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르트 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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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ert Ley
1890년 2월 15일 ~ 1945년 10월 25일
1. 개요
2. 생애


1. 개요


나치 독일정치인. 나치의 어용노조였던 독일노동전선총재.

2. 생애


로베르트 라이는 1890년 독일 제국 뉨브레흐트(Nümbrecht)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집안 형편에도 불구하고 명석한 두뇌 덕분에 그는 본 대학과 예나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하였다. 이후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라이는 보병으로 입대하였는데, 1917년 총에 맞은 부상으로 인해 평생 언어장애발작으로 고생해야 했다.
게다가 전쟁 말기에는 프랑스군에 붙잡혀 잠시 동안 포로 생활을 하였고, 1920년 독일로 돌아와 대학을 졸업하고 이게파르벤에 취직하였다. 그러던 1924년 나치당에 가입한 라이는 라인란트 대관구의 지도자로 임명되었다. 이후 1933년 정권을 장악한 나치당이 독일의 모든 노조를 해체시키고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만든 독일노동전선이라는 어용노조를 만들자 라이는 이 단체의 지도자 자리에 올랐다.
그가 이끄는 독일노동전선은 히틀러의 신임을 얻으며 경제 및 노동 정책의 주도권을 둘러싼 당과 국가 기관의 대립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였고, 노동자자영업자를 독일 산업의 기반으로 올리기 위해 각종 복리후생 정책을 펼쳐 성공을 거두었다. 일례로 휴가보조금 지급, 오페라를 비롯한 문화 활동 장려, 그리고 당시 초호화 여객선이었던 빌헬름 구스틀로프 호를 이용한 크루즈 여행을 노동자들에게 저렴하게 제공하는 정책도 시행하였다고 한다.
그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인 1945년 라이는 알베르트 슈페어의 자리를 탐내며 의용군 사령관에 임명되었지만, 소련군베를린으로 진격해오자 4월 20일 히틀러의 생일 파티를 마친 후 바이에른으로 탈출하였다. 하지만 얼마 못가 어느 산장에서 미군 공수부대에게 체포되었고, 전범으로 뉘른베르크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는 체포 후 지속적인 정신분열에 시달렸고, 결국 자신이 수용된 독방 안에서 수건으로 목을 매어 자살하고 말았다. 자살한 그의 유서에는 '내가 범죄자 취급을 받는 것은 절대 참을 수 없다.'라고 적혀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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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트 라이가 자살하였던 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