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 대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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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 대분열은 원래는 그 유명한 니케아-칼케돈 신조를 비롯해서 여러 세계 공의회의 합의를 따르는 양대 기독교인 동방 교회(훗날의 정교회)와 서방 교회(훗날의 가톨릭)가 1054년에 분열되어 오늘날의 정교회와 가톨릭으로 갈라선 시점이라고 역사가들이 보는 사건으로, 기독교사와 세계사에 손꼽히는 중대한 사건이다.
이 갈등은 9백 년이 지난 20세기 들어서야 교회일치운동의 확산 덕에 화해 무드로 들어갔으며, 1965년을 기준으로 동서 교회는 상호 파문을 취소하고 교류를 재개하였다.
후대 역사가들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할 때 이 시점을 두 교회가 갈라지기 시작한 시점으로 판단한다는 것이지, 실제로는 1053년까지 한 교회였다가 1054년부터 딱 갈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이전과 달리 재통합되지 못하여 영영 떨어져 나간 것이다. 실제로 1054년 이전에도 두 교회가 상호 파문을 한 적이 있으며, 반대로 1054년 이후에도 두 교회가 교류를 이어갔다. 그러므로 이 문서에서는 1054년의 사건뿐만 아니라 그 이전의 두 교회의 관계에 대해서도 서술한다.
동서 분열에 대해, 정교회는 하나인 교회로부터 로마 측이 분열되어 나갔다고 인식하며, 가톨릭은 정반대로 하나인 교회로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측이 분열되어 나갔다고 인식한다. 다만 양측에서는 모두 서로에 대한 시선이 개신교에 대한 시선과는 차이가 있으며, 분열 전 역사를 어떤 형태로든[1] 공유한다고 인식은 하고 있다.
그 근원을 따진다면, 서로마 제국이 야만민족의 지속적 침공을 받다 결국 공중분해되어 버려 서방 세계에 헬게이트가 열린 일로 거슬러 올라간다.[2] 여하튼 서방 세계가 개박살 난 와중에도 어찌저찌 야만인(?)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켜가며 어떻게든 생존한 서로마 교회는 게르만족을 개종시키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래도 동서 교회는 서로마의 급작스런 붕괴로 인해 벌여진 헬게이트를 수습하는 동안에는 멀쩡히 하나의 통합된 지체를 이루고 있었으나.... 서방 교회가 어찌저찌 야만인들을 개종시킨 끝에 이 난장판이 수습되자 이미 로마의 동서 분리 때부터 슬금슬금 올라오던 수위권 떡밥이 또 튀어나오게 된다. 또, 이미 교리적 논쟁이 일어나서 본래 하나였던 알렉산드리아 교회가 정교회와 콥트 정교회라는 두 교회로 분열되는 등 이미 꽤나 오래 전부터 교회의 일치는 무너질 대로 무너져가던 상황이었다.[3][4]
또, 동로마 제국은 이슬람의 진출로 인해 레반트 지역, 아프리카, 이집트를 영구 상실하고 만다. 그리고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위기까지 겪었으나, 간신히 이슬람 세력을 격파하고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여기서 잠시 이야기를 돌려보자. 313년 밀라노 공인으로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의 공인을 받은 이후 로마 제국 전역의 교회는 니케아 공의회 기준으로 세 중심지인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를 중심으로 운영되다가 훗날 신흥 세력인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올라오고 예루살렘도 합세하며 5개 중심지 체제로 바뀐다. 이들, 즉 로마 제국의 총대주교 5명을 펜타르키아라고 하는데 펜타르키아의 구성원은 로마 총대주교,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s-1,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안티오키아 총대주교, 예루살렘 총대주교였다. 여기서 신흥 세력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동방의 기존 중심지인 알렉산드리아와 갈등을 겪는데, 여기서 로마가 베드로가 세운 3개 주교좌(로마,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사상을[5] 선호했다.
그리고 6세기 중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고토 회복 전쟁의 결과 동로마는 옛 서로마의 강역 중 상당 부분을 수복한다. 수복한 지역에는 옛 수도 로마가 있는 이탈리아 또한 포함이 되어 독립적인 교회 수장이던 교황은 다시 동로마 황제의 산하로 들어온다. 수복한 이탈리아 지역에는 라벤나 총독부가 설립되어 동로마 황제가 베드로좌를 보호했다. 그 결과 교황은 로마 교회의 사제단이 선출하여, 황제의 대리자인 라벤나 총독에게 '''선출을 보고'''하는 등 복종적인 태도를 보였다.
잡음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5명의 총대주교가 대략 로마>콘스탄티노폴리스[6] >알렉산드리아>안티오키아>예루살렘 순의 서열로 전 세계의 교회를 관리하며 동로마 황제가 신앙의 수호자로서 이들을 보호하는 보편 교회 자체는 이어지게 된다. 그러나 7세기 이슬람의 발흥으로 인해 보편 교회의 근간이 뿌리채 흔들리게 된다. 동로마가 레반트, 북아프리카, 이집트 일대를 상실하게 되는데 하필 이 지역에 알렉산드리아, 예루살렘, 안티오키아가 포함되는지라 3개의 총대주교좌 또한 이교도 손 안에 들어가고 결국 기독교 세계에 남은 총대주교좌는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이 둘뿐이었다.
그럼에도 동서 대분열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는 라벤나 총독부의 존재 때문. 로마 자체는 교황이 다스리는 곳이지만, 원래 로마는 라벤나 총독부의 영토로 수틀리면 라벤나 총독이 바로 로마로 쳐들어가 교황을 끌어낼 수도 있기 때문에 교황은 동로마 황제와 대놓고 척을 지진 못했다.
가톨릭과 정교회의 분열은 1054년의 상호 파문 사건 하나 때문만은 아니고, 이미 5세기 아카키오스 분열이나 단의론 논쟁 등을 통해 계속 쌓여왔다. 726년, 레온 3세 시대의 성상파괴운동[7] 등으로 인해 문화적인 이질감도 커져갔다.
하필 이런 좋지 않은 타이밍에 안 그래도 북이탈리아를 장악하고 있던 랑고바르드족이 남하하여 중부 이탈리아를 개박살 낸다. 이미 7세기 초반 랑고바르드 족의 남하로 라벤나 총독부는 북부 이탈리아를 상실하고 중부 이탈리아로 영역이 축소된 상황었는데 이슬람에 의한 레반트-이집트-아프리카 대거상실 트리플 콤보로 국력이 아작난 동로마는 안 그래도 라벤나 총독부 살려놓기도 힘든 판이었는데, 성상 파괴 운동으로 제국 내부가 분열되어버렸으니 랑고바르드족의 침공을 받아낼 수가 없었다.
랑고바르드족들은 기어코 라벤나를 함락, 라벤나 총독부를 멸망시키고 로마까지 진군한다. 이 초유의 사태를 로마 교회는 간신히 민병대를 조직해 기적적으로 버텨낸다. 당연하지만 로마 교회는 버틸 수 없는 피꺼솟에 동방 교회에 참을 수 없는 악감정을 가지게 된다. 마침 다행히도 피핀 3세의 도움으로 랑고바르드족을 물리칠 수 있었고, 이때 피핀 3세는 라벤나 지역을 정복하고 교황에게 양도하는데, 이게 바로 교황령의 시초가 된다.
그리고 아들인 카롤루스 대제가 서유럽을 제패하면서 랑고바르드족도 덤으로 깔끔하게 개박살났다. 그러고 이 양반은 랑고바르드 왕국도 개박살, 색슨 왕국도 개박살, 그야말로 로마 교회의 적이란 적은 모조리 개박살 냈다. 이베리아 반도를 완전히 장악하고 프랑스 지역으로까지 진출하려던 이슬람 세력도 개박살 냈다. (물론 프랑크 왕국의 이베리아 진출은 실패.) 게르만-북구 신화에서 신성시되는 세계수의 상징이자, 색슨족의 성지였던 이르민술도 바로 샤를마뉴가 작센을 개박살내면서 활활 태워버렸다.
마침 카롤루스는 서로마의 후손이라 할 수 있는 교회들의 정보망을 이용해 지방 행정기구로 활용하였던 참이라 로마 교회가 적극적으로 자신을 지원하는 것이 절실한 상황이었으니 로마 교회와 프랑크 왕국의 유착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로마 교회는 카롤루스를 교회의 새로운 수호자로 지목하였고, (동로마 입장에서는) 엉터리로 짝퉁 서로마 제위를 하나 만들어 무단 수여한다. 그리고 당시 동로마의 여제였던 이리니와 결혼하여 여성상속을 인정하지 않는 프랑크 및 게르만족 문화에 따라 "로마의 여황제와 결혼해 로마 제위를 넘겨받는다!"는 생각으로 (동로마 입장에선) 매우 황당한 정략결혼을 시도했고 이리니도 여기에 동의했으나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은 당연히 이에 반발, 여기에 '''친아들''' 콘스탄티노스 6세의 눈을 뽑았던 것에 대한 불만이 합쳐져 이리니가 폐위되고 니키포로스 1세를 추대하면서 이 시도는 무산된다.
프랑크 쪽은 프랑크대로[8] , 동로마 쪽은 동로마대로[9] 대단히 분개해 아드리아 해와 발칸반도 북부에서 몇 년간 전쟁을 벌였다. 동로마가 해군이 크게 활약하고 카롤루스의 아들을 전사시키는 등 낙승을 거두었으나, 국력이 제법이라는 것을 느꼈던 데다가, 북방의 불가리아가 심상치 않았으므로, 그쯤에서 그치고 "로마" 황제는 아니되 황제인 것까지는 인정했다.
이후로도 서방과 동방, 그리고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양대 교회는 시대 사정에 따라 협력과 대립을 반복하였다. 9세기 로마-콘스탄티노폴리스 양대 교회의 주요 분열 사건으로 포티오스 분열이 있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문서 참조.
하지만, 아직 교회가 완전히 분열된 것은 아니었다. 비록 라벤나 총독부가 박살이 나긴 했어도, 11세기 중반까지는 동로마 제국이 이탈리아 남부(대 그리스)를 장악하고 있었기에 로마에 이리 저리 간섭을 할 수 있었고, 따라서 교회가 완전히 분열될 만한 환경은 피하고 있었다. 하지만 소빙하기 크리를 맞고 도저히 버틸 수가 없어 남하한 바이킹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며 노르만인이 되었는데, 이들이 이탈리아 남부를 침공하여 이 지역을 점령하였다. 이후 동로마 제국은 서방 세계에 대한 영향력을 사실상 상실해버렸다.
전통적으로 동로마 황제는 너무나 거대하고 강력한 자국의 교회를 견제하기 위해 항상 로마와 제휴하곤 했던 것이 배경으로 있다. 11세기 중반 동로마 제국은 내부의 세력 다툼으로 약해져 있는 상태였고, 황제의 권력 또한 매우 약해져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권력이 황제를 압도할 정도로 강해져 가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 황제 콘스탄티노스 9세는 교황에게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를 찍어 눌러달라는 의미의 서한을 보냈다. 교황 레오 9세는 즉각 황제의 요구에 부응하여 로마 교회에서 가장 완고하며 호전적인 세 추기경을 사절로 보내 공의회를 개최하도록 했다.
이 기간 중 내내 교황 사절단이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뭐라고 하건 말건 처음부터 끝까지 교황의 수위권만을 주장했기 때문에 양자 간 합의는 없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는 이들을 추방했고, 결국 열이 단단히 뻗친 교황 사절단은 1054년 7월 16일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의 제대 위에 세계 총대주교에 대한 파문장을 올려놓고 로마로 돌아가버렸다. 다음 날 아침 이것을 보고 격노한 세계 총대주교는 그 세 명을 파문하고 교황의 이름을 딥티코스에서 지워버렸다... '''고 알려져 있으나, 실상은 다르다.'''
일방적인 수위권 주장과 추방까지는 맞지만, 양측이 서로의 교회 자체를 파문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사절단을 보낸 교황 레오 9세는 1054년 4월 19일에 사망했고, 후임 교황 빅토르 2세(재임 1055~1057)는 1055년 4월 13일에 선출되었기 때문에, '''사건이 벌어진 1054년 7월에 교황좌는 공석'''이었다. 다시 말해, 이들은 레오 9세의 대리자로 파견된 것이었기 때문에 파문 교서를 하기아 소피아 성당 제대 위에 올려 놓았거나 말거나 그들은 끝끝내 몰랐지만 '''자격이 소멸된 상태'''였고[10] 게다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인 미카엘 케룰라리오스가 직접 파문한 것은 교황이 아니라 훔베르투스 추기경과 그 사절단이었다. 혹은 일부 주장처럼 교황을 직접 파문했다고 하더라도 레오 9세는 이미 죽었고 빅토르 2세는 착좌하지도 않았던 상태였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오늘날 동서 대분열이라고 불리는 1054년의 상호 파문 사건 자체는 일종의 해프닝이었다. 당대의 사람들은 이 사건을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설사 훔베르토 추기경이 적법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해도, 교황과 세계 총대주교의 상호 파문 자체는 이미 500여 년 전 아카키오스 분열 때도, 200여 년 전 포티오스 분열 때도 있었던 일이다. 실제로 1054년 이후로도 두 교회는 교류를 계속 했으며, 50여 년이 지나 동로마 황제 알렉시오스 1세의 요청에 교황이 응하는 식으로 시작된 십자군 전쟁은 두 교회가 동질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십자군 전쟁은 문서에서도 볼 수 있다시피 단순히 종교와 신앙에 기반한 전쟁이 아니었다. 교황, 서방 국가, 동로마 제국 모두 각자의 정치적 이유를 가지고 전쟁에 임했던 것이다. 그래도 초기에는 실제로 성지를 수복하였으나, 십자군 세력은 동로마 제국의 통제를 받기를 거부하였다. 또한 동로마 콤니노스 왕조의 현란한 외교술은 장기적으로 동로마의 외교적 평판을 깎아먹었으며 외교술이 뛰어난 콤니노스 왕조의 대가 끊겨버리자 사방에 적만 깔리게 되었다. 게다가 베네치아 공화국 등 경제적 이득을 중시한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마구잡이로 끼어들면서 1204년 결국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하는 비극이 일어난다.
이 제4차 십자군 원정은 '''1054년의 사건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돌이킬 수 없는 분열'''을 일으켰다. 동로마 제국의 땅은 분열되었고 십자군과 베네치아가 세운 괴뢰 라틴 제국은 한심한 꼴로 몰락했다. 결국 분열된 정교회권 나라들은 하나씩 오스만 제국에 먹히게 되었다. 더 큰 비극은 라틴 교회와 그리스 교회가 서로를 다른 집단으로 여기는 것을 넘어 적대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동로마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한 이후 공의회를 통해 두 교회를 다시 합치려는 시도가 두 차례 있었지만 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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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바오로 6세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아테나고라스 1세.
위 두 사람이 이러한 흑역사를 고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1964년 당시 가톨릭 교회의 수장인 교황 바오로 6세와 정교회의 수장인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인 아테나고라스 1세가 예루살렘에서 역사적인 만남을 가졌으며 바오로 6세가 교황으로서는 최초로 정교회의 여러 지도자들과 만남을 가지기도 했고 반대로 아테나고라스 1세 역시 정교회의 수장으로서 최초로 바티칸을 방문하는 등 서로 교회의 일치를 위해 노력하였다.
이듬해인 1965년 12월 7일 1054년 동서 교회 대분열 이후 무려 900여년 만에 가톨릭과 정교회는 서로에 대한 파문을 철회하였다. 물론 900여년 간 분열되어 있었던 만큼 이 화해는 일단 명목상으로 화해한 것이며 교회 일치 노력에 어느 정도 진전은 있지만 서로 간의 입장과 견해 차이는 여전히 남아있는 상태다.
성사 교류에 대해서, 두 교회는 서로의 성사 유효성을 인정한다. 세례를 인정하므로 영성체도 가능하나 실제로는 사망 직전 등 위급한 상황이거나 본인 교회의 성사에 참가가 현실적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경우(한국에서의 예: 입대한 정교회 신자)에 한해서다.
1. 정의
동서 대분열은 원래는 그 유명한 니케아-칼케돈 신조를 비롯해서 여러 세계 공의회의 합의를 따르는 양대 기독교인 동방 교회(훗날의 정교회)와 서방 교회(훗날의 가톨릭)가 1054년에 분열되어 오늘날의 정교회와 가톨릭으로 갈라선 시점이라고 역사가들이 보는 사건으로, 기독교사와 세계사에 손꼽히는 중대한 사건이다.
2. 서론
이 갈등은 9백 년이 지난 20세기 들어서야 교회일치운동의 확산 덕에 화해 무드로 들어갔으며, 1965년을 기준으로 동서 교회는 상호 파문을 취소하고 교류를 재개하였다.
후대 역사가들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할 때 이 시점을 두 교회가 갈라지기 시작한 시점으로 판단한다는 것이지, 실제로는 1053년까지 한 교회였다가 1054년부터 딱 갈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이전과 달리 재통합되지 못하여 영영 떨어져 나간 것이다. 실제로 1054년 이전에도 두 교회가 상호 파문을 한 적이 있으며, 반대로 1054년 이후에도 두 교회가 교류를 이어갔다. 그러므로 이 문서에서는 1054년의 사건뿐만 아니라 그 이전의 두 교회의 관계에 대해서도 서술한다.
동서 분열에 대해, 정교회는 하나인 교회로부터 로마 측이 분열되어 나갔다고 인식하며, 가톨릭은 정반대로 하나인 교회로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측이 분열되어 나갔다고 인식한다. 다만 양측에서는 모두 서로에 대한 시선이 개신교에 대한 시선과는 차이가 있으며, 분열 전 역사를 어떤 형태로든[1] 공유한다고 인식은 하고 있다.
3. 배경
그 근원을 따진다면, 서로마 제국이 야만민족의 지속적 침공을 받다 결국 공중분해되어 버려 서방 세계에 헬게이트가 열린 일로 거슬러 올라간다.[2] 여하튼 서방 세계가 개박살 난 와중에도 어찌저찌 야만인(?)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켜가며 어떻게든 생존한 서로마 교회는 게르만족을 개종시키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래도 동서 교회는 서로마의 급작스런 붕괴로 인해 벌여진 헬게이트를 수습하는 동안에는 멀쩡히 하나의 통합된 지체를 이루고 있었으나.... 서방 교회가 어찌저찌 야만인들을 개종시킨 끝에 이 난장판이 수습되자 이미 로마의 동서 분리 때부터 슬금슬금 올라오던 수위권 떡밥이 또 튀어나오게 된다. 또, 이미 교리적 논쟁이 일어나서 본래 하나였던 알렉산드리아 교회가 정교회와 콥트 정교회라는 두 교회로 분열되는 등 이미 꽤나 오래 전부터 교회의 일치는 무너질 대로 무너져가던 상황이었다.[3][4]
또, 동로마 제국은 이슬람의 진출로 인해 레반트 지역, 아프리카, 이집트를 영구 상실하고 만다. 그리고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위기까지 겪었으나, 간신히 이슬람 세력을 격파하고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여기서 잠시 이야기를 돌려보자. 313년 밀라노 공인으로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의 공인을 받은 이후 로마 제국 전역의 교회는 니케아 공의회 기준으로 세 중심지인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를 중심으로 운영되다가 훗날 신흥 세력인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올라오고 예루살렘도 합세하며 5개 중심지 체제로 바뀐다. 이들, 즉 로마 제국의 총대주교 5명을 펜타르키아라고 하는데 펜타르키아의 구성원은 로마 총대주교,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s-1,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안티오키아 총대주교, 예루살렘 총대주교였다. 여기서 신흥 세력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동방의 기존 중심지인 알렉산드리아와 갈등을 겪는데, 여기서 로마가 베드로가 세운 3개 주교좌(로마,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사상을[5] 선호했다.
그리고 6세기 중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고토 회복 전쟁의 결과 동로마는 옛 서로마의 강역 중 상당 부분을 수복한다. 수복한 지역에는 옛 수도 로마가 있는 이탈리아 또한 포함이 되어 독립적인 교회 수장이던 교황은 다시 동로마 황제의 산하로 들어온다. 수복한 이탈리아 지역에는 라벤나 총독부가 설립되어 동로마 황제가 베드로좌를 보호했다. 그 결과 교황은 로마 교회의 사제단이 선출하여, 황제의 대리자인 라벤나 총독에게 '''선출을 보고'''하는 등 복종적인 태도를 보였다.
잡음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5명의 총대주교가 대략 로마>콘스탄티노폴리스[6] >알렉산드리아>안티오키아>예루살렘 순의 서열로 전 세계의 교회를 관리하며 동로마 황제가 신앙의 수호자로서 이들을 보호하는 보편 교회 자체는 이어지게 된다. 그러나 7세기 이슬람의 발흥으로 인해 보편 교회의 근간이 뿌리채 흔들리게 된다. 동로마가 레반트, 북아프리카, 이집트 일대를 상실하게 되는데 하필 이 지역에 알렉산드리아, 예루살렘, 안티오키아가 포함되는지라 3개의 총대주교좌 또한 이교도 손 안에 들어가고 결국 기독교 세계에 남은 총대주교좌는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이 둘뿐이었다.
그럼에도 동서 대분열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는 라벤나 총독부의 존재 때문. 로마 자체는 교황이 다스리는 곳이지만, 원래 로마는 라벤나 총독부의 영토로 수틀리면 라벤나 총독이 바로 로마로 쳐들어가 교황을 끌어낼 수도 있기 때문에 교황은 동로마 황제와 대놓고 척을 지진 못했다.
4. 5~10세기의 여러 충돌
4.1. 726, 성상파괴운동
가톨릭과 정교회의 분열은 1054년의 상호 파문 사건 하나 때문만은 아니고, 이미 5세기 아카키오스 분열이나 단의론 논쟁 등을 통해 계속 쌓여왔다. 726년, 레온 3세 시대의 성상파괴운동[7] 등으로 인해 문화적인 이질감도 커져갔다.
4.2. 랑고바르드족의 이탈리아 침공
하필 이런 좋지 않은 타이밍에 안 그래도 북이탈리아를 장악하고 있던 랑고바르드족이 남하하여 중부 이탈리아를 개박살 낸다. 이미 7세기 초반 랑고바르드 족의 남하로 라벤나 총독부는 북부 이탈리아를 상실하고 중부 이탈리아로 영역이 축소된 상황었는데 이슬람에 의한 레반트-이집트-아프리카 대거상실 트리플 콤보로 국력이 아작난 동로마는 안 그래도 라벤나 총독부 살려놓기도 힘든 판이었는데, 성상 파괴 운동으로 제국 내부가 분열되어버렸으니 랑고바르드족의 침공을 받아낼 수가 없었다.
4.3. 교황령의 탄생
랑고바르드족들은 기어코 라벤나를 함락, 라벤나 총독부를 멸망시키고 로마까지 진군한다. 이 초유의 사태를 로마 교회는 간신히 민병대를 조직해 기적적으로 버텨낸다. 당연하지만 로마 교회는 버틸 수 없는 피꺼솟에 동방 교회에 참을 수 없는 악감정을 가지게 된다. 마침 다행히도 피핀 3세의 도움으로 랑고바르드족을 물리칠 수 있었고, 이때 피핀 3세는 라벤나 지역을 정복하고 교황에게 양도하는데, 이게 바로 교황령의 시초가 된다.
4.4. 카롤루스 대제의 서유럽 평정
그리고 아들인 카롤루스 대제가 서유럽을 제패하면서 랑고바르드족도 덤으로 깔끔하게 개박살났다. 그러고 이 양반은 랑고바르드 왕국도 개박살, 색슨 왕국도 개박살, 그야말로 로마 교회의 적이란 적은 모조리 개박살 냈다. 이베리아 반도를 완전히 장악하고 프랑스 지역으로까지 진출하려던 이슬람 세력도 개박살 냈다. (물론 프랑크 왕국의 이베리아 진출은 실패.) 게르만-북구 신화에서 신성시되는 세계수의 상징이자, 색슨족의 성지였던 이르민술도 바로 샤를마뉴가 작센을 개박살내면서 활활 태워버렸다.
4.5. 교황의 카롤루스의 서로마 황제 서임
마침 카롤루스는 서로마의 후손이라 할 수 있는 교회들의 정보망을 이용해 지방 행정기구로 활용하였던 참이라 로마 교회가 적극적으로 자신을 지원하는 것이 절실한 상황이었으니 로마 교회와 프랑크 왕국의 유착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로마 교회는 카롤루스를 교회의 새로운 수호자로 지목하였고, (동로마 입장에서는) 엉터리로 짝퉁 서로마 제위를 하나 만들어 무단 수여한다. 그리고 당시 동로마의 여제였던 이리니와 결혼하여 여성상속을 인정하지 않는 프랑크 및 게르만족 문화에 따라 "로마의 여황제와 결혼해 로마 제위를 넘겨받는다!"는 생각으로 (동로마 입장에선) 매우 황당한 정략결혼을 시도했고 이리니도 여기에 동의했으나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은 당연히 이에 반발, 여기에 '''친아들''' 콘스탄티노스 6세의 눈을 뽑았던 것에 대한 불만이 합쳐져 이리니가 폐위되고 니키포로스 1세를 추대하면서 이 시도는 무산된다.
4.6. 카롤루스 vs. 동로마제국: 무승부
프랑크 쪽은 프랑크대로[8] , 동로마 쪽은 동로마대로[9] 대단히 분개해 아드리아 해와 발칸반도 북부에서 몇 년간 전쟁을 벌였다. 동로마가 해군이 크게 활약하고 카롤루스의 아들을 전사시키는 등 낙승을 거두었으나, 국력이 제법이라는 것을 느꼈던 데다가, 북방의 불가리아가 심상치 않았으므로, 그쯤에서 그치고 "로마" 황제는 아니되 황제인 것까지는 인정했다.
4.7. 9세기~11세기
이후로도 서방과 동방, 그리고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양대 교회는 시대 사정에 따라 협력과 대립을 반복하였다. 9세기 로마-콘스탄티노폴리스 양대 교회의 주요 분열 사건으로 포티오스 분열이 있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문서 참조.
하지만, 아직 교회가 완전히 분열된 것은 아니었다. 비록 라벤나 총독부가 박살이 나긴 했어도, 11세기 중반까지는 동로마 제국이 이탈리아 남부(대 그리스)를 장악하고 있었기에 로마에 이리 저리 간섭을 할 수 있었고, 따라서 교회가 완전히 분열될 만한 환경은 피하고 있었다. 하지만 소빙하기 크리를 맞고 도저히 버틸 수가 없어 남하한 바이킹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며 노르만인이 되었는데, 이들이 이탈리아 남부를 침공하여 이 지역을 점령하였다. 이후 동로마 제국은 서방 세계에 대한 영향력을 사실상 상실해버렸다.
5. 1054년, 상호파문 사건의 전말
전통적으로 동로마 황제는 너무나 거대하고 강력한 자국의 교회를 견제하기 위해 항상 로마와 제휴하곤 했던 것이 배경으로 있다. 11세기 중반 동로마 제국은 내부의 세력 다툼으로 약해져 있는 상태였고, 황제의 권력 또한 매우 약해져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권력이 황제를 압도할 정도로 강해져 가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 황제 콘스탄티노스 9세는 교황에게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를 찍어 눌러달라는 의미의 서한을 보냈다. 교황 레오 9세는 즉각 황제의 요구에 부응하여 로마 교회에서 가장 완고하며 호전적인 세 추기경을 사절로 보내 공의회를 개최하도록 했다.
이 기간 중 내내 교황 사절단이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뭐라고 하건 말건 처음부터 끝까지 교황의 수위권만을 주장했기 때문에 양자 간 합의는 없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는 이들을 추방했고, 결국 열이 단단히 뻗친 교황 사절단은 1054년 7월 16일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의 제대 위에 세계 총대주교에 대한 파문장을 올려놓고 로마로 돌아가버렸다. 다음 날 아침 이것을 보고 격노한 세계 총대주교는 그 세 명을 파문하고 교황의 이름을 딥티코스에서 지워버렸다... '''고 알려져 있으나, 실상은 다르다.'''
일방적인 수위권 주장과 추방까지는 맞지만, 양측이 서로의 교회 자체를 파문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사절단을 보낸 교황 레오 9세는 1054년 4월 19일에 사망했고, 후임 교황 빅토르 2세(재임 1055~1057)는 1055년 4월 13일에 선출되었기 때문에, '''사건이 벌어진 1054년 7월에 교황좌는 공석'''이었다. 다시 말해, 이들은 레오 9세의 대리자로 파견된 것이었기 때문에 파문 교서를 하기아 소피아 성당 제대 위에 올려 놓았거나 말거나 그들은 끝끝내 몰랐지만 '''자격이 소멸된 상태'''였고[10] 게다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인 미카엘 케룰라리오스가 직접 파문한 것은 교황이 아니라 훔베르투스 추기경과 그 사절단이었다. 혹은 일부 주장처럼 교황을 직접 파문했다고 하더라도 레오 9세는 이미 죽었고 빅토르 2세는 착좌하지도 않았던 상태였다.
6. 진짜 분열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오늘날 동서 대분열이라고 불리는 1054년의 상호 파문 사건 자체는 일종의 해프닝이었다. 당대의 사람들은 이 사건을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설사 훔베르토 추기경이 적법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해도, 교황과 세계 총대주교의 상호 파문 자체는 이미 500여 년 전 아카키오스 분열 때도, 200여 년 전 포티오스 분열 때도 있었던 일이다. 실제로 1054년 이후로도 두 교회는 교류를 계속 했으며, 50여 년이 지나 동로마 황제 알렉시오스 1세의 요청에 교황이 응하는 식으로 시작된 십자군 전쟁은 두 교회가 동질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십자군 전쟁은 문서에서도 볼 수 있다시피 단순히 종교와 신앙에 기반한 전쟁이 아니었다. 교황, 서방 국가, 동로마 제국 모두 각자의 정치적 이유를 가지고 전쟁에 임했던 것이다. 그래도 초기에는 실제로 성지를 수복하였으나, 십자군 세력은 동로마 제국의 통제를 받기를 거부하였다. 또한 동로마 콤니노스 왕조의 현란한 외교술은 장기적으로 동로마의 외교적 평판을 깎아먹었으며 외교술이 뛰어난 콤니노스 왕조의 대가 끊겨버리자 사방에 적만 깔리게 되었다. 게다가 베네치아 공화국 등 경제적 이득을 중시한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마구잡이로 끼어들면서 1204년 결국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하는 비극이 일어난다.
이 제4차 십자군 원정은 '''1054년의 사건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돌이킬 수 없는 분열'''을 일으켰다. 동로마 제국의 땅은 분열되었고 십자군과 베네치아가 세운 괴뢰 라틴 제국은 한심한 꼴로 몰락했다. 결국 분열된 정교회권 나라들은 하나씩 오스만 제국에 먹히게 되었다. 더 큰 비극은 라틴 교회와 그리스 교회가 서로를 다른 집단으로 여기는 것을 넘어 적대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동로마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한 이후 공의회를 통해 두 교회를 다시 합치려는 시도가 두 차례 있었지만 무산되었다.
- 미하일 8세&교황 그레고리오 10세 때 제2차 리옹 공의회(1274년)에서 동서교회 통합 논의가 나오자 필리오케 문제에 대해 정교회가 가톨릭의 입장을 수용하겠다고 밝혔지만 미하일 8세 사후에 여러 사정으로 흐지부지됐다.
- 요안니스 8세&교황 에우제니오 4세 때 열린 피렌체 공의회(1439년)에서도 정교회가 가톨릭의 필리오케를 수용하고 가톨릭의 수위권 우위를 인정하는 조건으로 통합하기로 했다. 그리고 콘스탄티노스 11세도 피렌체 공의회의 결정을 재확인했지만 동로마의 국내 여론은 오히려 나빠졌다. 당시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기 직전이라서 서방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판단으로 내닌 결정이었지만, 동로마인들은 "정교회 신앙이고 뭐고 일단 살고 보자" vs "저 악마 같은 라틴인에게 머리숙이느니, 차라리 이교도의 손에 긍지 있게 죽고 콘스탄티노플이 터번으로 덮히는 게 낫다. 튀르크족은 최소한 우리에게 딤미로서 정교회를 믿을 권리는 준다"며 국론 분열을 일으켰다. 이미 그 시점에서는 종교의 문제를 넘어섰던 것이다. 그리고 메흐메트 2세는 동로마를 멸망시킨 후, 통합 반대파 성직자인 옌나디오스 스콜라리오스를 세계 총대주교로 임명하며 밀레트 제도를 통해 국내 정교도를 관리했고, 통합 찬성파가 서방으로 망명하면서 동서교회 통합 논의도 흐지부지됐다.
7. 오늘날: 화해와 일치의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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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바오로 6세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아테나고라스 1세.
위 두 사람이 이러한 흑역사를 고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1964년 당시 가톨릭 교회의 수장인 교황 바오로 6세와 정교회의 수장인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인 아테나고라스 1세가 예루살렘에서 역사적인 만남을 가졌으며 바오로 6세가 교황으로서는 최초로 정교회의 여러 지도자들과 만남을 가지기도 했고 반대로 아테나고라스 1세 역시 정교회의 수장으로서 최초로 바티칸을 방문하는 등 서로 교회의 일치를 위해 노력하였다.
이듬해인 1965년 12월 7일 1054년 동서 교회 대분열 이후 무려 900여년 만에 가톨릭과 정교회는 서로에 대한 파문을 철회하였다. 물론 900여년 간 분열되어 있었던 만큼 이 화해는 일단 명목상으로 화해한 것이며 교회 일치 노력에 어느 정도 진전은 있지만 서로 간의 입장과 견해 차이는 여전히 남아있는 상태다.
성사 교류에 대해서, 두 교회는 서로의 성사 유효성을 인정한다. 세례를 인정하므로 영성체도 가능하나 실제로는 사망 직전 등 위급한 상황이거나 본인 교회의 성사에 참가가 현실적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경우(한국에서의 예: 입대한 정교회 신자)에 한해서다.
8. 관련 문서
[1] 정교회 시점의 역사관이든 가톨릭 시점의 역사관이든[2] 다만 이것의 책임을 서로마를 "포기"한 동로마에 돌리는 견해가 있는데 학문적으로 근거 없는 얘기다. 동로마와 서로마 사이의 협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건 테오도시우스 대제 사후이지만 이건 두 로마 제국의 주도권이 책임감 있는 황제가 아닌 자기 잇속밖에 모르는 권신들에게 넘어간 속사정 탓이었다. 물론 스틸리코는 그렇지 않았지만, 하필 스틸리코의 홈그라운드는 서로마였던 데다가 다른 정치력 있는 부하도 없어서 이 난국을 타개할 수 없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동서 로마의 협조 체제는 나름 복원되지만 북아프리카를 장악한 반달족을 격파하러 대규모 원정군을 보낸 것이 반달족의 화공으로 인해 실패로 돌아가면서 동로마가 큰 경제적·군사적 피해를 입어(원정군 규모가 10만 명, 동원한 배는 1000척을 훌쩍 넘었다. 이 원정군을 편성하기 위해 동로마는 13만 리브라('''금 48톤 750kg 상당''')의 예산을 쏟아 부었다. 대규모 인력과 비용을 쏟아 부은 이 원정의 실패는 동로마를 근 30년 가까이 괴롭혔다.) 이후 더이상 서로마에 개입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결코 동이 서를 포기한 게 아니었다.[3] 교회 전체의 통합을 꿈꾸는 교회 일치 운동은 현대에 와서야 제대로 일어난 일이다. 교회에 좋든 싫든 정치 알력이 얽힐 수밖에 없던 옛날엔 수위권 분쟁이 안 날 수가 없었다.[4] 하지만 동방 교회들 간에 수위권 타령 = 신앙적 자살이 된 현대에선 저 교리 분쟁은 사실 '''오해''' 였다고 결론났다.[5] 비록 알렉산드리아는 마르코를 통해서 간접적으로지만.[6] 칼케돈 공의회에서 2위로 격상[7] 아래에도 설명되어 있었지만 동로마의 황제와 세계 총대주교는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는 입장이었다. 성상파괴주의는 정치적으로 이용된 문화 및 종교 사건으로 그 특징과 파괴력이 가히 로마판 문화대혁명급이다.[8] 정략결혼을 무산시킨 것으로 모자라 폐위시켰으니까[9] 글도 모르는 게르만 오랑캐 따위가 로마를 참칭했으니까[10] 서울 가톨릭대 신학과에선 이를 두고 '''"의도치 않은 월권'''' 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11] 이후에도 모스크바 대공국이라는 국호는 유지하다가 손자인 이반 4세의 치세에 루스 차르국으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