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열보병

 


'''【언어별 명칭】'''
'''한국어'''
전열보병(戰列步兵)
영어
Line infantry
일본어
戦列歩兵(せんれつほへい)
터키어
Hat piyadesi
프랑스어
Infanterie de ligne
1. 개요
2. 역사적 배경
2.1. 선형진과 발전
2.2. 전열보병은 돈을 아끼기 위한 것이다?
3. 전열보병은 왜 이렇게 싸웠는가?
3.1. 근본적인 원인: 머스킷의 근본적 한계와 전장의 특성
3.2. 부수적인 원인: 병사들의 낮은 사기?
3.3. 전열보병의 싸움은 단순한 소모전인가?
4. 훈련
5. 쇠퇴
6. 조선에선?
7. 이 시대 각국의 군복
8. 참조할 만한 글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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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0) 영화 군주의 하인(Sovereign's Servant) 中
영화 패트리어트
[1][2][3]
본격적으로 머스킷이 전장의 주역이 되면서 그에 따른 전법으로 열을 짜서 싸운 보병을 가리키는 말. 영어로는 line infantry, 부대 단위로 부를 때에는 Infantry를 생략하고 Line company(전열보병중대), Line battalion(전열보병대대) 식으로 부른다. 18세기 초반에 등장하기 시작하여 7년 전쟁, 나폴레옹 전쟁 등에서 그 위력을 과시하였다.
참고로 전열보병이 사용하는 진형인 '''선형진'''(line formation)이나 전술인 '''선형전술'''(linear tactics)을 보고 인터넷에서는 '''라인배틀이란 용어를 쓰는데, 이는 잘못된 용어'''이다. 비슷한 라인 오브 배틀(line of battle)이란 용어가 있으나 일반적으로 형성되는 "전선(戰線)"을 통칭하는 용어이다. 애초에 우리가 한국어로 '전선'이라고 쓰는 것 부터가 일본에서 'line of battle'을 '戰線'으로 번역하는 것을 그대로 따온 것이다.[4]
한국사에서도 전열보병을 상대한 적이 있다. 최초는 나선정벌 당시의 러시아군과의 교전으로 신류 장군은 북정록에서 러시아군의 전열보병 전술에 강한 인상을 받았던 것을 기록으로 남겼다. 이후 병인양요, 신미양요 때도 전투가 벌어졌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해군은 정족산성에 포격 지원도 없이 돌격하다가 큰 피해를 봤고, 이와 달리 신미양요 때 미 해군은 충분한 함포 및 상륙한 해병대 야포의 지원을 받으며 광성보를 함락시켰다.
현재는 거의 사장된 병과 용어지만 영단어 'Line Infantry'는 정규 보병들을 지칭하는 단어로서 가끔씩 쓰이기도 한다. 전열을 이뤄 싸운다기보다는 전역에서 전선을 형성하는 보병들이라는 뜻이다.

2. 역사적 배경


초기의 조악한 핸드캐논이 점차 사수와 지휘관의 사격통제가 가능한[5] 정밀한 화승총으로 발전함에따라 전장은 일대의 격변을 맞이한다. 핸드캐논과 달리 화승총은 사용하기 쉬웠고, 정밀도가 높았기 때문에 사냥용으로도 사용할 수 있었고, 곧이어 전문 사수들이 등장하였다.[6] 하지만 아르퀘부스 계열과 머스킷 계열의 화승총들은 그 가격이 비싸 대중적으로 보급하기는 무리였기에 낮은 숙련 난이도에도 불구하고 15세기 소수의 우수한 총사들에 의해 변칙적으로 사용되는데 그쳤다.
그러던 16세기 파비아 전투에서 우수한 스페인 총병대들의 일제사격으로 스위스용병대와 프랑스 기병대를 말 그대로 분쇄하는데 성공하면서 전장의 주역으로 급부상하게 된다. 이 당시의 총사들은 나름 고급병과였는데[7], 때문에 그 훈련도와 사기가 높기로 유명했다. 하지만 긴 장전시간으로 인한 취약점으로 인해 무거운 총기 외에는 몸을지킬 대형 냉병기를 확보하기 힘들었고, 때문에, 행여나 상대방 기병이 들이닥치면 꼼짝 없이 당해야 했다.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스 중장기병이 화승총 사격에 괴멸하기는 하였으나 이후 주요부위에 대한 두께를 늘리고 범위를 줄인 방탄갑옷이 등장한데다 기병도 총을 들고 다니게 되면서 총사들의 단발 사격이 상대 기병을 완전히 압도하기는 힘들었기 때문이다.[8][9] 이를 해결하고자 평소엔 장창병이 안에, 사격병이 밖에 포진하여 사격전을 벌이다 기병이 돌격해오면 두 병과의 위치를 신속하게 바꾸어 대적한다는 개념의 진형이 탄생했다. 꽤 훈련이 필요하긴 했지만 이 스페인 테르시오는 이후 약 60년에 걸쳐 무적으로 유럽에 군림하며 그 전과에 주목한 각국도 비슷한 전술을 모방하게 된다.
앞서 언급하다시피 당시의 총사들은 훈련도가 매우 높았기 때문에 자유자재로 사격을 하는데 능했고, 상대 보병 혹은 기병에 최대의 충격을 주기 위해서 여러 열의 순차적인 일제사격을 선호했다. 하지만, 16세기 이후로 넘어가면서 총이 점차 대중적인 무기가 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숙련되지 않은 총사들이 다수 생겨났으며, 빠른 재장전속도를 통한 빠른 연사를 선호하게 되면서 탄자직경이 총열 직경보다 많이 작아지게 되어 명중률이 많이 낮아지게 되었다.[10] 때문에 소수의 많은 열을 통한 지속사격보다는 다수의 적은 열을 통한 대규모 화망구성으로 교리가 변해갔다. 즉, 한 사람이 적 한 사람을 목표로 두고 쏘는 것이 아니라 단체로 산탄총을 쏘듯이 넓게 퍼지게끔 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총알도 한번에 하나만 넣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큰 총알 앞에 작은 총알을 두세개 더 넣어서 쏘기도 했다.
이 시기의 머스킷이나 화승총의 낮은 명중률로 인해 진정한 화력을 유도하게 하기 위해선 화망이 중요했다. 반면 주적이 청의 기병이었고 사격전 이후 난사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불필요한 화약 소모를 줄이고자 했던 조선에서는 대규모 화망에의한 일제사격보다는 숙련된 사수에 의한 원거리(100~120보) 조준사격을 더 선호했다. 팔기군 특성상 통상 조총 유효사거리인 50보 정도로는 한발 쏘면 이미 적의 기병이 눈앞에 도달하는 상황이니 그보다 먼 거리에서 예봉을 꺾어야 하는데 효율적인 제압에 난사는 곤란했다. 기병 특성상 표적지(사람+말)가 커서 보병보다 조준사격 하기가 용이하기도 하고.
잘 통제된 숙련된 사수들에의한 개별 사격은 나선정벌의 조선군 조총부대와 같은 결과를 낳기도 했다. 당시 러시아군은 플린트록 머스킷을 사용하는 전열보병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고르고 고른 조선 조총수들의 개별 사격에 압도되었다. 후장식 라이플이 주력으로 자리잡기 이전 전장식 머스킷 수준에서는 어느정도 기술 격차가 있어도 숙련도와 전술로 극복한 사례가 세계사적으로 없지 않다.
물론 서구에서도 경보병등의 산병 병과들은 조준 사격을 실시했고 전열보병들 보다 더 먼거리에서 사격했으며 기존의 선형 전술을 포함해 산개해 은엄폐한 후 조준사격을 융통성있게 활용했다. 조선이라고 항상 조준사격에만 의존한것은 아니며, 이인좌의 난 당시 관군은 가공할 만한 일제 사격으로 반란군 보병들을 도살한적이 있다. 경보병과 같은 병과는 임시 편제가 아닌 군의 정식 편제였으며 서구라 해서 조준사격이 등한시 되었던건 절대 아니었다. 오스만 투르크 또한 화승총을 도입한 이래에 조선처럼 조준사격을 주로 행하였으나, 이후에는 유럽의 전열전술이 효과적이라 판단, 그대로 도입하게 된다.
전장의 주역이 보병으로 옮겨간 후 총의 비율은 계속해서 높아져가 16세기 말에는 50%를 넘기기 시작하였고, 테르시오 전술은 스페인이 로크루아에서 패배하여 무패 행진을 끝냄과 동시에 사라짐으로써[11][12] 마우리츠가 제창한 선형진이 각광을 받기 시작한다. 이후 총검이 개발되면서 총병이 창병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되자 장창은 완전히 퇴출되고 총의 시대가 된다.[13]

2.1. 선형진과 발전


[image]
최초로 실전에 쓰였다고 알려진 마우리츠 선형진
선형진은 전열보병의 프로토타입격 전술인데, 16열로 늘어서는 기존 총병대와는 달리 2~3열로 늘어서는 선형진을 선보였다. 하지만 창안된 시기에는 아직 총기의 화력이 강력하지 못했었다. 창안된 이유 역시 당대 최고의 전술로 여겨지던 테르시오를 상대하기 위한 의도였으나, 오히려 테르시오 전술에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해 사장 당했다.[14][15]
이후 30년 전쟁이 발발하자 신교측은 테르시오 대신 선형진을 채택하여[16] 전쟁에 임했으나 역시나 아직은 전술의 발전이 더뎠고 초기 신교군에는 별다른 명장이 없는 반면 가톨릭 및 제국군 측은 당대 최강이었던 스페인 테르시오에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요한 체르클라에스 폰 틸리 등의 명장이 버티고 있었기에 신교군은 계속해서 깨지기만 했다. 그러나 구스타프 2세 아돌프의 등장은 이런 국면을 대대적으로 전환시키는데, 선형진의 머스킷 위주의 화력과 더불어 부족한 화력을 가죽포 등의 경량화시킨 포병과 연계하여 메우고 화력이 부족한 테르시오 측에 지속적인 손해를 강요하여 깨부수는 전술을 들고 나옴으로서 전술의 양상은 차츰 선형진 쪽으로 옮겨간다.
선형진의 전면적으로 널리 퍼지게 된 것은 총검의 등장이었다. 이것으로 기존의 이 가지던 임무는 자연스럽게 머스킷에 적용될 수 있었고 안 그래도 점점 줄어드는 추세였던 파이크가 총으로 완전히 대체되는 계기가 되었다.[17] 때문에 창과 총을 겸하는 당대 "최고의 무기"인 총으로 "최선의 전투방법"을 찾다보니 어느새 전열을 갖추고 사격을 주고받게 된 것이었다. 산개가 원칙인 현대 보병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이해가 힘들다면, 창에서 총알이 나갈 수 있게 개조했다고 생각해보면 간단하다. 진형을 이루고 창검을 맞붙이는 중세 백병전에서 냉병기를 그저 총으로 대신했다고 생각하면 저런 선형진을 이해하기가 쉽다. 보다 더 쉽게 말하면 당시 보병들은 총이라는, 100미터짜리, 때에 따라서는 150미터까지 늘어나는 창을 새로이 들게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전열보병은 동서고금 어디에나 있었던 밀집한 보병방진의 연장선에 있으며 제대간의 교전거리가 늘어났다 뿐이지 여전히 고중세의 회전의 영역 아래에 있는 밀집한 보병의 진형과 진형의 싸움이었고 이 틀을 크게 벗어날 수는 없었다. 총으로 인한 현대보병의 이미지가 겹쳐 편견을 가지면 제대로 이해 할수가 없음은 자명하다.
사실 근대 이전 인류의 전쟁은 회전이 중심이었고 동서고금 밀집대형이 항상 기본이었다. 테르시오도 선형진도 그 연장선에 있었고 오히려 화력의 발전으로 선형진과 그 후대 전술은 더 얇게 개량되었다.
대포의 경량화, 발전된 정확도, 커진 구경으로 인해, 기존의 밀집 대형을 이루면(ㅁ 모양) 순식간에 몇십 명이 몰살당할 가능성이 늘어났고(한 지점에 더 몰려있는 거니까), 창과 달리 총은 최대한 많은 수가 동시에 발사할 때 화력이 나오기 때문에 대형은 2~3열 정도로 얇아지면서 대신 횡대로 길게 늘어나게 되었다. 기술 발달로 매치락플린트락으로 대체되어 12열씩 늘어서지 않고도 3열 이내에서 순차적으로 장전, 사격을 나눌 수 있게 되었다.


2.2. 전열보병은 돈을 아끼기 위한 것이다?


프랑스 혁명전쟁 문서를 참조하면 알겠지만, 징병제를 통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프랑스군의 전례를 시작으로 유럽 국가 다수가 대규모 상비군 체계로 전환되었다. 그 결과 십만 단위로 군대의 규모가 증가했다. 이 시절에도 군대는 '숙련된 사수'를 구하거나[18] 키워서 운용해왔다. 이렇듯 당시 군대 역시 경보병의 높은 전투력을 알고 있었지만 여전히 전열보병이 군대의 주축을 담당하게 만들었다.
돈을 적게 쓰기 위해서라는 주장대로라면 당시 프랑스러시아가 대포에 미친듯이 투자하거나 영국이 함포에 투자를 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애시당초 이런 주장은 중앙집권화와 생떼띠엔, 툴라, 엔필드 같은 조병창 시스템이 확보되고 국가세수의 증대가 이루어 졌다는 것을 간과한 주장이다. 토크멘터리 전쟁사를 인용해 베네치아 공화국의 사례를 들어 반박하는 주장도 있지만 17~19세기 절대왕정 시대의 조병창, 전열보병 시스템과 근세기 용병, 15~16세기 길드가 동일선상에 놓일 수는 없다.#
100만 가까운 병력을 뽑아내면서 70만을 전선에 동원한 프랑스나 250만의 인구에서 20만의 상비군을 뽑아낸 프로이센의 사례를 보다시피 돈 때문에 전열보병을 운용했다는 주장은 말이 되지 않는다. 1812년 러시아 원정 시기 프랑스 대육군의 전체 대포 숫자가 1만 5천 문이었다. 돈이 문제라면 상비군이나 시민군 같은 근대적 징병제도 역시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전열보병의 유지비에 대한 것은 생각해볼 여지가 있는데, 당연한 얘기지만 군인의 계급과 역할에 따라 임금은 판이하게 다르고, 일반 시민의 임금 역시 하는 일에 따라서 판이하게 다르다. 따라서 군인이 받는 돈이 일반 시민이 받는 돈에 비해 얼마나 많았는가를 통상적으로 따지기는 어렵다. 다만 한가지 예시를 들 수 있는데, 7일을 전부 일한다는 조건 안에서 영국군 보병의 경우 당시 도공(도자기 기술자)에 비해 두배정도의 임금을 받았다. 이렇게 보면 상당히 비싸게 보이지만 당시의 군인들 중 상당수는 자신의 장비와 식사를 전부 사비로 충당(혹은 임금에서 제하는 형태)했기 때문에 실제로 손에 들어오는 임금은 그보다 더 적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결국 전열보병의 유지비가 그렇게 비싼가? 만 따지고 본다면 생각보다 그렇지도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애초에 전열보병이 돈을 아끼기 위한 것이었나? 라는 질문 자체도 올바르지 않은 것이, 전열보병의 발생과 주력화는 당시 무기의 발전과 시대상을 반영한 결과이지 돈의 유무로 결정될만한 일도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한가지 추론을 해보자면, 실제 18세기 영국 보병의 임금이 그렇게 높은 편은 아니었다는 점과 총이라는 무기가 냉병기에 비해 많은 숙련도를 요구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미루어 보았을 때, 전열보병이 이전의 보병들에 비해서는 싼 값에 운영할 수는 있었다는 것이다.

3. 전열보병은 왜 이렇게 싸웠는가?


[image]

"프랑스의 신사들이여! '''먼저 발포하셔도 좋소'''!"

"말씀은 고맙지만 사양하겠소! 먼저 쏘시지요!"

- 퐁트누아 전투(1745년)에서 '''서로 먼저 쏘라고''' 양보하는 영불 양군

우선 선형진은 절대로 총에 맞춰 새로 등장한 진영이 아니였다. 순간 제압력/저지력[19]을 위해서 한번에 많은 투사체를 발사하는 것은 상식이기 때문에 활, 투창도 같은 방식으로 사용되어왔다. 다만 활을 사용하던 시기에는 갑옷의 존재로 보조 수준으로 활용되었기 때문에 전면에서 선형진을 맞출 필요가 없언던 것일 뿐이며, 초기의 총도 창과 보조를 맞추며 활용되었기에 창과 자리를 바꿔가며 전열을 갖춰왔던 것이다. 그러다 총검의 등장으로 창의 필요가 사라지자 단독으로 전면에서 선형진을 갖추게 된것이다.
요즘 상식으로 생각해보면 전열보병들의 전투 방식은 코앞에 적을 두고 일렬로 마주서서 총을 쏘고 죽거나 다친 병사의 자리를 뒷 사람이 채워서 다시 메우는 전술이 어찌보면 매우 신사적이면서도 몹시 우스꽝스러운 방식의 전투이다. 그 당시에도 이런 양상이 꼴사납게 여겨졌는지, 퐁트누아 전투에서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선빵을 양보하는 해프닝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철학자 볼테르의 저서 <루이15세 시대의 역사>에 따르면, 영국 제1 보병 근위연대(1st Foot Guards)의 사령관 찰스 헤이 경(Sir Charles Hay)은 "프랑스 근위 연대의 신사들이여 먼저 사격하시오" 라고 권했고, 이에 프랑스 장교 드 안테로셰 백작은 "말씀은 고맙지만 우리는 먼저 사격하지 않겠소. 그쪽이 먼저 사격하시오."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선두에 있던 병사들 입장에서는 어이 없을 노릇. 결국, 영국군의 선제사격으로 프랑스군의 1열이 큰 피해를 입었다.하지만, 이긴 건 사격을 양보한 프랑스군이었다. 영국군의 사격을 버텨내고 더욱 가까운 거리에서 사격을 실시해 보다 더 정확한 사격으로 피해를 입힌 덕분에 영국군이 사기를 잃고 후퇴했다는 것이다. 다만, 이 이야기는 볼테르의 저서 이외에는 어디서도 언급되지 않고, 사료검증도 되지 않는 뜬소문일 뿐이다. 이에 대해서는 후술된 읽어볼만한 글 링크자료들을 참조하기 바란다.
물론, 당대에 저런 뜬소문이 퍼졌을 정도라면, 오늘날의 관점으로는 물론이고 당시 관점으로도 흩어져서 엎드려 쏘면 간단히 이길 수 있을 것을 굳이 열 맞춰서 마주 서서 쏘려고 하는 모습을 바보 같이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다.[20] 만약 이러한 전투 형식이 정말로 비효율적이고 비상식적인 것이었다면 전열보병은 진작 사장되고 다른 패러다임이 등장했을 것이다. 전열보병이 주력으로 고집되었던 것은 엄연히 이유가 있었으며, 사람들 생각은 그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전열보병들의 은엄폐사격과 포복은 장교의 통제가 있으면 시행되었고, 사격전은 전열보병들이 버티고 서있는 앞에서 산병(skirmisher)들이 담당했다.
멀리 갈 것 없이, 오스만 제국도 하단에 서술하였듯 전열보병 전술을 받아들였고, 아편전쟁때 청군은 비오는 날 뇌홍도 없는 세포이 전열보병들에게 궤멸당했으며 육전에서 지리멸렬했다. 제 2차 아편전쟁 당시 팔리교 전투에서도 청군의 몽골과 만주 팔기, 그리고 보병들은 영불 연합군의 전열보병이 만들어내는 가공할만한 화력투사에 그야 말로 궤멸되었다. 2만 5천에서 3만명이 동원된 청군과 각각 4천명씩 8천명이었던 영불 연합군과의 전투에서 청군은 궤멸되었고 영불연합군의 사상자는 12명에 불과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이집트 원정때 프랑스군 전열보병 앞으로 달려든 맘루크의 기병들도 마찬가지였다. 2배에서 3배의 병력을 가진 6만의 맘루크군과 그의 동맹군은 18000명의 사망자를 냈고 맘루크군의 기병돌격은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했다. 이 전투에서 2만명의 프랑스군의 전사자는 불과 29명에서 40명이었다.
아편전쟁 이후 청군은 군제 개혁을 통해 그들의 군제를 그대로 받아들였으며[21] 청불전쟁에선 되려 성과를 냈고, 코바이트 난 때의 컬로든 전투나, 프랑스의 베트남 침략 그리고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정벌을 보면 전열보병에게 섣불리 덤빈 냉병기 중심의 구식 군대가 어떠한 피해를 입는지 잘 볼 수 있는데, 러시아의 원정만 봐도 쥘베른이 쓴 저서에서 방진을 짠 러시아군 10여명에게 수백명의 유목민 기병대가 격파당하는 것들이 묘사되어 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밀집하여 일제화력 투사로 제압력을 높이고, 기병돌격, 대포사격 등의 상황에서도 진형을 유지하여 각개격파되는 것을 대비한 것이다. 멀뚱허니 맞아주는게 바보같아 보이지만, 그 당시에는 전열보병을 뛰어넘는 전술이 없었고, 양측 다 전열보병을 기용하니 자연스럽게 지금보면 이상한 형태의 전투가 이루어지는 것.
완벽히 맞다고 볼 수는 없지만, 머스킷 보병은 100m길이의 창을 들고 있다고 보면 대강 이해하기 쉬워진다. 역사적으로 장창방진은 정면 대결에서는 깨지지 않았는데, 그 길이가 100m로 늘어났다. 당시 전장은 현대전과 같은 전선이 아닌 고대나 중세와 똑같은 회전이었고 현대전에서의 총을 생각하는것이 아닌 상술했듯 백미터짜리 창으로 이해하는게 전열보병을 직관적으로 이해하는데 더 도움이 된다. 전열보병의 진형과 전술에 여러가지 합당한 이유를 증명하고 논증할수 있지만 그것은 결국 현대적인 관점에서 과거를 이해하려 노력하는데서 나오는것으로 전열보병을 수십에서 백미터 단위의 사정거리를 지닌 장창 방진의 발전형으로 이해하는게 당대의 전술 발전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느끼는데 더 도움이 된다.[22][23]

3.1. 근본적인 원인: 머스킷의 근본적 한계와 전장의 특성


적을 만나게 되면 삶과 죽음이 한순간에 달려있으니, 얼굴은 누렇게 되고 입은 마르며, 손은 떨리고 다리는 힘이 빠져서 배운 기술은 모두 잊어버린다. 화기(火器)는 더욱 일을 그르치니, 하늘을 향해 쏘기도 하고, 총을 쏘면서 머리를 돌려 도망칠 길을 보기도 하고, 탄환을 입에 머금고 조급하게 총을 쏠 준비를 하다가 뱃속으로 삼켜 버리기도 하고, 탄환 넣는 것을 잊기도 하고, 탄환을 먼저 넣고 화약을 나중에 넣기도 하고, 큰 총구에 작은 탄환을 넣어서 기울여 겨눌 때 탄환이 빠져나오기도 하고, 준비가 끝났는데 화승이 땅에 떨어져 습기에 꺼져버리기도 하고, 혹은 약선의 약이 저절로 타버리기도 한다. '''열 자루의 총 중에 겨우 예닐곱 자루가 발사되고, 그 중에 두세 발의 탄환이 적중될 뿐이다.''' 이것들은 수많은 전투 중에 직접 보고 시험해 보아 알게 된 것이다.

기효신서』 4권 수족편[24]

Lieut.-General Beauchamp Walker, C.B.:

기병을 화기로 무장시키는 문제에 관해서. 나는 우드 대령이 그 주제에 대해 완전히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기병이 총을 소지하고 있으니까 당연히 그것을 전투에서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25]

미친 사람이나 떠올릴 발상이죠. 내가 알기로 프랑스인들이 가끔 그런 짓을 하곤 합니다.

제6근위용기병연대의 명예 대장인 토머스 호커 경이 언젠가 그분의 인생에서 가장 성공적이었던 기병돌격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었습니다. 반도에서의 전투에서 그분이 지휘한 기병 연대가 프랑스의 기병대와 맞붙게 되었습니다. 프랑스인들은 일렬로 길게 늘어선 채, 제자리에 멈춰 서서, 우리 군에게 사격을 가해 몇 사람을 쓰러뜨렸습니다. 그리고 영국 기병대는 "프랑스인들이 카빈을 다시 매고 백병전을 준비하기도 전에 그들에게 들이닥쳤습니다."

따라서 기병전에서 카빈을 사용하는 것은 확실히 정신 나간 짓입니다. 그런 주장이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입니다.

''Journal of the Royal United Service Institution'', vol.22 (1878)

흔한 편견과 달리 '''머스킷이 그렇게 정확도가 떨어지는 무기는 아니다.'''
머스킷 구조 자체의 열악함은 '''전장식 구조'''와 '''강선 없는 총열''' 뿐이다. 머스킷이 너무 안 맞아서 엄폐가 필요없다거나 목표물에 대고 쏴야 맞는다는 말은 과장된 말이다. 머스킷은 숙련된 사수의 손에 들어가면[26] 일반적인 명중거리는 70~80미터 정도였고 엽병의 경우 150 m 에서 최대 200 m 까지의 명중률을 보여줬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6세기에 이미 화승총을 이용한 저격이 행해졌으며, 당시 유럽에서는 많은 스포츠 사격 클럽이 등장하고있었고 이들의 사격능력은 초기형 강선식 소총과도 맞먹을 정도였다.[27] 명나라에서는 화승총의 명중률에 감탄해서 나는 새도 쏘아 맞춘다는 의미로 '''조총'''이라 불렀다. 선조실록에도 사수와 포수를 짝지어 100보 밖에 있는 과녁을 맞추게 해 실력을 겨뤘다는 기록이 남아있다.[28] 조선시대 1보는 일반적으로 1.2 m 로 환산되니 적어도 120 m 정도의 거리에선 조총과 활의 명중률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뜻이다. 만약 머스킷이 그 정도로 명중률이 나쁜 무기였다면 애당초 대량으로 보급되지도 않았을 것이며, 민간 사냥도구였던 활을 밀어내지도 못했을 것이었다. 일반적인 조건은 아니었지만, 엽병이 아닌 일반적인 영국군 전열보병이 좋은 조건에서 175야드(160미터)에서 명중률 75퍼센트를 기록했다는 기록도 있고, 고지에서 사격할 것을 전제로 하는 요새는 전열보병의 유효 사거리를 200미터 이상으로 잡고 설계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 전열보병들의 총이 낮은 명중률을 보인 이유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재장전 속도의 향상을 위해 의도적으로 활강식 머스킷의 탄약 직경을 총강보다 많이 작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탄약이 총강에 딱 맞물리지 않으니 폭발 가스가 새어 나가고 탄약도 총강에서 이리저리 튕기다 마지막에 총강에 부딪힌 방향으로 스핀이 걸린 채 날아가니 탄의 궤도는 제멋대로에 명중률이 낮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총강에 딱 맞물리게 만들면 탄을 넣은 다음 막대를 대고 망치로 때려넣어 장전해야 하기 때문에 재장전 속도가 극히 느려지는 건 물론이고, 자칫하면 아예 총강에 탄이 끼어서 사용 자체가 불가능하거나 총이 폭발할 위험이 있어서 어쩔 수 없었다.
두 번째는 당시의 머스킷의 정밀한 조준기는 비쌌고, 어설프게 견착하고 눈을 대고 쐈다간 플린트록에서 생긴 밝은 불꽃에 잠시동안 눈이 멀 수 있어서 제대로 된 조준을 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전투를 재현한 영화나 리인액터들이 사격하는것을 보면 보병들이 격발시에 고개를 돌리거나 눈을 감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 이유가 이것이다. 아래의 영상을 봐도 격발 시 눈앞에서 상당히 밝은 불꽃이 터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당시 전열보병의 활강식 머스킷에는 가늠자가 달려있지 않았다. 가늠쇠는 총검 장착용 돌기로 겸용하여 사용했다. 정밀한 가늠자 가늠쇠가 달린것은 엽병용 혹은 사냥용으로, 활강식 머스킷에는 어울리지 않았다.[29]
그리고 명중률 향상을 위해 사격 훈련을 많이 하려 해도 한계가 있었다. 머스킷 자체가 당시로선 꽤 비싼 물건이기도 했지만, 진짜 문제는 화약이었다. 산업혁명 이후의 발전한 공업으로 화약을 대량생산하기 전에는 화약은 제법 값비싼 물건이었다. 화약의 중요한 원료인 초석을 유럽에서 확보하려면 별도의 초석밭을 만들어서 채취하거나, 해외에서 구아노나 땅에서 채취하는 질산염을 수입해야 했는데 여기에 들어가는 돈은 결코 적지 않았다. 실전에서 사용할 화약이라면 모를까 평시 사격 훈련을 위해 마구잡이로 사용하기엔 감당하기 힘든 수준이었다.[30]
게다가 흑색화약 자체가 엄청난 양의 매연을 발생시키기 때문에 많은 수의 병사들이 두 세번만 사격을 주고받아도 한 치 앞도 못 볼 정도로 짙은 연무가 끼어서 시계(視界)가 제한되기 마련이었다.[31] 즉, 조준사격을 하고 싶어도 적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전장 상황 때문에 사격의 효과를 확률적으로 극대화할 수 있는 면 단위 일제사격으로 적을 제압하는 방식을 사용하게 되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조준기의 간략화가 전혀 문제 없었다. 한 명을 노리는게 아니라 대체적으로 적 대열을 지향 사격하면 되니까.[32] 사실 보병을 제압할 수 있는 수류탄이 있긴 했지만, 현대의 수류탄과는 달리 사용하기가 까다로웠고 무게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투척거리가 매우 짧아 현대의 유탄수 포지션인 척탄병들이 따로 존재했을 정도였다. 척탄병 연대들이 정예부대로 취급받은 것도, 이렇게 사용하기 어려운 수류탄을 다루려면 당연히 훈련을 잘 받아서 유능한 병사들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명중률과는 달리 훈련이나 기타 등등의 노력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그 구조에서 나오는 본질적인 문제는 장전 방식과 속도였다. 우선 전장식 머스킷은 장전 방식은 이러하다.
  • 총을 세로로 세우고 총구에 화약을 넣는다.[33]
  • 탄약을 총구에 끼워넣고 꽂을대를 이용해 탄약을 총열 안으로 깊숙히 쑤셔 넣는다.[34]
  • 총을 가로로 들고 화약 접시를 연후 화약을 넣고 화약이 안으로 들어가도록 흔든 후 화약접시를 닫는다.
  • 화승(부싯돌)이 있는 해머를 당긴다. (퍼커션 캡 방식 이라면 뇌관을 넣고 해머를 당긴다)
  • 조준 후 발사한다.
이 과정을 선 채로 장전하면 중력이 장전을 도와주지만, 은폐, 엄폐를 위해 엎드리거나 누운 채로는 사실상 장전이 불가능하다. 때문에 엎드려 쏘는 자세가 일반 보병 교리에 등장한 것도 후장식소총이 등장한 19세기 이후에서나 가능했다. 저 장전 방식으로 인해서 숙련된 사수가 아무리 빨리 장전한다 하더라도 머스킷의 발사 속도는 훈련상황과 같은 최적의 조건에서조차 1분에 3발이 한계였다. 조지 워싱턴은 모든 신병이 15초에 1발 사격할 수 있도록 훈련하라고 요구했었는데 바꿔 말하면 1분에 4발 쏘면 최정예라는 뜻이다.

게다가 머스킷이란게 방아쇠를 당긴다고 반드시 격발된다는 보장이 있는 물건도 아니었다. 영상에서 보다시피 현대 기술로 제대로 만든 총을 전문가가 절차를 거쳐서 사격을 하는데도 계속 불발이 나온다. 하물며 당대의 열악한 기술로 만든 화약과 머스킷을 훈련이 충분치 않은 징집병 사수가 다룬다면 불발율은 당연히 더욱 오를 수밖에 없다.
이렇게 명중률도, 재장전 속도도 형편없는데 가랑비에 옷 젖는게 무서워서 산개해서 배치한다면 방진을 짤 수가 없어 적의 돌격을 저지하지 못해 각개격파되어 모조리 패주해 버린다. 총이라는 아직까지도 이어지는 개념에 영향을 받다보니 당시의 전장환경을 간과하는 경우가 많은데, 보병의 진형이 산개로 바뀌는것은 대량 살상 무기가 개발되는 기술적 발전이 더 일어나야 가능했던 일이다. 군대는 군체 의식이 아니기 때문에 복잡하고 구체적인 명령을 수행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적이 돌격했을때 거리를 벌리라 하고 싶어도 분위기를 타 그대로 패주하는 병사들을 통제할 방법이 없었고, 그렇다고 맞서 싸우자니 그저 각개격파 될 뿐이었다. 방진을 짜면 반대로 적의 포격에 노출된다는 약점이 있었으나 이시대의 대포는 아직 분당 두세발만 쏘는 수준에 폭발하지 않는 원형탄을 사용해서 지역 제압 능력이 많이 떨어졌고, 직사포 특성상 오히려 아군의 뒷통수를 후려갈길까봐 많이 배치할수도 없어 사실 맞을만한 수준이었다. 오히려 사격전보다, 사격전 막바지에 한쪽의 돌격으로 시작되는 육탄전으로 인한 소모가 훨씬 빠르게 일어났고 이를 근거로 프랑스나 러시아는 총들고 돌격 훈련만 죽어라 하게 되었다. 대기병이 아닌 보병간의 맞사격전은 상대가 먼저 돌격하다 지쳐 백병전을 유리하게 치르기 위한것 뿐이었고, 강가 전투 같이 돌격이 힘든 곳에선 사격 훈련을 집중적으로 한 경보병을 배치해 산개전술도 펼칠 줄 알았다.
밀집진형은 포병의 공격에는 더 심대한 타격을 입을 수 있지만, 당시의 대포도 머스킷처럼 전장식 형태에 주퇴복좌기도 없었으므로 연사력이 형편없었다. 현대에선 좌표를 찍고 계산을 하여 사격하니 목표에 대한 정밀한 사격이 가능하지만, 당시로선 어느정도 계산을 하더라도 초탄을 쏴봐야만 명중하는 거리를 제대로 알 수 있었다. 거기다 사용하는 탄환도 볼링공과 같은 거대한 쇠공 그 자체였으므로 포병에게 제대로 맞더라도 밀집 대형의 일직선만 날아가는 정도의 피해만 당할 뿐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포병은 적의 직접적인 살상은 부차적인 목적이고, 적의 방어 진형을 무너뜨려 약점을 만드는 게 주 목표였음을 생각한다면 당연한 소리. 따라서 전열을 좀 얇고 길게 만들기만 해도 선단위의 피해는 많이 줄일 수 있었고, 최소한 산개 대형을 취했다가 돌격에 제대로 걸려서 부대 전체가 와해되는 것보다는 밀집 상태에서 대포를 얻어맞는 게 차라리 견딜만했다.[35] 물론 이건 지휘관의 입장이고, 일반 병사 입장에서는 피하거나 방어해볼 기회도 가지지 못하고 대열 속에서 죽어야 하니 이전 시대보다 더 암울했다.
전열보병과 동 시대에도 산개 대형으로 은엄폐한 채 조준사격을 하는 경보병은 존재했지만, 이들 역시 엄폐물이나 아군의 엄호가 없는 독자적인 행동은 적병의 먹잇감일 뿐이었다. 산개한 경보병 부대들은 정찰과 교란이 담당이었고, 회전 이전에 선두에 서서 본대인 전열보병의 움직임을 가리거나 보조하는 정도였다. 현대전에서도 고도로 훈련받은 특수부대원들이 오합지졸 게릴라들에게 숫적 열세에 밀려 전멸하는 사례도 있듯이, 경보병들로 편제 상 한계가 있었다. 미국 독립전쟁의 미니트맨들이 대표적인 예인데, 이들 역시 숲이나 건물, 담벼락 등 적절한 엄폐물이 없다면 산개하는 대신 전열을 짜고 교전하는 것을 선호했다.

3.2. 부수적인 원인: 병사들의 낮은 사기?


전쟁사 서적 등에서는 전열보병들이 방진을 이루어 싸운 이유 중의 하나로 군인들의 낮은 사기를 드는 경우가 있다. 어느정도 맞는 말이지만 이는 근본적인 원인으로 말할 수 없다.
확실히 전근대~근대 초기의 많은 국가에서 병사들의 충성심이나 사기가 영 믿을 만하지 못했다. 영국과 프랑스를 제외하고[36] 당시에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나 소속감을 일으키는 민족주의가 퍼져있는 나라는 없었다. 그런데다가 과거 18세기 초 유럽 국가의 병사들은 대부분이 하층민 출신이었다.[37] 그러나 싸워야 할 이유가 없었던 이들은 당연히 사기가 그다지 높지 않았고, 이들에게 지형을 이용해 엄폐하도록 산개시켜둔다면 전투가 벌어지기 전이라든가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지휘관의 통제가 느슨해질 경우 병사들이 모두 도망쳐 부대가 와해될 가능성이 충분했다.[38] 심지어 당시 장교들은 질이 안좋은 자원들만 모인 자기 휘하의 병사들보다 적국의 장교를 더 신뢰했다고 한다. 유럽 귀족들은 서로 혈연으로 연결되어 있었으며 라틴어 또는 프랑스어를 교양어로 썼으므로[39] 언어적 장벽도 크지 않았다. 문화적으로나 혈연적으로 따지고 들면 자국 백성들보다 적으로 만난 타국의 귀족이 더 가까웠던 것이다. 물론 여기서 신뢰했다는 의미는 약속을 어기지 않을 존재로 여겼다는 점이다.
게다가 19세기만 해도 '영국 안에는 두 개의 나라가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으므로, 신분제에서 비롯되는 사관과 병사간의 불신 문제는 매우 심각했다. '''이 불신 문제는 절대로 그냥 넘길 일이 아니었다.'''[40]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전쟁 양상이 변화되어 전열보다는 산병전이 더 나은 상황도 곧잘 발생했지만 이 때에도 지휘관들은 계속 전열을 고집했고 산병 상황을 훈련시키지도 않아 많은 손실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41][42]
이런 상황에서 전열은 장교가 병들을 통솔하는 데에도 실제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 목숨은 누구나 아까운 법이라 강한 전투 욕망이 있는게 아니면 최전선에서 목숨걸고 싸우려 하지 않아 종국엔 아무도 전진을 하지 않는데 전열은 뒤에서 앞사람을 밀며 강제로 전진시켜 싸우게 하고, 후열이 길을 가로막기 때문에 사기를 잃은 전열이 멋대로 패주하는 것을 막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병사들의 낮은 사기'는 전열보병이 이루어지게 된 부수적인 원인일 뿐 근본적인 원인은 아니었다. 다른 문제와 달리 이 문제는 해결이 가능했지만, 해결할 생각 자체가 없고 편견 때문에 해결될 수 있다는 생각조차도 안했던 문제였을 뿐. 이 사기는 무기체계가 개인적 기량을 발휘할 수 있는 라이플로 바뀌어 사기가 증전되었다고 평가한다. 19세기 비약적인 군대의 발전은 저 요소와 사회의 변화를 통해 군대에서 충분히 굴릴만한 사람 수가 증가했다는 것이 맞물린 덕분이다.
심리학자 데이브 그로스먼의 저서 <살인의 심리학>에 의하면, 전열보병 시대의 낮은 명중률에는, 장병 개개인의 살인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의도적으로 오조준했다는 가설도 언급된다. 제 2차 세계대전까지 이런 경향이 있었다고 하니, 꽤 신빙성 있는 이론으로 보인다. 실제로 전열보병 시대의 유물 중에는 병사가 전투중에 발포를 아예 하지 않고 장전만 계속해서 총구까지 화약/총알/화약/총알...이 꽉 들어차 있는 총도 간혹 발견된다.

3.3. 전열보병의 싸움은 단순한 소모전인가?


전열보병의 경우 가장 눈에 띄는 "전투의 시작"이 서로 줄을 세워 맞아주는 모습인지라 "소모전" 이미지가 두드러졌다. 하지만 중심 병력이 보병이었다고 전술적 선택지가 없는건 아니었다. 주연에선 밀려났다곤 하나 여전히 근접전 만큼은 대단한 후사르, 샤쇠르 등 경기병들은 호시탐탐 보병 대열이 흐트러지는 틈을 노리고 있었고, 기회를 포착한 경기병들이 돌격하는걸 창기병이나 중기병들을 출격시켜 카운터 하고, 경보병대들은 강으로 우회하여 오는 기병이나 보병들을 뛰어난 사격 능력으로 저지했으며, 무거운 견인포는 아군의 엄호 속에서 먼 거리의 적을 견제했고, 기마 포병대는 복잡한 난전 중 아군이 고지대를 점령한 순간 재빠르게 이동해 자리를 잡고 적 기병대나 장군을 향해 산탄을 쏘아댔고, 깨기 어렵지만 신속하게 돌파해야 하는 곳에 자리잡은 방진이 보이면 척탄병을 투입해 수류탄과 강력한 돌격으로 깨부수려 하였다.
사실 웰링턴도 기병은 패주하는 적을 처리할때나 쓸모있다 판단하여 병력의 강함을 평가할때 기병을 빼고 판단했을 만큼 직접 전장을 경험한 시대에서도 보병들을 축자 투입하고 먼저 나가떨어지는 쪽이 지는 소모전으로 보는 경향이 없지는 않았다. 소모전에 대한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인원이나 병기, 물자 따위를 자꾸 투입하여 쉽게 승부가 나지 아니하는 전쟁. 적의 병력이나 군수품을 소모시키어 승리를 거두려는 목적으로 행한다.'[43]이다. 쉽게 말하자면 계속 1:1 교환을 통한 접전을 거듭하다 먼저 지치는쪽이 지는 멸망전이란 건데, 이는 로이텐 전투, 아우스터리츠 전투 등에서 병력의 숫적 열세를 기만 전술, 작전술 입안으로 승리에 필요한 거점 우선 확보로 극복할 수 있음이 이미 증명되었다.

4. 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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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톰슨 作 카트르 브라의 28연대[44]
"전열"에 살고 "전열"에 죽는다. 이는 매우 중요했으며, 전열이 무너져 내린다는 것은 해당 연대가 무너져 내린다는 것과 같았다. 1분 1초가 급박한 전투에서 한번 무너진 대형을 다시 가다듬는 것은 군사를 물리고 재정비하지 않는 이상 거의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전열보병은 머스킷의 부족한 제압력을 집단 사격으로 극복하고 화력을 투사했다. 이를 위한 제식훈련을 통한 대형 유지와 행군은 매우 중요하였고, 이를 유지하기 위해서 굉장히 가혹한 군기와 세뇌에 가까운 훈련이 이루어졌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했다고 전해지는 명언 "제식은 전력이다." 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기인한다. 단순히 머스킷의 화력 투사에만 관련한 것은 아니고, 보병의 생존률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이 제식 훈련이다. 길게 횡대로 늘어선 선형진의 경우 적의 포병 세력으로부터 받는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었지만 기병대의 돌격을 효과적으로 저지할 수 없었고[45], 보병들이 정사각형 모양으로 진을 구성한 방진의 경우 기병의 돌격을 무력화시키는 데에는 좋았지만 포병들의 사격에는 무력했던데다 대열 또한 좁았으므로 상대적으로 대열이 넓고 더 광범위한 화력을 투사하는 상대 보병의 선형진에 대응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그 때 즉각 상황에 맞추어 능수능란하게 진형을 바꿀 수 있어야 했고, 이를 실패할 경우 해당 제대의 생존률은 극도로 떨어졌다.
흔히 이 시기 보병간의 전투를 겨우 100야드(90 m) 떨어진 곳에서 서로 마주보고 서서 포화를 교환한다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이는 정상적이라고 보기 힘들다. 일반적으론 사정거리까지 접근하여 한두 번의 사격 후 적의 전열이 흐트러졌다고 판단한 장교의 명령하에 총검 돌격으로 마무리 지었다. 그러니 총검 돌격이라고 쉬운게 아니였다 적병이 한두번의 사격에 사기가 떨어져서 전열이 붕괴되었다면야 돌격하는 자세만 잡아도 도망쳤지만 사기가 굳건하거나 지휘관의 카리스마로 전열을 유지하는데 성공했다면 역으로 돌격자가 죽어나갔기 때문이다. '100야드쯤 20초 안이면 달려나갈수 있으니까 한두 발만 피하면 된다'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당대의 군장도 결코 가벼운건 아니였고 20초 안에 100미터를 뛰었다간 정작 적군 병사들과 백병전을 할 체력이 전혀 남지 않기 때문. 그렇기에 열심히 총알을 퍼붓고 있는 적을 향해서 걸어서 전진해야 했으며, 멀어봐야 2~30미터 정도 남은 뒤에야 전력 질주를 할수 있었는데, 그동안 일제사격 두세번 정도는 맞아야 했다. 이 분야 최고봉이 철저한 실탄 훈련으로 단련된 영국의 레드 코트였다.
그럼 문제는 적의 포화를 병사들이 어떻게 견디느냐인데[46], 그걸 가능케 하기 위해서 태형성행했다. 상당히 가혹하여 이로 인해 병사들이 '100% 죽는 항명을 선택하느니 확률적으로 살 가능성이 있는 전열에 서고 말지' 정도의 수준이었다. 영국군 레드코트들이 겉으로는 멋있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태형으로 인해 죽거나 병신이 되는 비율도 상당히 많았다. 채찍질 100대 정도는 기본이고 300대, 500대, 900대 형도 존재했으며 최고는 1,200대까지도 가능했다. 1200대면 중간에 죽을 가능성이 큰데, 원칙적으로는 중간에 죽더라도 시체에 채찍질을 해서 다 채우도록 되어 있었다고. 물론 실제로는 시체에까지 채찍질을 하라고 하는 또라이는 굉장히 드물었고, 보통은 채찍질을 할 때 군의관이 옆에 있다 중간 중간 끊고 치료를 하고 휴식도 시켜 안 죽게 잘 조절하면서 댓수를 채웠다고 한다.
이는 공격측 말고도 방어측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화력상으로는 돌격해오는 쪽보다 사격을 지속하는 보병측이 유리하다곤 해도 묵묵히 자신쪽으로 다가오는 적에게 압도당할 수도 있기 떄문에 혹독한 훈련으로 장교의 명령에 따르게 훈련을 해야만 돌격해오는 적을 명령에 따라 총알을 계속 퍼부어 돈좌-격퇴시키거나 심지어 공격자의 사기가 가장 낮아지는 걷기에서 뛰기로 전환하기 직전의 순간 역으로 맞돌격을 해서 제압할수 있었기에 철저한 복종 훈련은 공-수 양측에게 매우 중요했다.
다만 유의할 점은 전열보병 시대의 체벌이 어디까지나 장교의 명령에 따라 공개적으로 행해지는 군법상의 형벌이라는 것이다. 영국군의 경우 일선에서 병사들을 관리 감독하는 부사관이나 초급 장교들이 병사들을 처벌할 만한 일을 발견하면 이름과 해당 행위를 기록했다 함장이나 중대장 같은 부대 지휘관에게 보고한 후, 일요일에 약식 재판을 열고 채찍질을 가했다고 한다. 갯수도 100대까지는 아니고 30~50대 가량 '상식적인' 부분까지 내려서 집행했다고 한다. 또한 태형은 국가별 차이가 커서, 모병제로 병력 자원의 질이 상당히 낮아 범죄자들도 군대에 몰아넣던 영국군[47]이나 수백개의 나라를 통일해서 만든 봉건적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던 독일 제국군 등에서는 태형이 강력했지만 프랑스군의 경우 프랑스 혁명 이후엔 군 내 태형이 아예 금지되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기가 잘 유지되었다.
또다른 예외는 러시아인데, 여전히 중세적 세계관을 지닌 러시아 농노들은 차르와 귀족 장교들의 명령을 신의 명령으로 받아들였기에 사기가 높고 탈영율도 낮았다. 이는 적백내전 당시 정규군이었다가 졸지에 만고의 역적이 되어버린 백군들까지 이어지다가 적백내전이 끝나 백군 병사들이 모두 전사하거나 숙청당함과 동시에 없어진다.[48]
그리고 러시아는 스웨덴을 제외하면 대체로 반란군이나 중앙아시아 칸국들이 적들이었기에 전열보병보다는 경보병 경기병들이 산개 진형으로 싸우는 일이 잦았다. 다만 프랑스 혁명의 시대가 오면서 이런 장점도 소멸된다.
기타 내용으로, 나폴레옹 전쟁 기간 모든 국가 모든 병사들이 쓴 플린트락 머스킷의 경우 지금 가격으로 따지면 개당 100만원을 호가하는 생각보다 비싼 무기였다. 현재 국군 제식 소총인 K2 소총의 납품가는 처음 생산된 80년대는 30만원 정도였고, 물가가 오른 2010년대를 기준으로 80만원 정도 하니 큰 차이는 없으나, 시대에 따른 경제력 차이가 있으니, 당시 기준으로는 비싼 무기인 것이 맞다.
따라서 전투중 머스킷이 불발될 경우의 응급 대처 요령 또한 훈련받았으며, 모든 절차를 밟았음에도 발사가 불가능한 경우, 소대장의 허가를 받고 전열 이탈도 허용되었다. 물론 그러기 전에 보통 죽거나 다친 동료의 머스킷을 이어받는다. 다만 전황에 따라서는 그러한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투입되는 경우도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 원정 실패 이후 벌어진 전역에서 총을 쏘지 않는 병사에게 마르몽 원수가 이유를 묻자 "쏘는 방법만 알면 쏘겠습니다"라는 답변을 들었다는 기록도 있다. 당시 하사관들의 주 업무 중 하나가, 부상병이나 시체에서 멀쩡한 머스킷을 수습해 자기 머스킷이 맛 갔다고 손드는 병사의 것과 교체해주는 것이었다.

5. 쇠퇴


전열보병의 전투 방식을 만들어낸 각 요인들은 19세기 중반 이후 기술의 발전과 사회 변화를 통해 하나 하나 제거되었다. 총기의 낮은 명중률은 강선미니에 탄의 등장으로, 느린 장전 속도는 퍼커션 캡후장식 소총의 등장으로, 낮은 사기의 병사들은 강도 높은 훈련을 받는 지원제 상비군의 등장으로 사라졌고 덤으로 포병의 살상력이 고폭탄의 보편화로 훨씬 올라가면서 19세기 중반에 이르면서 산개 대형이 훨씬 효율적이라는 전훈이 확실하게 자리잡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전열보병식 일명 ′라인배틀′ 전투는 제1차 세계 대전부터 사라졌다고 알고 있지만 서술했듯 이미 그 이전부터 사라진 전술이다. 전열보병식 전투가 마지막으로 활약한 전쟁은 나폴레옹 전쟁크림 전쟁[49]이라 할 수 있다. 2차 슐레스비히 전쟁을 시작으로 산개 돌격전술과 참호가 본격적으로 등장했으며 보불전쟁,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에도 참호와 산개 돌격을 하는 형태를 보였다. 이와같은 전술적 형태는 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된 20세기 초중반에 이르러서도 그게 달라진 점은 없었다. 기술은 급속도로 진보했으나 군사 전술은 진보되지 못했다. 안정성과 보수적인 방식을 선호하는 군대에서 새로운 전술을 개발하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유럽에서의 20세기 첫 전쟁이라는 점도 그 이유 중 하나이다. 크림전쟁 이후 유럽에서는 그렇다 할 큰 전쟁이 발발하지 않았는데 전장에서 신기술과 신무기들을 아직 경험하지 못한 상태에서 전쟁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19세기의 참호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1차대전에 이르러서는 참호가 방어진지의 역할 뿐만 아니라 군사기지의 역할로 확장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전선의 길이가 예전보다 더 길어지고 전선의 고착화와 수없이 많이 발생하는 부상자가 그 원인이다.
하지만 전열보병의 흔적은 여전히 남아있다. 오늘날 우리가 잘 알고있는 제식이 바로 18세기 전열보병을 운용할 때 사용된 것이기 때문이다. ′훈련′ 타이틀에서도 설명이 되었다시피 전열보병의 대형을 운용하기 위해서는 일렬로 길게 늘어선 보병들을 지휘관이 자유자재로 바꿔야 하는데, 그에 따른 강도높은 훈련은 필수다. 수 킬로미터를 일렬로 대형을 유지하면서 이동하기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측면을 치는 적 보병이나 기병에 맞서 대형을 회전시켜야 하는데 이때 100명이 넘는 보병의 대형을 유지한 상태로 회전시켜야 하는 것은 기본이다.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대형을 유지한 상태로 각각 전장에 일어나는 상황에 맞추어 전열보병의 대형이 빠르게 이동과 후퇴, 방진을 구성하는 능력 등이 필요했다. 이러한 능력을 기르기 위해 행했던 훈련들이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이다.[50] 오늘날 의장대가 하고 있는 제식도 유럽의 전열보병 제식훈련이 그 영향이고 영국군 근위대가 하는 행진이나 경계근무는 18세기 당시에서 크게 달라진 것이 없이 유지 중이다. 하지만 현재 이 제식은 점점 간소화되고 사라져가는 추세이다.
전열보병그 특유의 각 잡힌 멋은 어느 나라에서나 군인의 이상적인 모습으로 각인되었고, 제식을 통한 집단행동은 소속부대원간의 유대감이나 부대에 대한 소속감을 느끼게 해주며, 명령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버릇을 몸에 익힐 수 있게 해줄 수 있다. 그래서 총알을 한 탄창에 30발씩 넣으면서 1초에 12발씩 쏟아내는 돌격소총이 판치는 오늘날에도[51] 군대의 열병식이나 '받들어 총'으로 대표되는 제식동작, 그리고 군대의 예식이 있을 때 입는 정복 및 예복 등에 전열보병 시대의 흔적이 면면이 남아 있다.

6. 조선에선?


기록에 따르면 조선은 플린트락(머스킷 소총) 방식을 굉장히 부정적으로 보는데[52] 이는 불발 문제만이 원인은 아니었다. 매치락을 고집할만큼 플린트락의 불발률이 큰 문제가 되었다면 모든 유럽 군대가 전부 플린트락으로 갈아타는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다. 기후가 유럽보다 습해서 어쩔 수 없었다는 견해도 가끔 보이는데 우리나라 이상으로 습한 영국은 그럼 어떻게 플린트락을 대규모로 굴렸겠는가? 기후 적응력은 불 붙은 화승이 필요 없는 플린트락이 차라리 더 나을 수도 있다. 열강들은 습도로는 더 이상 나쁠 수 없는 정글 지대에서도 큰 무리 없이 머스킷을 운용했으며 심지어 태국의 시암왕국이나 베트남의 응우옌 왕조등 동남아 제국들도 적극적으로 플린트락 머스킷을 수입해 전열보병의 주무장으로 운용했다.
그럼에도 조선은 왜 플린트락을 도입하지 않았는가? 첫 번째 추측으로는 동아시아엔 플린트 같은 질 좋은 부싯돌이 없었다는 것이 있다. 한국에 널린 차돌로는 불꽃이 잘 일지 않으며, 황철석이나 마노 정도가 대등한 성능을 내는데 이것들은 조선 땅에선 준 보석급이라 구하기가 어렵다.
두 번째는 당시 조선의 교리가 지금의 예비군 뻘인 속오군조차 연간 교탄 소모량이 자동소총을 쏘는 현대의 한국 예비군과 비교해도 상당히 많았을 정도로 사수들의 명중률에 굉장히 민감했던 탓이 있다. 매치락 머스킷의 격발 방식은 앞서 말한 용두가 후퇴 고정되는 것이 기본이냐, 격발 위치로 전진된 것이 기본이냐에 따라 지발식과 순발식으로 나눈다. 전자는 용두가 스프링 힘으로 후퇴 고정되는 것이 기본이고 방아쇠를 당길 때 손가락 힘으로 용두를 전진 시키는데 유럽과 중국에서 애용되었다. 후자는 용두가 전진된 것이 기본이고 장전시 용두를 후퇴시켜 걸쇠에 고정한 후 방아쇠를 당기는 동작으로 걸쇠만 치워 용두가 스프링 힘으로 전진할 수 있게 하는데 조선과 일본에서 애용되었다. 이는 현대 권총의 더블액션/싱글액션 방식의 차이와 유사한데, 방아쇠압과 격발 준비 과정의 차이로 인한 장단점도 서로 유사하다. 이 때 플린트락 머스킷의 작동 구조는 유럽의 지발식에서 출발했으므로 방아쇠압 또한 이와 유사할 정도로 비교적 무겁다.
세번째로 조선의 기술 및 공업력이 유럽보다 뒤떨어졌던 것도 양산에 걸림돌이 되었다. 조총에도 용두를 화약접시에 꼽는 스프링이 들어가니 플린트락도 못 만들 거 없다는 견해도 있지만 조총에 들어가는 스프링은 황동 스프링으로써 불씨가 살아있는 화승을 갖다대기만 하면 되니 복원력만 있으면 되었지만 플린트락에 들어가는 스프링은 부싯돌이 장착된 공이치기가 방아쇠를 당기면 화약접시 덮개를 개방함과 동시에 불까지 붙여야 하는 이중기능을 할 수 있는 강한 동력을 제공해야 했으므로 강한 탄성력이 요구되었고 따라서(시계태엽과 유사한 재질의) 스프링강을 써야했다. 당시 조선은 무게추를 이용한 자명종은 어찌어찌 만들어냈지만 태엽이 필요한 회중시계는 끝끝내 못 만든 것을 생각하면 기본자재 생산부터가 난관이었다. 더욱이 플린트락은 고장력 스프링만 필요한게 아니라 공이치기가 함부로 움직여 사고나는 걸 방지하기 위한 안전장치 등 여러가지 장치들이 들어갔기 때문에 상당한 수준의 기술력을 요구했다. '''서구의 문물을 일찍히 접한 동남아에선 플린트락의 성능을 인정하고 대량으로 사용했지만 기술력 부족으로 유럽상인에게서 대량으로 구입해 사용한 것'''만 보아도 플린트락의 생산이 당시 수준에선 결코 쉽지가 않았단 걸 알 수 있다.

7. 이 시대 각국의 군복


전열보병 시대의 군복은 위장이 아닌 아군 구별과[53] 사기 증진이[54] 목표이기에 당시 유럽 군사들은 다들 각자 색깔을 정해서 화려하게 차려입었다. 군복에다가 가슴에 하얀 X자로 차려 입은 건 우리가 여기 있다는 의미다. 즉 연기가 자욱한 전장에서 지휘관에게 위치를 알려주고 아군들에게는 적군과 구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현대와는 반대로 각이 잘 잡히고 발색이 선명해야 생존율이 올라가는 셈이기 때문에, 이 당시 병사들은 A급 군복은 군장속에 고이 넣어두고 훈련시나 행군시에는 너덜너덜한 폐기 직전의 군복이나 아예 헐렁한 사제 작업복을 입고 오직 전투 당일에만 차려입었다. 매체에서는 선명한 원색의 군복을 칼같이 맞춰 입는 모습만 주로 나오지만 현실은 시궁창(...)
  •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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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칭 '''레드 코트''', 비칭 랍스터. 이 분야에서는 가장 유명할 것이다. 이름대로 제복은 붉은색 계열. 왜 붉은색이였냐 하면 당시 붉은색 염료가 가장 가격이 쌌기 때문.[55] 해군과 특수 병과는 파랑, 경보병은 녹갈색을 입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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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경보병. 단, 모든 경보병이 이런 녹갈색 제복을 입은 것은 아니며 레드 코트를 입은 경우도 많았다. 저 녹색 제복은 경보병 중에서도 라이플 연대만 입었다. 일반적인 머스킷이 아니라 강선이 파인 베이커 라이플[56]로 무장했고 전열을 이루어 싸우기보다 산개대형으로 유격전을 벌였다. 흔히 그린 재킷이라고 불렸고 정예병 취급을 받았다. 샤프 시리즈의 샤프 대령의 제복을 보면 이 제복이다. 원래 제95 라이플 연대 소속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무려 91m에서 274m에 달하는 교전거리를 자랑했고 나폴레옹 전쟁이베리아 반도 전쟁에서는 토머스 플렁켓이라는 병사가 730m에 달하는 거리에서 프랑스의 오귀스트 마리 프랑수아 콜베르 샤바네 장군을 저격하는데에 성공했다. 당시 전열보병들이 쓰던 활강식 머스킷이 50m 밖에서 명중을 보장하기 어려웠다는 점을 상기하자.[57] 이렇게 뛰어난 명중률이 보장되었으니 밀집대형보다 산개대형을 선호한 것이고 허용된 것이다. 일반적인 전열보병의 총검과는 달리 '''24인치'''짜리 대형 총검이 지급되었는데 라이플이 일반적인 머스킷보다 짧을 뿐더러 워낙 재장전이 늦다보니 자위용 무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요즘 미군 보병들이 권총을 따로 들고 다니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단 이 총검은 일반 전열보병들의 총검과는 달리 단독으로도 써먹을 수 있는 물건이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사실상 총에 끼울 수 있는 숏소드 정도의 물건을 따로 들고 다닌 셈. 일반적인 머스킷에 장착하는 총검은 단독으로 쓰기엔 좀 어려운 소켓식 총검인 경우가 많았다.
  •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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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전쟁 당시 프랑스군 병사들. 프랑스 역시 파랑의 군복을 착용했으나, 프로이센의 그것보단 훨씬 선명한 푸른색을 사용했다. 좌측부터 도약병 및 유격병(Voltigeur), 전열보병인 소총병(Fusilier), 정예 전열보병인 척탄병(Grenadier), 뒤에 깨알같이 선 2명의 스위스 보병(Suisse) 앞치마를 입고 도끼를 든 공병(Sapeur, 영어의 Sapper를 생각하면 된다.), 북을 든 척탄병 고수다. 이 외에도 프랑스 제국 근위대 문서를 참고하면 당대 프랑스 전열보병의 모습을 좀 더 볼 수 있다.
나폴레옹 전쟁 이전의 프랑스군 전열보병은 부르봉 왕가의 상징색인 백색 군복을 입었다. 하지만 부대마다 군복의 색이 다르다. 이를테면 위의 퐁트누아 전투의 프랑스군은 파란(King's blue라고 한다, 부르봉 전에 카페 왕가의 색은 전통적으로 파란색이었다.) 군복을 입고있는 Garde francaise이다. 마찬가지로 프랑스군 내 스위스인 부대의 경우는 스위스의 상징인 붉은 색 군복을 입었다.
  • 오스트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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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나폴레옹 전쟁 초기 전열보병의 모습으로, 이 당시에는 그림에 나온 것과 같이 헬멧을 착용하였으나, 1808년의 군제개혁 이후에는 샤코를 착용하게 된다. 오스트리아는 흰색의 군복을 착용해서 특이한 경우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작센스페인, 상술된 프랑스 혁명 이전의 프랑스 왕국, 나폴레옹 휘하의 이탈리아 출신 보병들도 흰 색의 군복을 착용한 것을 보면 그리 특이하다고 볼 수 없다. 그리고 부대 지휘관을 비롯한 하급 통솔장교들은 검정색 코트에 금빛 복대를 착용했기 때문에 유독 장교가 눈에 띄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작센군의 경우 프랑스가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벌일 때 프랑스 측에서 싸웠다. 그리고 앞서 말했던 대로 작센군이 회색 군복을 입었는데, 문제는 여기저기서 총소리가 들리고 시꺼먼 연기가 자욱한 전장에서 흰색과 회색을 분간하기 어려웠다는 점. 결국 바그람 전투에서 프랑스군에게 오스트리아군으로 오인받아 오스트리아군과 프랑스군 양측에게 사격을 여러 번 당해서 전열을 무너뜨리고 패주한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그러니까 오스트리아군과 싸우다가 수적으로 밀려 프랑스군 쪽으로 퇴각했더니 프랑스군이 작센군을 오스트리아군으로 오인하고 신나게 쏴제꼈던 것. 게다가 뒤에서는 진짜 오스트리아군이 추격하며 역시 신나게 쏴제끼고 있었다.
즉 프랑스군도 작센군을 아군으로 쓸 생각이 있었다면 자기네 푸른 제복을 줬어야 했다. 군복의 통일과 제식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부분. 물론 50만이 넘는 자국 군대에도 복장 지급하기 벅찼던 만큼 동맹군에게 물자를 지원할 여력이 없었겠지만 반대로 영국은 이베리아 반도 전쟁에서 포르투갈 보병에게 영국 군복을 입혀줬으며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이후에도 오스트리아나 프로이센에까지 피복이나 물자를 팍팍 지원해준 사례가 있다. 자국의 경제력과 공업능력이 전황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좋은 사례.
마찬가지로 프랑스군이 영국군과 전투를 벌였을 적에도 당시 동맹군이었던 스위스군이 붉은색 군복을 입고있었던 까닭에 종종 프랑스군이 영국군으로 착각하여 오인사격한 경우도 발생하였다.
  • 프로이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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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전쟁 후반기 프로이센군의 모습. 프로이센은 주로 파랑/진녹색 계열의 군복을 착용했다고 한다. '''프러시안 블루'''가 여기다가 쓰려고 나온 색. 짤에서 Musketiere('머스킷총병'의 복수형)로 쓰인 보병들이 전열보병. 나폴레옹 전쟁 중반부의 군제개혁 이전에는 이각모(bicorn hat)를 착용했었다.
  • 러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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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방전쟁기 러시아군. 표트르 대제의 서구화 정책의 일환으로 탄생한 군복이며 최대한 서유럽 트렌드를 따라가기 위해 노력했다. 초록색 코트와 붉은 바지가 특징으로, 붉은 바지는 곧 폐지되었지만 초록색 코트는 나폴레옹 전쟁기까지 남아서 제정 러시아군의 상징과도 같은 군복 색(러시안 그린)[58]이 되었다. 이 러시아군 군복의 통칭으로 ‘그린 코트’ 라는 말이 있긴 했지만 영국의 레드 코트만큼 널리 통용되지는 못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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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전쟁기 러시아군. 이각모를 샤코 모자로 바꾸는 등 다른 나폴레옹 전쟁기 군복들과 크게 다르진 않다.[59]
  • 13개 식민지 대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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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독립 전쟁기의 대륙군 전열보병대의 모습. 13개 식민지도 영국군에 맞서기 위해 미군의 근간이 되는 군대인 대륙군(Continetal army)을 창설하였다. 다른 군대들에 비해 상당히 늦게 창설된 군대인 만큼 복식면에서 타국의 것, 특히 프랑스군을 많이 참고하였다.
  • 오스만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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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라클라바 전투당시 오스만군 전열보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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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 전쟁 당시 오스만군의 모습을 그린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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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오스만-그리스 전쟁 당시 전열보병의 모습.
본래 오스만 제국에는 전열보병의 개념이 없었다. 초기 오스만 제국 시절에는 경기병 위주의 전술이 성행했으니 그렇다 쳐도, 17세기 이후 오스만 제국이 유럽영토에서 징집한 보병들을 활용하기 시작한 이후에도 한동안 오스만 제국은 서구 군사전술의 도입에 적극적이지 않았으며, 전통적인 방식대로 머스킷조차도 화망 형성이 아닌 '''조준사격''' 위주로 활용해 왔다. 하지만 나폴레옹 전쟁과 그리스 독립전쟁에서 쓴맛을 본 이후, 그리고 니자므 제디드 등의 서구식 군제 개혁에 매우 저항이 심했던 예니체리가 혁파되고 나서 이루어진 탄지마트 이후 오스만 군도 프랑스군과 영국군의 영향을 받아 전열전술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보다시피 상당히 늦은 시기의 일이다. 남들은 뇌관식 소총에 연발소총에 관심 쏟는 마당에 이제서야 전열전술이라니. 하지만 후기 오스만 제국이 상대했던 나라들이 다행스럽게도 오스만 제국과 비교했을때 전술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우위에 선 나라가 없어서 후기 오스만 군대의 전열보병 전술은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발칸 전쟁 직전까지(무려 20세기다!) 군복 개혁도 안 한 채 전열전술을 고집하다가 피를 보게 된다.
오스만 전열보병의 복식은 프랑스의 영향을 받은 남청색 군복을 입었으며 여기에 탄지마트 개혁 이후 착용하기 시작한 페스 모자를 썼다. 출신 지역에 따라 복식이 다른데, 아랍 징집병들은 주아브 부대처럼 헐렁헐렁한 바지를 입었고, 알바니아, 북부 그리스, 발칸 징집병들은 푸스타넬라(Φουστανέλα)라는 치마 비슷한 옷을 입은 게 특징이다.
  •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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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또한 근대 서구 문물이 유입되면서 전열보병 전술이 같이 들어왔는데, 1834년 사가번에서 네덜란드 군제를 연구하다 최초로 도입한 것을 시작으로[60] 신식 막부육군을 비롯하여 개항 이후 미국으로부터 들여온 신무기 등과 함께 1870년대까지 전열보병 전술이 사용되었다. 하지만 막부가 전열보병을 운용하던 시기의 유럽에선 이미 전열보병 전술은 쇠퇴하는 전술이었으며 병력의 질도 한계가 있었기에 큰 효과는 보지 못했지만, 어찌되었건 무진전쟁까지 전열전술은 계속해서 사용되었으며 산개 전술을 이용하는 경보병 또한 운용되었다. 특기할 만한 점으론 초기에는 일본 특유의 삿갓모나 털모 등을 군모로 사용하기도 했는데, 이후에는 서양식 군모로 차차 변경되었다.

8. 참조할 만한 글


본 문서 자체가 흔히 알려져 있는 통설에 기반하다보니 아래의 링크를 기반으로 수정하기가 쉽지가 않다.
18세기 전열보병은 어떻게 싸웠는가? ㅡ 1부
18세기 전열보병은 어떻게 싸웠는가? ㅡ 2부
미국 독립전쟁기의 오해와 운용
나폴레옹 시대 보병 전술
나폴레옹 시대 보병 전술 2
나폴레옹 시대 경보병 전술
[1] 실제로는 이렇게 느리게 걷지 않았었다. 18세기 후반, 19세기 초반 정도 되면 보병들이 뛰지는 않았어도 걸음 폭을 넓게하여 빨리 걸었었다고 한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베리 린든에서 묘사된 영국군의 전투 장면을 참고. 심지어는 전술적 목표를 위해 뛰는 경우도 많았다. 8번 참조[2] 또한 영화 군주의 하인에서 나온 것처럼 처음 일제사격 이후 바로 백병전에 돌입하는 경우는 훈련이 잘 안된 잡병들을 상대하지 않는 한 드물었다. 보통은 서로 선형으로 서서 사격을 주고받다가 총알을 다쓰거나 적의 보병 진형이 붕괴돼서 틈이 생길 경우 총검 돌격하였다.[3] 패트리어트에 나온 미군은 오합지졸의 전형인데, 우선 전열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상태였고, 원래 사격을 먼저 하는 게 아니라 나중에 해야 적의 밀집도가 높아지고 더 근접해서 더 많이 죽일 수 있는데 원거리에서 선제 사격을 하였다. 게다가 병사들이 눈을 감고 쏘거나 일제사격이 아닌 순차사격이 이뤄지면서 총알이 아무데로나 날아가 영국군의 피해가 생각보다 적게 나오는데, 이건 당시 기준으로 지휘관의 통제가 제대로 먹히지 않을 정도로 훈련도가 처참했다는 의미이다. 또 영국군의 대응사격을 받을 때 미군 병사들의 전열이 한순간에 붕괴되는데 원래 전열보병은 옆에서 누구 머리가 날아가도 눈하나 깜박해서는 안 되고, 이건 좀 가혹하다고 쳐도 대열을 끝까지 유지할 의무는 있다는 점에서 기본적인 멘탈조차 영화에서 말한 것처럼 농부 수준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게다가 레드코트만 상대해도 이미 패배가 확정인 판에 대포 공격까지 받고 기병대도 달려들고 있었으니, 말 그대로 시작하기도 전에 진 싸움이다.[4] 정작 영어권에서는 전선이라는 단어로 Front, Battlefront 등의 단어를 사용하고 Line of Battle은 해군 용어로 단종진의 의미로로 사용한다.[5] 자주 간과 되지만 이는 정말로 중요한 개념이다.[6] 실제 16세기 사코 디 로마당시 신성로마제국군 지휘관인 샤를3세가 화승총에 저격당해 죽는다. 당시 화승총의 명중률은 현재 생각하는것 만큼 낮지 않았다.[7] 소설 삼총사도 원제는 Les Trois Mousquetaires로 머스킷 사수를 의미한다. 장자 독식 체제에서 차남, 삼남들의 선택지는 군입대로 출세하는것 외엔 없었다. 이 귀족 자제들이 총사대를 구성하게 된다.[8] 이 당시의 갑옷을 보면 신품인데도 움푹 파인 곳이 눈에 띄는데 미리 화승총을 쏴보고 관통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종의 품질보증마크였다.[9] 덤으로 기병이 랜스를 포기한 것은 16세기 위그노 전쟁 이후부터이고 갑옷이 완전히 물러난 것은 18세기 부터였다.[10] 전장식 소총들은 탄약을 총구로 쑤셔 넣어서 장전을 해아한다. 때문에 탄약이 작을수록 장전이 쉬웠다.[11] 테르시오가 이 전투에서 완전히 붕괴된것은 아니다. 오히려 최후까지 전장을 지키며 프랑스군의 돌격을 좌절시키다가 누적된 피해로 인해 지휘관의 용인하에 철수 했기 때문이다.[12] 스페인 테르시오는 로크루아 전투 이후에도 한동안 남아있었다. 대신 마우리츠식 선형진처럼 머스킷 사수들의 비중이 점차 증가하다가 군제개혁을 통해 완전히 사라진다. 로크루아 전투가 곧 테르시오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13] 단, 창이 아주 완전히 버려진 것은 아니다. 병사들을 이끄는 부사관들에게 주어지거나 비상시 사용할 목적으로 창을 보급했다. 실제로 나폴레옹 시대에 파리 수비군 병기창에 있던 창들을 징발해 러시아 원정에 가져가기도 하였다.[14] 매번 패전만 한 것은 아니다. 선형진과 테르시오가 처음 맞붙은 니우포르트 전투에서 테르시오의 병사들이 선형진을 거의 밀어내자 이겼다고 생각한 병사들이 전리품 챙기겠다고 대거 전열을 이탈하는 사태가 벌어져, 이에 반격한 네덜란드군이 승리했다.[15] 그리고 마우리츠는 이번 전투는 이겼지만, 네덜란드 육군이 스페인 육군을 상대하는 건 무리라 여겨 이후에는 회전을 최대한 피했다고 한다.[16] 아무래도 신교측은 전력이 빈약한데다 테르시오라면 당대 최강인 스페인군에게 똑같은 테르시오로 맞선다는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17] 이 때문에 초기의 머스킷의 정착과정에서 머스킷은 창의 대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실제로 근대 총검술의 근간이 된 건 창술이었고, 중국에서는 지금도 총을 창이라고 부른다.[18] 유럽 각국은 평소에 사냥으로 총기를 항상 다루고 그만큼 숙련이 된 사냥꾼들을 징집하여 샤쇠르예거 같은 엽(獵, 사냥 렵)병부대로 편성하여 군의 정예부대로 운용했다.[19] 영화를 보면 일정거리 까지 끌여들여 동시 발사하는 묘사가 많다. 분명 개인으로선 더 먼 거리에서도 맞출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지만 적의 돌격을 주춤 혹은 저지하기 위한 제압력이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20] 당장 엎드려서 쏜다면 전장식 소총의 특성상 어차피 장전하기 위해 다시 일어서야 하는데 그러면 엎드려 사격의 의미가 거의 사라진다.[21] 이는 개화기 조선도 마찬가지다[22] 다만 패러다임 변화도 생각해야 한다. 엄밀히 말해 총검이 발명된 후, 장창병과 사수가 각각 전담하던 역할을 전열보병이 모두 맡게 되었으니까.[23] 하지만 어디까지나 사수의 역할을 일부 떠맡은 거지 근본적으로 전열보병은 장창병의 연장선에 있다. 그리고 사수(궁병)의 역할을 계승한 것은 포병이다. 애시당초 사수의 역할은 단순히 원거리 투사 무기를 날리는 것이 아니라 그 무기를 곡선으로 쏴서 상대방 머리 위로 투척하는 것이다. 직선 공격을 하는 장창병 및 전열보병과는 이런 면에서 다르다.[24] 동시대의 스페인의 필리핀 마닐라 총독 프란시스코 데 산데(Francisco de Sande)는 명나라 정벌 계획을 펠리페 2세에게 청원하면서 명나라는 소수의 왜구에게 대도시를 뺏기는등 형편없고 명나라의 화승총의 성능과 사격술이 조악하고 형편 없음을 근거로 정벌을 주장하기도 했다.[25] 근대 경기병 전술이론이 확립된 18세기 중반부터 미국 남북전쟁 전까지, 기병총의 주된 용도는 말에서 내린 채 보초를 서거나 징발(약탈)을 할 때의 호신무기였다. 야전에서 같은 기병을 상대할 경우, 증언에 따르면 "50보 밖에서의 권총 사격은 잘 던진 돌멩이보다 나은게 없으며, 50보 안에서는 권총을 쏘자 마자 바로 던져버리지 않으면 칼을 뽑기도 전에 머리에 칼이 박힐 것이다." 선제공격의 이점마저 화약연기에 시야가 가려지고 청각이 마비된 상태에서 백병전에 휘말리게 됨으로써 상쇄된다. (Berenhorst, G.H., ''Betrachtungen über die Kriegskunst'', 3 vols.)[26] 물론 훈련 덜 된 소년병이나 훈련병은 우리가 알고 있는 스톰트루퍼 효과를 연출하기 일쑤였다. 이건 지금도 마찬가지다.[27] 기록에 따르면 사격 클럽에서는 200 m 에서 280 m 까지도 '''화승식''' 머스킷으로 명중시켰다고 한다. 강선식 소총은 '''맞추기 너무 쉬워서''' 금지시켰다고.[28] 선조실록 61권, 선조 28년(1595년) 3월 23일 병신 2번째 기사. "포수(砲手)와 사수(射手)를 각각 30, 40명이나 혹은 40, 50명을 정밀하게 가려 뽑으라. 포수는 세 자루의 조총(鳥銃)으로 3순(巡)하고 사수는 세 개의 편전(片箭)으로 3순한다. 과녁(貫革)을 백 보(百步) 밖에 세우되, 관중(貫中)한 자는 30분(分)이고 변(邊)은 15분으로 한다. 포수와 사수를 짝지워 재주를 겨루게 하여 승부를 내고, (중략) 시험이 끝나거든 아울러 서계할 것을 훈련 도감에 말하라." 순은 화살을 세는 단위로, 조총 도입이후 총알을 셀때도 쓰였다. 5발을 1순이라고 하니 3순을 쏘았다는 건 15발을 쏘았다는 것, 백보 밖에서 15발 안에 과녁 중앙을 맞추는 사람을 30~40명씩 수십번 뽑아 부대를 만들어 내었으니, 조총의 명중률이 그리 낮지 않았음을 알수 있다.[29] 현대의 산탄총도 기본적으로 가늠쇠만 갖춘 채 생산된다.[30] 화약과 부싯돌이 생각보다 비싼 물건이기 때문에 대규모 육군을 운용한 프랑스 같은 경우 사격술 대신 총검 돌격을 마스터하자! 라는 생각으로 총검 돌격 훈련을 엄청 시키기도 했다. 이는 어느 정도 성과가 있어서 당대에 프랑스군은 백병전으로 유명했다. 실제로 아우스터리츠 전투 당시 총알을 다쓰고 고지를 점령하느라 지친 상태임에도 프랑스 전열보병 연대가 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몰려온 연합군 전열보병들을 총검 돌격으로 쓸어버리기도 했다. 한편 영국은 프랑스에 비해 소규모 육군을 운용했고 국가 자체도 부유한 편이었기에 보병 개개인의 사격술 향상을 도모하기 위해 실탄 사격 훈련을 자주 하였고 영국군 보병들은 당대 타국 보병들에 비해 상당히 숙달된 소총수들이었다. 특히 아주 얇은 선형진을 구성, 엄청난 화력을 뱉어내는‘씬 레드 라인’이라는 용어는 영국군 보병을 대표하는 단어가 되었다.[31] 이는 이 시대의 군복들이 왜 색이 튀고 화려했는지를 뒷받침하는 주장이다. 색이 튀고 화려해야 아군의 위치를 파악하기에 적당했고 기타 이유들이 있었다.[32] 명심하자. 당시 경보병들이나 조선 포수들도 가늠쇠만 가지고 100m 거리의 표적을 맞췄다.[33] 초기에는 화약 주머니를 따로 가지고 다녔고, 나중에는 기름종이로 탄과 화약을 한꺼번에 싸서 화약 조절을 신경쓰지 않아도 되게 했다. 종이를 뜯어 화약을 붓고 탄을 집어넣는 방식이다.[34] 상황에 따라 생략이 가능하다. 물론, 당시 군대 교범에는 이런걸 수록하진 않았고, 최전선의 병사들 사이에서 퍼진 야매(?)방법이었다.[35] 높은 확률로 지면에 포탄이 박히지 않고 오히려 튀어서 직선 상의 적군을 더 피해를 줄 수 있기에 포병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다. 이 때 비가 와서 땅이 진창이 되거나 하면 대포알이 지면에 도탄되어 다수의 사람을 잡을 확률이 확 떨어지므로 보병에게 보다 더 유리해진다.[36] 이 둘은 백년전쟁 때문에 원시적인 내셔널리즘이 생겨나있었다. 다른 국가들은 '민족'이나 '국가'의 개념이 한참 뒤에나 생겼다.[37] 당시 하층민에게 출세하는 유일하다시피한 길이 바로 입대였고, 시간이 지나 장교가 되는 것만이 하층민으로서 할 수 있는 출세였다.[38] 현대의 군대도 이 점은 마찬가지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국가의 통제력이나 민족주의 등 현대의 국가들과 이 시대 국가들과는 환경이 전혀 다르다. 실제 당대 탈영율은 지금보다 훨씬 높았다. 용병이나 가난한 하층민들로만 구성된 정도면 그래도 자질이 양호한 수준이고, 심한 경우 주정뱅이나 부랑자등의 막장인생에다 죄인들까지 형벌 대신 입대시켜 굴릴 정도였으니 각종 사건사고나 탈영이나 심지어는 적군과의 내통등이 빈번하게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높은 기동력을 가질 수 있던 이유의 하나가 사기 높은 시민병은 약탈하러 보내도 탈영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하급병사들의 자질문제는 전열보병에만 해당된 것이 아니라 대항해시대 수병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좋지 않은 처우와 높은 사망율에 거친 환경으로 인해 좋은 자질의 수병 충원이 힘들어 강제입대시킨 죄수나 부랑자들의 비율이 매우 높았고, 항구 근처의 거리에서 보이는 남자들을 아무나 마구 잡아다가 운용인원을 채우는 일마저 비일비재했다. 물론 이렇게 강제충원한 인원들의 반란이나 탈주를 막기 위해 온갖 강제적인 규율에다 입항시에 수병들의 선내 감금(!)은 기본이었다.[39] 두 언어가 중세 또는 근대에 유럽에서 가진 위상은 해당 문서 참조.[40] 상술했다시피 이것 때문에 외국어를 좀 한다 싶은 하층민 병사들은 적군과 내통해서 배신하는 일이 심심찮게 일어났다.[41] 그러다 미국 독립전쟁 당시의 미니트맨같은 경보병의 유격전에 화력이 분산되는 정석적인 전열보병은 의외로 취약했기 때문에, 결국 나폴레옹 전쟁 후반기에는 그 영국군에도 그린 자켓(Green Jackets)과 같은 경보병 부대가 만들어지게 된다.[42] 가장 극단적인 사례는 예나전투에 있다. 프랑스군이 차지하고 있던 마을에 프로이센군이 공격해는데, 프랑스군이 건물에 숨어서 사격한 반면, 프로이센군은 이런 상황에서도 열을 맞춰서 싸우고 있던 것. 당연히 프로이센군은 큰 피해를 입고 격퇴당했다. 국민군인 프랑스군에 비해 구시대의 프로이센군은 산병으로 싸우는 건 생각도 할 수 없었기 때문.[43] 네이버 국어사전[44] 1815년 6월 16일 벨기에 카트르 브라(Quatre Bras)에서 벌어진 전투를 묘사한 것이다. 워털루 전투의 전초전에 속한다.[45] 만약 기병이 보병진의 정면으로 돌격한다면 보병의 입장에서는 방진을 짜는 것 보다 더 쉽게 처리가 가능하다. 당연한 것이 방진보다 선형진의 전면 화력이 더 좋기 때문이다. 후면에서 쇄도해 들어가도 보병진이 뒤로 돌면 기병으로서는 정면 돌격과 같은 상황에 빠진다. 이런 이유로 기병 돌격은 선형진을 짜고 있는 보병의 측면을 치는 것을 가장 이상적인 전술로 본다. 기병이 보병진의 측면으로 돌격할 때 보병진이 좌향좌, 우향우를 해봐야 고작 1열의 3~4명 정도만 사격이 가능할 뿐이다.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 보병이 선형진으로 대응하고자 한다면 선형진의 전면이 기병 돌격이 들어오는 방향을 마주보도록 진형을 바꿔줘야 한다. 이런 방향 맞춤을 하고 있는 사이에 기동력에서 우위에 있는 기병이 방향을 틀어버리면 보병진은 또 진형을 움직여야 한다. 보병이 이렇게 사격을 못하고 선형진의 전면 방향을 이리저리 바꾸고 있는 사이에 기병은 별다른 제지를 받지 않은 상태로 보병진에 접근이 가능하다. 이런 이유로 기병은 항상 보병진의 측면을 노리고 들어오게 마련이고 이에 보병들은 측면이 존재하지 않는 방진으로 대응하게 된다.[46] 이 점에선 오히려 전열보병들의 전투가 자동화기와 각종 폭발물들이 난무하는 현대전보다도 훨씬 가혹했는데, 현대전이면 적당히 흩어져서 은엄폐를 실시하면 기관총이든, 수류탄이든, 심지어 포격이나 폭격에 노출되더라도 생존 확률이 상당히 올라가지만, 전열전은 엄폐물 따위는 없는 개활지에서 적군의 사격과 전장포 포격을 그대로 서서 받아줘야 했다. 이게 무섭다고 대형을 풀거나 엎드리거나 한다면 후술할 태형을 비롯한 각종 형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47] 다만, 모병자원 대다수는 그렇게 질이 낮지는 않았다. 웰링턴장군의 영국군 장병들에 대한 애정섞인 디스가 와전된 것에 가깝다.[48] 영화 제독의 연인에서 백군 병사들이 총알없는 착검 모신나강을 들고 붉은 군대의 기관총 앞으로 덤덤히 대열을 맞추어 걸어가다가 수녀의 사망으로 분노, 장렬히 돌격하는 장면은 여기서 기인한 것이다.[49] 다만 크림전쟁에서도 참호가 이용되었고 참호전이 일어났었다.[50] 의장대를 나온 사람이라면 잘 알겠지만 네명이 일렬로 동시에 회전하는 것도 쉬운일은 아니다.[51] 전열보병 시절의 관점으로 보면 이거 모든 병사들이 개틀링을 들고 뛰어다니면서 싸우는 거나 마찬가지다. 실제로 전열보병 시기의 기관총의 정의를 그대로 적용하면 모든 돌격소총은 기관총이고, 애초에 자동소총이란 물건 자체가 원리적으로 기관총의 축소판이다.[52] 다만 성호사설이나 국조보감에서는 이런 수석식을 발사속도가 더 빠르다고 좋게 평가했다.[53] 흑색화약은 터질 때 연기가 심하게 발생하기에 화약 연기가 자욱한 전장에선 피아 구별이 쉽지 않았다. 또한 지휘관이 멀리서 병력 상황을 잘 파악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기도 했는데 제대로 된 통신수단이 전무했기 때문. 그래서 눈에 잘 띄는 원색을 많이 사용했다.[54] 근대 시대에 멋진 군복은 군대에 지원하는 동기가 되기도 했다. "군대에 가면 번쩍거리는 칼도 차고 저렇게 멋진 옷도 입을 수 있구나!"는 생각에 지원하는 사람이 의외로 적지 않았던 것. 현 오스트리아 의장대도 화려한 군복과 그 멋짐에 오스트리아 내에서도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이 용도로는 아직까지도 장교 및 사관생도용 예복으로 남아있다.[55] 대항해시대로 무역량이 증가하며 붉은색 염색에 필요한 코치닐이 대량으로 유입되었다.[56] 사실 후대의 혁신적인 후장식 소총같은 물건은 이니고 플린트락 방식의 강선 파인 머스킷으로 보는 편이 맞다. 자세한건 소총 문서를 참고하자.[57] 단, 숙련시 150m까지 가능했다.[58] 소련군, 그리고 현재 러시아군 기갑차량의 도색인 좀 칙칙한 녹색이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59] 특이한 점이라면, 다른 군대처럼 요포를 말아서 배낭 위에 결속하는게 아니라 어깨에 직접 들러맸는데, 남북전쟁기 남군이나 보불전쟁기의 후기 프로이센군처럼 그렇게 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60] 아시가루 같은 평민 병 체제는 붕괴했기에 사무라이 같은 무사들이 전열보병이 되었는데, 불만이 막심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