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화론

 

[image]

'''Völker Europas, wahrt eure heiligsten Güter'''
'''유럽의 민족들이여, 그대들의 신성한 재보를 지켜라.'''[1]

헤르만 크낙푸스(Hermann Knackfuß), 1895

독일을 상징하는 대천사 미카엘이 유럽 국가들에게 '''용(중국)'''을 타고 날아오는 '''부처(일본)'''를 경계하는 듯한 손짓으로 가리키고 있다.
1. 개요
2. 유럽에서
3. 미국에서
4. 유목제국들과의 연관성
5. 도교와의 연관성
6. 관련 문서


1. 개요


Die gelbe Gefahr (Yellow Peril, 黃禍論)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일본중국을 비롯한 황인종들에게 정복당할지도 모른다는 유럽인들의 위기론.
황화론에 대한 다트머스대학의 소개문[2]
두산백과의 "황화론" 항목

2. 유럽에서


이 "황화"라는 말을 만들어내어 주창한 사람은 독일 제국빌헬름 2세이다. 이러한 황화론은 당연히 인종주의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지만, 사실 황화론과 인종주의의 관계는 보이는 것보다 훨씬 복잡한 양상을 띄고 있었다. 여기에는 단순히 황인종에 대한 멸시적 인종주의 뿐만 아니라, 당시 독일 제국의 범게르만주의(Pan-Germanism)과 그와 충돌하고 있던 동시대 러시아 제국의 범슬라브주의(Pan-Slavism)까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때는 마침 부동항을 찾아나서던 제정 러시아와 동아시아에 뒤늦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대영제국의 동아시아 진출이 맞물려있던 때로, 동시에 청일전쟁에서 일본 제국이 승기를 잡아가면서 일제의 국제적 발언권이 높아지던 시절이다. 빌헬름은 이를 자신의 제국과 대치 상황에 있던 제정 러시아를 약화시키고 발칸 반도와 그 너머로 범게르만주의를 확산시킬[3] 기회로 보고 마침 새로운 열강으로서 힘을 확장시킬 단계에 있었던 일본을 경계 대상으로 주창하여 러시아와 영국이 자국의 국력을 동북아시아 방면으로 집중시키는 상황을 유도하려 했다.
실제로도 (몇십년 전만 해도 페리 제독이 "개화시킬 야만족" 취급을 하던) 일본의 갑작스런 국력 신장을 마주했던만큼 러시아와 영국이 둘 다 이러한 황화론에 성공적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그 가장 큰 결과로 러일전쟁이 벌어져 러시아측은 수많은 사상자를 내야 했다. 다만 빌헬름 2세 본인이 그 기회를 틈타 범게르만주의를 확산시키려는 본래의 의도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는데 이는 황화론 주창 자체는 외교적으로 효과적인 전략이었으나 정작 독일 제국 자체가 내정이 시망인 탓이었다 봐야 할 것이다.[4]
빌헬름 2세가 일본에 대한 황화론을 펼치는 데에는 보다 통속적인 원인이긴 하지만 빌헬름 본인이 '''그냥''' 일본인들을 싫어했다는 것도 있었다.[5] 1차 세계대전 때 일본은 영일동맹을 맺고 독일과 중국에서 싸웠으니 감정이 좋기를 기대할 순 없을 것이다. 여기에 당시만 해도 상대적으로 유럽으로 유학 가는 일이 그다지 많지 않았던 다른 극동인들에 비해 일본인들은 아예 국가 차원에서 프로이센을 모델로 한다며 유학을 보내는 일이 많았으니 일본인들을 개인적으로 접하게 되는 일도 상당히 있었을 것이다. 빌헬름 2세 입장에선 독일로 수많은 일본인들이 몰려오는 데다가, 나중에 이들이 전쟁에서 뒤통수를 친 것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빌헬름 2세는 일본과 적대적인 관계였던 대한제국 시절 고종과의 개인적 친분을 다지기도 했다.
일단 유럽과 러시아 일대에서의 황화론 소동은 이렇게 일단락된다.
그러나.....

3. 미국에서


그런데 정작 원조인 유럽에서는 높으신 분들의 정치적 수사로 쓰였던 황화론이 이민 사회인 미국에 소개되고 나서는 약간의 의미 변화를 겪은 뒤 그야말로 '''대박'''을 친다. 미국이 "도금 시대"라 불리는 호황기가 끝나가면서 몇몇 하류층 미국인들 사이에서는 중국인 이민자들[6]이 자신들의 일자리와 기회를 크게 위협하고 있다는 인종갈등론이 퍼지기 시작했는데, 이 "황화(Yellow Peril)"라는 말이 자신들의 위기감과 새 인종갈등론을 설명하기에 안성맞춤인 단어로 여겨졌던 것이다.
이 당시 미국의 시대상을 가장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표현이 바로 이른바 "더러운 노란색 폭도들(Filthy Yellow Hordes)"이라는 문구. 게다가 미국의 아시아계 미국인들에 대한 황화론은 굉장히 오래 가서 (처음에는 중국계 미국인을 주로 타겟으로 했지만 러일전쟁 이후 일본인들의 활동반경이 넓어지자 일본계 미국인들에게도 확대되었다.) 1917년의 이민제한법안과 1924년의 국적식별법안은 황화론이 주 원인이 된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20년대는 "재즈 시대(Jazz Age)"라고 해서 곧 벌어질 대공황 시기보다 훨씬 더 풍요로웠는데도 저랬다.
이러던 황화론에 일본의 진주만 공습은 말 그대로 불난 집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어 버렸다. 일본계 미국인들은 모두 강제수용소에 갇히고, 황화론은 아예 태평양 전선에서 맞닥드린 동양인들을 침팬지로 묘사하는 수준까지 간다.[7] 거기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나서도 중국의 공산화와 냉전의 확산으로 미국의 황화론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황화론은 냉전으로 미국과 소련이 군비증강 하는 동안 일본의 경제가 고속성장을 하여 1980년대 일본이 미국의 경제 패권 자리를 위협하자 더 극에 달한다. 단적인 예로 1988년 기준으로 시가총액으로 따졌을 때의 "세계 50대 기업" 중 33개가 일본 기업이었다. 다만 이 시기 직후는 황화론이 사그라드는 계기가 됐는데 일본의 버블경제가 몰락하게 되고 마침 동시에 냉전도 끝이 나면서 (물론 중국과는 리처드 닉슨 때 이미 관계가 완화되었지만) 황화론이 미국 사회에서 조금씩 옅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LA 폭동 때 두순자 사건을 집중보도 하기에 바빴던[8] 미국 언론들을 생각하면.....
이후 중국의 국력이 급상승하면서 중국에 대한 경계심이 부활하는 것 아니냐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중국 위협론 문서 참조. 단, 중국 위협론 자체는 황화론과 다른 점도 있다. 사실 저 당시 유럽인들도 황화론을 떠들긴 했지만 정작 큰 싸움은 전부 자기들끼리 했었다.

4. 유목제국들과의 연관성


한 때 이 항목에서는 처음 작성 이후 몇년 동안 "황화론"이라는 개념이 청나라의 전성기 때부터 유럽인들 사이에서 본격화된 것처럼 서술했고 심지어는 몽골 제국까지 그 기원을 찾는 서술도 있었으나 엄밀히 말해서 "황화"라는 말은 17-18세기 당시에는 조어되지도 않았고 당시의 유럽인들도 청나라에 대해 막연한 환상을 갖기는 했어도 심각한 경계심 같은 것을 가지지는 않았다. 고로 황화론이 청나라(더 거슬러가서는 "몽골 제국")에 의해 시작됐다는 주장은 사실 아귀가 잘 맞지 않는다.
적어도 유럽에서의 황화론은 19세기 말 빌헬름 2세의 정치적 계략에 온 유럽인들이 수선을 피운 소동이라고 보는 게 맞으며, 유럽인들을 이렇게 행동하게 한 "신빙성"이란 것도 사실 일본이 모두의 예상을 깨고 매우 성공적인 산업화를 이뤘기 때문이다.
사실 17-18세기 당시의 유럽인들은 청나라에 대해 막연한 환상, 혹은 동경을 갖고 있었지 경계심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오히려 시누아즈리라고 해서 당시에 떠오르던 로코코 예술에 중국풍을 가미하는 게 대유행을 했고 이 때문에 온갖 경로에서 중국 예술품이나 도자기 등을 있는대로 긁어모았다. 이 시누아즈리는 사실 꽤 오래된 전통이었기 때문에 명나라와 그 뒤를 이어 대륙을 먹은 청나라가 괜히 아시아의 먹는 하마라고 불린 게 아니다. 청나라 때 가서는 청 정부가 소유한 은이 많다보니까 당시에 거두던 인두세를 토지세로 바꿔버렸다.[9]
황화론을 청나라의 중흥과 연결짓다 몽골 제국에서까지 기원을 찾는 건 사실 '''신빙성이 희박'''하다. 결론부터 확실히 긋자면 동서양과 시대를 막론하고 제대로 배운 호사가들 중에서 몽골 제국의 원 황실과 만주족을 단순히 소위 "시베리아 유목계"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다고해서 아예 '''동족'''으로 여기는 경우는 없었고 지금도 없다. 몽골의 원 황실과 근세에야 "만주족"이라는 새 이름을 쓰기 시작한 여진족, 알타이 제어 문서만 봐도 알 수 있지만, 이들은 언어의 어파부터가 다르다.

5. 도교와의 연관성


19세기 말의 황화론은 중국의 도교와 이에 대한 서구인들의 시각에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는 주장도 있으며, 해외 역사학계에서는 의외로 상당히 진지한 연구 주제들 중 하나이다.
이러한 시각이 제기되는 이유는 결정적으로 의화단 운동 때문이다. 의화단 운동은 토착종교에[10] 광신적인 근간을 둔 중국 민간 세력이 거대 조직화 해서 외국인들에게 집단적인 테러를 가한 사건이었다는 점에서 서구인들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실제로 의화단 운동 문서를 보면 알 수 있지만, 당시 의화단이 하던 행동들 중에는 기본적으로 국적을 막론하고 의화단 외부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충격을 줄 만한 행동이 많았다.
의화단 운동은 통상적으로는 서구인들의 중화 문명에 대한 환상이 팍 깨지고 중국인들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계기였다는 면에서 더 주목을 받지만, 한편으로는 의화단 단원들의 광신적인 행위들을 보고 서구인들로 하여금 "저들이 저렇게까지 광신적인 행위에 몸담게 하는 저 중국의 토착종교라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 것인가" 하는 공포감을 느끼게 했던 것도 사실이다. 이 때문에 황화론과 도교 사이의 연관성에 대한 역사학적인 시각이 제기되는 것이다.
단, 본인들이 도교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어느 정도 억울한 시각일 수도 있다. 청말 당시 의화단 운동에서 돌았던 종교적 믿음에 대해서는 아직 여러 연구가 진행 중이지만 현재까지의 성과로는 사실 의화단 운동의 기틀이 되었던 무언가는 엄밀히 따지면 도교보다는 불교의 법상종에 더 가까웠다는 설이 더 지지를 받고 있다. 다만 당시 의화단 운동의 적대 대상이었던 서구인들은 둘을 구분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담으로 의화단 운동의 광신적인 행위들에 충격을 받은 건 서구인들 뿐 아니라 의화단 운동과 관련이 없는 중국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는지 세계적으로 유명한 무술영화인 황비홍(영화) 시리즈에서도 황비홍 일행이 외세에 맞서싸우는 무술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의화단이 긍정적인 세력으로 등장하기는 커녕 오히려 외세보다도 더 악질적인 이들로 묘사된다. 그리고 전형적인 사이비종교의 말로를 맞는 것으로 묘사된다.

6. 관련 문서


  • 오리엔탈리즘
  • 옥시덴탈리즘
  •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 - 일본이 가장 경제적으로 승승장구했던 시기로, 미국을 넘어설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이 가득했다.
  • 중국 위협론
  • 미중 패권 경쟁
  • 쌀과 소금의 시대 - 페스트로 인해 실제역사와 달리 백인들이 거의 괴멸에 이르러서 잔존한 이들은 원시적인 수준으로 살아가거나 이슬람 국가등지에서 노예로 팔려다니고 있다. 대신 중국이 원래 역사보다 더 강성해서 이슬람 칼리프국들과 자웅을 겨루고 신대륙 한편에서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나름대로 발전을 하기 시작한 대체역사세계관이다.
  • 혹성탈출 시리즈 - 원작 소설 한정해서 간접적으로 이와 연관되어있다. 작가의 일본군 포로수용소 생활 경험이 아이디어가 되었기 때문.
  • 코로나 19 - 중국 정부가 앞으로 수십년을 내다보고 미국과 유럽의 다음세대 인적기반과 경제기반을 파괴시키기 위해 자국민을 수만명 희생시키더라도 황인종보다는 백인종의 유전자에 더 치명적으로 작용하도록 인위적으로 RNA가 조작된 생물학병기인 코로나19 바이러스를 만들어 유출시켰다는 음모론이 퍼지고 있다. 실제로 중국, 한국, 일본 등 아시아 국가보다 미국, 유럽 국가들에서 코로나바이러스 전염과 치사율이 훨씬 더 높으며, 아시아 국가에서는 코로나 19에 감염된 소아들이 큰 후유증 없이 치료되었으나 미국, 유럽에서는 코로나 19에 감염된 소아들에게 소아 다기관 염증 증후군이라는 괴질이 발생한 것이 생물학병기설의 근거가 되고 있다.[11]
  • 유라비아


[1] 이 말은 당시 상황과는 다르지만 북한중국기독교를 탄압하는 공산주의 국가가 되면서 어느 정도 현실이 되었다.[2] 이 소개문을 쓴 티모시 양(Timothy Yang)은 현재는 오리건 주의 퍼시픽대학교의 교수로 부임 중이다.[3] 이게 무슨 소린가 싶지만, 사실 19세기 당시와 심지어는 그 이후 이오시프 스탈린 때까지도 볼가 강 유역에 독일어를 쓰는 인구가 실존했다.[4] 실제로 역사학계에서 빌헬름 2세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이뤄놓은 것을 까먹기 바빴다는 평가를 많이 받는다. 이런 평가를 유독 가혹히 하는 대표적인 학자가 하버드대학교의 조지프 나이.[5] Buruma, Ian. <Inventing Japan: 1853-1964>. London: Weidenfeld & Nicolson, 2004[6] 속어로 "쿨리(Coolie)"라고 칭하고 있다.[7] 심지어는 어린이용 학습동화의 저자로 유명한 닥터 수스(Dr. Seuss)까지 저런 포스터를 그리던 시절이다![8] 미국인들, 심지어는 한국계 미국인들도 잘못 아는 경우가 있는데 LA 폭동의 공식적인 시발점은 보통 로드니 킹 사건으로 본다. 적어도 현대사학계에서 LA 폭동의 시발점이 두순자 사건이었다고 공공연히 주장하는 학자는 없다고 봐도 된다.[9] 청나라 중기에 청의 인구가 폭발한 원인을 여기에서 찾는 학자들이 많다.[10] 도교는 동양적인 시각에서는 도가 사상을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완전히 "토착종교"로 보기는 어려울 수 있지만, 당시 서구인들의 시각으로는 토착종교의 정의에 완전히 부합했다. 애당초 서구에서 "Religion"이라는 용어를 로마 가톨릭이나 동방정교회 외의 종교에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400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11] 다만 미국과 유럽 등 서방 진영을 약화시키는 데 성공하더라도 중국이 바보가 아닌 이상 북한, 러시아, 파키스탄, 이란 등의 기존의 우방국들까지 포기하고서라도 바이러스를 만들었겠냐는 반론도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