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상드르 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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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소설가, 극작가. 프랑스를 대표하는 최고의 작가 중 한 명이다. 오늘날 그의 작품은 보편적이라고 할 만큼 전세계적인 고전으로 읽히고 있으며 약 100개국의 나라에서 번역됐다.[2]
2. 생애
2.1. 어린 시절
1802년 7월 24일 북프랑스 엔현의 빌레르 코트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휘하의 장군이었던 아버지 토마알렉상드르 뒤마를 잃었다. 나폴레옹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이유[3] 로 군인 연금도 제대로 못받던 아버지는 시름시름 앓다가 프랑스로 돌아온지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난다. 알렉상드르 뒤마는 아버지가 죽었을때 겨우 4살밖에 안되었지만 30여년이 지난 뒤에도 그 순간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때를 회고하는 내용이 아버지가 죽고 난뒤 하느님이 아버지를 데려가셨다는 어른들의 말을 듣고는 아버지의 총을 들고선 천국으로 가서 아버지를 내게서 데려간 하느님을 죽여버리겠다고 얘기했다고 한다.
뒤마의 아버지가 죽자, 뒤마의 가족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된다. 어린 뒤마는 제대로 교육도 받지 못했지만, 어렸을때부터 책을 많이 읽었는데 10세에 성경, 각종 신화, 로빈슨 크루소와 아라비안 나이트, 조르주루이 르클레르 드 뷔퐁[4] 등을 읽었다.
2.2. 극작가 활동
성인이 된 뒤마는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해 파리로 간다. 1823년 그는 파리에 가서 오를레앙공(公)의 사무실에 취직해 필경직(筆耕職)[5] 을 지내면서 몇 편의 작품을 쓰는 동안, 사극 《앙리 3세와 그 궁정》(1829)이 대성공을 거두게 되어, 새로 일어난 낭만주의파의 선구자 구실을 하였다.[6] 1829년 이 작품의 공연은 첫날부터 대성황을 이루었다. 뒤마를 후원한 오를레앙 공작(후에 루이필리프 1세)은 매우 흡족해했으며 한때는 왕당파였던 빅토르 위고도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렇게 작가로서의 뒤마의 출발은 성공적이었다. 파리에서 그는 1823년 오를레앙 공작 가문에서 서류 작성하는 일을 얻게 되지만 곧 연극계로 뛰어들었다. 1820년대 말에서 1830년대 초는 패기 넘치는 젊은 뒤마에게 작가로서의 장래를 보장해 준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이후 20여 년 동안 뒤마는 위고, 비니Vigny와 더불어 가장 인기 있는 극작가로 활약했다. 1830년 7월 혁명 때는 루이필리프 1세를 지지하여 당대 유명인사로 크게 활약했으며[7] , 그 후로는 로맨틱한 대상이 풍부한 정열적인 주제를 솜씨 있게 구사한 작극법(作劇法)으로, 《앙토니 Antony》(1831) 《La Tour de Nesle》(1832) 《킹》(1836) 등을 상연하여, 분방한 상상력과 교묘한 작극술을 보여 줌으로써, 파리 극단의 인기를 휩쓸었다. 뒤마는 혁명과 공화국에 대해 1848년 3월 1일, 일간지 <라프레스>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그렇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아름답고,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위대하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공화국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 눈에는 혁명만 보였다.”
뒤마는 문학적 공적을 인정받아 1837년 3월 2일 레지옹 도뇌르 훈장 슈발리에 훈장을 수여받았다.
2.3. 소설가 활동
뒤마는 극작가로서 성공을 거두자 당시 빠르게 성장하던 언론 매체인 신문에 연재 소설을 기고하기 시작하였다. 1820년대에는 많은 잡지가 창간되면서 '문예란'에 연재소설이 등장하였다. 뒤마는 연재소설에 매력을 느껴 차츰 극작품보다는 소설, 특히 역사소설을 더 많이 쓰기 시작했다. 그는 일만큼이나 삶의 자극에 탐닉했다. 평범한 일상생활의 권태를 모면하기 위해 그는 연애, 음식, 잠, 쾌락, 여가, 운동 등 여러 방면의 자극을 원했다. 그중에서도 그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여행이었다. 이탈리아 여행에서 뒤마는 여자, 오페라, 그리고 지중해에 대한 애정을 키웠고 그런 가운데 그의 대작들이 잉태된다.
바로 리슐리외 시대의 통쾌한 검사(劍士) 이야기인 모험담《삼총사》(1844)를 써서 대호평을 받았으며, 그 후편으로 《20년 후》(1845) 및 《브라질론 자작(철가면)》(1848)을 썼다. 1838년 발표된 그의 첫 소설 “자본가 폴”은 기존에 발표하였던 동명의 희곡을 각색한 것이었다. 뒤마는 이후에도 같은 방식으로 수많은 자신의 희곡을 소설로 각색하여 발표하였다. 1839년에서부터 1841년까지 뒤마는 유럽 역사에서 유명한 범죄 사건을 뽑아 8권짜리 ‘유명한 범죄자들“을 출간하였다. 이 책에는 베아트리체 첸치, 마르탱 게르, 체사레 보르자, 루크레치아 보르자 같은 역사적 인물들과 함께 카를 루드비그 상트, 앙투아네 프랑수아 데스루 등의 당대 인물들이 수록되었다. 한편 1840년 뒤마는 펜싱 마스터 아우구스틴 그리시에르와 함께 ‘펜싱마스터“를 출간하였다. 이 책은 그리시에르가 러시아에서 겪은 12월 반란의 경험담을 담고 있다. 뒤마는 그의 자서전에서 그리시에르로부터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영감을 얻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의 작품 수는 무려 250편이 넘었으며, 천변만화하는 장면전환과 등장인물들의 활기찬 성격묘사 등 작가로서의 수완은 천부적인 것이었다. 그 중 특히 1844년에 시작된 파란만장한 장편 모험소설 《몽테크리스토 백작》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이 책은 출간 즉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으며, 번역되고 차용되고 표절되는 등, 한마디로 그 시대 최고의 '인기 소설'이 되었다. 이 책은 그의 최고 걸작이라고 불린다.
결혼은 1840년에 이다 페리에라는 배우와 했지만 1859년에 그녀가 사망했다. 그리고 결혼 이전부터 40명이 넘는 여성들과 관계를 가졌으며 어머니가 각각 다른 사생아도 최소 4명은 두었다. 그 중 정식 자식으로 그가 인정한 건 아들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小 뒤마)'와 딸 '마리알렉상드리엔 뒤마'이다. 뒤마 피스와는 소원했다가 가까워졌다 하는 관계였다.[8] 뒤마 피스는 사생아였기 때문에 10살 때까지 거리에서 자랐고, 후일 성장한 아들이 마리 뒤플레시라는 고급 창부와 사랑에 빠지자 격렬히 반대했다. 이에 격분한 뒤마 피스는 아버지와 의절해 버린다. 뒤마 피스는 이 과정을 걸작 춘희에 그대로 그려냈고, 뒤마는 이 소설이 성공한 한참 후에야 뒤마 피스와 화해하게 되었다. 춘희 항목 참조.
2.4. 말년
가장 인기있는 작가로서의 입지를 굳혔지만 그의 사생활은 날로 황폐해 가고 있었다. 사치한 생활에 빠져 채권자들에게 돈을 갚기 위해 그는 오노레 드 발자크처럼 날마다 더 많은 글을 써내야 했고, 그 때문에 발자크처럼 방대한 양의 작품들을 후세에 남기게 되었다. 뒤마는 많은 작품을 출판하였고 그로 인한 수입도 컸다.
그러나, 그는 호화스런 생활과 여성 편력에 들인 비용때문에 종종 빚더미에 몰려 파산을 하곤 하였다. 그가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루이 필리프가 반란에 의해 폐위되고, 나폴레옹 3세가 집권할 즈음, 뒤마는 몰락하였다. 1851년 벨기에 브뤼셀로 추방당한, 뒤마는 다시 러시아로 탈출하였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프랑스어가 널리 통용되었기 때문에 뒤마는 그곳에서 작품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1861년 3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이탈리아 왕국의 성립을 선언하자, 뒤마는 이탈리아로 건너가 신문 “인디펜덴테”의 발간을 주도하며 이탈리아의 통일 운동에 앞장섰다. 3년을 이탈리아에서 보낸 뒤마는 1864년 파리로 돌아왔다. 공장 시스템의 부작용으로 뒤마는 말년에 태작을 일삼았다. 그리고 미식을 일삼는 사치스러운 생활과 여성 편력에 돈을 소비하며 사업에 손도 대봤지만 경제적으로 망하는 결과로 이어졌다고 한다. 뒤마는 말년을 아들의 별장에서 지냈다. 어느날은 아들 뒤마가 뒤마의 소설들이 모두 고전이 되었다고 말하자 뒤마는 글을 쓰는데 바빠서 정작 자신의 글을 읽어본 적이 없었다고 허탈해했다. 이에 아들 뒤마는 삼총사와 몽테크리스토 백작을 가져다 주었다. 죽기 직전 뒤마는 몽테크리스토 백작을 읽으며 '''몽테크리스토 백작은 진짜 명작이구나. 하지만 내가 결말을 읽을 때까지 살아 있을 것 같진 않다'''라고 크게 아쉬워하며 말했다.
1870년 12월 뇌졸중으로 사망하면서 뒤마는 아이스네 과의 빌러스코테레츠 생가에 안장되었다. 그의 죽음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가려졌다. 문학적인 사조도 바뀌면서 그의 인기는 떨어졌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레지날드 하멜과 클로드 쇼프 같은 비평가나 학자들은 그의 잃어버린 작품을 찾는 것뿐만 아니라 그의 예술에 대한 비평적인 재평가 운동과 새로운 감상을 야기했고 생전 못지않은 인기와 오히려 더 높은 평가를 되찾았다.
3. 평가
그는 당대 최고의 인기 작가 중 하나였으며 현재에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으로 인정받는다. 또 장르소설의 시초 중의 한 명이라고 평가받는다.
재미만 있으면 고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당대 최고의 이야기꾼이다. 그의 작품은 많은 고전 문학중에서 재미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서양권에서 '페이지 터너'[9] 라고 불릴정도로 작품이 술술 읽힌다. 삼총사의 경우 19세기 작품이라고 믿기지 않을정도로 센스와 유머 감각을 보여준다. 또 역사가 쥘 미슐레는 "뒤마는 다른 역사가들을 모두 합해 놓은 것보다 대중들에게 더 많은 역사를 가르쳤다고 할 수 있다. 당시 대부분의 프랑스인은 전문적인 역사가가 아니라 오히려 뒤마의 소설을 통해 프랑스 역사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고 평했는데, 실제 <삼총사>에는 영국과 프랑스를 둘러싼 17세기 유럽의 현실이 허구와 절묘하게 혼합되어 있다. 역사를 분석하는 뒤마의 통찰력은 대중소설가 수준 이상이었고, 간결하고도 속도감 있는 그의 문체는 '역사상 가장 흥미롭고 유명한 역사 모험 소설'을 탄생시키는데 유감없이 발휘됐다. 또 뒤마의 소설은 흡입력이 굉장히 뛰어난데 대표적인 작품이 그의 걸작이자 복수극의 정석이자 시초 몽테크리스토 백작이다. 뒤마의 소설들은 당시부터 '재미있고, 잘 팔릴만한 줄거리'를 담아 집필됐고 특히, 모험물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있기에 웬만한 양판소나 가공전기와는 비교도 안 되게 재밌다. 심지어 당대의 기록 중에는 외과 의사가 마취제 대신에 뒤마의 소설을 읽고 있도록 했다는 것마저 있을 정도다.[10] '''19세기 중반에 창작된 대중 소설이 현대에도 스테디셀러의 반열에 올랐다는''' 점에서 뒤마의 작품들이 걸작임을 증명하고 있다.
다만, 문학사에서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었는데 왜냐하면 뒤마는 프랑스 문학의 대본소 작가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뒤마는 무명 작가들이나 문예 지망생들을 모아서 이야기를 구성하고, 자신이 최종적으로 편집하는 공장 시스템을 유지했다. 여기 관련해서 삼총사 연재시 걸린 소송이 유명하다. 삼총사가 밀라디와 리셜리외의 밀담을 엿듣는 장면을 당시 동업자인 다른 작가에게 표절 및 도용 혐의로 걸린 것이다. 당시는 도제 제도가 유행한 시기였는데도 소송이 걸릴 정도면 좀 흠좀무. 결국 뒤마는 원래 나온 설정에서 대사를 더 넣어서 밀라디의 비밀을 추가한뒤 리슐리외 추기경과 삼총사와의 만남 부분을 재창작하고 순서를 바꾸었다. 또 그가 주목받지 못했던 이유 중 하나는 그가 흑인혼혈이었기 때문이다. 외모가 검었던 뒤마는 당시 프랑스 주류사회에 편입되기 힘든 인물이었다. 그러나 21세기인 현 시점에서는 그의 책들이 여전히 널리 읽히며 고전의 반열에 올라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가 중 하나로 문학사에서 인정받고 있다.'''[11] 여러모로 문학사적으로도 상당히 독특한 위치의 작가라고 볼 수 있다.[12]
주로 역사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썼지만 재미를 위해서 고증을 신경쓰지 않았으며 역사왜곡도 서슴치 않았다. 호레이쇼 넬슨 전기는 원균옹호설 정도의 왜곡을 자랑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넬슨이 프랑스의 적이기 때문에 어쩔수 없었고 또 그는 나폴레옹을 싫어할 수 밖에 없었다. 그의 아버지는 투옥 동안 지병을 가지게 되고 나폴레옹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군인 연금도 제대로 못받던 그는 시름시름 앓다가 프랑스로 돌아온지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난다. 한마디로 뒤마 입장에서 나폴레옹은 원수라고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알렉상드르 뒤마의 모든 작품에서 나폴레옹은 매우 부정적으로 그려지게 된다. 굳이 비교하자면 삼국지연의정도에 가깝지만 연의보다도 허구의 비중이 높다. 또한, 당시 프랑스에서는 단어수에 비례하여 일정액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원고료가 산정되었기 때문에 그의 소설은 무척 길다. 예를 들어 몽테크리스토 백작의 경우에는 괜히 루이지 밤파 이야기로 한 챕터를 때우기도 하고, 심지어 행수를 늘리기 위해 말없는 캐릭터를 넣기도 했다.[13] 이밖에도 다른 표절 논란이 있자 뒤마는 '신 자신도 인간을 창조할 때 인간을 발명해낼 수 없었거나, 아니면 감히 그러지 않았다. 신은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만들어냈다'는 말로 반박한다.
4. 팡테옹 안장
사망 후, 뒤마는 자신이 태어난 고향 마을 빌레르 코트레 공동묘지에 묻혀 있었다. 그러나 2002년, 그의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여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이 그의 무덤을 파서 유해를 꺼내 프랑스의 위인만 들어갈 수 있다는 팡테옹의 안장하도록 지시한다.
그의 유해는 파리 근교의 뒤마가 소유했던 ‘몽테 크리스토 성’을 거쳐 파리 시내 상원 의사당으로 옮겨졌다. 이장위원회는 상원에서 팡테옹까지 퍼레이드와 노상 공연을 벌였다 삼총사의 등장인물들인 다르타냥, 아토스, 아라미스, 폴토스로 분장한 공화국 수비대(Garde républicaine, 프랑스 헌병대의 일부) 4명이 푸른색 비단[14] 으로 덮은 뒤마의 새로운 관을 에워싸고, 엄숙한 분위기 속에 프랑스의 위인들이 잠든 국립묘지 파리 팡테옹으로 운구해 이장했다. 시라크 대통령은 2002년 3월 그의 이장 포고령을 내리면서 “일생동안 고통을 받았지만 프랑스 공화국 이념에 가장 헌신한 창조적인 천재에게 보답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뒤마는 볼테르, 장 자크 루소, 에밀 졸라, 빅토르 위고, 앙드레 말로에 이어 문필가로서는 6번째로 이곳에 묻혔다.
2002년 11월 30일 이 안치식은 TV로 생중계 됐으며 시라크 대통령은 과거 인종차별주의가 존재했지만 이제 뒤마가 빅토르 위고와 에밀 졸라의 곁에 안장됨으로써 잘못된 것이 바로잡혔으며, 비록 프랑스가 많은 훌륭한 작가들을 배출하였지만, 뒤마만큼 세계적으로 널리 읽혀진 작가는 없다고 언급했다.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이장식에서 “뒤마는 더이상 혼자가 아니다”라면서 “그와 함께 우리 어린시절의 추억과 상상력이 팡테옹으로 들어간다”고 말했다. 그의 관을 장식한 짙푸른 덮개에는 1845년작 ‘삼총사’에서 나왔던 “하나를 위한 전체, 전체를 위한 하나(All for one, one for all)” 구호가 장식됐다.뒤마에게 치명타를 입힐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사회참여 작가의 직분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인간의 본성이 통치자와 통치받는 자라는 영구적인 대립 관계를 만든다는 사실을 익히 알았다. 나폴레옹군의 장군이었지만 나폴레옹에게 배신당한 아버지를 두었고, 군주였지만 공화정을 주창하던 오를레앙 가문의 친구였고, 보수주의자인 동시에 혁명주의자였던 뒤마는 내밀한 갈등을 잔뜩 품은 프랑스를 그대로 보여준다. 프랑스인이 뒤마를 그토록 사랑하는 이유다. 오늘 드디어 뒤마는 빅토르 위고와 에밀 졸라 옆에 나란히 자리하게 되었다. 이로써 공화국도 ‘삼총사’를 가지게 되었다.
5. 그에 대한 말들
'''뒤마는... 예술의 정상이었다. 아무도 뒤마의 소설과 연극을 발전시킬 수 없었거나, 했거나, 혹은 발전시킬 수 없을 것이다.'''
'''뒤마는 거인이다, 그는 보편적이다.'''
― 알랭 드코 (프랑스 사학자,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17]
'''세상에서 가장 너그럽고 마음이 넓은 존재. 그는 또한 지구상에서 가장 재미있고 자기 중심적인 존재였다. 그의 혀는 마치 풍차와 같았다. 일단 움직이면 언제 멈출지, 특히 주제가 자신이라면 더욱 그랬다.'''
''the most generous, large-hearted being in the world. He also was the most delightfully amusing and egotistical creature on the face of the earth. His tongue was like a windmill – once set in motion, you never knew when he would stop, especially if the theme was himself.''
― 워터 필립스 (영국 극작가)[18]
'''뒤마는 우리들에게 볼테르를 되돌려주었다. 그의 작품 속에는 지옥이란 없고, 어디서나 광채가 빛나고 기지가 번쩍인다.'''
'''인간의 특질을 꿰뚫어 보고 거기에 씨앗을 뿌려, 읽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작품을 창조해내는 뒤마 덕분에 우리의 영혼, 마음, 지성은 풍요로워진다.'''
'''이 세기의 그 어떠한 유명세도 알렉상드르 뒤마의 유명세를 넘지 못했다. 그의 성공은 단순한 성공이 아니라, 그야말로 휘황찬란하고 열광적인 성공이었다. 뒤마의 이름은 프랑스를 넘어 유럽적이며 유럽을 넘어 세계적이다. 그는 '읽고자 하는 욕구'를 창조해 낸다. 사람의 영혼을 파고들어 거기에 씨를 뿌린다. 그곳에는 찬란한 빛과 정오의 태양 같은 밝음이 있다.'''
'''화산의 분출이 재주 있는 관개(灌漑) 기술자의 절묘한 솜씨와 결합되어 있는 것과 같다.'''
'''뒤마는 작가일 뿐 아니라 자연의 위대한 힘의 하나.'''
― 쥘 미슐레 (역사가)[23]
'''뒤마, 당신과 함께 있을 때, 우리는 말을 타고 프랑스의 길을 달리고 전쟁터를 순회하고 궁과 성을 방문하는 달타냥이거나 몬테크리스토이거나 발사모였습니다. 우리는 당신과 함께 꿈을 꿉니다.'''
'''1870년 12월 4일 사망 전날, “내가 죽고 나면 남는 게 있을까”라며 알렉상드르 뒤마는 아들에게 말했다. 그리고 150여 년이 지난 지금, 그건 걱정할 필요가 하나도 없음을 몽테크리스토성의 정원에서 칼싸움하는 아이들을 바라보노라면 알 수 있다.'''
― 르파리지앵[25]
'''위대한 작가, 존경할 만한 인물, 그리고 모범적인 프랑스인.'''
― 디디엥 드콩 (각본가, 아카데미 공쿠르 회원)[26]
6. 대표작
- 달타냥 3부작
- 몽테크리스토 백작
- 왕비 마고(카트린느 메디치의 딸) - 여왕 마고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 마고는 왕비이지 여왕은 아니다. 프랑스에서는 왕위 계승과 관련된 법인 살리카 법에 의해 여성은 왕이 될 수 없었다. 프랑스어 Reine 이나 영어 Queen 을 '여성 군주(여왕)'으로만 해석해서 생긴 대표적 오역 사례.
- 검은 튤립 - 네덜란드 독립항쟁기를 그린 작품. 뒤마의 마지막 걸작이다.
6.1. 국내 번역
뒤마의 작품은 방대한 분량과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재창작한 스토리 때문에 한국어 번역이 어렵고 적다. 몽테크리스토 백작을 보면 현재 시중에 구할수 있는 역본중 가장 유명한 민음사 판본은 역자인 1935년생 오증자 교수가 70년대에 번역한 판본을 여러 출판사가 그대로 물려내려 쓰고 있는 것으로 지금에와선 오역에 대한 지적이 계속 나오고 있다. 또 이 역본은 번역중에 발생한 오탈자나 비문의 교정수준이 출판사마다 다른걸로도 유명한데 민음사판은 출판사측이 일 제대로 안했는지 제대로 교정 안된 부분이 꽤 있다. 오히려 중역으로 악명높은 동서문화사가 고려대 불문과 출신 번역가를 기용해 내놓은 역본이 더 좋은 평가를 받는다.
달타냥 로망스는 우리가 흔히 삼총사라고 알고 있는 1부는 민음사와 시공사에서 번역본을 내놓았지만[28] 20년후는 세계문학이란 소규모 출판사에서 영어 중역본으로 90년대에 한번 발매했다 절판된게 끝이고 가장 방대한 분량을 자랑하는 브로즐린 자작은 아예 번역본이 없다. 왕비 마고는 1994년에 홍원출판사에서 낸 절판본이 유일한 번역이었다가 2019년 레인보우퍼블릭북스에서 카트린느 메디치의 딸이란 제목으로 재번역, 출간되었다.
7. 대중 매체에서
- 문명 5의 위대한 작가로 등장한다.
- Fate/strange Fake에서 캐스터 클래스로 등장한다.