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 코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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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coat
과거 영국 육군 및 해병대가 입던 붉은색 군복 혹은 그 군복을 입은 영국 육군 군인을 말한다. 영국 육군 보병의 별명이자 한 때 세계를 주름잡던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British Empire)의 아이콘이라 할만하다.
그 기원은 청교도 혁명 중 올리버 크롬웰에 의해 만들어진 신식 군대(New Model Army)이다. 당대에 상대적으로 값이 싼 코치닐 염료를 활용하였기에 '''붉은색'''으로[1] 복식을 물들였고, 몽골의상 → 폴란드 기병군복 → 귀족옷의 단계를 거쳐 이전부터 서유럽 군인들의 군복으로 자리하게된 프록 '''코트'''를 물들여 입었다.
상대적으로 육군이 약한 영국이지만 그 군인들은 약골이 아니라서 소수의 병력으로 그야말로 세계를 정복했다. 그런 그들의 군복을 따서 지은 영국 육군 보병의 별명. 영국 해군에 파견보내던 육군 연대를 아예 해군에 배속시켜 만든 영국 해병대 역시 육군 보병의 레드 코트를 입었으며, 이러한 색상덕에 조리시 붉은색이 되는 랍스터가 그들의 멸칭으로 따라붙게 되었다.
물론, 모든 육군 병력이 붉은색 군복을 입진 않았고, 라이플 연대는 흑록색 군복을 입는 등 일부 부대는 다른 색상의 피복을 입기도 했으나 소수였다.
특히 영국군은 17~19세기 선형 전투에서 타국에서는 기본적으로 3열로 전열을 갖춰 전투를 치르는 데에 비하여 특이하게 2열의 얇은 전열을 짰는데 이는 영국군이 사격과 속사를 중시했기 때문이다. 좀더 이야기 해보자면 타국에서는 1열 사격 2열 사격준비 3열 재장전의 단계를 거쳐 사격에 임했는데 이는 플린트 락 머스킷 특유의 느린 재장전 속도 때문이었다. 게다가 병사들이 사격에 쓸 재료인 부싯돌과 화약은 턱없이 비쌌으며 사격을 연습한다 하더라도 부싯돌을 끼울 곳에 나무조각을 끼워넣는 식으로 사격연습을 했고, 따라서 사격전보다는 백병전을 중시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영국은 상대적으로 우월한 국력을 바탕으로 인도를 확보한 이후에는 엄청난 양의 초석 광산을 통해 막대한 화약을 확보하여 실탄 사격연습을 할 수 있었으며 특히 속사를 연습할 수 있었다. 타국에서는 3열로 구성된 병력이 느린 속도로 사격전을 감행할 때 영국군은 2열로 구성된 병력들이 더 빠른 속도로 사격에 임했다. 게다가 같은 병력을 3열로 나누어 순차사격 하는 것보다 2열로 나누어 순차사격을 하면 사격 할때 탄환의 밀집도가 이론적으로 1.5배 올라간다. 영국군은 거기에 더해서 2열이 동시사격을 해대기도 했다. 이렇게 되니 3열 이상으로 나뉘어 순차사격을 하는 적보다 압도적인 화력을 낼 수 있었던 것. 이는 병사 개개인의 숙련도와 정예도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으며 영국군은 상대적으로 적은 병력으로도 적의 대병력을 맞이하여 대등한 전투를 벌일 수 있었다.
이런 영국군 특유의 가늘지만 야무진 붉은 전열을 가리켜 '씬 레드 라인'이라고도 한다. 앞서의 특성 때문에 영어 숙어로 '특정 지역, 주의를 지키는 용감한 소수인들'이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동명의 전쟁영화도 있다.
레드 코트를 전장에서 밀어낸 것은 역시 시대가 바뀌면서 원색의 군복이 더이상 전장 환경에 맞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총의 명중률도 좋지 않고, 대열 유지가 중요하기 때문에 화려한 원색의 군복이 오히려 실용적이었으나[2] , 그 이후 보어 전쟁에서 눈에 잘 띄는 붉은 레드 코트가 보어군의 좋은 과녁이 되면서(...) 영국 육군은 레드 코트는 물론 흰색 장구들까지 전면적으로 폐지하였고 카키색 군복으로 교체했다. 이는 나중에 제1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군은 물론이고 독일군보다도 사망 비율을 줄일 수 있었던 중요한 결정이었다.[3]
육군 뿐 아니라 해병대 역시 19세기 말에 육군과의 구분 및 해군 소속임을 보다 명확히 하기 위해 검정색으로 옷을 바꿨고, 지금도 정복 색상을 검정으로 유지하고 있다.
붉은색 군복의 영국 육군과 대조되게, 혁명기와 제정기 프랑스 육군은 푸른 군복을 입었고, 혁명기 이전 부르봉 왕조 때에는 흰색 군복을 입었다. 마찬가지로 부르봉 왕가 시기의 에스파냐 육군 역시 흰색을 입었으며, 오스트리아 육군의 군복도 흰색이었다. 프로이센 육군은 특유의 군청색, 흔히 프러시안 블루라고도 알려진 색의 군복을 입었으며, 러시아 육군은 표트르 대제 시대에는 녹색, 이후 18세기에는 영국과 흡사한 붉은색, 나폴레옹 전쟁기에는 다시 녹색의 군복을 입었다. 자세한 내용은 전열보병 문서 참조.
최근에는 영국 일각에서 현재의 1, 2차 대전식 카키정복이 아니라 이 레드코트 풍의 붉은 정복으로 돌아가자는 이야기도 있다. 지금처럼 카키색의 정복과 붉은색 예복이 나뉘어 있는 걸 정복을 폐지하고 붉은 예복만 줘서 정복을 겸하게 하면 되려 피복비가 절감된다는 주장도 있는데[4] 이미 카키색 정복이 100년 넘게 사용된터라 일선의 평은 뭥미? 라는 반응이 지배적이다.
오래된 관습에서 벗어나 경제와 비용도 생각해야된다고 하며 아직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왕실이 아직도 있는''' 영국 땅에서 "전통을 내다버려라!"하고 주장한다는게...[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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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독립전쟁 당시의 육군 군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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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전쟁 당시의 육군 군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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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레드 코트. 왼쪽은 아이리시 가드의 명예 대령 예복을 입은 윌리엄 왕자, 오른쪽은 육군 항공대의 예복을 입은 해리 왕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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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육군의 현용 카키색 정복을 입은 닉 호턴 장군.
1. 개요
Redcoat
과거 영국 육군 및 해병대가 입던 붉은색 군복 혹은 그 군복을 입은 영국 육군 군인을 말한다. 영국 육군 보병의 별명이자 한 때 세계를 주름잡던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British Empire)의 아이콘이라 할만하다.
2. 역사
그 기원은 청교도 혁명 중 올리버 크롬웰에 의해 만들어진 신식 군대(New Model Army)이다. 당대에 상대적으로 값이 싼 코치닐 염료를 활용하였기에 '''붉은색'''으로[1] 복식을 물들였고, 몽골의상 → 폴란드 기병군복 → 귀족옷의 단계를 거쳐 이전부터 서유럽 군인들의 군복으로 자리하게된 프록 '''코트'''를 물들여 입었다.
상대적으로 육군이 약한 영국이지만 그 군인들은 약골이 아니라서 소수의 병력으로 그야말로 세계를 정복했다. 그런 그들의 군복을 따서 지은 영국 육군 보병의 별명. 영국 해군에 파견보내던 육군 연대를 아예 해군에 배속시켜 만든 영국 해병대 역시 육군 보병의 레드 코트를 입었으며, 이러한 색상덕에 조리시 붉은색이 되는 랍스터가 그들의 멸칭으로 따라붙게 되었다.
물론, 모든 육군 병력이 붉은색 군복을 입진 않았고, 라이플 연대는 흑록색 군복을 입는 등 일부 부대는 다른 색상의 피복을 입기도 했으나 소수였다.
특히 영국군은 17~19세기 선형 전투에서 타국에서는 기본적으로 3열로 전열을 갖춰 전투를 치르는 데에 비하여 특이하게 2열의 얇은 전열을 짰는데 이는 영국군이 사격과 속사를 중시했기 때문이다. 좀더 이야기 해보자면 타국에서는 1열 사격 2열 사격준비 3열 재장전의 단계를 거쳐 사격에 임했는데 이는 플린트 락 머스킷 특유의 느린 재장전 속도 때문이었다. 게다가 병사들이 사격에 쓸 재료인 부싯돌과 화약은 턱없이 비쌌으며 사격을 연습한다 하더라도 부싯돌을 끼울 곳에 나무조각을 끼워넣는 식으로 사격연습을 했고, 따라서 사격전보다는 백병전을 중시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영국은 상대적으로 우월한 국력을 바탕으로 인도를 확보한 이후에는 엄청난 양의 초석 광산을 통해 막대한 화약을 확보하여 실탄 사격연습을 할 수 있었으며 특히 속사를 연습할 수 있었다. 타국에서는 3열로 구성된 병력이 느린 속도로 사격전을 감행할 때 영국군은 2열로 구성된 병력들이 더 빠른 속도로 사격에 임했다. 게다가 같은 병력을 3열로 나누어 순차사격 하는 것보다 2열로 나누어 순차사격을 하면 사격 할때 탄환의 밀집도가 이론적으로 1.5배 올라간다. 영국군은 거기에 더해서 2열이 동시사격을 해대기도 했다. 이렇게 되니 3열 이상으로 나뉘어 순차사격을 하는 적보다 압도적인 화력을 낼 수 있었던 것. 이는 병사 개개인의 숙련도와 정예도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으며 영국군은 상대적으로 적은 병력으로도 적의 대병력을 맞이하여 대등한 전투를 벌일 수 있었다.
이런 영국군 특유의 가늘지만 야무진 붉은 전열을 가리켜 '씬 레드 라인'이라고도 한다. 앞서의 특성 때문에 영어 숙어로 '특정 지역, 주의를 지키는 용감한 소수인들'이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동명의 전쟁영화도 있다.
2.1. 퇴출
레드 코트를 전장에서 밀어낸 것은 역시 시대가 바뀌면서 원색의 군복이 더이상 전장 환경에 맞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총의 명중률도 좋지 않고, 대열 유지가 중요하기 때문에 화려한 원색의 군복이 오히려 실용적이었으나[2] , 그 이후 보어 전쟁에서 눈에 잘 띄는 붉은 레드 코트가 보어군의 좋은 과녁이 되면서(...) 영국 육군은 레드 코트는 물론 흰색 장구들까지 전면적으로 폐지하였고 카키색 군복으로 교체했다. 이는 나중에 제1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군은 물론이고 독일군보다도 사망 비율을 줄일 수 있었던 중요한 결정이었다.[3]
육군 뿐 아니라 해병대 역시 19세기 말에 육군과의 구분 및 해군 소속임을 보다 명확히 하기 위해 검정색으로 옷을 바꿨고, 지금도 정복 색상을 검정으로 유지하고 있다.
2.2. 타국의 군복
붉은색 군복의 영국 육군과 대조되게, 혁명기와 제정기 프랑스 육군은 푸른 군복을 입었고, 혁명기 이전 부르봉 왕조 때에는 흰색 군복을 입었다. 마찬가지로 부르봉 왕가 시기의 에스파냐 육군 역시 흰색을 입었으며, 오스트리아 육군의 군복도 흰색이었다. 프로이센 육군은 특유의 군청색, 흔히 프러시안 블루라고도 알려진 색의 군복을 입었으며, 러시아 육군은 표트르 대제 시대에는 녹색, 이후 18세기에는 영국과 흡사한 붉은색, 나폴레옹 전쟁기에는 다시 녹색의 군복을 입었다. 자세한 내용은 전열보병 문서 참조.
3. 여담
최근에는 영국 일각에서 현재의 1, 2차 대전식 카키정복이 아니라 이 레드코트 풍의 붉은 정복으로 돌아가자는 이야기도 있다. 지금처럼 카키색의 정복과 붉은색 예복이 나뉘어 있는 걸 정복을 폐지하고 붉은 예복만 줘서 정복을 겸하게 하면 되려 피복비가 절감된다는 주장도 있는데[4] 이미 카키색 정복이 100년 넘게 사용된터라 일선의 평은 뭥미? 라는 반응이 지배적이다.
오래된 관습에서 벗어나 경제와 비용도 생각해야된다고 하며 아직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왕실이 아직도 있는''' 영국 땅에서 "전통을 내다버려라!"하고 주장한다는게...[5]
4. 창작물
(대륙군이 접근하는 영국군에게 선제 사격을 가한다. 가브리엘이 뒤를 돌아보자 아버지 벤저민이 있다)[6]
가브리엘 마틴 : 돌아가지 않을 거에요.[7]
벤저민 마틴 : 그래. 나도 그럴 거라고 기대하진 않았다.
(벤저민, 전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쉰다)
벤저민 마틴 : 게이츠 저놈은 빌어먹을 병신이야. 영국 육군에 너무 오래 있었어. 탁 트인 야지에서 레드 코트랑 정면으로 맞붙으려고 하다니 이건 미친 짓이야.[8]
(영국군, 더 가까이 접근하여 사격을 개시한다.[9]
일제사격 한방에 대륙군의 전열이 무너지고, 대륙군은 패퇴하기 시작한다.)벤저민 마틴 : 이 싸움은 시작하기도 전부터 진 거야.[10]
(영국군의 포격과 기병 돌격으로 전열이 무너진 대륙군은 혼비백산하여 후퇴한다.)
5.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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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독립전쟁 당시의 육군 군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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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전쟁 당시의 육군 군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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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레드 코트. 왼쪽은 아이리시 가드의 명예 대령 예복을 입은 윌리엄 왕자, 오른쪽은 육군 항공대의 예복을 입은 해리 왕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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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육군의 현용 카키색 정복을 입은 닉 호턴 장군.
6. 관련 문서
[1] 사실 코치닐은 굉장히 비싼 염료였다. 멕시코산 연지벌레를 산 채로 짓이겨 내는 즙을 이용해 만드는 염료가 코치닐이었는데, 사르가소 해 항로를 개척하기 전까지만 해도 대서양 항로를 건너면 겨우 10%만 살아남았기 때문. 소설 베니스의 개성상인에서 이 부분을 매우 잘 다뤘다. 그런데 사실 이게 삽질인것이, 아무도 현지에서 염료를 만들어서 유럽으로 운반할 생각을 하는 경지에는 도달하지 못한 것 같다(...). 실제로도 벌레의 생존 문제로 인해 가격이 비쌌다는 기록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어 신빙성이 다소 떨어지고, 코치닐이 비싼 진짜 이유는 신대륙에서 들여오는 운송비용+엄청난 연지벌레의 필요량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장 코치닐 단 1kg을 만드는데에 약 '''16만 마리'''의 연지벌레가 필요했다고 하니 이걸로 제식 군복을 대량으로 물들이는 것은 여간 돈이 깨지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비싼 염료를 쓴 이유는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값이 싸기 때문이다.[2] 덤으로 하층민 출신이 많은 병사들에게 당시 신사들이나 입는 형태의 화려한 옷을 입혀줘서 사기진작 효과도 있었다. 다만 그때문에 멋진 옷에 혹할 이유가 없던 귀족들(애초에 귀족들은 전부 장교로 참전했다)이나 신사들에겐 사병입대를 고려할 이유도 전혀 없었으며, 따라서 사병 지원자들의 질적수준은 대체로 도시 빈민, 시골뜨기, 범죄전과자 등으로 떨어졌다.[3] 개전 시점 독일과 프랑스의 복식을 보았을 때 독일군은 피켈하우베의 반짝이는 촉이 눈에 매우 잘 띄었고, 프랑스군은 군장 맨 위에 냄비를 올려놓는 바람에 더 눈에 띄었다. 출처: 1차세계대전사, 존 키건[4] 미육군은 2006년에 이런 아이디어가 나와서(사족으로 미육군은 블루 코트) 2015년 10월부터 시행했다.[5]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레드코트가 대영제국의 번영과 왕조의 상징이라면, 카키색 군복은 1, 2차 세계 대전을 극복한 영국의 노련함과 투지의 상징이다. 카키색 군복 역시 상징성이 있는 만큼 굳이 레드코트로 회귀할 이유가 없다.[6] 플린트락 머스킷이 사용되던 시절에는 총의 명중률이 영 좋지 않아 1파, 2파를 맞아주며 가까이 들어가서 사격하고 백병전에 돌입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게다가 대륙군은 훈련이 부족해 사격할 때 화염과 연기에 놀라 총구로부터 눈을 돌릴 정도인데 상대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실탄 사격 훈련을 하던 최정예 영국군이다. 영상 내 영국군이 집중사격을 받고도 대륙군의 저열한 훈련도 때문에 소수의 병력만 사상한 것과 달리 영국군 특유의 씬 레드 라인의 포화를 감수하고 파고들기를 시도하던 프랑스군, 대륙군, 제정 러시아군 등은 1, 2열이 그야말로 삭제당하는 것을 감수해야 했다.[7] 위 영상에는 부대로 복귀하지 않겠다고 오역을 해놨지만 집으로 돌아가지는 않는다는 의지 표명이다. 작 중 가브리엘은 아버지 벤저민의 허락 없이 대륙군에 입대했다.[8] 당시 영국 육군의 전열보병은 영국의 막대한 군비에 힘입어 유일하게 실탄을 이용하여 훈련했기에 당대 유럽에서 뛰어난 훈련도와 강함으로 위명을 떨쳤다. 민병대 수준을 겨우 벗어난 당시 미 육군 전열보병들이 전면전으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위 영상에도 미국 보병들이 머스킷을 쏠 때 화약접시의 불꽃에 겁먹고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자주 보인다. 사격할 때는 눈만 질끈 감아도 조준선이 흐트러지기 쉬운데, 안그래도 잘 안맞는 머스킷으로 저래대니 사격 명중률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는 그만큼 훈련도가 처참했다는 이야기도 된다. 뿐만 아니라 레드 코트들은 일제사격 한 번 맞는 것을 감수하고 더 접근해서 사격했다. 영국군의 훈련도가 대륙 육군보다 더 높았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으로 실제로도 저렇게들 했다. [9] 자세히 보면 대륙군과 영국군의 머스킷 종류가 다른데 대륙군은 프랑스에서 지원받거나 7년 전쟁 당시 획득한 샤를비유 머스킷으로, 당시 프랑스군 제식 머스킷보단 한 두세대 전 모델이긴 해도 머스킷계의 명품으로 불린 명중률 높은 머스킷으로 무장했다. 반면 영국군은 구경은 더 크지만 샤를비유 머스킷에 비해 몇 퍼센트 모자라다던 평가를 받던 브라운 베스 머스킷으로 무장했다.[10] 다만 실제 캠던 전투는 저것과는 좀 다르게 진행되었다. 당시 대륙군은 병력 수와 포문 수에서 영국군에 비해 2배 정도 많았으나 병력의 질은 영국군이 좀 더 좋았다. 전통적으로 영국군은 우익에 정예를 배치하는 경향이 있었고, 당시 대륙군 지휘관이었던 게이츠도 영국군 장교 시절 하던 대로 우측에 전투경험이 있는 정예를 배치했다. 문제는 좌측에 배치한 게 전투경험이라곤 하나도 없는 새파란 민병대 신병뿐이었다는 것. 반면 대륙군 좌익에 맞서는 영국군 우익은 바로 그 레드 코트였으며, 대륙군 우익에 맞설 영국군 좌익도 왕당파 민병대가 좀 섞이기는 했지만 기본적인 훈련도와 실전경험은 있었다. 양군이 교전에 들어가자 오합지졸이었던 대륙군 좌익은 영국군 우익에게 신나게 얻어터졌고, 전투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상당수의 병력이 죽거나 도망쳐 버렸다. 반면 영국군 좌익은 대륙군 우익과의 교전에서 다소 밀리긴 했지만 일단 버티고는 있었다. 대륙군 좌익이 모조리 털리자 전장에 남은 대륙군 우익이 열심히 버텨봤지만, 영국군 좌익/우익의 포위공격을 받다가 영국군 기병대에 뒤통수를 거하게 맞아 완전히 와해되었다. 물론 결정적인 패인이 훈련도 부족이었다는 점과, 기병대의 공격이 전투의 피날레를 장식했다는 점은 영상과 동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