렌 바이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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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네임'''
Leonard Kevin "Len" Bias
'''출생'''
1963년 11월 18일 메릴랜드 주 랜도버
'''사망'''
1986년 6월 18일
'''신체조건'''
206cm, 95kg
'''포지션'''
스몰 포워드
'''출신대학'''
메릴랜드 대학교
'''프로입단'''
1986년 전체 2순위
보스턴 셀틱스
1. 개요
2. 일생
2.1. 화려했던 대학 시절
2.2. 1986년의 비극
2.3. 그 이후
2.4. 유사 사례
3. 출처


1. 개요


미국의 전 농구선수로, 대학 시절 화려한 경력을 쌓았으나 프로에 발을 딛기도 전에 빨리 가 버린 비운의 선수였다.

2. 일생



2.1. 화려했던 대학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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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분'''과의 매치업
1963년에 메릴랜드 주 랜도버에서 태어난 렌 바이어스는 하야츠빌에 있는 노스웨스턴 고등학교 시절 탁월한 실력을 보여 1982년에 메릴랜드 대학교에 입학해 레프티 드라이젤 감독의 가르침을 받으며 대학 시절 3년 동안 뛰어난 탄력과 득점력을 선보인 특유의 농구 센스로 1985년과 1986년에 두 차례 ACC 올스타 선출, ACC 올해의 선수상에 두 번 뽑히기도 했다. 1986년에는 올 아메리칸 퍼스트 팀에도 뽑혔다.
특히 대학 4학년 때에는 평균 23.2득점과 7.0리바운드로 말 그대로 펄펄 날았고, 덕분에 그는 지금도 메릴랜드대 농구팀 역사상 최다 득점자로 기록되고 있다. 그의 하이라이트는 1984년 ACC 토너먼트 결승전이었다. 결승전에서 듀크 대학교를 상대로 26점을 올리며 팀에 30년만의 우승 축배를 선사해주었고, 1986년 노스 캐롤라이나 대학교와의 원정경기에서는 35점을 터뜨려 명장 딘 스미스 감독에게 패배를 선사해주었다.
바이어스의 장점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바이어스는 드리블과 리바운드, 수비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보였는데, 발전 욕구가 강했던 그는 팀의 포인트 가드에게 "볼 다루는 기술을 가르쳐달라"고 졸라 볼 핸들링을 연습했을 정도였다.

2.2. 1986년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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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보스턴 셀틱스는 1985/86 시즌에 케빈 맥헤일이 아킬레스건 부상으로 14경기를 결장하게 되자 결국 팀은 새로운 구심점을 되찾고자 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케빈 맥헤일 이후 신인 가뭄을 해결하기 위해 1986년 6월 17일에 열린 드래프트에서 렌 바이어스를 뽑았다. 팀의 심장인 래리 버드는 "여름 동안 내가 옆에서 훈련을 도와주겠다"라고 하여 보물을 찾은 듯한 느낌으로 기뻐했다.[1]
특히 바이어스가 뽑힌 1986년은 나이키가 '에어 조던'으로 이리저리 날고 기고 하던 시점이었다. 경쟁사였던 아디다스리복도 새 모델을 찾기 위해 바이어스에게 눈독을 들였는데, 그는 아디다스를 선택했고 드래프트 지명 뒤 후원 계약을 체결했다. 이후 그는 가족들과 함께 보스턴에서 구단 관계자들과의 파티에 참석해 미래에 대한 기대감을 드높였다.
바이어스는 가족들과 함께 워싱턴으로 이동한 뒤 홀로 대학 친구들을 만나 드래프트 지명을 자축하는 술자리를 가졌다, 이 때가 6월 18일 새벽 2시였다. 당시 사건을 보도한 워싱턴 포스트취재에 따르면 그는 파티가 끝난 뒤 홀로 숙소에 돌아왔다고 한다. 이때가 새벽 세 시 남짓으로 추정된다. 바이어스는 숙소에 들어간 뒤에도 몇몇을 만났다. 이 때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그러나 코카인은 혼자 흡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그 흡입이 지나친 나머지 결국 그는 18일 오전에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주변인에게 그가 건넨 마지막 말은 "드래프트에 지명되어 너무 신나고 기대된다."였다. 바이어스의 친구들은 그가 너무 지쳤을 때나 긴장이 될 때 코카인을 흡입하곤 했다고 밝혔는데, 들뜬 기분 뒤에는 잘 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계속된 계약 제안, 그리고 기자들의 취재로 많이 지쳐 있었던 것 같다는 추정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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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 인해 메릴랜드대는 충격에 빠졌다. 부모도, 셀틱스도 마찬가지였다. KC 존스 감독과 지미 로저스, 크리스 포드 코치 등의 코치진과 가족들은 그가 코카인을 즐겨 피웠다는 사실조차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이 역시 NBA도 비난을 피하진 못했다. 왜냐면 NBA 역시 드래프트에 앞선 5월에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약물 검사를 했으나 "그 때 소변 검사에선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고 항변했지만, 바이어스의 직접적 사인이 코카인 흡입이란 사실은 변치 않았기 때문이다.

2.3. 그 이후


훗날 바이어스의 부모는 그가 1985년 드래프트에 나가길 원했다고 밝혔다. 경제사정이 안 좋았기 때문에 3학년만 마치고 프로에 가길 원했던 것이다. 또 행여나 가치가 떨어지기 전에 미리 프로에 나가는 것도 좋다고 생각했다. 만약 그가 부모에 바람대로 프로에 1년 먼저 진출했다면 역사가 바뀔지도 모를 것이다.
바이어스 사건은 그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바이어스의 부모는 에이전트와 보험사 등을 상대로 거액의 소송을 벌여 금전적 문제를 해결코자 했다. 그러나 가장 억울한 쪽은 셀틱스였을 것이다. 바로 전날만 해도 함께 웃고 즐겼던 '복덩이'가 한순간에 시신이 되었으니 말이다. 한때 그를 예의주시했던 레드 아워백 사장과 래리 버드 역시 충격에 빠졌다는 후문이었다. 이후 셀틱스는 1987년에 레지 루이스를 뽑아 세대전환을 시도코자 했으나 그가 1993년에 연습 도중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쓰러졌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한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한순간에 차세대 리빌딩 구심점을 잃은 셀틱스는 결국 버드-맥헤일-패리시 시대의 후계자를 모두 잃고 팀이 노쇠화하면서 쇠락, 2001년까지 플옵 진출에 실패했고 바이어스 사후 23년 뒤인 2008년 파이널에서 케빈 가넷-레이 앨런-폴 피어스 삼총사를 꾸려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를 꺾어 통한의 세월을 풀 수 있었다. 이때의 트라우마때문인지 셀틱스의 선수관리 정책도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다.

2.4. 유사 사례


1986년 드래프트에선 바이어스 말고도 약물 과다복용이 확인된 선수가 나오는 비극이 발생했다. 크리스 워시번(전체 3위, 골든스테이트), 윌리엄 베드포드(전체 6위, 피닉스), 로이 타플리(전체 7위, 댈러스) 등 상위 드래프트 지명 선수 세 명이 약물 복용이 적발된 것이다. 특히 타플리는 1988년 올해의 식스맨 상을 받았지만 계속된 NBA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세 번 적발되어 1994년에 NBA서 영구 퇴출당했다. 이로써 데이비드 스턴 총재가 약물에 대해 강경히 나서며 NBA 농구판에 약물을 뿌리 뽑는데 성공했다.
이 1986년 드래프트는 NBA 역사상 최악의 드래프트로 평가받는다.

3. 출처


[1] 당시 보스턴은 7순위 지명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팀의 사장이었던 레드 아워백은 렌 바이어스를 뽑고 싶어서 당시 2순위 지명권을 가지고 있었던 시애틀 슈퍼소닉스와 협상을 벌여 7순위 지명권과 당시 팀의 포인트가드였던 제랄드 핸더슨을 트레이드 하고 2순위 지명권을 받아왔다. 물론 당시 바이어스는 1순위 지명도 가능했기 때문에 불안해하기도 했지만 다행히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가 브래드 도허티를 1순위로 지명해서 바로 2순위로 바이어스를 지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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