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피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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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 NBA 선수. 주요 포지션은 주로 스몰 포워드였으며 이전에는 슈팅 가드 포지션도 잘 소화했던 보스턴 셀틱스의 프랜차이즈 스타이다. 셀틱스의 암흑기와 부흥기를 함께 경험한 '''몸에 녹색 피가 흐르는 남자.'''[2] 별명인 '''The Truth'''는 샤킬 오닐이 지어준 것. 한국 NBA 팬들은 저 별명을 인용해서 '진실이' 등으로 부르며 애칭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한국에서 인기가 높았던 선수.
2. 플레이 스타일
다른 선수들처럼 어떤 화려함이나 극강의 피지컬 혹은 운동능력은 없었지만 1옵션 득점원의 롤을 묵묵히 해낸선수였다. 그래서 그런지 보스턴의 Blue Collar 색깔에 가장 잘 맞은 선수였다. 무엇보다도 피어스의 가장 큰 강점을 이야기하라면 승부가 걸려있는 상황에서 발휘되는 엄청난 '''강심장''' 이것 하나때문에, 4쿼터 막판 접전일때 피어스를 냅뒀다간 상대팀은 지옥을 경험하게 되는게 한두번이 아니다. 여러차례 중요한 슛을 성공시켜서 팀을 수차례 구해내기도 했으며, 선수생활 막바지인 최근에도 수 차례 버저비터를 성공시켰다.
2000년대 셀틱스의 가장 핵심적인 스코어러였으며, 위치 선점과 미들 레인지 점퍼가 뛰어나다. 언뜻 그의 플레이를 보면 정말 대충대충 플레이하는것 같지만 실제로는 리그에서 가장 쉽게 득점하는 선수 중 한 명이다. 화려한 기술을 구사하지는 않지만 의외로 상당한 순간스피드와 힘을 활용한 돌파 능력도 수준급이며 돌파 이후 자유투를 얻어내는 능력도 리그에서 상위 클래스에 해당된다.[3] 또한 3점슛도 준수한 편[4] 이라 그를 상대하는 선수는 골치가 많이 아플것 같다.
다만 공식신장인 2m1보다 작은 1m98cm[5] 이다보니, 자기보다 더 크고 빠른 스몰 포워드를 막는데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며, 특히 2000년대 이후, 수비 능력에 의문을 가지는데, 피어스의 수비는 워싱턴까지는 충분히 평균 이상은 하는 선수였다.[6]
피어스와 전성기를 같이 보냈고 비슷한 신장을 가진 코비, 맥그레디, 카터가 직선적으로 돌파로 림 어택을 노렸다면 피어스는 능구렁이 같은 스핀무브나 힘을 이용한 플레이로 이들과는 또다른 플레이를 보여주었다.[7]
3. 평가
폴 피어스에 대하여, 레전드 선수들의 유명한 평가 두 가지가 있다.
"(보스턴 헤럴드의 기자 스티브 불펫에게) '''받아적어라. 내 이름은 샤킬 오닐이다. 그리고 폴 피어스는 씨X[8]
진실이다. 다 필요없고 이것만 받아적어라. 나는 그가 꽤 잘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까지 할 줄은 몰랐다. 폴 피어스는 진실이다.'''"[9] - 샤킬 오닐[10] -
"(셀틱스의 홈구장 TD 가든에 대해) This is the Truth's house." - 케빈 가넷 -
4. 고등학교 & 대학시절
고등학교 시절, 팀을 주 챔피언으로 이끈 피어스는 올 맥도날드 아메리칸 게임에 선발된다. 그때 같이 선발된 선수로는 빈스 카터, 케빈 가넷, 스테판 마베리, 앤트완 제이미슨, 샤리프 압둘라힘 등 선수들 모두 올스타와 드래프트 전체 5위내에 선발된 엘리트 선수들이다.[11][12]
피어스는 대학농구의 명장 중 하나였던 로이 윌리엄스[13] 가 지휘봉을 잡고 있던 캔자스 대학에 입학했다. 당시 대학 최고의 빅맨중 하나였던 레프 라프렌츠와 함께 팀을 이끌면서 팀을 Big-12 토너먼트에 우승시키면서 많은 관심을 받게 되었다. 그렇게 꼬박 3년을 뛴 피어스는 1998년 NBA드래프트에 참가신청을 하게 된다.
5. 파란만장한 NBA 경력
5.1. 전반기
피어스는 의외로 전체 10순위라는 낮은 순위로 보스턴에 지명된다. 팀 동료인 라프렌츠가 전체 3순위로 지명된 것과는 달리 너무나도 초라한 모습. 더군다나 마이클 올로워캔디[14][15] 라는 성씨도 이상한 녀석이 떡하니 전체 1순위 지명인것도 그렇고, 또 어디 독일에서 갑툭튀한 녀석이 자기보다 높은 순위로 지명되자 자존심이 상할대로 상했을 것이다. 이때 피어스는 인터뷰를 통해 '''"지금 날 지나친 9개팀은 반드시 땅을 치고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다."''' 고 선언했다.[16]
당시 보스턴은 NCAA 켄터키의 감독으로 주가가 오른 릭 피티노를 감독으로, 켄터키에서 뛰었던 선수들과 비슷한 스타일의 선수들로 로스터를 꾸렸고, 피어스 이전에 켄터키 출신의 스윙맨 론 머서와 포워드 앤트완 워커로 팀의 공격 중심을 잡아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드래프트에서 운좋게 피어스를 뽑게 되었고, 머서-피어스-워커를 동시에 선발로 기용하면서 나름 젊은 트리오로 각광받기도 하였으나, 세 사람의 조합이 아주 좋지는 않았고 또한 머서가 연봉문제로 팀과 불화를 빚으면서 결국 트레이드. 보스턴은 이후 익히 알려진 피어스-워커의 '다이나믹 듀오'를 중심으로 팀을 리빌딩하게 된다.
첫 시즌, 피어스는 평균 16.5점. 6.4리바운드 2.4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올 루키 퍼스트팀에 뽑혔다. 그러나 당시 팬들의 관심은 하늘에서 예술을 펼치는 빈스 카터와 땅에서 예술을 펼치는 제이슨 윌리엄스의 차지였다. 아마도 처음에는 팬들의 주목을 많이 받지 못했다.[17]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피어스는 계속해서 자신의 기량을 향상시켰다. 기존에 있었던 앤트완 워커가 점점 3점슛만 던져대면서 서서히 망가져가는 사이 피어스는 견실할 플레이로 보스턴에 리더이자 팬들의 새로운 희망이 되었다. 그런데 3년차 시즌에 위기가 찾아왔다.
피어스는 2000년 9월 25일. 한 클럽에서 괴한이 휘두른 칼에 찔려 얼굴, 목, 등, 폐를 포함해 무려 '''11번'''이나 칼빵을 맞았다. 보스턴 구단과 팬들은 그야말로 초상집이었다. 그것도 시즌 개막이 한달 앞이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치명적이었다. 하지만 피어스는 '''한달후에 바로 개막전을 뛰었고, 그것도 아무렇지도 않게 전 경기를 다 뛰었다.'''[18] 그리고 이 시즌에 피어스는 래리 버드 이후 어느 보스턴 선수도 하지 못한 시즌 2000득점을 기록했다. 그 많은 칼빵을 맞고 선수생활을 할수 있는 것만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선수가 그야말로 날아다닌 것. 팬들은 그에게 존경심을 표했다. 당시 클럽에 함께 있었던 동료 토니 베티와 그의 동생이 피어스를 안전하게 구한 후 병원으로 데려가지 않았더라면 큰일났을 것이다. 다행히도 급소를 모두 피했다고. [19]
2001-02 시즌. 보스턴은 49승 33패를 기록하며, 1992-93 시즌 이후 오랜만에 5할 승률을 기록하면서 플레이오프에 진출, 단숨에 컨퍼런스 파이널까지 올라가는 돌풍을 일으켰다. 여기서 피어스는 컨파에서 뉴저지 네츠를 상대로 명승부를 펼쳤는데, 컨퍼런스 파이널 3차전에서 그는 28점을 넣었는데 이중 19득점을 '''4쿼터에 몰아넣었다.''' 참고로 보스턴이 4쿼터에 기록한 득점은 21득점. 혼자서 팀의 4쿼터 득점을 다 해먹은 것이다. 폴 피어스를 4쿼터만 되면 주시할 수밖에 없게 된 건 바로 이때가 시초였다. 하지만 피어스의 이런 미칠듯한 퍼포먼스에도 불구하고 팀은 2승 4패로 탈락했고, 다음 시즌에도 뉴저지와 컨퍼런스 세미파이널에서 맞붙었으나 이번에는 4전 전패로 맥없이 탈락했다. 그리고 보스턴은 다시 빠르게 몰락해가고 있었다.
6성 슈가중 한명으로 꼽힐 정도의 활약을 하고[20] 2003-04, 2004-05시즌에도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으나, 모두 1라운드 탈락이었다. 2005-06 시즌과 2006-07시즌에는 아예 플레이오프 진출도 실패했다. 피어스는 팀이 패하는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팀에 대한 불만이 커질대로 커질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앤트완 워커가 팀을 떠난 이후 리빌딩도 아니고 강팀 반열도 아닌 어설픈 팀 정책으로 피어스의 전성기가 2시즌(05/06과 06/07)이 허무하게 날아간 것이다. 당시 팀 로스터는 피어스를 제외하면 처참한 수준의 선수진 이였고 오직 루키 라존 론도만이 경쟁력이 있었으나 루키 시즌당시 즉시 전력감으로는 무리가 있었다. 당시 허약한 동부지구전력에서 셀틱스는 어정쩡한 영입정책으로 오직 피어스만 바라보는 꼴이였다.
그래도 피어스는 일단 별다른 움직임없이 한번 더 참았다. 2007년 드래프트 순위 발표를 앞두고,당시 대학 최고의 센터 그렉 오든의 드래프트 참여가 확정되면서 2006-07 시즌 24승 58패라는 최악의 성적을 거둔 보스턴이 1픽을 받고 오든을 뽑아 팀이 강해질 가능성에 기대를 걸었지만, 애꿎게도 당시 셀틱스의 픽순위는 톱3를 건너 5픽으로 드래프트 순위마저 망.[21]
06-07시즌 까지 피어스도 슬림한 체형이였는데 빅3 시절부터 살이 조금씩 붙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30대가 가까워지고 운동능력 감소가 나타난점을 몸으로 느꼈는지 파워를 늘리는 방향 몸매 관리를 바꾼듯 하다. 그리고 07-08시즌 혹은 00년대 후반의 체형이 철저하게 은퇴시즌까지 유지되었으니 철저한 자기관리로 nba커리어를 마감했다.
5.2. 빅3 결성
피어스의 인내심은 한계에 달할 수밖에 없었고, 팀에 전력강화를 하거나 자신을 트레이드시켜달라고 요구했다. 일단 피어스를 안심시키기 위해 보스턴은 시애틀과의 트레이드를 단행하며 만렙슈가 레이 앨런을 데려왔다. 앨런과 피어스. 6성슈가 중 2인이 아직 전성기가 안 지난 상태에서 만난 것만으로 많은 사람들이 흥분한 가운데, 이번엔 미네소타와의 초대형 트레이드로 외로운 늑대 케빈 가넷을 영입한다.
그 결과 팀 전력은 단숨에 우승후보로 급부상했다. 물론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다. 피어스는 여러가지 부상전력이 있고, 레이 앨런은 양쪽 발목을 수술한 전력이 있고, 가넷은 새로운 팀에 적응이라는 과제가 남아있었다. 그리고 이 둘을 데려오느라 많은 선수들이 팀을 떠났다.
하지만 이후, 보스턴 셀틱스의 성공 이후, 빅3 결성은 우승을 원하는 팀들의 공식과도 같아졌다.
5.3. 2007-08 시즌
2007-08시즌 보스턴은 66승 16패를 기록하며 NBA 전체 승률 1위를 차지했다. 빅3는 서로의 역할에 매진하며 서로를 받쳐주었고, 팀에 있던 젊은 선수인 라존 론도와 켄드릭 퍼킨스, 리온 포우, 글렌 데이비스, 토니 알렌 등도 제 몫을 해주며 빅3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그리고 오프시즌 동안 영입한 제임스 포지와 에디 하우스, 시즌 중에 영입한 노장 P.J 브라운과 샘 카셀까지 영입하면서 로스터는 신구 조화를 잘 이루었다. 플레이오프에서는 1라운드에서 의외로 애틀란타에게 7차전까지 가는 접전끝이 간신히 승리했고, 2라운드에서도 르브론 제임스가 이끄는 클리블랜드에게도 7차전까지 가는 접전끝에 승리하는 등 험난한 플레이오프를 치뤘다. 피어스는 2라운드 7차전에서 45득점을 기록한 르브론에게 41득점으로 맞대응하며 훗날에도 간간히 회자되는 엄청난 쇼다운을 펼쳤다. 컨퍼런스 파이널에서는 디트로이트 피스톤스를 6차전까지 가면서 승리. 2008 NBA 파이널에 오랜만에 올라가게 된다. 하지만 워낙 플레이오프 경기를 많이 하고 올라온 탓에 반대로 승승장구하며 올라온 LA 레이커스에 비해 여러모로 불리했다. 단 한가지 유리한점이라면 1차전을 홈에서 치룬다는 것 정도?
하지만 이런 우려를 깨고 홈에서 2경기를 승리한 보스턴은 LA원정에서도 2패뒤 1승을 했고, 홈에서 열린 6차전을 승리하면서, 통산 17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피어스는 1차전 때 무릎을 다쳐 한때 락커룸으로 퇴장했으나 다시 복귀하는 투혼을 발휘하고, 팀의 에이스로서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팀의 우승에 기여했다.[23] 이 공로로 피어스는 2008 NBA 파이널 MVP를 차지했다.
5.4. 후반기
2008-09 시즌에는 케빈 가넷의 부재로 플레이오프 2라운드에서 올랜도 매직에게 발목을 잡혀 탈락하고 말았다. 보스턴은 2009-10 시즌 라쉬드 월러스까지 영입하면서 다시 한번 우승에 대한 집념을 보였다. 그럼에도 정규시즌 팀 성적은 오히려 떨어지는 모습이 보여 "이제 보스턴도 끝 아니야?" 라는 어두운 전망까지 있었지만 보스턴은 Blue Collar 성향의 팀다운 끈질긴 근성으로 파이널까지 올라갔다. 안타깝게도 7차전까지 간 끝에 레이커스에게 우승컵을 내주고 말았지만.. 2010-11 시즌에도 플레이오프까지 올라갔으나, 정규시즌 동안 주축선수들의 부상과 트레이드로 인해 팀은 어수선한 상태였다.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뉴욕 닉스를 4전 전승으로 압살했지만 2라운드에서 마이애미 히트에서 1승 4패로 탈락하고 말았다. 폴 피어스는 정규시즌과 플레이오프에서 변함없는 활약을 펼쳤지만 팀의 플레이오프 탈락을 막지는 못했다.
2000년대 보스턴의 상징과도 같았던 피어스조차도 팀 전력이 점점 약해지면서 2013년 이후 바이아웃될거란 루머가 돌고 있어 팬들을 불안하게 하고 있던 찰나에.. 우려가 현실로 되었다. 2013년 6월 27일, 보스턴 셀틱스와 브루클린 네츠 사이의 3대 7 (드래프트 지명권 포함) 트레이드가 발표되었고, 폴 피어스와 케빈 가넷, 그리고 제이슨 테리가 브루클린 네츠로 이적하게 되었다. 아무리 리빌딩을 위한 포석이라지만 선산의 굽은 나무처럼 지난 15년간 셀틱스를 지켜온 영웅에 대한 합당한 대접이 아니라는 것에 팬들의 중론이 모아지는 중. [24][25]
브루클린에서 1년을 뛴 다음 2014년 여름에 워싱턴 위저즈와 2년 계약에 합의했다. 오바마, 존 월 내가 왔다. 브루클린, 워싱턴에서 뛸 때 플레이오프에서 연속으로 토론토 랩터스와 만나 활약을 보여줘 2번 모두 1라운드에서 탈락시키는데 공헌, 토론토의 웬수가 되었다.
애틀란타 호크스와의 세미파이널 3차전에서 버저비터로 워싱턴의 승리를 만드는 등 베터랑의 위엄을 보여주고 있다. 6차전에서도 극적인 동점포를 꽂아넣나 했지만 이번에는 간발의 차이로 무효 처리[26] 되면서 탈락했다. 플레이오프가 끝난 뒤에는 로스앤젤레스 클리퍼스와 계약하게 되었다.
클리퍼스에서는 시즌초 재앙적인 슛감으로 벤치멤버들과 함께 클리퍼스가 5할 승부만 간신히 하는데 일조했지만 1월 들어 살아나며 클리퍼스의 전력에 도움이 되고 있다.
5.5. 2017. 02. 05
1999년 2월 5일 피어스는 셀틱스에서 데뷔했었다. 그리고 18년 뒤인, 2017년 2월 5일, 무려 15시즌을 보내며, 1102경기, 2만 4021득점, 6651리바운드, 4305어시스트, 자신의 영광의 시간을 기록 했던 '''Truth's house'''에서의 마지막 경기를 치루었다. 인터뷰에서 "한번 더 럭키에게 키스를 하고 싶다"라는 발언을 했는데, 이 말의 뜻은 TD가든 중앙에 있는 셀틱스의 마스코트 "럭키"에 무릎꿇고 한번더 뽀뽀하겠다는 발언으로, 유니폼을 갈아입었지만 여전히 몸에 초록색피가 흐르는 남자임을 증명했다.
경기 시작전 통로에서 그는 LA 클리퍼스 소속임에도 불구하고도,이번 슈퍼볼에 진출한, 셀틱스와 같은 연고지를 둔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의 옷을 입은 모습이 카메라에 잡히면서 자신은 아직 셀틱스의 일원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자신이 TD가든에서 선수 소개를 받을때 받은 TD가든 팬들의 환호에도 무덤덤했던 그는 결국 경기가 시작하자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란 것을 실감했는지 결국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경기 당일 날 그는 코비와 같은 60득점도, 화려한 퍼포먼스를 보여주지 못했으나, 경기 종료 19.8초전 교체되어 출전한 그는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득점을 자신의 주특기인 '''3점 슛'''으로 넣었다. '''클러치의 제왕인 그답게 4쿼터 19.8초 안에 자신의 주무기를 성공시키는 그야말로 폴 피어스다운 모습을 TD가든 팬들의 앞에서 보여주었다.'''[27] 그리고 경기는 완전히 종료되고 TD가든의 팬들은 오랜 시간동안 '''몸에 녹색 피가 흐르는 남자. 셀틱스 프라이드였고 초록색 피를 가진 캡틴'''에게 어울리는 기립박수를 보내면서 폴 피어스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동영상
5.6. 16-17 시즌 후
셀틱 프라이드를 지키는 보스턴의 심장이라 할 수 있었지만 말년에 저니맨이 되어 여러 팀을 떠돌게 되었다. 그러나 그동안 팀을 위해 많은 헌신을 했기 때문에 그의 번호 34번은 셀틱스의 영구결번 예정이라는 예상이 많았다.
17년 7월 18일, 폴 피어스는 보스턴과 10일 계약을 체결했다. 2017-18 시즌 보스턴에서 은퇴경기를 치르는데 목적을 둔 계약이다.##
5.7. 영구결번과 헌정영상
당연한 얘기지만, 그의 등번호 34번은 영구 결번 확정이다. 보스턴의 암흑기부터 시작하여, 우승을 하기까지, 그가 셀틱스에 바친 공로는 셀틱스의 23번째 영구결번자로 결코 부족함이 없다. 그리고 18년 2월 12일 클리블랜드 전에서 영구결번식이 있을 예정이었으나, 다시 한 번 셀틱스 구단은 피어스와 또 다른 선수에게 상처만을 남겼다.
다만 이 경기에서 아이제아 토마스의 헌정 영상이 같이 틀어질 예정이라 피어스 자신은 약간 서운하다는 감정을 내보냈다. 보스턴 팬들은 이해한다는 심정이다. [28]
한편 아이제아 토마스는 "그의 영구결번 행사를 망칠 생각은 없지만 헌정 영상을 밤새 트는 것은 아니지 않나. 결정은 구단이 하겠지만, 내 영상을 틀어준다면 영광으로 생각할 것이다." 맞불을 놓았고, 셀틱스에서 피어스와 함께 우승을 이끈 보스턴 셀틱스의 또 하나의 레전드인 라존 론도는 " 그(토마스)가 무엇을 했는가? 여기는 ‘보스턴 셀틱스’다. 비하하려는 의도는 없지만, 피닉스 같은 팀이 아니다. 우리가 컨퍼런스 파이널 정도의 업적을 기념해야 하는가?"로 아이제아 토마스를 비난하고 나섰다.
피어스 역시 "토마스는 영광을 누릴 기회가 있었다. 경기에 뛰든 그렇지 않든 이전에 보스턴에 왔을 때 헌정영상을 틀었어야 했다. 자신의 헌정영상을 미뤄달라는 토마스의 요청을 보스턴이 받아준 것은, 그를 클리블랜드로 트레이드한 것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다."며 구단에 대한 섭섭함을 내비쳤다.
결국 쓸모없는 감정소비가 커지면서, 아이제아 토마스는 자신의 SNS 계정을 통해 “보스턴에서 보냈던 내 3년을 위해 헌정영상을 틀어주겠다고 제안한 보스턴의 제안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폴 피어스를 위한 날에 논란을 일으킬 것 같기 때문에, 그날은 온전히 피어스만을 위해 관심을 기울여달라고 구단에 요청하겠다”며 논란을 끝냈다.
보스턴 구단으로서는 다소 아쉬운 행보가 아닐 수 없다.
폴 피어스는 선수로서도 스포츠 해설가로서도 셀틱스와 보스턴에 넘치는 사랑을 주고 있는 셀틱스 팬들에게 독보적인 사랑을 받았던 선수이며, 아이제아 토마스 역시 2016-17시즌 동생의 사망, 자신의 부상을 참아가면서까지 컨파에서 활약을 했던 보스턴 팬들이 누구보다도 사랑을 했던 선수이기도 하다. 영구결번 행사와 헌정영상은 사전에 충분히 조율이 될 수가 있었던 문제며, 이러한 일로 필요 이상의 논란을 만들어버린 안일한 행동이 문제가 되었으나, 결국 양쪽 다 어느 정도 상처를 받으며, 씁쓸하게 막을 내려버렸다.
6. 기타
- 맥도날드 올 아메리칸이 선정한 위대한 소년 35인에 선정.
7. 여담
- 2002년 세계농구 선수권대회에 국가대표로 뽑혔으나, 당시에는 미국 농구 국가대표팀이 슬슬 몰락테크를 밟던 중이었다. 이때 미국팀은 6위라는 처참한 성적만을 남겼다. 그것도 미국땅에서 열린 대회였는데도 말이다. 이때 피어스는 9경기 동안 19.8점을 기록하며, 정말 열심히 뛰었지만 팀은 그 모양 그 꼴(...).
- 나이키의 모델이지만, 실상은 르브론 제임스와 코비 브라이언트에게 한참 밀리고, 최근에는 케빈 듀란트에게까지 밀린다. 본인 시그니쳐 슈즈도 가지고 있는데 아는 사람이 별로 없을 지경(...). 미국에서도 잘 팔리지 않는지 그의 시그니쳐 슈즈는 주로 아동용으로 많이 나오는 편이라고 한다. 괜찮은 디자인을 가진 시그니쳐 모델도 있는데 아예 성인용이 생산이 되질 않았다. 정말 본인만을 위한 신발로 만약 피어스 시그니쳐 모델들이 경매사이트에 나온다면 100% 피어스가 신고 경기한 의미 있는 농구화 일 것 이다.
2008년에 경기중 바지에 똥쌌다.
- 1999년 여름 나이키 스폰서로 한국에 방문했다. 3대 3 농구 대회에 직접 참가하여 중,고등학생들과 경기를 펼쳤다. 당시 피어스는 이제 막 루키시즌을 끝낸 새내기 였고 nba 성공적으로 데뷔했지만 워낙 빈스 카터, 제이슨 윌리엄스가 유례없을 정도로 인상적인 루키시절을 보냈기에 nba골수팬만 아는 선수였다. 지금 그 학생들은 최소 30년 중후반이 되었는데 아마도 그 피어스가 이렇게 성공한 nba 선수가 되리라고는 거의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 은퇴후에는 ESPN의 The Jump의 고정 패널로 활약중이다.
- 은퇴 후에 본인을 고평가한다는 지적을 받는다. 특히 논란이 되었던 것은 스스로 드웨인 웨이드보다 낫다는 평가를 내린적이 있었다.
5분 10초부터
> (웨이드와 피어스 둘 중 누가 더 나은 NBA 플레이어냐는 질문에) 쉽네! 당연히 나지! 내가 르브론이나 샼과 한 팀이었거나(중략) 24살에 샤킬 오닐과 한 팀이었다면, 내가 24~25살때 르브론이랑 보쉬가 같은 팀이었으면 나도 5~6번 우승했을걸?
물론 피어스가 24~25살이던 시절 보스턴은 정말 지금의 미네소타 못지않게 처참한 팀이었고, 피어스가 앨런, 가넷과 함께 슈퍼팀을 결성한 것도 30대 이후였다. 폴은 지금의 슈퍼팀 결성 메타를 비판하며 자신이 2003년~2004년에 가넷, 앨런[29] 과 좀 더 일찍 결성했더라면 게임조차 안됐을 것이다고 발언한 바 있다.
당연히 이 떡밥은 굉장히 불타올랐고 어딜 감히 슈퍼팀 처음으로 결성해놓고 1우승한 주제에 3우승에 올느바 8회의 웨이드를 상대로 비비느냐vs 젊은 나이에 슈퍼팀 결성해놓고서는 그때와 지금이랑 같느냐 는 의견으로 첨예하게 대립했었다.
스탯상으로 비교한다면 3점 슛 야투 성공률은 피어스가 2143회, 웨이드가 538회로 피어스가 4배 가까히 높고[30] , 커리어 승률은 웨이드 5할 8푼, 피어스 5할 6푼 4리로 웨이드의 근소우위. 놀랍게도 둘의 고투무브, 그러니까 경기 종료 10초전 야투 성공횟수가 69회중 15회로 정확히 일치한다. All NBA 선정의 경우 폴은 4회, 드웨인은 8회로 웨이드의 압승[31] . 여기에 웨이드는 폴에게는 없는 올느바 디펜시브가 있다. 판단은 각자의 몫.
조현일이 보스턴 출입기자였던 당시 '아시안 리틀가이'라 부르며 잘 챙겨줬다한다. 당연히 이 떡밥은 굉장히 불타올랐고 어딜 감히 슈퍼팀 처음으로 결성해놓고 1우승한 주제에 3우승에 올느바 8회의 웨이드를 상대로 비비느냐vs 젊은 나이에 슈퍼팀 결성해놓고서는 그때와 지금이랑 같느냐 는 의견으로 첨예하게 대립했었다.
스탯상으로 비교한다면 3점 슛 야투 성공률은 피어스가 2143회, 웨이드가 538회로 피어스가 4배 가까히 높고[30] , 커리어 승률은 웨이드 5할 8푼, 피어스 5할 6푼 4리로 웨이드의 근소우위. 놀랍게도 둘의 고투무브, 그러니까 경기 종료 10초전 야투 성공횟수가 69회중 15회로 정확히 일치한다. All NBA 선정의 경우 폴은 4회, 드웨인은 8회로 웨이드의 압승[31] . 여기에 웨이드는 폴에게는 없는 올느바 디펜시브가 있다. 판단은 각자의 몫.
8. 관련 문서
[1] 이건 NBA 공식 신장. 실제 맨발 키는 6' 6" = 198.12cm[2] 그런데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본인은 로스앤젤레스 출신이며, 레이커스의 열렬한 팬이었다고 한다. 물론 지금은 그 누구보다도 셀틱스를 사랑하는 남자이다. 08 NBA 파이널 영화에서도 본인의 홈타운인 로스앤젤레스에서 셀틱스가 우승을 확정짓기를 정말 바랬다고 코멘트를 남겼다. 여담이지만 2011년에 '''LA에서''' 열린 올스타 위켄드 당시 3점슛 콘테스트에 참가했을 때 선수 소개 당시, 레이커스 팬들은 피어스가 LA출신이란 건 신경도 안 쓰고 최대 라이벌인 셀틱스 선수들인 그와 레이 알렌에게 무지막지한 야유를 퍼부었는데, 알렌은 그냥 무표정하게, 피어스는 씩 웃으며 여유있게 손을 흔들었다. 애초에 야유 좀 받는다고 흔들릴 리도 없는 강심장들이니[3] 우승을 차지했던 '08년 파이널에서는 6경기 동안 무려 53개 중 44개의 자유투를 성공시켰다.[4] '08년 파이널에서는 28개중 11개를 성공시켰으며, 셀틱스에서는 3번째로 많은 횟수이고, 레이커스의 그 어떤 선수보다도 많았다.[5] 막상 경기를 보면 198cm 보다는 커 보인다.[6] 내외곽에 힘까지 겸비한 피어스를 수비하는데 상당히 어려움을 겪었다.비슷한 케이스로 유투브에 드림팀 멤버(kd, 폴 조지, 하든) 끼리 1대 1 하는 영상들이 있는데 서로가 서로를 막지 못했다.[7]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횟수이지 젊은 시절 피어스도 림 어택을 자주 보여주었다.[8] 원문은 Motherf***ing[9] '01년 3월 13일 레이커스가 셀틱스를 112대 107의 스코어로 이긴 경기에서 폴 피어스는 13/19의 야투율로 42점을 올렸었다. 당시의 레이커스는 한참 쓰리핏을 향해 달리던 전성기의 최강팀이었다.[10] 여담으로 오닐은 여러 선수들의 별명을 지어준것으로 알려져있다. 팀 던컨의 별명인 "Mr. Fundamental" 도 오닐이 처음에 부른 The big Fundamental의 변형이다. 이 점을 본인도 아는지 피어스의 은퇴를 축하하는 영상에서 피어스의 별명인 The Truth를 자기가 이은 별명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11] 여기에 선발은 됐으나 어깨를 다쳐 뛰지못한 천시 빌럽스와 NBA드래프트에서 뽑혔으나 대성하진 못한 론 머서나 로버트 트레일러(노비츠키와 맞트레이드된 선수)와 같은 선수까지 하면 더욱 ㅎㄷㄷ해진다. 1984, 1996년, 그리고 2003년 NBA 드래프트가 역대 최고의 재능들이 모인 드래프트들로 인정받고 있으며 1998년 NBA 드래프트도 못지 않은 편이다.[12] NBA에선 고작 20경기 뛰었지만 스트릿볼의 레전드이자 케니 스미스같은 선수들이 최강의 볼핸들러로 꼽는 "God Shammgod Wells 역시 이 경기에서 뛰었다. 이 때문에 이 경기는 역대 맥도널드 게임 중에서 손꼽힐 정도로 수준이 무지막지하게 높았다. 심지어 덩크 콘테스트에서도 탈고등학교급 덩크를 카터가 보여줬다. 여담이지만 피어스는 이 경기에서 최다득점인 28점을 넣었으나 MVP는 18점 11리바운드 4어시스트 3블럭에 7피트에 가까운 주제에 가드처럼 전방위로 뛰는 미친 활약을 펼친 가넷에게 돌아갔다.[13] 노스 캐롤라이나 대학교 유니폼을 마사장에게 입히고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던 딘 스미스 감독 밑에서 어시스턴트 코치로 일했고 캔자스대학교로 건너가 감독을 맡았다가 노스 캐롤라이나 대학교 감독으로 복귀했다.[14] 역대 최악의 드래프트 1픽으로 손꼽힌다.[15] 올로워캔디는 좋은 신장과 긴 팔, 뛰어난 운동능력으로 이상할 정도로 고평가받고 있었다. 나이지리아 출신과 피지컬 때문에 무려 하킴 올라주원과도 비교될 정도. 데뷔 후 그의 문제는 부상이 잦은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성장을 못했다. 이게 포인트. 사실 그는 뛸 때는 그럭저럭 준수한 기량의 롤플레이어였으며 수비존재감도 나름 있었고 블럭슛과 보드장악력도 괜찮은 수준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냥 괜찮은 선수를 뽑기 위해 전체 1순위를 뽑았다'''는 것이었다. 사실 그가 피지컬이 뛰어나다고 해도 드래프트 당시 나이도 만 23세로 많은 편이었고 대학도 4년 꽉 채워서 졸업한 상태였다. 즉, 그는 성장가능성을 드래프트 당시 이미 거의 소진한 상태였다는 것. 물론 그는 만 18세가 되어서야 농구를 시작했다는 건 있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고등학교 떄 농구를 시작한 팀 던컨의 예만 봐도 아무리 농구를 늦게 해도 대학에서 4년이나 다니면 이미 농구선수로 거의 완성이 된다. 이걸 간과한 클리퍼스는 도박을 했으며, 폭망한 셈.[16] 실제로 보스턴은 노비츠키를 노리고 있었다. 2,3순위 지명 정도로 예상되던 폴 피어스가 자기 순번까지 떨어질 줄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에 당시 주가가 별로 높지 않던 유망주 노비츠키를 뽑으려고 한 것. 98클래스의 루키 시즌은 빈스 카터와 제이슨 윌리엄스가 양분하긴 했지만 사실 당시 기준으론 두 선수가 그 정도까지 압도적인 루키시즌을 보내리란 예상이 많이 없었다. 카터는 오히려 팀동료 앤트완 재미슨에게 대학시절 어느 정도 가려졌었다. 즉, 현 시점으로 보면 98드래프트는 상당한 풍작이지만 당시 기준으론 확실한 1순위감은 없이 비슷비슷한 수준의 괜찮은 유망주들 사이에서 뽑는 양상이었다. 이 때문에 센터이고 체격과 운동능력이 좋은 올로워캔디가 도박성으로 뽑힌 것. 피어스 역시 1픽 가능성이 있었고, 이 때문에 훗날 고향팀 LA에 있는 클리퍼스에 뽑히길 은근히 바랬다고 밝힌바 있다. 여담으로 보스턴의 릭 피티노 감독은 기대도 안했던 대어가 자기 순위까지 떨어지자 놀라서 캔자스의 로이 윌리엄스 감독에게 전화해 혹시 건강에 문제라도 있는거냐고 물어봤다고 한다. 그만큼 이변이었던 것.[17]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주목도 이다. sf/sg 포시션인 티맥, 아이버슨, 카터, 코비에 비해 덜 유명했지 꾸준히 올스타와 올 nba에도 이름을 올렸고 플레이오프, 클러치상황에서도 강한 면모를 보여주면서 주목을 받았다. 또한 2001-02시즌 부터는 리그를 대표하는 스윙맨 선수로 본격적으로 이름을 날렸다. 무엇보다 피어스가 오기 전 까지 셀틱스는 팀 명성만 명문이지 래리 버드은퇴 이후 철저하게 비주류 팀이였다. 그나마 앤트완 워커가 96년에 합류하고 올스타레벨로 성장하며 조금씩 보스턴의 존재감이 생기기 시작했다.[18] 이게 왜 대단한 것이냐면, 단순한 부상이 아니라 저 정도로 칼에 찔리면 일반적으로 생명까지도 위협받을 수 있는 경우가 대다수이기 때문. 그것도 복부나 폐는 심한 경우, 과다출혈로 인한 '''즉사'''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은 부위다. 팔이나 다리 같은 경우에는 최악의 경우 장애나 후유증을 앓더라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지만, 복부나 폐는 부상 정도에 따라 바로 생명으로 직결될 수 있는 부위다. 피어스는 인체에 가장 치명적인 부위에 집중적으로 습격을 당했음에도 회복했기에 더욱 놀라운 것이다. 단순히 시즌 아웃, 선수생활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까지 위독할 수 있었던 상황에서 돌아온 것이다.[19] 보스턴 셀틱스 문서에 나와 있지만, 셀틱스의 암흑기 원인이 되었던 렌 바이어스, 레지 루이스의 요절 사태를 한번 더 겪을 뻔했다. 그래서 피어스에 대한 셀틱스 팬들의 애정은 상상을 초월한다.[20] 2000년대 초반을 풍미했던 슈팅 가드 6명. 멤버는 코비 브라이언트, 트레이시 맥그레디, 빈스 카터, 앨런 아이버슨, 폴 피어스, 레이 앨런이 꼽힌다.[21] 2007년 드래프트에서는 포워드 제프 그린을 지명했으나 직후 레이 앨런 트레이드로 시애틀행. 그린은 2011년에 다시 보스턴으로 돌아온다.[22] 왼쪽부터 레이 앨런, 케빈 가넷, 폴 피어스 순이다[23] 부상당한것 치고는 너무 일찍 복귀했다는 의문점이 항상 있었는데, 본인이 '화장실에 갔어야만 했다'라고 해설자 시절 이야기 했다..[24] 사실 이 트레이드의 결과로 보스턴은 젊은 피를 대거 수혈한데다 이때 받아온 지명권이 나중에 전체1순위가 되고 연봉많이 받는 베테랑들을 보냈고, 이어 성공적인 리빌딩으로 플옵에 진출하는 등 미래가 밝은 반면 브루클린은 기껏 받아온 가넷, 피어스가 노쇠화하고 드래프트 지명권까지 상실해 미래가 암담해졌다. 당연히 셀틱스의 일방적인 윈을 넘어선 아주 대박이다. 문제는 프랜차이저에 대한 예우는 개나 줘버린 점. 비슷한 시기에 정확히 반대되는 결정을 한게 바로 레이커스로, 기량도 크게 떨어지고 부상도 잦아진 코비 브라이언트에게 리그 1위의 연봉을 주면서 예우는 화끈하게 해주었으나, 과한 연봉지급으로 선수수급에 문제를 겪은데다 고집을 버리지못한 코비 때문에 팀공격이 망가지고 유망주들이 공격기회를 충분히 얻지못하는 부작용을 겪었다. 물론 프로스포츠에선 팬들의 사랑이 무엇보다 중요한 만큼 단순히 비지니스적으로만 볼 수 없고 보스턴과 LA, 어느 쪽이 현명한지는 각자의 몫이다. [25] 현 시점에서는 셀틱스의 소탐대실이라는 평가다. 그 젊은 선수단으로 우승은 커녕 파이널조차 못간건 둘째치고 폴 피어스, 케빈 가넷 이후에도 라존 론도와 아이재아 토마스같은 선수들을 내치면서 토사구팽 이미지가 너무 강해진 나머지 스타 플레이어들이 기피하는 구단이 되어버렸다. 셀틱스 측에서 오기만 하면 아예 그 선수를 위해 팀을 맞춰준다고 했으나 거절했던 케빈 듀란트나 앤서니 데이비스가 그 예시.비단 NBA 뿐만아니라 모든 스포츠 구단이 팀 레전드를 예우해주는데엔 이유가 있는 법이다.[26] 버저가 울릴 때 손가락 끝에 공이 닿아 있었다고 한다[27] 이때 수비하던 선수가 당시 셀틱스를 이끌고있던 아이재아 토마스였는데, 확실히 수비를 타이트하게 안하는게 보인다. 신 프랜차이즈 리더가 구 프랜차이즈 리더에게 보일수있는 존경의 표시였던게 아닐까....[28] 유튜브 코멘트를 보면 you're not kobe라고 적은 코멘트 추천수가 많은데 이런 이유는 바로 이 발언이 드레이먼드 그린이 폴 피어스와 트레쉬 토킹을 했을 때 한 발언인데, 현재 영향력이 큰 골든스테이트 팬들이 자기 팀 선수를 디스한 피어스에게 좋은 감정이 있을 리가 없기에 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식의 디스하는 풍자적인 개그도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것 역시 한 몫 한다.[29] 당시 가넷은 미네소타 늑대왕 시절이었고 앨런은 밀워키의 스코어러 이미지를 갖추던 시기였다.[30] 사실 이건 웨이드가 돌파형 슈가라서 그렇다. 애시당초 성공률도 30%가량이기도 하거니와...[31] 심지어 폴은 세컨이 최대기록이고 웨이드는 퍼스트만 2번 더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