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드 브로이
1. 개요
제7대 브로이 공작 루이 빅토르 피에르 레몽 드 브로이(프랑스어: Louis Victor Pierre Raymond de Broglie, 7th duc de Broglie, FRS, 1892년 8월 15일 ~ 1987년 3월 19일)은 양자역학의 기초를 닦은 프랑스의 물리학자이다.
1920년대 양자 역학의 개척시대에 ‘드 브로이 물질파’(파장= 플랑크 상수/입자운동량)의 개념을 주창하였고, 양자 역학의 입자-파동 이중성 개념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 제6대 브로이 공작인 형[4] 이 1960년 후계자 없이 사망한 후 제7대 브로이 공작이 된 귀족으로 현대의 과학자들 중에 가장 높은 세습 귀족의 지위를 가진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다만 그 자신이 혼인을 하지 않고 자식도 없어, 사후 공작 자리는 먼 친척에게 넘어갔다. 당시 프랑스는 공화국이었기 때문에 귀족 제도는 없었으나, 귀족 집안의 인사가 공식 석상에서 귀족 칭호를 사용하는 것 자체는 허용했었다. 이런 관례는 1975년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 대통령이 폐지하면서 사라진다.
2. 물질파 이론
제1차 세계 대전 중 물리학의 기술적 문제를 연구하고, 대전 후에 물리학자였던 형인 모리스 드 브로이 제 6대 브로이 공작(Maurice, 6th duc de Broglie)[5] 의 연구로 자극을 받아 연구를 시작했다.
1923년 물질파의 개념에 도달하고, 다음해에 '양자론의 연구'라는 논문으로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 내용을 요약하자면 모든 입자는 자신의 운동량에 반비례하는 파장을 지닌 파동이라는 것으로, 쉽게 말해 물질=파동이라는 것이다. 지금 들어도 황당한 이론인데 그 때야 오죽했겠는가. 다만 이 '물질이 갖는 파동으로서의 성질'의 의미는 아직 해석이 완료되지 않은 상태이며, 제일 유명한 코펜하겐 해석에선 그 파동은 사실 '그 점에서의 물질의 발견 확률'을 나타낸다고 설명하는 정도이다.[6]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광전 효과 실험에서 빛이 입자의 성질을 지닌다는 것이 증명되었기에 이 개념을 역으로 생각하여 "입자도 파동의 성질을 지닐 수 있지 않을까?"라는 가정 하에 출발하였다. 이 이론 덕분에 빛의 이중성뿐만이 아니라 물질의 이중성 역시 인정받기 시작했으며, 양자 역학의 발전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1927년 데이비슨과 거머가 니켈의 결정을 이용해 행한 전자 선속의 회절 실험으로 전자에 의해 생성된 간섭 무늬 관찰을 통해 실험적으로 증명되었다.
드 브로이는 1929년 파동역학의 연구에 대한 업적으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그런데 이 논문은 소르본 대학의 박사 학위통과를 위한 '''학위 청구 논문'''이었다. 그 당시 기준으로는 과학보다는 철학에 가까웠던 내용이 매우 파격적이었고 분량도 짧아서[7] 심사위원들에게 좋지 않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고귀한 공작 가문 출신[8] 의 논문을 퇴짜놓기 싫었던 심사위원들은 이 논문에 대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에게 조언을 구했다고 한다. 다행히 아인슈타인은 물질파 이론을 '물리학의 커다란 베일을 걷어냈다'고 높이 평가했다고 하며, 이 답장을 받은 심사위원들은 "좋아, 누가 뭐라고 하면 아인슈타인이 지지했다고 하면 되겠네. 통과시키자." 라며 논문을 통과시켰다고 한다.
즉, 이 사람은 '''박사학위도 따기 전에 노벨상을 받을 논문을 쓴 것이다'''. 사실 드 브로이는 이 물질파 이론을 뜬금없이 낸 것이 아니었다. 원래 그는 문학과 역사에 관심이 있었다.[9] 그러나 실험물리학자였던 형 모리스 드 브로이의 영향을 받아 물리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던 그는 형의 실험[10] 에서 도출된 형의 견해, 'X선은 사실 물질과 파동의 복합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다시 전개해서 전자도 파동으로써의 성질을 가질 것이라는 견해를 덧붙여 박사학위 논문으로 낸 것이다.
3. 수상내역
- 1929년 노벨물리학상
- 1932년 Albert I of Monaco Prize
- 1938년 막스 플랑크 메달
- 1944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
- 1952년 유네스코의 Kalinga 상
- 1953년 영국 왕립 학회 국외회원
[1] 英 : Duke of Broglie[2] '''역사''' 학위[3] 과학 학위[4] 형도 동생만큼 유명하진 않았으나 x-ray 연구 등에서 성과를 남겼다.[5] 동생이 워낙 잘나서 그렇지 모리스도 노벨상 후보에 몇 번이나 오른 뛰어난 물리학자였다.[6] 여기서 주의 할 점은 '존재 확률' 이 아니라 '발견 확률' 이라는 점이다. 존재 확률이라는 단어는 "입자 등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는 의미를 내포하기 때문에 발견 확률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하다. 영의 이중슬릿 실험에서 볼 수 있듯이 광자는 슬릿 두 곳에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7] 물질파를 유도해 보면 알겠지만, '''고등학생도 무리없이 따라올 수 있을 정도로''' 굉장히 간단한 컨셉이다.[8] 드 브로이는 프랑스의 공작인 빅토르 드 브로이의 둘째 아들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중에 군복무를 했는데 복무지가 '에펠 탑의 통신센터'... 쉽게 말하면 장군 아들이 꽃보직 맡는 거라 보면 되겠다. 다만 당시 에펠 탑이 프랑스 북부에서 가장 높은=가장 통신거리가 긴=가장 중요한 무선통신용 탑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업무강도면에서 땡보로 보긴 힘들다. 그리고, 이런 인재를 전방으로 보내서 헨리 모즐리 꼴이 되게 했다면 인류에 큰 손실이었을 것이다.[9] 그의 첫번째 학위는 상술되었듯이 역사 학위이다.[10] 귀족의 아들답게 파리에 있는 저택에 실험장비를 잘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