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폭동
1. 개요
1992년 4월 29일부터 5월 4일까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미국 흑인들이 일으킨 폭동. 비단 미국 흑인 뿐만 아니라 히스패닉계 미국인까지도 가세했으며, 미국 인종차별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남아 있다.
4.29 시민 폭동(4.29 Civil Uprising)이라는 명칭도 유명하며, 이 폭동의 기폭제였던 '로드니 킹'의 이름을 따 'King Riot'이라고도 불린다.
사건의 발생 과정에서 LA의 한인들도 인종차별을 포함해 큰 피해를 입었던 탓에 사이에서는 지금까지도 '4.29'라고 불리고 있는, 현지인들에게 있어선 잊을 수 없는 사건이다.
2. 전개
폭동의 발단은 '로드니 킹 사건'에서 시작된다.
1991년 3월 3일 로스앤젤레스 경찰국 소속의 백인 경찰관 네 명[1] 이 210번 고속도로를 타고 서쪽으로 과속[2] 으로 달리던 흰색 현대 포니엑셀 승용차[3] 1대를 추격전 끝에 세우고 범인을 현장에서 붙잡았다.
경찰은 운전자 로드니 킹[4] 을 끌어냈지만, 그는 경찰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난폭하게 행동하고 경찰은 이에 폭력으로 대응한다. 당시 경찰은 킹이 마약인 PCP를 복용하고 매우 거칠어진 상태였다고 주장하는데 킹이 '''체포된 지 며칠 후 여러 번 마약 검사를 실시했으나 모두 음성으로 나왔다.'''[5]
킹은 당시 강도, 폭행, 절도 등의 범죄를 저지르고 가석방 된 상태였는데, 만약 자신이 과속으로 잡힐 경우 가석방 조건에 걸려 도로 수감되어야만 했기 때문에 거칠게 행동했다고 밝혔다.영상
피투성이가 된 킹은 그대로 경찰서에 끌려가게 되는데, 이 장면을 인근 주민이 비디오로 찍어 방송사에 제보를 하게 된다. 하지만 로스앤젤레스 경찰서장 데릴 게이츠 총경은 아무런 대응도 제대로 하지 않았고, 문제가 생길 경우에는 훌륭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언플만 하고 있었다. 결국 3월 15일에 킹을 구타한 경찰관 4명은 기소되었고, 7월 9일에는 경찰 위원회가 과잉폭력 인정 보고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여기까지는 정말 문제가 잘 해결될 듯 싶었으나,[6] 해가 넘어가 1992년 2월 5일 사건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었다. 몇 개월 동안 진행된 법정 심의 결과, 4월 29일에 발표된 판결은 '''4명의 경찰관 중 3명은 무죄, 1명은 재심사 결정.''' 당시 현장에 있었던 5명의 이름은 스테이시 쿤, 로런스 파월, 티머시 윈드, 시어도어 브리세노, 롤란도 솔라노[7] 이다. 당시 배심원은 10명의 백인, 1명의 히스패닉계 미국인, 1명의 아시아계 미국인으로 구성되었고 검사 테리 화이트는 흑인이었다. 취재 열기가 뜨거운 탓에 재판지를 옮겼는데 '''그 동네 사람들 대신 근처 다른 동네 구역, 그것도 백인 및 히스패닉 구역에서 배심원을 모집했다.'''[8]
이런 판결에 분노한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는 흑인들은 판결이 발표된 그 날 길거리로 나와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자 시위는 점점 폭동으로 변해갔고, 곳곳에 방화 및 약탈, 총격전이 벌어지며 사상자가 속출하였다.
그리고 방화와 약탈이 TV로 방송되고 있는 상황에서도 게이츠 총경은 정치자금모집을 위한 집회에 참여하느라 자리를 비워서 초동진압 시점을 놓치고 말았다. 결국 SWAT의 창설자로서 탄탄대로가 보장되어 있었던 게이츠 총경은 이 사건으로 직위해제, 1992년 이그노벨상 평화상을 수상한다. 이후에도 게이츠 총경은 경찰 관련직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폭동은 점점 규모가 커졌고 흑인은 물론 히스패닉 갱단들까지 무장하고 합세하여 경찰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게 되었다. 결국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은 캘리포니아 주방위군 육군 병력 6,000명과 다수의 험비, 트럭, 연방 육군 제7보병사단 2,000명과 제40보병사단 헌병중대, 미합중국 제1해병사단 병력 1,500명과 제1경기갑정찰대대와 LAV-25 장갑차 투입 명령을 내렸으며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서 아예 제82공수사단 공수부대 대대를 18시간안에 배치 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춰 뒀다. 이는 연방군이 '''폭동 진압에 동원된 건 1968년 마틴 루터 킹 암살 이후로 처음 일어난 일이다.'''[9][10] 여하튼 총합 13,500명의 사단 급의 군대가 투입되면서 경찰과 함께 폭동을 진압하기 시작해 5월 4일에 폭동이 모두 종결되었다.
이 폭동으로 공식 집계된 사망자는 58명, 부상자 2,383명, 체포된 사람은 13,779명이었다.
3. 원인
언론은 주구장창 미국 사회의 고질적 문제인 백인 경찰의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을 탓했고, 경찰 당국이 '''로드니 킹이 먼저 경찰을 폭행하였음'''을 밝혔지만 물타기 취급을 했다. 이 경우 피해자의 인종을 떠나 경찰과 추격전을 벌이고 경찰을 폭행하기 까지 한 상황이지만, 이에 대응한 경찰의 폭행이 과잉진압에 해당함은 사실이다.[12][13]
괜히 민중의 지팡이라고 불리는게 아니다. 경찰의 폭력은 그것이 법을 수호하려는 수단으로 이용될때만 정당화될수 있는 것이다. 킹이 체포에 적극 저항할때 그에 대한 무력 사용은 정당화될 수 있으나, '''그가 무력화된 시점'''에서 더 이상 무력 사용은 분풀이고 단순 폭력일 뿐이다. 킹이 저지른 범죄 (경찰 폭행)은 '''법으로 처벌받아야지, 무자비한 구타로 되갚아줄 게 아니다.''' 피장파장의 논리가 적용될 수 없는 것이 킹이 잘못을 했다고 해서 경찰이 잘못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단순 범법자인 킹보다 권총 소유와 발포가 허용된 경찰의 폭력이 더 무거운 건 사실이다.''' 경찰에게 무력사용이 허가된 것은 경찰이 법의 수호자로서 그 무력을 남용하지 않을 것이란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무력을 남용 (무력화된 피의자를 구타한 시점에서 변명의 여지없는 권한 남용이다)한 경찰에 대한 신뢰가 있을까?[14]
어쨌거나, 로드니 킹이 폭행하는 장면만 촬영되지 않은 저 장면은 TV 생중계 되었고 미국 흑인을 포함해서 인종을 불문하고 미국인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거기다 당시 LA의 게토에는, 금주법에 버금가는 실책인 마약과의 전쟁으로 인한 여파로 극빈층 흑인이 늘어나 불만이 고조되고 있었고, 자신들의 권리를 표현할 수 있게 된 시점에서 로드니 킹 사건이 터지자 격분한 흑인들이 자신들의 불만과 권리요구를 폭동과 약탈, 방화로 표현한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평화적인 시위로 시작되었다가 나중에 폭동으로 변질되었다.
그 전에도 LAPD 즉 LA 경찰국은 흑인의 불신을 샀는데 당시 LA 경찰국장이었던 데릴 게이츠가 문제였다. 이 양반은 무자비한 진압으로도 유명했다. '''마약사범 검거를 위해 장갑차에 충각을 달아 가정의 벽을 부수고 특수요원처럼 무장시킨 경찰을 투입시키는 방법을 썼던 것'''[15] , 이 무자비한 진압 방식으로 이그노벨상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러니 로드니 킹 사건의 경찰관이 무죄를 선고받자 감정이 폭발한 것.''' 사건이 종결된 후, 위에도 적혀 있지만 1992년 6월 28일에 LA 경찰국장 데릴 게이츠가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16]
이후 원인 제공자인 경찰관 4명은 연방 민권법 위반 혐의로 모두 재기소되었고 그 결과 2명에게는 징역 30개월 유죄가 선고되고 2명에겐 무죄가 선고되었다.
4. 영향
이 사건은 미국의 인종차별 문제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물론 1964년 미국 연방 민권법의 제정 이후 미국 전역에서 인종차별이 철폐되었지만, 이는 법적으로만 철폐된 것이었지, 인종차별주의자들의 인식은 당연히 바꾸지 못했다.[17]
그러나 이 사건 이후 미국인들의 일상 생활에서 차별을 표현하는 단어는 암묵적으로 터부화되었는데, 이를 테면 인종을 색깔이 아니라 그 발상지로 지칭하는 풍조가 퍼졌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같은 명칭이 대표적으로, 그 당시의 픽션 등에서는 인종차별적인 악당이 등장하여 '너희 검둥이, 아니 요즘은 소위 아프리칸 아메리칸이라 부르던가?'라는 식의 대사를 통해 이러한 변화를 언급하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다.
원래는 흑인을 택하는 니그로란 단어 자체도 차별적 요소가 없었으나, 이 단어와 슬랭에 해당하는 니거란 단어가 비하적으로 쓰이자 흑인들이 이 단어로 지칭되는 것을 거부하면서 "유색인종 (colored)"란 단어로 바뀌었고, 이 단어에도 거부감을 일으키자 결국 "블랙"으로 바뀐 것이다.[18] 현재 흑인이 아닌 다른 인종이 니거를 쓰는 건 미친짓이고,[19] 니그로나 유색인종이란 단어는 흑인들 본인도 쓰지 않으나, "블랙"이란 단어는 많이들 쓴다. 흑인들이 본인들을 지칭할 때 아프리칸 아메리칸이라고 하는 경우는 없다시피하고 거의 블랙이라고 하며, 타인종이 하는 경우도 어느 정도 받아들이는 편. 정확히는 "난 블랙이지만 니들이 날 블랙이라고 부르면 차별하는 의도가 있는게 아닌가 약간 의심스러워" 정도 인식이다.
결국 1990년대까지도 미국에서 인종차별 문제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20]
LAPD는 데릴 게이츠를 비롯한 관련자들이 싹 물갈이되었으며, 당시로서는 많지 않던 비백인 경찰이 중용되는 계기가 되었다. 더불어 경찰수사에 인권 문제가 심도있게 논의되었고, 경찰들이 매우 몸을 사리게 되었고 이전부터 관행적으로 사용해오던 강압수사 및 폭행과 협박이 줄어들게 되었다.
여러 작품들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는데, GTA 산 안드레아스의 주요 무대인 로스 산토스의 모티브는 LA이고 스토리도 흑인 갱과 경찰관의 이야기다.[21] 작중 시간 배경도 1992년. 거기다 최후반부에 나오는 폭동까지 완전히 LA 폭동의 오마주다. 게임 내에서 로스 산토스 경찰서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가보면 경찰관들이 시민 한 명을 다굴치는 이스터 에그가 있는데, 이는 로드니 킹 사건의 패러디인 듯하다. 캐스린 비글로 감독의 1995년작 영화 스트레인지 데이즈에서도 로드니 킹 사건과 이후 벌어진 폭동과 유사한 내용이 영화 속에 등장한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블랙팬서에서도 직접적인 언급은 안하지만 사건의 발단이 되는 배경이 1992년이며 흑인들이 무장을 준비하는 모습에서 연관성을 유추할 수 있다.
5. 한인 사회와 LA 폭동
5.1. 한인 사회의 피해
폭동이 일어난 지점과 그 인근에는 수많은 코리아타운이 있었다. 지금도 LA의 대표적인 흑인 게토로 알려져 있는 컴턴[22] 은 LA의 코리아타운과 LA의 위성도시인 토랜스(Torrance)의 한인타운 사이에 햄버거처럼 끼어 있다. 즉 이 동네 거주 흑인들이 뭔일 있어서 자기 동네 밖으로 나오면 제일 먼저 맞닥뜨리게 되는 게 한국계 미국인들 사는 동네이다.
당시 경찰의 대처에서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폭동을 막기 위해 백인 거주 지역으로 가는 길을 완전히 막았지만 '''한인 지역으로 가는 길은 그대로 열어 놔 흑인들이 한인 지역으로도 몰려가도록 만든 것이었다.''' 계기가 흑백갈등이라 백인이 일차적인 목표가 된다 해도 시위가 폭동으로 변한 뒤에는 초기의 목적성이 대부분 사라지기 마련이고 감정적인 행동을 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소 흑인들과의 관계가 좋지 못했던 한인들의 거주지가 흑인 거주지와 바로 접해있어 주변으로 확산되면 피해가 생길 것임이 분명한 폭동에 대해, 아예 차단하는 게 아니라 폭동지역과 거리가 있어 대응할 시간이 충분한 특정구역을 보호하려는 식으로 대처한 것이다.
게다가 주방위군이 출동하고도 북쪽으로 가는 흑인들을 제 때 차단하지 못했기에 피해는 심각했다.
이에 대해 당시 한국 정부가 강력히 항의하여 한미간의 외교관계가 나빠지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직접적으로 폭력에 노출된 한인사회는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최종적으로 집계된 한인사회의 피해는 최소 3억 5천만 달러의 손해,[23] 2,300여 개의 점포손실 등등. 한인 상점 중에서 피해를 입지 않은 곳도 있긴 했지만 그건 극소수였다.[24]
자경단 활동 덕인지 폭도들에게 살해된 한인은 없었다. 유일한 한인 희생자는 청년단 소속이었던 19살의 이재성은 한인 간의 오인사격으로 사망하였다. 서로를 폭도로 착각해서 벌어졌고, 가해자는 처벌되지 않았다. 기사 참고
5.2. 한인 사회와 흑인 사회의 갈등
한인 사회가 LA 폭동에서 큰 피해를 당한 건 흑인들과 한인들의 갈등도 어느 정도 원인으로 작용했는데, 흑인 래퍼들은 폭동이 일어나기 전부터 한인들에 대한 불만을 곡으로 써서 비난하기도 했다.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래퍼 아이스 큐브의 Black Korea란 곡이다.# 한인 업체들 또한 흑인 손님들을 차별했었는데 이는 LA에서 갱단과 범죄율이 높아지자 더 심해져갔다. 결국 한인 업체들은 아예 흑인들을 고용하지 않는 수준까지 이어졌다. 범죄와 아무상관없는 흑인들에게까지 차별하고 무례하게 대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대다수가 그런건 아니였고[25] 이와 다르게 '''실제로는 흑인 차별을 하지않는 한인들과 한인들을 차별하지 않는 흑인들도 많았다.''' 미국은 한흑 갈등을 정치적 요소로 사용하기 위해 이런 차별 부분만 집중적으로 보도를 한 것. 또 폭동이 터지자 미국 언론들은 로드니 킹 사건과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라타샤 할린스 살해사건을 폭동과 연관지어 집중 보도해 흑인들의 분노를 한인들에게 돌리기 시작했다.[26]
이 사건은 아시아계, 특히 한국계 미국인 커뮤니티에 흑인에 대한 거센 반감과 분노를 야기하며 한국계 이민자들과 흑인과의 갈등이 이후로도 불거지게한 사건이다. 또한 모든 일의 근원인 로드니 킹 본인이 강도질을 벌인 대상이 다름 아닌 한국계 미국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한인들 중에선 로드니 킹을 안 좋게 보는 사람도 있다.
폭동 이후 흑인 커뮤니티에서도 이후 자성과 반성의 목소리가 나왔으며 이후 흑인 커뮤니티에서 이 일에 대해 공식 사과를 하였고 이후 흑인 사회의 지도자 중 한명이 이 사건으로 피해를 입은 한국계 이주자들에 대해 사과하였다. 흑인지도자 LA폭동 사과 LA 폭동 8년만에 흑인사회 한인들에게 공식 사과
물론 지금도 한인과 흑인 갈등은 여전히 남아있으며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는 이후로 이어지는 한국계 이민자들의 흑인에 대한 반감과 불신을 일으키고 있다. LA 폭동의 여파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셈.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한인 사회에서 흑인 사회와 대화와 교류를 하며 이 일의 재발 방지를 위한 협력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흑인 사회에서도 반성과 함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꾸준히 한인 사회와 교류를 하며 이 사건에 대해 잘못을 시인하고 반성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LA시 당국에서 이사건으로 아주 처참하게 데였고, 미국내 비판자들로 부터 가루가 되도록 까인 만큼 '''LA시 차원에서 한인 사회, 흑인 사회의 협력을 지원하며,'''[27] 한인 사회에 대해서도 행정적 편의 등의 신경을 쓰게 되었다.
5.3. 한인 사회의 인종차별 피해
무엇보다도 한국인의 가슴에 두번 못을 박은 이들은 바로 한인 중 "이 모든 것이 한인 탓이다"라는 식으로 성토하는 이들이었다고 한다. 또한 흑인들과 대립하는 백인 및 정치적, 인종적 동맹관계였던 히스패닉들은 더욱 한국인 탓을 해댔다.
미국의 주류 백인 사회에서는 한인들을 모범 소수민족(model minority)이라하면서, 정작 위기상황에서는 흑인들의 공격을 방조하는 모습을 보였다.[28] 당시 캘리포니아 주지사였던 피트 윌슨은 재정 때문에 한인촌에 대한 지원이 어렵다는 입장을 밝혀서 교민들을 절망하게 만들었다. 또한 애초에 언론들부터가 상술한 두순자 사건을 집중 보도하며 한인에 대한 흑인들의 '''공격을 대놓고 부추긴 주범'''들이다. 몇몇 정치인들은 한국인들이 흑인 상권을 침해했다고 까는 적반하장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는 명백하게 한인들을 "희생양"으로 쓰겠다는 모습이었고, 상황을 파악한 교민들이 정신을 차리는 결과로도 이어졌다.
미국 측 시각에서 보면 한인들에 대한 로스앤젤레스 시 정부의 갈등이 쏟아진, 한마디로 불똥튄 상황이 되었다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즉, 당시 LA의 지방정계는 이런 저런 일로 상당히 시끄러웠는데 이 상황에서 흑인 정치운동가들이 등장하면서 한인들을 표적으로 삼아 언플을 시작했고 이는 LA 타임스 등의 기사에서 상당히 선동적으로 다뤄졌다는 것이다. 현재의 미국의 시각은 양자간의 갈등보다는 미국의 당시 언론의 플로팅 문제가 결국 폭동을 키워 놓은 주 원인이 된 것으로 보고 있는 셈. 더군다나 LA 내부에서 경찰 책임자 해임건에 대한 여러 갈등이 산적해 있다 보니 이게 인종 이슈로 간 거고, 사실상 당시 흑인들의 정치운동 행태도 흑인들 내부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기도 하다. 아시아계 미국인은 미국내에서 흑인보다도 소수이기 때문에, 결국 흑인들이 백인에게 당한 차별을 자기보다 더 약한 사람들인 아시아계에게 괜히 화풀이했다는 비난에 직면하게 되기 때문이다.
5.4. 한인 사회의 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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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한인 가게 주인들은 자경단을 조직했으며 총기와 탄약을 들고 지붕 위로 올라가서 폭도들과 공성전을 벌였다. 이런 노력 덕분에 폭도들 역시 시가전을 굳이 감수할 이유가 없어서 저항이 거세 자신들이 되려 죽겠다 싶으면 금방 달아났다.
5.5. 당시 한국인 조직폭력배들의 행동
당시 한인타운에서는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나기에는 그냥 넘길 수 없는 사건이 있었다.
한인타운을 자신들의 구역으로 삼고 보호비 명목으로 상인들을 갈취하던 한국인 조폭들은 폭동이 터지자 한인들을 보호하기는 커녕, 혼란을 틈타 흑인이나 히스패닉들이 들이닥치기 전 한인 상점의 물건을 털고 잽싸게 도망쳤다. 애초부터 인간말종 범죄조직 조폭들에게 한인 수호를 바랄 수는 없는 일이다. 정작 이는 당시 히스패닉 갱단과 중국계 삼합회가 어찌됐건 자신들의 물주들을 지키려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때문에 당시에 차이나타운과 히스패닉 주거지는 털리지 않았다.
사실 이 당시 한인타운에서 삥 뜯던 조폭들은 한국에서 기반을 잃거나 쫓겨온 이들이 대부분으로, 특히 범죄와의 전쟁을 계기로 늘어났다. 게다가 민족 정서상 같은 한국인이라도 범죄자들은 따돌림 당하기 마련이고, 그렇게 겉돌음으로서 동질감이 적었다는 점도 원인이기도 했다.
하여간 이 때문에 한인들은 조폭들을 믿을 수 없게 되었으며, 자경단을 구축해 대응했던 깡까지 더해져 사태 진정후 뻔뻔스레 다시 나와서는 돈내놓으라는 조폭들에게 돈만 갈취하던 놈들이 뭐하러 오냐, 한번만 더 그러면 쏴죽이겠다며 분노하던 사례가 상당히 많이 생겨 오히려 조폭들이 힘도 못쓰고 부리나케 쫒겨난 사례도 부지기수로 생겼다. 그나마 조폭들이 명분이 없어져서 이 사건 이후론 코리아 타운에서 쪽을 못 쓰게 됐다는 게 이 폭동의 몇 안되는 긍정적 효과라 할 수 있겠다.
5.6. 한인 사회의 변화
폭동 사건 이후, 한인 사회에는 두 가지로 변화점이 있었다. 먼저 '''미국에서 살아가기 위해선 미국 국적을 취득하여 미국인으로서 권리를 얻어야만 한다는 의식'''이 생겼다. 이전까지 한인들은 한인 공동체에서만 살았고, 경쟁 대상도 보통은 같은 한국 이민자들이었으며, 영주권을 취득하는데서 멈추고 미국 시민권 취득을 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29] 즉 미국 사회에서 중요한 '''정치가'''와의 교류에 무심했기 때문에, 흑백 양쪽에서 일방적으로 따돌림을 당한 것이었다.[30]
'''흑백갈등'''이라는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격으로 얻어맞고 "총알막이"로서 내몰린 이후, 한인들은 '''교민들의 의견을 대변하고 권리를 지켜 줄 정치가'''의 존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수많은 교포들이 미국 시민권 취득 운동을 벌였다. 그 결과로서, 미국 정치인들이 한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한인 출신들의 정치 참여가 늘며 코리아 타운발 세수나 정치 후원금 액수도 무시못할 만큼 증가해 확실히 로스 앤젤레스 정계는 예전처럼 한인들을 없는 것처럼 취급하지 못하고 있다.
한편으로 이들은 교포들만의 세상에서 탈피하여 공존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라타샤 할린스 살해사건조차도 방아쇠에 불과하다는 말이 나올 만큼, 한인 사회는 주류 백인 사회와의 갈등만 아니면 관심 없이 생활했다. 물론 관심이 없었던 만큼 적의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으므로 다른 소수민족과의 더 많은 인적 교류가 시작된 것도 이 즈음이다.[31]
그리고 그 변화의 결과 2020년에 일어난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 직후의 혼란에서는 LA 총영사관과 한인회가 나서서 LA 한인타운의 치안 유지를 위해 주 방위군 투입이 결정되었음을 알려왔다. 이에 따라 주 방위군은 윌셔 대로의 코리아타운 주요 길목에 배치돼 삼엄한 경계에 들어갔다.
6. 기타
- 2014년 8월 미국 미주리 주에서 또다른 흑인 소요사태인 퍼거슨 소요가 벌어졌고, 또 한인 상가가 불타고 약탈당했다. 정치계 진출이건 인종교류건 결국 아무런 영향도 없이, 다시금 흑인 동네 옆에 있다는 이유로 한인들이 또다시 피해를 보게 된 것. 미국/인종차별 항목에서도 볼 수 있듯 결국은 인종차별의 피해자인 흑인들이 다시금 그들의 분노를 자기들보다 더 약한 소수인종들에게 표출한 것이다. 그 결과 흑인들에 대한 이미지만 안 좋아지고 경찰들의 강경진압에 대한 정당성만 강화되는 등 부작용이 속출하자 흑인 사회 내에서도 이를 비판하며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 아이러니하게도 폭동시 공권력이 폭동과 약탈에 대처 못하는 추태를 보이고 한인들이 자체 무장하여 자신들을 지키는 모습으로 총기소지에 대한 옹호론이 강화되었고 한인 등 백인과 흑인에 비해 소수인 아시아계와 동유럽, 아프리카 이민자의 총기소유 비율이 높아져 이제는 총기규제시 이들의 반대가 만만치 않다.
- 폭동의 소용돌이에서 무사했던 곳도 있었는데, 당시 42세였던 홍정복 씨가 운영하던 밴네스 마켓이 대표적이다. 평소 가정 형편이 어려운 흑인과 히스패닉 주민들에게 무료로 생필품을 준다거나, 기초생활수급자이면서 알콜중독자인 남편이 정부에서 받은 생활비로 술을 사려고 하자 아내에게 전화를 함으로써 막거나, 물건을 훔쳐 달아나는 좀도둑을 향해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라면서 걱정해주는 등의 선행으로 지역 사회에서는 MAMA라는 별명으로 유명했고, 폭동 당시 흑인 주민과 갱단이 자진해서 주변을 호위했을 정도. 그러나 안타깝게도 7년 후인 1999년 2월 3일 히스패닉 무장 강도에게 살해당했고, 흑인과 히스패닉 주민들이 교회 장례식에 대거 모여 눈물로 추모했다.#[32] 이후 흑인 갱단이 홍정복 씨를 죽인 범인을 잡아서 죽여버린다는 경고 쪽지까지 붙였고,[33] 실제로 이 히스패닉 범인 중 한 명은 경찰에 잡혔으며, 다른 한 명은 실종되었다고 한다. 달리 말하면, 흑인들에게 끝없는 선행을 베푼 한인조차도 히스패닉 무장 강도에게 살해당할 만큼 당시 LA 및 미국은 인종에 따른 범죄가 만연한 사회였다는 것이다.
- 코리아타운과 다저 스타디움이 인접해있었기 때문에, 폭동 기간동안 잡혀있던 필라델피아 필리스와의 홈 3연전중 2경기(첫 경기는 폭동 당일인 4월 29일 열렸다.) 몬트리올 엑스포스와 홈 3연전 시리즈가 전부 연기되었다. 문제는 두 팀 연고의 거리는 거의 미국 동서 끝자락이라서 다음에 언제 올 있을지가 문제가 되는지라, 다음 잡혀있는 필리스와 엑스포스의 LA 원정때 잔여일정을 어떻게든 전부 다 끝내야 했다. 그래서, 두 팀이 다시 LA를 찾은 7월 2일부터 5일까지 필리스와는 4일동안 5연전(7월 3일 더블헤더), 그 다음 엑스포스는 3일 연속 더블헤더라는 엽기적인 일정을 소화했다. 1992년의 다저스는 리그 최하위 팀이었기 때문에 지구 우승 경쟁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는 점이 다행일 정도. 다저스의 1992년 스케줄.
- 다이 하드 3에서 이 사건이 잠깐 언급된다. 존 맥클레인과 어거지로 파트너가 된 제우스 카버가 "자네 LA에서 무슨 일 있었나? 혹시 자네 유명인물이야? 설마 로드니 킹 사건은 아니겠지?"라고 묻자 존 맥클레인이 "내가 이 사건의 범인의 동생을 옛날에 빌딩 32층에서 던져버린 일이 있었어."라고 대답한다. 영화 스트레이트 아웃 오브 컴턴에서도 잠깐 나온다.
- 폭동을 키운 주범으로 지목되어 그간 몸담아 온 경찰계에서 완전히 쫓겨난 게이츠 총경은, 이후 자신의 특기를 살려(?) 게임 회사에 들어가 SWAT 4의 감독을 맡는다.
7. 유사 사례
- 대공황 약탈 폭동 (1929~1932)
- 뉴욕 할렘 폭동 (1935)
- LA 폭동 (1965)
- 와츠 폭동 (1965)
- 뉴어크 폭동 (1967)
- 디트로이트 폭동 (1967)
- 마이애미 폭동 (1980): 특히 해당 사건의 발단이 된 '아서 맥더피 폭행치사사건'은 로드니 킹 사건과 진행양상이 대다수 비슷했다.
- 신시내티 폭동 (2001)
- 오클랜드 폭동 (2009)
- 퍼거슨 소요 (2014)
- 조지 플로이드 사망 항의 시위 (2020) - 일부 지역에서 폭동도 일어났으나, 전국적으로 보면 평화적인 시위가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으로 인한 폭동들에 대해서도 흑인들에 의한 인종 폭동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 백인들이나 히스패닉, 아시아계도 약탈에 많이 참여했다. 위의 퍼거슨 소요와는 확실히 다른 양상을 보였다. 게다가,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 이후 처음으로 일어난 폭동을 선동한 자가 백인인 것으로 밝혀졌다.
8. 관련 문서
[1] 이 중 한 명(시어도어 브리세노)은 이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히스패닉계 미국인이었다.[2] 115mph, 185km/h[3] 사건 이후 현대자동차 측에서는 그 차량이 그런 속도로 달릴 수 없다고 주장했다. 물론 과속이라는 자체는 의심이 없었다.[4] 2012년 6월 17일 자택의 수영장에서 익사했다.[5] 즉, 로드니 킹은 맨 정신이었고, 마약 복용이라는 것은 경찰의 일방적인 주장이다.[6] 로드니 킹 사건에서 주범인 4명의 경찰들에 대한 재판이 제대로 진행되었다면 LA 폭동은 역사 속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7] 5명 중 이 사람만 킹에게 폭력을 휘두르지 않았다. 그리고 이 사람은 아직 현역이다.[8] 검사가 흑인이긴 하지만, 배심원에 히스패닉계 미국인, 아시아계 미국인은 배정해 놓고 그보다 수가 많았던 미국 흑인을 한 명도 배정하지 않은 것은 명백한 인종차별이다.[9] 이 로드니 킹 사건과 두순자 사건의 여파가 마틴 루터 킹의 암살에 비하는 분노를 가져왔다는 것이다.[10] 서술된 것 처럼 마틴 루터 킹 암살 이후에도 미국 흑인들의 폭동이 일어나긴 했는데, 마틴 루터 킹은 미국 흑인들 모두에게 있어서는 영웅 중의 영웅으로, 마틴 루터 킹의 암살은 큰 충격과 분노를 불러올 수 밖에 없었다.[11] LA 폭동 1년 뒤 해당 경찰 4명은 연방민권법 위반 혐의로 다시 기소됐다. 그 가운데 2명은 징역 30개월을 선고, 나머지 2명은 무죄. 유죄는 과잉진압이 인정되어 해당 형량이 나온것으로 보인다.[12] 로드니 킹은 이 구타로 인해 당시 얼굴뼈 골절, 오른쪽 발목 부상, 많은 멍과 상처, 11번의 두개골 골절, '''영구적인 뇌 손상''', 치아 골절, '''신장 기능 상실''', 감정적, 정신적인 트라우마 등을 앓았다. (출처 - 영어 위키피디아)[13] 로드니 킹은 경찰이 들고 있던 바톤으로 무려 '''53번에서 56번 사이의 구타를 당했다.''' (출처 - 영어 위키피디아)[14] 잘 안 알려진 부분으로, 로드니 킹과 병원으로 동행한 경찰들(로드니를 폭행한 경찰들)이 로드니 앞에서 '''대놓고 로드니를 몇 번 팼는지에 대해서 조크를 하고 자랑했다.''' 이는 로드니의 증언이 아니며, 그 병원의 간호사들(제3자)의 증언으로, 이 백인 경찰들의 악랄함과 잔인함을 보여준다. (출처 - 영어 위키피디아)[15] 영화 스트레잇 아우다 컴튼에서 제대로 묘사된다. '''재임 당시 LA 반문화랑 사이가 안 좋아서 LA 하드코어 펑크 씬에 대해 다룬 다큐멘터리 서구 문명의 몰락 상영도 막으려고 했던 사람이기도 하다.'''[16] 참고로 게이츠는 이후에 자서전에서 경찰국장 자리에서 질려서 자의로 물러났다고 적었다. 이후 게임 디자이너로 활동해, 폴리스 퀘스트 시리즈 중 4와 S.W.A.T 제작에 참여한다(...).[17] 그 당시의 미국 연방 민권법으로 미국 흑인에 대한 린치, 고문, 살인 등은 막을 수 있었지만, 일상적인 차별은 막을 수 없었다. 일상적인 차별을 해결하려면 사람들의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18] 사람 피부는 누구나 색이 있고 비교적 어둡거나 밝을 뿐인데 "유색"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일반적이지 않다"는 의미를 내포한 차별적 단어라는 주장이다.[19] 물론 이 미국 흑인들도 "니가(Nigga)"라는, 흑인식으로 바뀐 슬랭을 쓰지, 인종차별적인 의미를 내포한 "니거(Nigger)"는 잘 쓰지 않는다. 게다가 저 "Nigga"라는 슬랭을 쓰지 않는 흑인들도 아주 많다. 흑인들이 무조건 N-word를 쓴다는 것 역시 인종차별적인 편견이다.[20] 1980년대에는, 이 인종차별이 음지에서 진행되어서 잘 안 알려진 것 뿐이지, 1940년부터 1980년까지 빠르게 떨어지던 흑인 빈곤율이 1980년부터 지금까지는 상당 부분 정체된 이유는 레이건 시대의 마약과의 전쟁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로 인해 흑인 빈곤층이나 히스패닉 빈곤층을 마구 잡아들였는데, 이로 인해 이 정책 이전과 비교하여, 감옥 재소자 수가 5~6배 정도나 늘게 되았다. 이 정책 전에는 감옥 재소자 수가 수십 년 동안 일정하게 유지되어 왔는데 이 정책 이후 재소자가 폭증한 것이다. 1980년대 흑인 빈곤층의 갱 활동 증가와, 갱스터 랩의 확산, 흑인 게토의 파탄 역시 이 정책으로 인한 것이다. 결국 나중에 공화당에서도 이 마약과의 전쟁은 잘못된 정책이라고 시인하였으나, 이미 파탄난 흑인과 히스패닉 빈곤층 사회는 다시 돌아올 수 없었다.[21] 덧붙여 산 안드레아스의 악역인 프랭크 텐페니 경관은 백인으로 설정하면 인종차별을 조장할 것 같아 흑인으로 교체했다는 이야기가 있다는 소리가 있다.[22] Compton. N.W.A의 "Straight Outta Compton"의 Compton이 바로 이 지역이다. 뮤직비디오에도 자주 나오며 흑인 갱단의 근거지로 많이 묘사되기도 한다. GTA 산 안드레아스의 주인공 CJ가 사는 동네 갠튼(Ganton)은 이 곳의 패러디다.[23] 그 당시 일어난 모든 피해액이 약 7억 달러. 즉 한인 사회가 전체 피해의 절반 이상을 받은것이다.[24] 그중에서는 평소 흑인들에게 선행을 베풀어서 흑인들이 직접 지켜준 곳도 있다. 자세한 것은 후술.[25] 사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중반의 미국 남부 주들을 제외하고는, 항상 "대다수"는 문제가 없었다. 허나 서술한 미국 남부 주들에선 거의 대부분의 백인 주민, 즉 대부분의 주민들이 흑인에 대한 심각한 수준의 인종차별 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대변하는 것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중반 흑인에 대한 수많은 린치가 매일같이 일어났지만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이렇게 인간 취급도 못 받던 흑인들이 결국 흑인 대이동을 시작한 것이다.[26] 물론 그 지역 거주 흑인들이 이 두 사건 전부터 한국계 미국인 1세대들과 갈등을 빚고는 있었지만, 라타샤 할린스 살해 사건의 집중 보도로 인해 폭발한 것이 맞다.[27] LA에서, 한인 지역 사회 리더와 흑인 지역 사회 리더가 만나서 대화하고 친목을 다지는 경우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28] 로드니 킹 사건 이후 두순자 사건을 집중 보도한 것은 보수, 진보 언론을 가리지 않고 저지른 일이다. 보수언론도 흑인들과의 정치싸움에서 좋은 명분이자 방패막이로서 한인들을 띄워줬을 뿐이었다. 실제로, 격한 대립 구도에 끼어들면 죽어나는 건 주민들뿐이다.[29] 이는 한국이 이중국적을 허용하지 않는것에도 원인이 있었다. 아무리 이민자라도 자신의 모국적을 포기하는게 쉬운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과의 교류를 계속 하고 싶어하는 경우 한국국적을 유지하는것이 여러가지로 유리할 수 밖에 없다. [30] 경찰 인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시민권 없고 자기들끼리만 뭉치는 이민자 집단보다 일단 시민권이라도 있는 미국 시민을 보호하게 된다. [31] 이 점은 시대의 변화와도 연관된다. 기존 한인 사회의 주류가 영어가 서툴고 미국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던 기존의 1세대에서 어려서부터 미국에서 자라와 미국식 문화를 더 익숙하게 여기며, 초기 이민자들보다 높은 교육 수준을 가진 2, 3세대로 바뀌고, 미국이 이민자를 제한한 후 들어온 새로운 이민자들은 전문적인 직업이 많아 미국 현지 사회와의 교류가 늘게 되었다.[32] 그녀의 장례식에서 한 흑인 소년은 그녀는 우리를 피부색을 가리지 않고 인간으로 대해주었다. 라면서 절규했다.[33] '마마, 우리가 범인을 찾아서 대가를 치르게 할게요.'라는 내용이었다.[34] 이때는 연방 민권법이 제정된지 단 4년 밖에 되지 않은 시점이었고, 미국 흑인 민권 운동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며 미국 흑인들은 "Black Pride Movement"라는 새로운 사회 운동으로 넘어가고 있던 시점이었다. 이제 막 민권 운동의 결실이 나오고 모든 것이 잘 되어 가고 있었는데, 미국 흑인 민권 운동을 이끈 리더 중 하나인 마틴 루터 킹의 암살은 미국 흑인들을 분노케 할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