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프 켄트
1. 개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 활동했던 2루수로 스테로이드 시대 최고의 공격형 2루수로 평가받고 있는 선수다.
통산 성적은 17시즌 동안 타율 .290, 출루율 .356, 장타율 .500, 2461안타, 377홈런, 1518타점, BB/K 0.52, wRC+ 123을 기록했다.
켄트는 2루수들 중에서 통산 홈런 1위, 타점 3위, 장타율 2위를 기록하고 6년 연속 100타점에 30홈런-100타점을 여러번 기록하는 등 대단한 기록들을 가졌다.
2. 선수 생활
캘리포니아 주 벨플라워에서 태어나 오렌지 카운티에서 자라난 켄트는 '''UC 버클리'''를 졸업하고 1989년 드래프트에 참여해 토론토 블루제이스의 20라운드 전체 523번 지명을 받게 되었다. 지명 순위에서 볼 수 있듯이 크게 기대하고 뽑은 선수는 아니었으나 마이너 리그에서 파워 포텐셜이 폭발해 일약 기대주로 주목받게 되었다.
2.1. 토론토 블루제이스 시절
1992년 스프링 캠프에 참가한 켄트는 25인 로스터에 포함되었으나 당시 팀에는 로베르토 알로마가 주전으로 있었기 때문에 내야 백업으로서 제한적인 기회만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팀의 주전 3루수였던 켈리 그루버의 부상으로 인해 3루수로 기용되기 시작했고 65경기에 출장해 .240 .324 .443 8홈런 35타점을 올리면서 신인치고는 제법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구단은 월드 시리즈 우승을 위한 결정적인 트레이드를 준비하고 있었고 때마침 주전이었던 그루버가 복귀하게 되자 켄트와 라이언 톰슨을 뉴욕 메츠에 넘기고 데이비드 콘을 받아오게 된다. 콘이 토론토 블루제이스의 첫 우승에 공신이 되면서 이 트레이드는 토론토 입장에서 별로 아깝지 않은 트레이드가 되었다.
2.2. 뉴욕 메츠 시절
당시 침체기였던 뉴욕 메츠에 합류하게 된 켄트는 주전 2루수로서 많은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는 1992년 남은 기간 동안 37경기에 출장해 .239 .289 .407 3홈런 15타점을 올리는데 그쳤다.
이듬 해인 1993년 140경기 .270 .320 .446 21홈런 80타점을 올리며 팀 타선을 이끌었지만 실력과는 다른 부분에서 문제가 나타났다. 신인 주제에 팀원들과의 사이가 썩 좋지 않았고 루키 헤이징을 거부하는 등 클럽하우스의 분위기를 최악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당시 메츠의 클럽하우스는 바비 보니야, 에디 머레이 같은 흑인 선수들이 주도하고 있었는데 유복한 가정에서 성장해 좋은 대학을 나온 백인 도련님 켄트는 이런 분위기를 견뎌내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 시절의 안좋은 이미지로 인해 켄트에게는 백인 우월주의자라는 딱지가 붙게 되었다.
당시 켄트는 뛰어난 공격력을 갖추었던 2루수였지만 수비에서는 부족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댈러스 그린 감독은 그를 겨냥해 1994년 스프링 캠프에서 "우리 팀 2루수 자리는 비어있다."라고 비난했다. 이에 켄트는 107경기에서 .292 .341 .475 14홈런 68타점을 기록하면서 감독에 무력시위를 펼쳤다.
1995년에도 125경기 .278 .327 .464 20홈런 65타점의 성적을 올렸지만 여전히 팀과 갈등이 컸던 켄트는 1996년 스프링 캠프에서 팀이 에드가도 알폰소를 2루수에 배치하고 켄트를 3루수로 전환하려고 하자 팀을 떠나는 것을 선택했고 팀은 그와 호세 비스카이노를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 내주고 카를로스 바에르가와 알바로 에스피노사를 받아오게 된다. 그 해 메츠에서 켄트는 89경기를 출장해 .290 .331 .436 9홈런 39타점을 기록했다.
2.3.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시절
1996년 인디언스는 알버트 벨, 짐 토미, 매니 라미레즈, 케니 로프턴 등을 보유하면서 메이저 리그 역사에서도 손꼽히는 강타선을 갖추고 있었다. 팀은 성적이 조금 하락하던 바에르가를 켄트로 대체해서 살인타선의 완성을 꿈꾸었지만 켄트는 인디언스에서 39경기에 출장해 .265 .328 .422 3홈런 16타점을 기록하는 데 그치면서 별 효과를 보지 못했고 팀 역시 월드 시리즈 도전에도 실패했다.
불안한 내야 수비를 실패의 원인으로 인식한 인디언스는 켄트와 호세 비즈카이노, 훌리안 타바레스를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로 보내고 당대 최고의 3루수였던 맷 윌리엄스를 영입했다. 이를 통해 기존의 3루수였던 짐 토미를 1루수로 옮기고 켄트가 빠져나간 2루수 자리에는 베테랑 내야수인 토니 페르난데스를 영입해 공격력과 수비력 동반 상승을 꾀했다.
맷 윌리엄스는 1996년까지 10년 동안 자이언츠에서 뛰며 팬들에게 사랑받은 프랜차이즈 스타였고 실력으로도 3할과 30홈런을 기대할 수 있는 최고의 선수였다. 반면에 켄트는 2루수치고는 괜찮은 공격력을 갖췄지만 부족한 수비력에 기량이 정체된 상황이었으며 실력 외적으로도 소문이 안좋은 선수였다. 비스카이노는 주전급 내야수였지만 파워와 스피드 어느 한 쪽도 특출난 면이 없는 선수였고 훌리안 타바레스는 방어율 5점대의 불펜 투수였다. 정상적인 상황이면 이루어질 수 없는 트레이드였지만 당시 자이언츠에서는 배리 본즈와 맷 윌리엄스가 파워 게임을 벌이고 있었고 본즈에게 밀려난 윌리엄스가 구단에 트레이드를 요청해 성사된 상황이었다. 이에 자이언츠 팬들은 엄청난 사기극이라며 광분했다.
2.4.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시절
자이언츠 팬들은 자신들이 사랑하던 윌리엄스를 떠나보내는 것은 어떻게든 이해해 보려 했지만 그 대가가 켄트와 떨거지들이라는 사실에 분노했다. 신임 단장 브라이언 세이빈이 트레이드를 성사시키고 비공식적으로 100만 달러를 건네받았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다. 이에 세이빈은 팬들과 지역 언론을 잠재우기 위해 비공식 기자회견을 요청했고 이 자리에서 "나는 바보가 아닙니다."란 말을 해 유명해졌다.
세이빈은 새 구장 건축을 위해 윌리엄스를 내보내야만 했었고 신인 유격수 리치 오릴리아, 3루수 빌 뮬러, 그리고 윌리엄스 트레이드로 데려온 선수들이 가세함으로서 팀이 더 좋은 성적을 올릴 것이라고 팬들에게 호소했다. 아울러 바비 보니야를 영입해 배리 본즈와 함께 킬러 B를 재결성시킬 것이라는 계획도 밝혔지만 이는 지켜지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서 켄트는 배리 본즈와 당시 전성기였던 골드글러버 1루수 J.T. 스노우와 함께 클린업을 이루었다. 본즈와 스노우가 좌타자였기에 주로 4번 타석에 들어섰던 켄트는 더스티 베이커 감독의 전폭적인 지지하에 155경기에 출장해 .250 .316 .472 29홈런 121타점으로 구단의 기대에 부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듬 해인 1998년 기량이 만개하면서 켄트는 137경기에 출장해 .297 .359 .555 31홈런 128타점을 기록했고 팀 역시 그에게 1999년부터 시작되는 3년 1800만 달러[1] 재계약을 선사했다. 1999년에는 138경기에 출장해 .290 .366 .511 23홈런 101타점을 기록하면서 생애 첫 올스타에 선정되는 기쁨을 누렸다.
2000년에는 159경기에 출장해 '''.334 .424 .596 33홈런 125타점'''이라는 아름다운 스탯과 함께 내셔널 리그 MVP에 선정되었고 올스타 게임에 선발 출장하는 등 자신의 커리어에서 가장 뛰어난 시즌을 보냈다.
2001년에도 159경기에 출장해 .298 .369 .507 22홈런 106타점을 기록했던 켄트지만 이듬 해인 2002년 스프링 캠프를 앞두고 손목 골절을 입게 되었다. 처음 켄트는 구단에게 자신의 트럭을 세차하다 넘어졌다고 거짓말을 했고 구단 역시 이를 믿었으나 신문 보도로 오토바이 묘기를 부리다가 얻은 부상임이 밝혀지면서 구단에도 찍혀 계약 위반으로 고소당할 위기까지 처했지만 간신히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럼에도 켄트는 152경기에 출장해 .313 .368 .565 37홈런 108타점으로 건재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팀 역시 월드 시리즈까지 올라 애너하임 에인절스를 상대로 우승을 목전에 두었지만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아쉽게 역전패하고 만다.
2.5. 휴스턴 애스트로스 시절
2002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의 계약이 만료된 후 샌프란시스코는 상기된 손목 부상 사건으로 인해 켄트와의 재계약을 포기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팀에도 좋은 결정이 아니었으니 그 이후 자이언츠는 본즈와 8명의 땅꼬마들로 이루어진 팀이 되어버렸다.
샌프란시스코 생활을 청산한 켄트는 자신의 텍사스 농장에서 가까운 팀인 휴스턴 애스트로스와 2년 1900만 달러[2] 계약을 맺고 자신의 네번째 팀에서의 커리어를 시작했다.
당시 애스트로스의 2루수는 팀의 레전드인 크레이그 비지오가 자리잡고 있었는데 그는 켄트가 오면 자신의 포지션을 기꺼이 내어줄 수 있다 하였고 실제로도 이를 실천해 중견수로 포지션을 이동했다. 켄트 역시 자이언츠 시절보다는 조금 떨어진 성적이긴 했지만 2003년 130경기에 출장해 .297 .351 .509 22홈런 93타점을 기록하고 2004년에는 145경기에 출장해 .289 .348 .531 27홈런 107타점을 기록하면서 비지오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하였다. 팀 역시 포스트시즌에 진출해 챔피언십 시리즈까지 올라갔지만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게 아쉽게 패하며 또 한번 우승에 실패했다. 그리고 애스트로스 구단은 2005년 팀 옵션을 포기하고 연봉 삭감을 전제 조건으로 재계약 협상에 나섰지만 켄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고향팀인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와 3년 2100만 달러의 계약을 체결했다.
2.6.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시절
다저스에 입단한 켄트를 향해 '예전보다 수비력이 떨어졌기 때문에 다저스에서는 1루수나 3루수로 쓸 것이다.', '극악의 투수 구장 다저 스타디움을 쓰게 된 켄트의 성적이 대폭 하락할 것이다.' 등 여러 말이 많았지만 켄트는 그런 거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다저스 입단 첫 해인 2005년 149경기에 출장해 .289 .377 .512 29홈런 105타점을 기록한 켄트는 파크 팩터와 나이를 무시하면서 37세의 노장 2루수가 재키 로빈슨 이후 다저스 2루수로는 최고의 성적을 거두며 팀 타선의 리더가 되는 진귀한 광경을 만들어냈다. 팀 내 홈런 2위가 15홈런을 친 최희섭이었으니 그야말로 대활약이었다. 구체적으로 보면 팀 WAR 1위에 출장ㆍ안타ㆍ2루타ㆍ홈런ㆍ타점ㆍ득점ㆍ타율ㆍ출루율ㆍ장타율까지 1위를 기록했다.
이듬 해인 2006년에는 복사근 부상으로 인해 115경기만을 소화했지만 .292 .385 .477 14홈런 68타점으로 여전히 좋은 성적을 거두었으며 2007년에도 136경기에 출장해 .302 .375 .500 20홈런 79타점으로 맷 켐프, 안드레 이디어, 러셀 마틴, 제임스 로니 등의 젊은 타자를 이끌었다. 아직 켄트의 기량이 남아있음을 확인한 다저스는 1년 1150만 달러에 켄트와 재계약 했지만 천하의 켄트도 40세가 되자 힘에 부쳤는지 121경기 .280 .327 .418 12홈런 59타점을 기록하며 부진한 모습을 보였고 팀 역시 켄트에게 재계약을 제시하지 않았다.
수비 부담을 없애고 지명타자로 뛴다면 더 활약할 수 있다는 것이 대부분의 예상이었으나 켄트는 해를 넘기도록 어느 팀과도 계약하지 않았고 결국 2009년 1월 22일 "가족과 더 오랜 시간을 보내고 싶다."라고 말하며 은퇴를 선언했다.
3. 플레이 스타일
다른 2루수인 로베르토 알로마나 크레이그 비지오와 비교했을 때 켄트가 특이했던 점은 바로 2루수로서 클린업 트리오에 낄 수 있는 선수였다는 것이다. 유격수 포지션에서는 어니 뱅크스와 칼 립켄 주니어 이후 거포형 유격수들이 줄줄이 튀어나왔지만 현재까지도 2루수로서 한 시즌에 30홈런-100타점을 기록할 수 있는 선수는 메이저 리그에서도 매우 드물다.
또한 타점 생산 능력이 뛰어나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서의 6년 동안 100타점 이하를 기록한 적이 없었고 자이언츠를 떠난 이후에도 100타점을 넘기는 시즌이 두 번 있었던 켄트는 당대 후안 곤잘레스와 비견할 만한 타점머신으로 평가받았다.
그리고 켄트가 활약했던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홈 구장이 투수친화적인 AT&T 파크여서 홈런 수에서 손해를 봤다. 대신 2루타 생산 능력이 좋아서 전성기에는 30~40개 가량의 2루타을 쳐낼 수 있었다. 게다가 켄트는 통산 순장타율이 2할을 넘어가는 2루수 3인 중 1명으로[3] 이 수치들만 봐도 그가 뛰어난 장타력을 지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수비력은 그다지 좋지 않은 편이어서 통산 dWAR이 -0.1인데 이는 2루수로서 7000타석 이상을 소화한 46명 중 40번째다.
4. 켄트는 명예의 전당에 갈 수 있는가?
타격 성적만 놓고 따져보면 통산 타율이 3할도 안되고, 400홈런도 못 때렸으며, 3천안타는 고사하고 2500안타도 못 쳐냈지만 은퇴할 때까지 2루수를 지켰다는 사실을 감안해 보면 명예의 전당에 충분히 들어갈 자격이 있다. 특히 명예의 전당은 포지션별로 입성한 선수들의 누적 스탯 편차가 굉장히 큰 편인데, 심지어 수비 부담이 큰 유격수의 경우는 OPS 7할도 못 넘은 타자도 간판급 수비 하나만으로 명전을 간다. 게다가 켄트의 누적 스탯에서 홈런과 타점은 2루수로서 역대 최고수준으로, 100년이 넘는 MLB에서 2루수 중 가장 많은 홈런을 때려냈고 은퇴 시점에서 로저스 혼스비와 더불어 통산 장타율이 5할을 넘어가는 유이한 2루수에 약물혐의에서도 자유로운 청정타자다. 공개적으로 성장호르몬 복용자 적발을 위한 MLB 선수 대상 혈액검사를 지지하기도 했을 정도. 때문에 켄트가 은퇴했을 때 몇 수 만에 몇 퍼센트의 확률로 입성하느냐에 주목하는 사람이 많았지 입성 자체를 걱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그가 은퇴하는 시점이 그렉 매덕스, 랜디 존슨, 페드로 마르티네즈, 마이크 무시나, 프랭크 토마스, 톰 글래빈 같은 괴수(魁首)들의 은퇴시기와 겹치는 바람에 시간은 좀 걸려도 언젠가 입성하겠지하고 생각했다.
다만 실버슬러거 4회, MVP 1회, 올스타 5회라는 절륜한 경력에도 불구하고 골드 글러브를 매년 거의 수집하다시피 하고 클린업과 테이블 세터를 넘나들면서 불꽃같은 전성기를 거쳤던 로베르토 알로마나 수상 내역에서 밀릴 게 없고 오히려 3000안타-400도루라는 진귀한 마일스톤까지 세웠던 크레이그 비지오 같은 타자들에 비해 홈런과 타점을 제외하면 누적과 WAR에서도 밀린다는 점,[4] 수비 지표라고 보기엔 애매하지만 그래도 내야수로서의 수비 실적이라 할 수 있는 골드글러브를 단 한차례도 받지 못했다는 점, 그리고 600타석 이상 들어선 시즌이 딱 6시즌이라는 점은 HoF 득표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실제로 통산 타석이 10??000타석을 못 넘겼다.
이 문제 때문인지는 몰라도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 첫해인 2014년도에 다소 당혹스러운 15.2%의 득표율을 보였다. 몇 년 간은 쟁쟁한 후보들이 많기 때문에 투표율이 오를 가능성이 별로 없다. 후보유지 기간이 기존 15년에서 10년으로 단축된 것도 커다란 악재. 솔직히 켄트 정도의 선수가 입성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현지에서도 논란이 많다. 현역 시절에는 당연히 입성을 전망했는데 막상 투표에서 예상밖의 결과가 나오자 당혹스럽다는 의견이 많다.
다음해인 2015년도에도 작년과 별 차이없는 14%의 득표율을 보였고, 2016년도 득표율은 16.6%로 소폭 상승하는 데 그쳤다.절망적인 흐름이다.
그 이유를 성적과는 무관한 켄트의 인성문제에 찾는다. 팀원이나 구단과도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던 데다가 백인우월주의론자로 찍혀서 밉상이 되었는데, 더 큰 문제는 언론과의 관계가 최악이었다는 것이다. 이 점이 명예의 전당을 가기 어렵게 작용하고 있다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다.
2017년에는 16.7%, 2018년에는 14.5%, 2019년에는 18.1%에 그쳤다. 2020년에 27.5%로 많이 올랐지만, 래리 워커처럼 극적인 반전을 기대하기도 어려운 수치였다. 2021년에 드디어 30%를 넘기는 데 성공했으나, 그야말로 턱걸이였다. 명예의 전당 입성은 거의 불가능해졌다.
은퇴 후, 텍사스에 있는 자신의 목장에서 지낸다는 켄트는 MLB.com과의 인터뷰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 난 나 자신을 위해 로비하지 않았다"고 얘기하면서 "명예의 전당은 여전히 약물/정치적인 논란을 일으킨 선수들에게만 관심이 있다"고 말했다. 또 자신의 수비에 대해서는 자신이 나름 괜찮은 수비수였지만 골드 글러브 등은 인기 많은 선수들이 받아갔으며, 자신이 인기가 많은 선수는 아니었지만 그걸 불평한 적도 없고 아쉽지도 않다고 밝혔다.
5. 기타
- 경기 외적으로 켄트와 본즈의 사이는 물과 기름처럼 사이가 정말로 안 좋았다. 드래프트 1라운더, 야구선수 집안, 거만한 천재 스타일인 흑인 배리 본즈와 하위라운더로서 밑바닥부터 기어올라온 백인 우월주의자[5] 제프 켄트는 성장 배경부터 성격까지 서로 어울릴 수 없는 사이였다. 어느 정도로 사이가 안 좋았냐면 둘이 더그아웃에서 난투극을 벌이던 장면[6] 이 중계 카메라에 잡히기도 했다. 그러나 경기 내적으로 이들은 최고의 파트너였고 서로의 잘한 플레이를 쌩까는 그런 수준은 아니었다.[7] 켄트는 은퇴 이후 본즈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그와는 가치관이 다른 부분이 있었다 정도로 설명하면서 항상 본즈를 좋게 얘기해줬다.
- 켄트는 여러모로 한국의 야구팬들에게 친숙한 선수인데, 먼저 박찬호가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의 선발투수로 활동하던 시절 박찬호에게 삼진과 아웃카운트를 헌납하던 선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허구연 해설위원이 토론토 블루제이스에서 코치연수를 받던 시절 자주 만나 조언을 해줬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리고 최희섭은 다저스 시절 그에게 밀려 플래툰 시스템으로 나왔고 둘이 팀내 홈런 1, 2위를 담당하기도 했다.
- 김병현이 콜로라도 로키스에서 선발 투수로 활동하던 시절이었던 2005년 7월 4일, 김병현과의 벤치클리어링으로 인해 또다시 한국의 야구팬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확실히 각인시켰다. 로키스와 다저스가 경기를 벌였던 이 날, 1회초 2사에서 3번타자로 출장한 제프 켄트는 볼카운트 0스트라이크 1볼에서 김병현의 공에 등을 맞았다. 이미 4월 25일에도 김병현에게 공을 맞았었고 이 것을 고의로 판단한 켄트는 불같이 화를 내며 김병현에게 걸어갔다. 그리고 김병현 역시 켄트에게 천천히 걸어오며 일촉즉발의 상황이 일어났고 결국 양 팀의 선수들이 모두 달려나와 벤치클리어링이 일어났다.
- 훗날 김병현 인터뷰에 따르면 '고의로 맞혔다'라고 했다. 전날 제프 켄트가 인터뷰 중에 "콜로라도에 야구 제대로 하는 놈 누구 있나?" 수준의 디스를 해댄지라, 팀내 투수 최고참[8] 인 김병현이 손수 응징했다고.
- 켄트의 현역 시절에는 로베르토 알로마와 크레익 비지오라는 2명의 걸출한 2루수와 커리어가 겹치며 곧잘 비교가 되었고, 은퇴한 후에는 자신보다 늦게 데뷔했음에도 높은 수준의 WAR를 쌓은 체이스 어틀리[9] 와 곧잘 비교되었다. 하지만 2013년 이후 2년간 어틀리가 부상으로 인해 골골대는 바람에 시애틀 매리너스의 강타자 로빈슨 카노가 더 좋은 비교대상이 되었다.
- 중간에 휴스턴 애스트로스가 끼기는 했지만,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서 꽃피운 선수가 불구대천의 라이벌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로 이적했기 때문에 당시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팬덤 사이에선 배신자 취급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양 팀 간의 경기에서 중계석에 종종 와서 무용담을 늘어놓기도 한다. 팬들도 워낙 뛰어난 타격을 선보인 선수라는 점, 애초에 샌프란시스코 프랜차이즈 스타는 아니었던 점과 본즈랑 맨날 티격태격했던 점을 들고, 또한 시간도 많이 지나다보니 후안 유리베처럼 팀을 우승시킨 후 비교적 훈훈하게 다저스로 떠난 사례[10] 도 나오면서 예전같이 천하의 개쌍놈까진 아니라 그냥 얄미운 정도라고. 또한 커리어의 전성기가 샌프란시스코 시절이기 때문에 만약에라도 명전에 자이언츠 모자를 쓰고 갈 가능성이 높은 점에서도 은근히 기대하는 면이 있다고 한다.
- CBS(미국 방송) 경쟁 리얼리티 서바이버(TV시리즈)/시즌25 필리핀에 참가한다. 이 방송의 상금은 100만 달러인데, 자신이 야구로 수천만 달라를 벌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불리할 까봐, 목장에 사는 오토바이 딜러라고 속인다. 방송 중에는 단 1명만 그가 누군지 알아 본다. 탈락하고서 무릎 인대까지 다치자 분통을 터뜨렸는데, "ㅅㅂ 내가 현역 때 번 돈이 얼만데 100만 달러 벌자고 무인도까지 와서 생고생임? 사실 100만 달러도 아니여, 오바마가 세금 팍팍 때려서 60만 달러밖에 안됨."이란 말을 남겼다.(...)[11]
- 랜디 존슨의 비둘기 폭파사건 당시 상대 팀 선수이기도 하다. 그리고 경기가 끝난 뒤 죽은 새를 잡고 실실 쪼개는 사진이 찍혔다.
[1] 2002년 600만 달러 옵션[2] 2005년 900만 달러 옵션[3] 로저스 혼스비야 논외로 쳐야 할 수준이고 알폰소 소리아노는 워낙 수비력이 안좋아서 좌익수로 포지션을 옮겼다.[4] bWAR = 55.2, fWAR = 56.1. 둘다 60을 못넘는다.[5] 단순 루머라고는 하나 2020년 현재까지 켄트가 명예의 전당에 올라가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6] 2002년 6월 25일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의 원정경기.[7] 애초에 이들은 타순이 서로 앞이거나 뒤기 때문에 하이파이브 할 일이 정말 많았다.[8] 확실히 팀 내에선 토드 헬튼 다음의 커리어였다. 그리고 토드 헬튼은 타자였다. 연봉으로 따져도 김병현은 팀 내에선 3위, 투수 중에서는 1위였다.[9] 2013년 초반 급기야 어틀리가 켄트의 통산 rWAR를 넘어섰다.[10] AT&T 파크에서 다저스 유니폼을 입고 온 그에게 우승반지 수여식을 열어줬고 선수들과 팬들이 기립박수를 보냈다. 유리베는 그야말로 2010 우승의 일등공신이었기 때문에 함부로 까지 않는 것. [11] 켄트 본인은 오바마를 매우 매우 싫어할 수밖에 없는 것이 그가 대표적인 백인우월주의자 메이저리거였으며, 동성결혼 반대에 15,000달러를 투자한 호모포비아에 마지막으로 모르몬교인이었기 때문. 오바마는 흑인이며 2012 대선에서 동성결혼을 찬성했으며 모르몬교인인 롬니를 탈락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