. 하지만 영상에도 나와있듯이 라타샤는 두순자가 손을 놓자마자 폭행을 멈췄고 뒤로 물러났다.0.01초: 두순자가 손을 뻗어 라타샤의 옷을 잡고 자기로 향해 잡아당긴다.
0.03초: 라타샤는 계산대로 끌려간다. 라타샤는 자신의 가방으로 두순자의 얼굴을 가격한다.
0:06초: 두순자는 두손으로 라타샤의 옷을 다시 자기로 향해 잡아당긴다. 라타샤는 두순자의 안면 부위를 주먹으로 2번 가격한다.
0:08초: 두순자의 두손은 라타샤의 옷에서 떨어지고 두순자는 계산대 뒤에 있는 벽에 기댄다.
0:09초: 라타샤는 가격을 멈추고 계산대 위에있는 자신의 가방을 가져가려한다. 두순자는 손으로 라타샤의 가방을 자신을 향해 잡아당긴다.
0:10초: 라타샤는 다시 한번 두순자의 얼굴을 가격한다. 두순자는 가방과 함께 계산대 뒤 바닥으로 쓰러진다. 라타샤는 뒤로 물러난다.
0:12초: 두순자는 바닥에서 일어나 라타샤를 향해 의자를 던진다.
0:16초: 두순자는 권총집에 담겨진 총을 꺼낸다. 그리고 총을 권총집에서 꺼낸다.
0:20초: 라타샤는 바닥에 떨어진 쥬스를 주워 두순자에게 건내준다.
0:21초: 두순자는 라타샤의 손목을 손으로 내려치고 주스는 계산대 위로 떨어진다. 두순자는 손으로 주스를 계산대에서 내쳐버린다.
0:24초: 라타샤는 뒤돌아서고 가게문으로 향한다. 두순자는 총을 발포한다. 라타샤는 바닥으로 쓰러진다.
또한 두순자는 라타샤가 갱단일 것이라고 추측했다고 증언했는데 이러면 두순자가 행한 행위는 납득이 가지 않는다. 실제로 두순자와 그녀의 가족이 운영하는 가게에서 많은 절도사건[18] 들이 있었고 1990년 말에도 강도사건이 일어나 아들이 갱단에게 협박당하자 잠시 가게 문을 닫은 이후 막 다시 연 상태였다. 이런 경험들로 인해 두순자는 갱단이 얼마나 위협적인 존재인지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두순자는 라타샤를 두려워 하기는커녕 오히려 손을 뻗어 라타샤의 옷을 잡아 자기 앞으로 끌어당겼다.
4.3. 목격자의 증언
'''목격자의 증언도 두순자의 증언과 달랐다.''' 두순자는 라타샤에게 주스값을 지불하라고 요청했을 때 “무슨 오렌지 주스요?” 라고 물으면서 발뺌했다고 증언했는데 당시 목격자인 러키샤와 그의 동생 이스마일의 증언에 따르면 라타샤는 2달러에서 3달러 정도의 돈을 들고 서 있었있고 그녀가 카운터로 다가가자 두순자가 먼저 라타샤에게 욕설을 했으며[19] 오렌지 주스를 훔치려고 했다고 했다. 이에 라타샤는 두순자에게 돈을 지불할 의도가 있었다는 답변을 했다고 증언했다.
라타샤는 사망했을 때 $2를 손에 쥐고 있었다.|||| Latasha had $2 in her hand when she died.
라타샤가 사망할 당시 그녀의 손에 2달러를 쥐고 있었다는 것 또한 입증되었고, 이는 라타샤는 절도범이 아니며 주스를 지불할 의도가 있었다라고 말해주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다.[20] 심지어 CCTV 영상을 보면 오렌지 주스를 두순자한테 돌려주기까지 한다. 이로 인해 라타샤가 발뺌을 했다는 증언은 신빙성이 떨어지게 되었다.- 법률보고서 (Court of Appeal, Second District, Division 5, California. PEOPLE of the State of California, Petitioner, v. SUPERIOR COURT of Los Angeles County, Respondent. SOON JA DU, Real Party in Interest. No. B063918) -
5. 우발적 살인
두순자는 재판에서, 그녀는 전에 총을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어떻게 작동했는지 몰랐으며, 총을 쏘는 것을 기억하지 않았고, 라타샤를 죽일 의도도 없었다고 증언했다.
두순자의 남편은 자가보호용으로 1981년 친구로부터 권총 (스미스 앤 웨슨 38구경 리볼버)을 구입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그는 그 총을 발사 한 적이 없었으며 두순자에게 총을 사용하는 법도 가르치지 않았다. 1988 년, 이 총은 소거스(Saugus)에 있는 가족 상점에 일어난 강도 사건으로 인해 총이 도난당했다. 그리고 1990년 두순자의 남편은 경찰로부터 총을 회수 할 수 있었고 총을 다시 Empire 리쿼 스토어으로 가져 갔다.
로스 앤젤레스 경찰청 탄도 전문가인 데이비드 버틀러(David Butler)는 사건에 사용된 권총에 대해 설명했다. 요약하면, 도난 당했던 총의 해머 잠금 메커니즘과 총의 주 스프링 장력 나사가 모두 변경되어 방아쇠에 많은 압력을 가하지 않고도 해머가 풀릴 수 있도록 조잡하게 변경되어 있었다고 증언했다.[21] 안전 메커니즘 또한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이에 법원은 만약 총이 쉽게 발사되게 변경되지 않았다면 이 살인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고 재기했다.
요약하자면 라타샤는 오렌지 주스를 지불할려고 계산대에 갔는데 두순자가 욕설을 내뱉으며 절도범으로 몰아갔고, 폭력을 가하자 방어기제로 두순자의 얼굴을 가격했으며 이에 생명의 위협을 느낀 두순자는 권총을 꺼냈고 가게 밖으로 나갈려 하는 라타샤에게 우발적으로 총을 쏘게 된것이었다.
6. 재판
재판에서 증언을 마친 후, 배심원은 두순자를 2급 살인죄로 보고했다. 두순자는 자발적 살인죄 (Voluntary manslaughter)로 유죄를 선고 받았으며 배심원은 두순자가 형법 1203.06 (a) (1) [22] 및 12022.5 [23] 의미 내에서 총기를 사용한 사실을 밝혔다. 자발적 살인죄로 유죄 판결을 내림으로써 배심원은 두순자가 라타샤를 살해하려는 의도가 있었고 그 살해가 정당하지 않다는 것이라고 함축했다. 따라서, 배심원은 두순자가 의도적 살인이 아닌 방어기제로 살해했다는 것에 대한 변호를 거부했다.
유죄 판결 후, 이 사건의 집행 유예 보고서를 준비한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보호 관찰관은 두순자가 범죄를 반복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했고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히려고 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결론 지었다.
이후 두순자는 법원으로부터 10년 형[24] 을 선고 받았지만 기각되었고 대신 400시간의 사회 봉사 활동 명령과 함께 집행유예 판결(5년)을 선고 받았다. 또한 법원은 두순자에게 벌금 500달러와 라타샤의 장례식에 관련된 모든 비용을 지불하라고 선고했다. 법원은 집행 유예 조건으로 형을 선고하지 않았다.
7. 반응
“개를 쏘면 감옥에 간다.[25] 흑인 아이를 쏘면 집행 유예를 받는다”.|||| “You shoot a dog and you go to jail. You shoot a black kid and you get probation.”
- African American community of Compton (컴튼 아프리카계 미국인 공동체) - #
“이 정의 체계는 정의롭지 않습니다. 그들은 제 손녀를 죽였다고요!”|||| “This system of justice is not really justice. They murdered my granddaughter!”
'''결국 이 판결로 인해 흑인들의 사법 시스템 및 한인들에 대한 반감이 확산되고 말았다.''' 흑인들은 분노했고 이 판결을 제기한 백인 판사인 Karlin이 일하는 법원에서 시위를 했다. 이 후 청원이 있었으며 수많은 서명이 모이자 변호사 Ira Reiner은 캘리포니아 항소 법원에게 재판결을 해달라고 요청했으나 법원은 거절했다. (#)- 라타샤 할린스의 할머니 - #
이로 인해 LA 폭동은 한국계 미국인과 기타 아시아계 미국인을 향해 진행되어 버렸다. 흑인들은 한국인으로 보이는 아시아인들에게 무차별 구타와 집단 난타, 투석, 총격을 가했고 격앙된 한국인 출신 이민자들 역시 흑인들을 발견하는 족족 끌어다가 구타, 폭행을 가하였다. 두순자의 가게는 약탈 당하고 불에 타서 다시는 열리지 않았으며 Karlin 판사는 또한 시위자들의 표적이 되었고 결국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출처) 한흑 갈등으로 인한 로스 엔젤레스 시 전체의 피해액은 7억 1천만 달러 선으로 집계되었으며, 이 중 재미 한국인/한국계 미국인의 피해액은 3억 5천만 달러로 절반에 달했다.
8. 정보왜곡
8.1. 미국
이 사건이 터지자 미국에서는 로드니 킹 사건에서 흑인들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이를 집중보도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왜곡된 정보도 보도되었는데, 예를 들어 두순자가 맞은 건 보여주지 않거나 두순자가 총으로 라타샤를 쏜 것만 보도했고 뉴스 헤드라인에는 라타샤가 고작 오렌지 주스 때문에 살해 당했다는 것을 강조했다. 이런 왜곡된 보도로 인해 미국 시민들 사이에서는 해당 사건이 인종적 동기를 바탕으로 한 증오성 의도적 계획살인이라는 이미지가 형성되어 버렸다.
8.2. 한국
한국 언론의 보도는 미국측의 정반대였다고 할 수 있다.
대다수 뉴스에서는 라타샤의 방어성 폭행만 강조했으며 두순자가 먼저 폭력을 가했다거나 절도범으로 몰아갔다고 보도하지 않았다. 또 라타샤가 절도범이 아니라는 것에 해명하지 않았으며 현재까지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등지의 문서에서는 라타샤가 먼저 아시아인 혐오 발언을 하고 폭행을 했다는 법률보고서에 아예 없는 정보까지 넣어 버렸다.[* #, # 이는 확실히 날조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인지 대다수 한국인들은 두순자가 사살한 라타샤 홀린스가 무죄 판시되었단 인식이 없으며. 이는 1990년대 초반의 열악한 해외취재환경, 그리고 미국의 황색언론과 흑인사회의 총공세로부터 두순자와 재미한인을 지원하려던 국가적 배경이 작용하였다 하더라도 법원의 최종판결과 다르게 두순자는 정당방위를 행사했단 인식을 국내에 고착화했다.
9. 그 외
- 두순자는 2012년까지 San Fernando Valley에 생존해 있었다고 보고되었다 #
- 두순자 사건에 대한 판결은 캘리포니아 주 정부에서 "국민 윤리 과목"에 "공평성 및 법원의 정직성"이란 주제로 "교육부 과정"에 실리게 되었다. 출처 (5 페이지 참고)
- "거리의 음유시인"이라 불리던 미국의 래퍼 2Pac이 흑인 여성에게 바치는 자신의 대표곡 "Keep Ya Head Up"의 뮤직 비디오를 라타샤에게 헌정했다. 다른 곡에서는 “그 이름을 기억해야 돼. 주스 한 병 때문에... 죽어야 할 정도로 대단한 게 아니잖아”[26] 라는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했다.
10. 관련 문서
- LA 폭동
- Black Korea
- 미국 흑인
- 한국계 미국인
- 마약과의 전쟁
- 디바이드 앤 룰
- 언론 플레이
- 이이제이 : 당시 미국 주류언론은 흑인들의 고조된 불만을 한인사회에 의도적 집중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