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르토 알로마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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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를 대표하는 명 2루수. 1990년대를 풍미한 2루수로 뛰어난 수비력과 준수한 공격력을 바탕으로 메이저리그 최고의 2루수로 군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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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형 샌디 알로마 주니어(오른쪽)와 함께)
2. 선수 생활 및 은퇴
푸에르토리코 출신으로 아버지인 샌디 알로마는 메이저리그에서 2루수로 올스타에 1회 선정되었고, 여러 차례 메이저리그 팀 코치를 맡은 경력을 자랑하며, 형인 샌디 알로마 주니어 역시 1990년대 준수한 포수로서 명성을 떨쳤던 선수다.[1] 아버지와 형에 비해서 로베르토 알로마는 더 잘했고, 더 슈퍼스타가 되었다. 별명은 로비(Robbie)로 로베르토의 애칭으로 흔히 로비 알로마로 부른다.
통산 .300 .371 .443의 비율스탯과 2724안타, 210홈런, 1134타점, 474도루를 기록하였다.
1985년 샌디에이고와 계약한 후, 마이너에서 착실히 수업을 받아 1988년에 데뷔했다. 샌디에이고에서도 이미 나이 20에 주전을 차지하고 1990년에는 올스타팀 리저브로 뽑히는 스타였지만, 알로마의 뜻과는 달리 유격수로 전환하는것을 원하던 팀과의 의견 차이 때문에 1990년 시즌이 끝나고 조 카터와 함께 그를 토론토 블루제이스로 보낸다. 그리고 그 대가로 받은 것은 프레드 맥그리프와 토니 페르난데스. 다만, 이 선수들을 샌디에이고가 제대로 써먹지 못하면서 이 트레이드는 샌디에이고 역사상 최악의 트레이드로 남았다[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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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실력이 성장한 알로마는 토론토에서 완전히 꽃을 피웠다. 수비력은 신인 시절의 미숙함에서 벗어나 최고의 수비력을 자랑하는 선수로 변모했고, 공격력 역시 그 재능을 만개했다. 4년 연속 3할 타율에 평균 40개의 도루를 기록하는 최고의 테이블 세터로서 활약했고, 1992년 리그 챔피언십에서는 데니스 에커슬리를 두들겨 시리즈 반전의 계기가 된 동점 홈런을 치는(위 사진의 모습이다)[3] 맹활약 속에 챔피언십 MVP를 차지하기도 했다. 그의 활약 속에 토론토는 1992년과 1993년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그 후 팀이 쇠락하면서 토론토는 결국 리빌딩에 돌입했고, 알로마도 팀을 떠나 FA자격으로 볼티모어 오리올스로 이적했다.
볼티모어에서도 좋은 활약을 펼쳤다. 칼 립켄 주니어와 함께 공격형 키스톤을 형성해 팀의 공격의 선봉에 섰다. 이 당시 볼티모어는 월드시리즈 우승의 야심을 숨기지 않던 팀이었는데, 그가 뛰던 시기인 1996년과 1997년에 리그 챔피언십까지 올랐다. 다만, 1996년에는 제프리 마이어스 의 홈런공 도둑질 사건으로 인해 뉴욕 양키스에게 패했고[4] [5] , 1997년에는 당대 최강이었던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게 졌다. 하지만 무엇보다 볼티모어에서 일어난 가장 큰 사건은 존 허시벡과의 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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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에게 닥돌 후 침 뱉기 직전. 옆에서 이를 말리는 이가 데이비 존슨 감독이다.
1996년 9월 27일 심판 판정에 항의하다가 구심이었던 존 허시벡과 말다툼을 벌였는데, 말다툼이야 메이저리그에서도 종종 일어나는 일이고, 허시벡도 오심으로 유명한 심판이기도 해서, 그냥 퇴장당하면 끝나는 사건이었다. 그랬다면 오히려 욕은 허시벡이 더 먹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다툼 도중 알로마가 허시벡의 얼굴에 침을 뱉은 것. 그래도 여기서라도 끝났다면 감정이 너무 격해서 벌어진 실수로 치부되었을지 모르겠지만, 다음 날 기자회견에서 허시벡이 3년 전에 희귀병으로 죽은 아들 때문에 정신이 나간 모양이라는 최악의 망언을 저지른 것. 물론 허시벡이 자기 가족을 먼저 욕했다고 주장했지만, 이미 망언을 저지른 뒤라 별반 무소용이었다. 결국 이 때문에 그간 좋은 이미지로 여성 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던[6] 알로마의 이미지는 나락으로 떨어졌고,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해 팀을 떠나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로 가고 말았다. 다행히 클리블랜드에는 아버지 친구인 마이크 하그로브 감독과 형인 샌디 알로마 주니어가 있어서 심리적인 안정을 찾았고, 다시금 맹활약하며 클리블랜드에 계속 남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문제는 클리블랜드가 재정적인 한계에 봉착한 것.
2001년을 끝으로 리빌딩에 돌입하기로 결심한 클리블랜드 단장 마크 샤파이로는 시즌 종료와 동시에 알로마를 뉴욕 메츠로 보내고, 유망주를 얻었다. 알로마 자신은 절대 내보내지 말아달라고 부탁했고, 샤파이로도 수락했지만 뒤통수를 친 것. 이 때의 배신감 때문인지, 트레이드 당시 34세라서 노쇠화의 시작인지는 몰라도 급격하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메츠에서 완전히 실패하면서 저니맨으로 전락, 결국 이 팀 저 팀을 떠돌아다니다가 제대로 된 은퇴식 없이 허무하게 2004년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접었다. 그러다가, 야구가 다시 그리워진거지 아메리칸 리그 팀인 탬파베이 데블레이스와 계약을 했다가 갑자기 시즌 전 전격 은퇴 선언을 했다. 결국 레이스는 쓴맛을 보았지만, 당시 마이너에서 활약하던 덩치 큰 신인이 메이저 콜업을 받게 된다.
2루수로서 3,000안타를 달성할 수 있을 거라고 많은 사람들이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말년의 몰락으로 인해 달성에 실패했다. 33세까지 2,389안타를 기록했고, 그 전까지 매년 평균 171안타를 기록해왔기 때문에 나이에 따른 노쇠를 감안해도 4년 정도만 그 페이스를 유지하면 3,000안타가 가능하리라고 사람들은 봤었다. 그리고 심지어 3,500안타까지도 봤었을 정도.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말년의 급작스런 몰락으로 인해 물거품이 되었다. 말년 3년간 그가 기록한 안타는 겨우 332안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루수로서 골드글러브 10회를 자랑하는 최고의 수비수로서 전성기에는 캐나다의 국경을 커버한다는 극찬을 들었다. 특히 클리블랜드에서 오마 비즈켈과 호흡을 맞춘 키스톤 콤비는 메이저리그 역사 전체를 통틀어서도 높은 명성을 인정받는다. 일명 '''미국-캐나다 국경을 커버하는 키스톤 콤비'''. 타격도 만만치 않아서 실버슬러거 4회를 차지했을 정도로 빼어났고, 인기도 좋아서 올스타에 12번 선정되었다.
은퇴 후에 에이즈 감염이 된 채 이를 숨기고 성관계를 맺었다는 혐의로 고소당하기도 했다. 심지어 에이즈 감염자인 남성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충격적인 이야기까지 나왔다. 다만, 이 문제는 사실 여부가 밝혀지지는 않았다. 고소는 취하되었고, 후자는 알로마가 부인하고 있다. 하지만 2010년 그의 아내가 비슷한 사안으로 그를 고소한 것을 보면, 이 문제에 대한 논란을 쉽게 해결되지 않을 듯.
누구나 다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첫 투표로 입성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예상을 깨고 첫 투표에서 간발의 차로 입성에 실패했다. 말년의 급작스런 몰락에 대한 인상과 함께 허시벡 심판에게 침을 뱉고 망언을 했던 이미지가 남아서라는 것이 중론. 그래도 두 번째 투표에서는 90%라는 높은 득표율로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는데 성공했다.[7]
2011년 7월 20일 토론토 블루제이스가 팀 역사상 최초의 영구결번을 그에게 주기로 결정했다. 8월 1일 결번식이 열리면, 토론토에서 등번호 12번은 그 누구도 달지 못한다. 토론토 역사상 최초로 토론토 모자를 쓰고 명예의 전당에 가는 선수라 극진히 대접하는 듯.
딱 하나 약물 의혹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 리스트의 신빙성 여부는 알 수 없기 때문에 일단은 믿어보자. 이 리스트에 따르면 페드로도 약빨이고 퍼지도 약빨이고 노마도 약빨이고 벨태현도 약빨이고 전부 다 약빨이란다. 도미니카 신문사가 2009년에 발표한 소스인데도 아직까지 미국 언론에서도 딱히 분석한 것도 없는지라 그냥 묻혔다. 게다가 일반적인 스타 선수들 생각나는대로 열거한 인상이 지나치게 짙기 때문에 신뢰성이 떨어진다는 견해다.
3.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
- JAWS - Second Base (14th)
[1] 형 샌디는 1990년 아메리칸리그 신인왕을 수상했고, 이듬해인 1991년 올스타전에는 동생 로베르토와 함께 아메리칸리그 베스트10으로 선정, 출장하기도 했다.[2] 근데 이것은 후에 두 팀 성적을 비교한 결과론이고, 트레이드 당시엔 양팀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트레이드란 평을 받았다. 트레이드 이전 1990년 시즌 성적은 맥그리프와 페르난데스가 알로마와 카터보다 더 좋았고, 샌디에이고 시절에도 이 둘은 좋은 성적을 기록했다.[3] 많은 토론토 팬들은 이 홈런이 조 카터의 이듬해 월드시리즈 끝내기 홈런과 더불어 팀 역사상 가장 중요한 홈런이였다고 하기도 한다. 사실 1991년 까지 토론토는 새가슴(영어로 '초커') 팀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매번 유력 후보로 꼽혀도 시즌 막바지에 지구 우승을 놓치거나 플레이오프에서 맥없이 패배하는 등 실패만 매년 반복하던것을 이 홈런을 계기로 완전히 씻어낸 것이였다.[4] 제프 마이어라는 소년이 리그 챔피언십 경기에서 평범한 플라이가 될 공을 손을 뻗어 가져갔고, 이게 홈런으로 둔갑하면서 결국 경기에서 지면서 시리즈를 내준 사건이다.[5] 이전 문서에는 제프 마이어라 되어있으나 제프리 마이어스가 올바른 표현이다[6] 어느 정도냐면 그를 납치해서 내 남편으로 만들겠다는 여자 팬이 있었을 정도였다.[7] 첫 투표에서 입성에 실패하고 다음해 입성한 경우에 90%의 득표율은 사상 처음이다. 그만큼 위에서 언급된 사건들만 없었다면 첫 투표에서 무난히 입성 가능했다는 사실을 입증한셈. 쉽게 말해서 기자들이 '당연히 첫 투표 입성 자격은 있지만 그런 영예는 주기 싫다'고 판단했단 얘기다. 또한 동시기 뛰었던 동포지션의 거물들인 크레이그 비지오, 제프 켄트와 비교하여 전성기시절에는 가장 높은 평가를 받던 알로마인 만큼 당연한 결과라고도 할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